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연 2014년 가을 답사 보고 0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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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14-12-20 07:02 조회2,224회 댓글2건본문
안사연 2014년 가을 답사 보고 04
고려의 대사찰, 세월 속에 묻히다
◆ 억정사지(億政寺址)
짧은 늦가을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 3시경 엄정면 논동(論洞)을 출발해 억정사지(엄정면 괴동리 360-1)로 향합니다. 직선거리로 불과 2km 남짓해서 산기슭을 끼고 돌아도 10리가 조금 넘는 거리입니다. 억정사지 입구에 ‘비석마을’이라는 도로표지판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습니다. 맞은편에 버스 정류소 쪽에 ‘억정사지’와 ‘경종대왕 태실’이라고 적은 문화재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 안내판을 끼고 좌회전해서 산기슭까지 직진하면 억정사지입니다. 억정사지에 도착하니 오후 3:07분입니다.
▲ 논동에서 억정사지 가는 길
▲ 억정사지 입구의 안내판. 버스정류소를 끼고 좌회전, 비석마을 산기슭이 억정사지이다.
▲ 버스정류소에서 바라본 비석마을과 억정사지
억정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절로 지금은 폐사되었으나, 여말선초의 고승 대지국사(大智國師)를 기리는 거대한 비석이 남아 있어 웅장했던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대지국사는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속명은 청주한씨 한찬영(韓粲英)이며,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庵)입니다. 1328년(고려 충숙왕 15년)에 태어나 14살에 태고화상 보우(普愚)의 제자로 출가한 뒤 1353년(공민왕 2년)에 시행된 승과(僧科)에서 장원급제하였습니다. 대흥사를 비롯해 승록사, 석남사는 물론 우리 문중과 관계가 깊은 전남 강진의 월남사와 황해도 신광사, 그리고 운문사 등의 주지를 맡기도 했습니다. 만년에 이곳 억정사에 머물렀는데 공양왕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1390년(공양왕 2년) 6월 28일 입적하자 공양왕이 지감(智鑑)이라는 시호와 함께 혜월원명(慧月圓明)이라는 탑호를 내렸습니다. 그 뒤 조선 태조가 시호 대지(大智)와 탑호 지감원명(智鑑圓明)을 내리고, 1393년(조선 태조 2년)에 대지국사의 비를 세우게 했습니다.
보물 16호인 대지국사비는 사각으로 다듬은 기단 위에 비신(碑身)만 세운 형태로 거북 좌대와 용머리가 없습니다. 비신 역시 위쪽을 귀접이 형태로 다듬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습니다. 청룡사지 답사에서 보았던 보각국사비와 모양이 같습니다. 이 형태가 14세기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대지국사비를 세운 이듬해인 1394년에 보각국사비를 세웠네요. 대지국사비는 앞에 부도탑과 석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대지국사비 앞에도 부도탑과 석등이 있었겠죠? 비문에는 목은 이색 선생을 비롯한 여말선초의 유명한 학자와 관리들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억정사지 인근에는 사과나무 과수원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수확을 마치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사과는 까치와 새가 쪼아서 멀쩡한 것이 없지만, 맛은 일품입니다. 맞은편 산기슭의 아늑한 마을이 허적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고 완식 회장이 들려 줍니다. 사과의 단맛을 만끽하고 이제 완식 회장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의 거돈사지로 향합니다.
▲ 억정사 터의 대지국사비.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 기단부와 비신 하단부. 거북좌대가 아니라 별다른 장식 없이 사각형으로 다듬었다.
▲ 보물 제16호 대지국사비. 비신 위쪽을 귀접이 형태로 다듬은 기법이 청룡사지 보각국사비와 같다.
▲ 작별 인사를 나누는 완식 회장과 영환 회장
◆ 거돈사지(居頓寺址)
20분 정도 대지국사비를 둘러보고 오후 3:30분 억정사지를 출발해 오후 4시경 부론면 정산리의 거돈사지에 도착했습니다. 초행인 데에다 구불구불 산길을 달려 자세히 안내하지 못하니 혜량하시기 바랍니다. 대략 32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 거돈사지 가는 길. 중간에 좁은 산길을 구불구불 달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 4시경 도착하였다.
거돈사지에 도착하니 금방이라도 어둠이 깔릴 기세입니다. 거돈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나, 창건 연대는 미상입니다. 고려 초에는 거대한 규모로 번창했는데, 폐사된 시기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거돈사지는 사적 제168호로, 7,500여 평의 거대한 절터에 금당지(金堂址)와 그 앞의 삼층석탑(보물 제750호), 동쪽의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 절터 북쪽의 원공국사승묘탑 재현품 등이 남아 있습니다.
