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연 2014년 가을 답사 보고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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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14-12-19 08:59 조회2,779회 댓글2건본문
안사연 2014년 가을 답사 보고 03
구한말까지 안김의 기개를 드높인 엄정 선영을 참배하다
11:50분경 소태면 오량리 양천허씨 별묘에서 출발해 엄정면 논강리 논동 선영에 도착하니 정오를 살짝 넘었습니다. 직선거리로 불과 6km 남짓한 산 너머 마을입니다. 논동으로 가는 길 중간에 이가원 선생 묘소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한학자이자 국문학자로 유명한 이가원(李家源) 선생을 가리키는지, 동명이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안내판을 조금 지나 우회전해서 도로 이정표의 동막마을 쪽으로 직진합니다. 얼마 못 가 동막교차로가 나오면, 여기서 다시 우회전해서 경사진 길을 올라가 일반국도 19번 도로로 갈아타면 됩니다. 요즘은 도로를 잘 닦아 놓아서 일반국도인데도 마치 고속도로 같습니다. 이 19번 국도가 엄정면의 정중앙부를 동남쪽으로 관통하는 큰길입니다. 이 도로로 올라가서 1.5km쯤 가면 ‘논동마을’이라고 적힌 도로 안내판이 서 있고, 바로 이곳에서 우회전해서 도로 밑으로 내려가 길 끝에서 다시 우회전하면 동북쪽으로 논동 선영이 350m쯤 됩니다.
▲ 엄정문중 선영으로 가는 길
▲ 19번 국도에서 엄정면 논강리 논동으로 가는 길
◆ 참판공(휘 愼) 묘소
허한(許僴) 선생 배위가 문숙공(휘 悌甲) 따님인데, 엄정문중의 현감공(휘 彦淸) 배위가 양천허씨 허적(許磧) 선생의 따님입니다. 허적 선생은 당대의 유명한 처사(處士)라고 합니다. 또한 현감공의 손자 첨사공(휘 繼賢)의 배위가 허변(許忭) 선생 따님이니 두 집안은 혼맥으로 얽힌 겹사돈인 셈인데, 엄정문중의 실질적인 입향조는 참판공(휘 愼)이라고 합니다. 현감공과 참판공, 그리고 첨사공 계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동추공(휘 宗淑) → 문정공(휘 礩) → 3子 부사공(휘 智童) → 2子 학생공(휘 滂) → 현감공(휘 彦淸) → 참판공(휘 愼) → 첨사공(휘 繼賢)
좁은 마을길로 들어서자 큰 나무가 서 있는 나지막한 구릉에 엄정문중 선영이 눈에 들어옵니다. 맨 위 묘소가 입향조 참판공(휘 愼) 묘소입니다. 참판공의 자(字)는 근숙(謹淑)으로 파평윤씨를 맞이하여 첨사공(휘 繼賢)을 비롯해 서자(庶子) 계철(繼喆)과 계성(繼聖)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첨사공께서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됨으로써 형조참판에 추증되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묘역으로 올라가 참판공께 큰절을 올리고 완식 회장의 설명을 듣습니다. 묘소에는 묘비를 비롯해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 배치돼 있습니다. 손자 통제사공(휘 逷)께서 현손 규(戣), 감(戡) 등과 함께 재물을 갹출하여 제전(祭典)을 마련하고, 참판공 묘비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셨는데, 뒷날 정시선(鄭是先) 선생이 충주목사로 부임하여 통제사공께서 남기신 재물을 토대로 그 일을 완수하였다고 합니다.
정시선 선생은 통제사공의 아우이신 병사공(휘 逸 : 초명 述)의 외손자입니다. 문익공 정광필 선생의 후손으로 조부는 예조참판 정만화(鄭萬和) 선생, 부친은 증이조참판 정재해(鄭載海) 선생입니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랐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청렴ㆍ신중하고 근실하였으며, 용모와 재능이 뛰어나 다섯 가지 덕을 두루 갖추었다는 평을 들었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선생을 기리는 거사비와 마애비 등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참판공 묘비에는 ‘증가선대부 형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김 공 신 지묘, 증정부인 파평윤씨 부좌(贈嘉善大夫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金公愼之墓 贈貞夫人坡平尹氏祔左)’로 적혀 있습니다.
▲ 엄정문중 선영(참판공 묘역)
▲ 엄정문중 선영. 1번 참판공 묘역, 2번 관찰사공 묘역, 3번 병사공 묘소.
