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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철(蔡洪哲)平康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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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근 작성일14-12-07 01:48 조회2,29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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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철(蔡洪哲)平康人

 

中菴公派(중암공파)의 派祖(파조) 中菴公(중암공) “洪哲(홍철)”은 平康蔡氏 第四世며, 平章事 (평장사) “華(화)”의 孫이다. 中菴公 行蹟(중암공 행적)에 對하여서는 朝鮮初期(조선초기)에 王命으로 學易齋(학역재) “鄭麟趾(정인지)”가 編纂(편찬)한 高麗史(고려사:一百八 列傳 卷第二十一 本項 參照)에 依하여 記錄하고저 한다.

洪哲의 字는 “無悶(무민)”이요 平康縣人이니, 忠烈王朝(충열왕조)에 등재하여 膺善府綠事(응선부사록: 忠烈王 10年 甲申 西紀 1284年)에 補任(보임)되고, 차차옮겨 通禮門祗候(통례문지후)가되었다. 나아가 長城府(장성부)를 지킬새 惠政(혜정)이 있었으나 얼마후에 官을버리고, 閑居(한거)하기 무릇 14年에 스스로 “中菴居士(중암거사)”라 號(호)하고, 佛敎의 禪旨(선지:불교의 가르침)와 琴書(지금의 음악 교과서)를 즐기며, 劑和(제화:생식과 같은 음식)를 日用으로 삼었다.忠宣王(충선왕:西紀 1309~1313年 在位)이 平素에 그 이름을 알고, 卽位함에 미처 將次 大用(대용: 크게 기용함)코자 억지로 이를 이르켜 司醫副正(사의부정:戊申 西紀 1308年)을 除受(제수)하고 갑자기 密直副使(밀직부사:忠宣王 4年 壬子 西紀 1312年)에 올려 前祗候(전지후)를 연유하여 여덟번 옮기어 相(상-:宰相)이되니 仕林(사림)의 영광스럽게 여겼으며, 또 知司事(지사사)를 加(가)하였다.忠肅王(충숙왕) 元年 甲寅(西紀 1314년)에 비로서 經界(경계)를 바르고 田地(전지)를 測量(측량)하고 賦稅(부세:세금)를 制定(제정) 할새, “洪哲(홍철)”이 五道巡訪計定使(오도순벙계정사)가 되어 이 일을 指揮(지휘) 하였고, 이듬해(忠肅王 2年 乙卯 西紀 1315年) 僉議評吏(첨의평리)에 올라 三司使(삼사사)로 轉任(전임)하였다가 이어 贊成事(찬성사)에 옮겼다. 忠肅王 7年 庚申(西紀 1320年) 重大匡 平康君(중대광 평강군)을 拜하였다. 아들 “河中(하중)”이 元에 벼슬하여 秩(질:서열)이 五品(오품)이었음으로 元으로 부터 “洪哲(홍철)”에게 奉議大夫 大常禮議院判官驍騎尉(봉의대부 대상례의원판관효기위) 大興縣子(대흥현자)를 除受(제수)하였다.忠肅王이 復位(복위:癸丑 西紀 1313年)하여 贊成事(찬성사)를 삼으니 때에 兩府(양부)가 行邸(행저:집무하는곳)의 用度가 不足함으로써 文武官에게 布(포:옷감,베)를 거두고, 富人(부인:부유계층의 사람들)의 財物(재물)을 抽出(추출)하니 理門郎中 “蔣伯祥(장백상)”이 “洪哲(홍철)”에게 일러 말리기를 「君(군)은 老宰相(노제상)이 되어 强制(강제)로 百姓(백성)의 財物(재물)을 거둠은 무엇때문이냐」라고 하니 “洪哲(홍철)”이 말하기를 「나의 허물이 아니라 지금 王이 燕邸(연저)에 있으며 쓰이는데가 많아서 徵錢(징전:돈을 거둠)하라는 王旨(왕지)가 있으나, 府庫(부고:나라의재정)의 貯藏(저장)이 虛渴(허갈:비어 아무것도 없음)하여 能히 支出하지 못하니 거두지 않고 어찌하리요」라고 하였다. 順天君(순천군)으로 改封(개봉:벼슬명의를 고쳐제수받음)되어 三重大匡(삼중대광)으로 나아가고 純誠輔翊贊化功臣號(순성보익찬화공신호)를 賜(사)하였다. “洪哲(홍철)” 및 “安珪(안규)”에게 命하여 掌試(장시:과거장 혹은 시험장을 관장)케 하였는데, “梁載(양재)”란 者(자)는 王이 寵愛(총애)하는 바라 政柄(정병:정치권행사)을 잡아 농락하며, 士大夫(사대부)가 그 門(문:문중)에 많이 나왔다. “梁載(양재)”가 “李潤(이윤)”을“洪哲(홍철)”에게 付託(부탁)하여 말하기를 「말을 달리면서 비단을 보면(走馬看錦) 눈에 五色(오색)이 混亂(혼란)해질까 두려워한다」하였더니, “洪哲”이 과연 그를 試取(시취:시험)하니 王이 “洪哲”에게 苧布(저포) 50匹(필), 珪玉帶 5, 綜布(종포) 600匹(필)을 賜(사:하사)하였다. 忠惠王 後 元年(元 順帝 至元 六年 庚辰 西紀 1340年)에 卒하니, 나이 79世였다. 사람됨이 文章(문장)에 精巧(정교)하고, 技藝(기예)에 모두 그 能力을 다 하였으며, 더욱 釋敎(석교:불교문학)를 좋아 하여서 일찌기 집을 북쪽에 전 檀園(전(향)나무로 지은 제단 공원)을 짓고, 禪僧(선승)을 기르고 藥(약)을 施惠(시혜)하니 個人이 많이 힘 입어 “活人堂(활인당)”이라 하였다. 忠宣王(충선왕)이 일찌기 그 園(원)에 行次(행차)하여 白金(백금) 30斤을 施賜(시사:하사)하였다. 또 집 남쪽에 堂을 지어 “中和(중화)”라 號(호)하고, 때로 永嘉君(영가군), 權溥(권부)以下 國老八人(국노 팔인)을 맞이하여, “耆英會(기영회)”를 組織(조직)하고 “紫霞洞新曲(자하동신곡)”을 지으니, 지금도 樂府(악부)에 그 樂譜(악보)가 있다.