금당지는 법당이 있던 자리를 말합니다. 장대석을 다듬어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법당을 앉힌 형태인데, 지금은 전면 6줄, 측면 5줄의 주춧돌만 남았습니다. 정교하게 다듬은 주출돌은 모서리 돌과 중간 돌의 형태가 확연히 구분돼 눈길을 끄는데 형태로 보아 두리기둥을 세워 집을 짓고, 남은 주춧돌로 보아 20여 칸의 큰 건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현재 금당지 중앙에는 불상 좌대가 남아 있는데, 높이가 2m에 달합니다. 그 규모로 보건대 불상 크기도 대단했을 겁니다.
▲ 거돈사지 전경
▲ 거돈사 금당지
▲ 법당 주춧돌. 모서리와 중간에 세운 기둥에 맞게 형태를 다듬었다.
▲ 불상 좌대. 높이 약 2m의 거대한 크기이다.
법당 앞에는 대부분 탑을 배치하는데, 거돈사지 역시 법당 앞에 삼층석탑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가탑 계열의 형태를 취했으나 비례가 엄밀하지 않아 긴장미가 덜합니다. 이런 형태는 대체로 나말여초에 나타나는 형태라고 합니다. 2중 기단 위에 삼층으로 쌓은 몸돌에는 별다른 장식 없이 모서리 기둥만 새긴 단순한 형태입니다. 이 때문에 비록 몸돌의 비례에서 배어나는 긴장미는 덜하지만, 단순한 형태로 인한 엄숙미는 석가탑 못지 않습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만 남아 있습니다.
▲ 법당 앞의 삼층석탑
▲ 거돈사지 축대 위로 삼층석탑의 윗부분이 보인다.
▲ 삼층석탑 서쪽에 절터에서 수습한 석재들을 모아 놓았다.
▲ 거돈사지에서. 앞줄 왼쪽부터 태철, 경식, 춘식, 용주, 태영, 윤식
뒷줄 왼쪽부터 은회, 태우, 영국, 영환, 영윤, 재영, 윤만
석탑 동쪽의 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빛을 받아 은은한 황금빛을 반사합니다. 1025년(고려 현종 16년)에 세운 이 비는 전체적으로는 신라 형식을 따랐으나, 세부 기법은 고려 초기 양식을 따랐다고 합니다. 거북모양의 좌대 위에 귀부(龜趺)는 꽉 다문 입에 용머리 형태인데, 양쪽 귀가 물고기 비늘처럼 생겼습니다. 비문은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崔冲) 선생이 짓고, 김거웅(金巨雄) 선생이 구양순체로 쓴 글씨라고 합니다. 이 비석 북서쪽 150m 지점에 원공국사승묘탑이 있던 자리입니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에 무단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집으로 몰래 옮긴 것을 1948년에 경복궁의 옛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가 1986년에 서울시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다시 옮겼습니다. 이 부도탑은 고려시대 부도의 전형적인 형태로 보물 제190호입니다. 정제된 비례와 중후한 품격으로 조각이 장엄할 뿐만 아니라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현재 거돈사지에는 이 부도탑의 재현품을 원래 자리에 세워 놓았습니다.
거돈사지 답사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오후 4:30분이 다 되었습니다. 짧은 해거름에 주위가 조금씩 어둠 속으로 묻힙니다. 수원참의공문중 일행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향합니다.
▲ 원공국사승묘탑비
▲ 원공국사승묘탑비 상단 장식이 섬세한데, 석양빛에 물들어 은은한 황금빛이 반사된다.
▲ 원공국사승묘탑비 거북 좌대
▲ 원공국사승묘탑비 거북 좌대 뒷부분
▲ 원공국사승묘탑.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 금당지 북쪽으로 멀리 원공국사승묘탑 재현품이 자리잡고 있다.
▲ 돌아보는 눈길에 무엇이 담겼을까
▲ 어둠 속으로 묻혀 가는 거돈사지
이상 2014년 안사연 가을 답사 보고를 마칩니다. 잘못된 내용은 바로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윤만, 윤식 / 글 윤식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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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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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엄정문중 선영을 참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완식 회장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보고 내용 중 잘못 설명드린 사항은 바로 잡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김완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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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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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바쁘신데 오나결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님의 답사기를 모두 모아 금번에 있을 저희 종중원들의 선조님 묘역 답사 시 자료집으로 제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거듭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