▲ 참판공(휘 愼) 묘역 참배
▲ 참판공 묘소와 정시선 선생 등이 묘비를 건립한 내력을 설명하는 완식 회장
▲ 참판공 묘비
▲ 수원 참의공문중 종인들. 왼쪽부터 태철, 재영, 춘식, 경식
◆ 첨사공(휘 繼賢) 묘소
참판공 바로 아래에 첨사공(휘 繼賢) 묘를 모셨습니다. 첨사공께서는 1566년(명종 21년)에 태어나 25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당시 갑사(甲士)로서 선조를 호위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이후 선전관을 거쳐 도총도사, 의주판관, 호조 좌랑ㆍ정랑, 군리첨정, 군자감정, 봉산구수를 역임하고 1594년(선조 27년)에 불과 29세에 여주목사로 임명되셨습니다. 이처럼 승진을 거듭하신 것을 보면 첨사공의 자질과 인품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건만, 초고속 승진에 따른 뭇 사람들의 시기 때문인지 나이도 어리고 무과에 급제해 출신(出身)한 지 몇 해밖에 안 되어 경력이 많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라는 사간원 소청으로 부임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재질을 어찌 숨기리오. 이 일로 개천부사, 단천군수, 영암군수 등 변방의 외직을 두루 거치셨는데, 영암군수 시절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목장흠(睦長欽) 선생이 선정을 베풀고 재능이 뛰어난 관리로 선조에게 보고하여 표리(表裏)를 하사받으셨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전남 영암향교에 ‘군수 김 공 계현 선정비(郡守金公繼賢善政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후 만포 첨사(滿浦僉使)에 임명되었으나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향년 43세로 원대한 뜻을 펴지 못하고 하세하셨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배위 양천허씨 또한 38세로 돌아가셨으니 더욱 애처롭기만 합니다.
첨사공께서는 2남 1녀를 두셨는데, 큰아드님(휘 逷)은 삼도수군통제사, 작은아드님(휘 逸)은 북병사(北兵使)를 역임하였으며, 따님은 군수 성후익(成後益) 선생에게 출가하였습니다. 첨사공 묘소 역시 병사공(휘 逸)께서 참판공 묘와 함께 단장하여 묘비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셨기에 정시선 선생이 참판공 묘비와 동시에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참판공과 첨사공 묘소의 두 묘비가 똑같이 생겼습니다. 묘비에는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 절충장군 만포진 병마첨절제사 김 공 계현 지묘, 증정부인 양천허씨 부좌(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行折衝將軍滿浦鎭兵馬僉節制使金公繼賢之墓 贈貞夫人陽川許氏祔左)’로 적혀 있습니다.
▲ 첨사공(휘 繼賢) 묘소
▲ 첨사공 묘비
◆ 통제사공(휘 逷) 묘소
첨사공 바로 아래에는 큰아드님 통제사공(휘 逷)의 묘가 모셔져 있습니다. 작은아드님 병사공(휘 逸) 묘소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엄정면 용산리 향림에 있습니다. 통제사공의 자(字)는 이원(而遠)으로 무과 급제 후 선전관, 개천군수, 군기시 첨정, 선천부사, 은성부사를 거쳐 1649년(인조 27년)에 경상좌병사를 역임하였습니다. 이 뒤로도 정주목사, 평안병사, 북병사(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전남병사를 지내시고 1659년(효종 10년)에 경상우병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그 해 12월 중풍으로 사직하실 때까지 임무를 수행하다가 이듬해 1660년 9월에 하세하셨습니다.
묘역에는 망주석과 동자석이 각각 한 쌍씩 서 있고, 근래에 세운 묘비와 장군석도 한 쌍이 조성돼 있습니다. 본래 묘 앞에 장군석과 장명등이 조성돼 있었다고 합니다. 장군석은 크기가 웅장하고 장명등은 조각 솜씨가 매우 정교했는데, 어느 날 도굴범들에 의해 도난당했다고 합니다. 근래에 세운 묘비는 옛 좌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옥개석을 얹은 형태입니다. 묘비에는 ‘가선대부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제사 김 공 적 지묘, 배 정부인 전주이씨 합부(嘉善大夫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制使金公逷之墓 配貞夫人全州李氏合祔)’로 적혀 있습니다.