처음 金方慶(김방경)”이 한 딸이 있어, “洪哲”이 이에 장가들어 “河中(하중)” “河生(하생) ”河老(하노)“를 낳으니 ”河中(하중)“은 따로 傳(전)함이 있다.後孫들은 京畿道 龍人(용인), 忠淸北道 報恩(보은)과 忠淸南道 大田(대전),天安(천안)에는 公의 長子 ”河中(하중)“의 後孫들이 살고 있고, 全羅南道 順天(순천), 昇州郡內(승주군내)와 隣近(인근) 光陽(광양),麗水(여수), 麗川(여천)에도 살고 있는 派(파)는 公의 二子 ”河生(하생)“의 後孫이며, 慶尙南道 南海(남해)에 公의 三子 ”河老(하노)“의 後孫들이 살고 있다.

안동의 영호루
영호루(英湖樓)는 안동 낙동강 가의 누각이다.안동 사람들은 자기 고장 자랑이 전국 으뜸이다. 자랑 거리에서 영호루가 한 몫 단단히 했다. 영호루는 고려 시대에 만들어 연조가 아지 높고, 안동에 왔던 공민왕이 써서 보낸 금자 현판을 달고 있어 지체 또한 최상이라 했다.영광에 불운이 따르는 것이 정한 이치인지, 홍수 피해를 자주 입에 다시 짓기를 몃번이나 거듭했다.934년에는 주춧돌만 남고 완전히 떠내려갔다. 1992년에 세운 '영호루유허비'(英湖樓遺墟碑)가 원래의 자리를 말해준다. 1970년에 다시 지었으나 볼썽 사나운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낙동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위치를 이동했다. 올라가서 강 건너 안동 시내를 바라보도록 했다.이 영호루에는 유래나 건물보다 시문이 더욱 소중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조선 초기까지의 것들만 해도 산문이 4편이고, 시는 14편이다.
蔡洪哲의 詩

해산당일왕래다 海山當日往來多 바다며 산이며 지금까지 많이도 오갔지
물외정신도차가 物外精神到此加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여기 오니 한층더하네
초위몽유운우협 初謂夢遊雲雨峽 처음에는 운우의 골짜기에서 노는가 했더니
점의신입화도가 漸疑身入畵圖家 몸이 점차 그림속으로 들어가는가 의심되네
남강추야천봉월 南江秋夜千峰月 남쪽 강 가을밤에 천 봉우리에 달이 돋고
북리춘풍만수화 北里春風萬樹花 북쪽마을 봄바람에 일만 꽃이 피네

전부 나열하지는 않았지만 채홍철(蔡洪哲)이 지은 이 시에는 영호루일대의 경치가 으뜸이라고 칭송한다.채홍철은 고려 말에 국권을 장악하고 부귀를 누리던 귄문세족 가운데 문학과 음악에서 이름을 남긴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송악산 자하동 선경과 같은 곳에 화려하기가 극치에 이른 대 저택을 마련하고 나라의 원로라는 가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며 천년 장수를 할 술을 마신다고 자랑했다. 바로 그런 연유로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은 굶주리지 않을 수 없었기어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항변하면서 나선 비판세력이 신흥사대부였다....더 이상은 나열하지 않겠습니다.요약하자면 채홍철이 남긴 영호루 일대의 경치를 칭송하는 시의 일부분입니다.

 

*月影臺[월영대] <*蔡洪哲>
文章習氣轉崔嵬 / 忽憶*崔侯一上臺 / 風月不隨黃鶴去 / 煙波長送白鷗來
雨晴山色濃低檻 / 春盡松花亂入盃 / 更有琴心隔*塵土 / 他時好與雨雲廻
문장의 익힌 기운 더욱 높아가 / 문득 최후 생각에 월명대에 오르네.
바람과 달은 화학을 따라가지 않고 / 부연 물결은 언제나 백구를 보내오네.
비 멎은 산빛은 짙어 난간이 나지막한데 / 가는 봄의 송화는 어지러이 잔에 드네.
다시 거문고 마음이 있건만 진토를 격했나니 / 이 다음에 좋은 구름,비 함께 오리.
*월영대;馬山에 있는 최고운이 놀던 곳.*채홍철;호는 中庵,紫霞洞人,벼슬은 平章事.
*최후;최치원을 가리킴. *진토;죽은 사람을 지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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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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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英公諱恂의 관작 奉議大夫는 처남의 관작과 동일한 원의 관작으로 유추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