통제사공 배위 전주이씨는 찬성(贊成) 이춘영(李春英) 선생의 따님으로 슬하에 5남 3녀(휘 振輝, 挺輝, 益輝, 正輝, 匡輝)와 3녀(사위 金得元, 鄭爾說, 鄭世演), 서출로 1남(휘 永輝)과 4녀를 두셨는데, 통제사공 묘소 바로 아래에 큰아드님 통덕랑공(휘 振輝) 내외분 합장묘와 손자 선전관공(휘 戣) 내외분 합장묘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묘비나 다른 석물이 없이 상석에 내외분 휘자와 관직만 간략하게 적혀 있습니다.
▲ 통제사공(휘 逷) 묘소
▲ 통제사공 묘소 후경
▲ 통제사공 묘소의 장군석
◆ 관찰사공(휘 思默) 묘소
참판동 이하 묘소를 참배하고 동쪽으로 250m쯤 떨어진 관찰사공(휘 思默) 묘역으로 향합니다. 마을길로 들어가 느티나무 고목에서 오른쪽 길로 50m쯤 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옵니다. 이 길 왼쪽이 관찰사공 묘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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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사공 묘역으로 가는 길
맨 위에 감찰공(휘 戡)의 양자 통덕랑공(휘 瑞夏) 묘가 모셔져 있고, 그 아래에 관찰사공 묘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통제사공의 큰아드님 통덕랑공(휘 振輝)은 선전관공(휘 戣)과 감찰공(휘 戡)을 두셨는데, 둘째 아우님 명천도호부사공(휘 益輝)께서 후사가 없어 감찰공께서 계대를 이었으나 감찰공 역시 따님 두 분만 두신 까닭에 선전관공의 작은아드님 통덕랑공(휘 振輝)께서 다시 양자를 가셨습니다.
봉분 앞에 망주석 한 쌍, 그 앞으로 묘비를 세울 자리에 양쪽 끝을 귀접이 형태로 다듬은 묘표가 서 있습니다. 묘표에는 ‘조선 통덕랑 김 공 서하 지묘, 유인 전주이씨 부좌(朝鮮通德郞金公瑞夏之墓 孺人全州李氏祔左)’로 적혀 있습니다. 통덕랑공 묘소를 참배한 뒤 관찰사공 묘소로 자리를 옮깁니다. 통덕랑공의 6대손이 바로 관찰사공입니다.
▲ 통덕랑공(휘 瑞夏) 묘소
▲ 통덕랑공 묘표
관찰사공은 충주 출신의 대한제국 관료이자 교육자로 활약하신 분입니다. 1856년 4월 9일에 엄정에서 태어나 1885년(고종 2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개화기에 일본유람신사단원으로 참여하셨는가 하면 대한제국 중추원 참서관, 평리원 수반검사,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셨습니다. 국운이 기울어 가던 1903년에 경무청 경무국장, 1905년에 경무청 경찰국장을 거쳐 이 해에 중추원 찬의와 경상남도 관찰사, 1908년(순종 1년)에 경기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관찰사공께서는 1903년 경무국장으로 근무할 당시 내장원 창고의 쌀이 시전 상인을 거쳐 부당한 이득을 좇는 간상(奸商)에게 헐값에 팔려나가 이들이 부정한 이득을 꾀한다는 소문이 항간에 떠돌자 경찰의 직책을 담당한 몸으로 부지런히 검찰하지 못했다며 죄를 청하는 자핵소(自劾疏 :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밝히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런 까닭에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분연히 맞서기도 하셨습니다. 경술국치를 두 달 앞둔 1910년 6월 7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와의 공문을 일문(日文)으로 시행하는 것을 내각령으로 금지하였는데, 최근의 각 관찰사들의 공문을 보면 경기관찰사 김사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문으로 시행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자 일제는 그 해 10월 17일 일방적으로 관찰사공을 중추원 찬의로 임명하고,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에 수록하였습니다. 그러자 관찰사공께서는 12월 19일 중추원 찬의를 내던지고 고향 엄정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 두 달 동안의 일로 인해 민족문화연구소의 친일활동 1차 조사 당시 관찰사공을 포함하였으나, 2008년 4월에 정밀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친일인사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니 관찰사공의 바른 행적이 저절로 실상을 밝히는 밝은 빛이 되었던 것입니다.
관찰사공께서는 1904년 9월에 이원긍(李源兢) 선생을 비롯해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이준(李儁) 선생 등이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결성하자 찬성금 10원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에도 찬조금을 보내는 등 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셨으며, 1920년 6월 27일 조선교육회 창립총회가 윤치소 선생의 집에서 개최될 당시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회장으로, 관찰사공이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습니다. 1934년에 발행된 『삼천리』 제6ㆍ7권에는 관찰사공을 “강직 고결한 인격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뒤 고향에 돌아와 칩거하신 관찰사공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나라 망한 신하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라고 하셨답니다.
관찰사공 묘소에는 상석만 놓여 있을 뿐 별다른 석물이 없었는데, 2009년 9월에 관찰사공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비석을 세웠습니다. 비문은 완식 회장이 지었습니다. 내용은 별도로 올리는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완식 회장은 오래 전부터 관찰사공 현양사업을 위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해 오고 있는데, 그 동안 구한말에 경성에서 촬영한 관찰사공 사진을 비롯해 서찰, 관찰사공께서 손수 적으신 가승(家乘) 등 귀중 유물은 물론 후손들을 통해 김구 선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구술을 채록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관찰사공에 관한 새로운 자료인 ‘경남진주관찰사 김사묵 영세불망비(慶南晉州觀察使金思默永世不忘碑)’와 경기도 수원박물관에 소장된 관찰사공 유묵인 촉탁증서 등을 발굴하여 현양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 자료들은 대종회 홈페이지(익원공파종회 → 충북 충주시 엄정면 문정공계 문중)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관찰사공 묘소를 참배하는 사이 우리 일행 소식을 전해 들은 재환(74세) 씨께서 묘소로 올라오셨습니다. 재환 씨는 병사공(휘 逸) 후손이십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엄중문중에 관한 귀중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 관찰사공(휘 思默) 행적을 설명하는 완식 회장
▲ 관찰사공 영세불망비. 완식 회장이 최근 발굴한 자료이다.
▲ 관찰사공께서 손수 기록한 가승(家乘)
▲ 구한말에 촬영한 관찰사공 사진
▲ 관찰사공 간찰
▲ 병사공(휘 逸) 후손 재환 씨
▲ 관찰사공 묘역에서. 앞줄 왼쪽부터 재환, 영환, 태영, 윤식, 경식, 태철
뒷줄 왼쪽부터 은회, 영윤, 태우, 용주, 춘식, 영국, 완식(앞), 윤만(뒤), 재영
◆ 병사공(휘 逸) 후손가 고문서
묘역 참배를 마치고 마을로 내려오자 어느덧 오후 1시가 되었습니다. 10여 분 거리인 식당으로 향합니다. 완식 회장이 예약해 둔 민물매운탕으로 푸짐한 대접을 받아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식사 후 재환 씨께서 대대로 전해온 각종 고문서를 친견하도록 배려해 주신 덕분에 귀한 자료를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 병사공(휘 逸) 교지(1638년, 인조 16년). 병사공 휘(諱)가 초명 김술(金述)로 적혀 있다. 숭덕(崇德)은 청나라 태종의 연호로 1636년(인조 14년)~1643년(인조 21년)이다.
▲ 병사공의 휘가 초명 ‘金述’로 적혀 있고, 관직이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적힌 것으로 보아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로 재임 중이던 1639년(인조 17년)에서 1640년 사이 문서인 듯하다.
▲ 병사공 교지(1642년, 인조 20년)
▲ 병사공(휘 逸) 교지(1649년, 인조 27년)
▲ 1649년(인조 27년)에 병사공께서 장단부사 재임 시 관찰사 남선(南銑) 선생이 인조에게 보고한 내용에 의거하여 표리(表裏) 1습을 하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 병사공(휘 逸) 교지(1649년, 인조 27년). 앞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하다.
▲ 병사공(휘 逸) 교지(1649년, 인조 27년)의 왼쪽 하단 작은 글씨 확대
▲ 병사공(휘 逸) 교지(1650년, 효종 1년). 앞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하다.
▲ 토지 매매문서. ‘熙’ 앞글자가 떨어져 나가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으나 ‘康熙 6년(1667년, 현종 8년)’인 듯하다.
▲ 토지 매매문서(앞면 : 1693년, 숙종 19년)
▲ 토지 매매문서(뒷면 : 1693년, 숙종 19년)
▲ 1719년(숙종 45년)에 병사공(휘 逸) 큰아드님 지추공(휘 胤輝)에게 내린 영지(令旨). 영지는 왕세자가 내리는 사령장을 뜻한다.
▲ 지추공(휘 城) 호구(1735년, 영조 11년)
▲ 지추공(휘 城) 교지(1744년, 영조 20년). 지추공은 병사공의 큰손자이다.
▲ 호구(1849년, 헌종 15년)
◆ 병사공(휘 逸) 묘소
병사공은 통제사공(휘 逷)의 아우님으로 초명은 술(述), 자(字)는 이서(而緖)이다. 묘소는 논동에서 약 1km 떨어진 엄정명 용산리에 있습니다. 묘역에 올라 인사를 드린 뒤 주위를 둘러보니 나지막한 구릉이 남서쪽으로 흘러가는데, 바로 앞에 19번 도로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병사공 묘소는 현 위치보다 20m 아래에 초배 광주이씨와 합폄으로 모셨는데, 19번 도로공사로 인해 천봉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계배 의령남씨 묘를 천봉하여 세 분을 합폄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묘소에는 묘표를 비롯해 문인석과 장명등이 각각 1쌍 배치돼 있으며, 봉분 오른쪽에 근래에 세운 의령남씨 묘비가 있습니다. 이 묘비에 천봉 내력이 기록돼 있습니다. 옛 묘표에는 ‘조선국 절충장군 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겸 경성도호부사 김 공 일 지묘, 정부인 광주이씨 부좌(朝鮮國折衝將軍守咸鏡北道兵馬節度使兼鏡城都護府使金公逸之墓 貞夫人廣州李氏祔左)’로 적혀 있습니다.
병사공께서는 1603년(선조 36년)에 태어나 무과 급제 후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당시 훈국파총(訓局把摠)으로서 강도좌초관(江都左哨官)이 되어 왕실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으셨습니다. 훈국은 훈련도감, 파총은 1594년(선조 27년)에 훈련도감을 창설하면서 처음 설치된 관직인데 차차 다른 군영으로 확대되어 훈련도감에는 6명을 두었다고 합니다. 임기는 2년으로 선전관이나 지방 수령을 거친 자가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병사공께서는 전형적인 무인의 길을 걸어 충청수사, 전라우수사, 전라병사, 황해병사, 안주목사, 평안병사, 오위장, 경기우방어사, 장단부사,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겸 경성도호부사에 이르렀으며, 북병사로서 변방을 지키다가 1651년(효종 2년) 12월 23일 병환으로 순직하셨습니다. 이때 향년 49세였으니 병사공의 자질이 얼마나 뛰어난지 충분히 짐작될 뿐만 아니라 천수를 누리셨다면 무관으로서 풍부한 경험을 살려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큰 뜻을 이루셨을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병사공께서는 관직에 나아가 여러 차례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셨는가 하면 임금의 총애를 받기도 하셨는데, 이로 인해 대신(大臣)과 대간(臺諫)들로부터 시기성 질투를 받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초배 광주이씨의 부친은 충주 출신으로 광남군 이광악(李光岳) 선생입니다.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에서 충무공(휘 시민)께서 원통하게 적탄에 맞아 운명하시자 충무공을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대승을 이끌어 적을 격퇴시켰으니 여러 면으로 우리 집안과는 깊은 인연이 있는 분입니다. 초배 광주이씨는 따님만 두 분 두시고, 계배 의령남씨는 아드님 다섯(胤輝, 良輝, 德輝, 世輝, 自輝)을 두셨습니다. 병사공의 외손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정시선 선생으로 충주목사로 부임하자 병사공을 비롯한 선대 묘소에 비석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오후 3시경 참배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니 늦가을 짧은 해라 서쪽 하늘에 이내가 내려앉았습니다. 재환 씨를 논동 댁 근처에 모셔다 드리고 우리 일행은 마지막 답사코스인 억정사지와 거돈사지로 향합니다.
▲ 병사공(휘 逸) 묘소 가는 길
▲ 병사공 묘소
▲ 병사공 묘소 뒤쪽 용맥(龍脈)
▲ 병사공 묘소 앞의 국도 19번
▲ 병사공 묘표
▲ 병사공 묘소를 설명하는 재환 씨
사진 윤만, 윤식 / 글 윤식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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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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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엄정문중 선조님 계대와 행적을 몰라서 잘못 서술한 내용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못된 곳은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김완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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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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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정성으로 쓰셔서 무엇하나 고칠 곳이 없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씀 밖에 더 드릴것이 없습니다.
후일 은혜를 갚을 기회가 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