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川沙)김종덕(金宗德) 묘갈명(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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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5-03-04 11:32 조회1,746회 댓글0건본문
川沙金公墓碣銘 並序 立齋 鄭宗魯
子思子曰苟不至德。至道不凝焉。夫至德固尙矣。學者苟能以眞實心做刻苦工。不徒言之口。而必要體之身。使涵養踐履之功。爲積德之基。則其於至道之凝。亦庶幾矣。若近故川沙先生金公。豈非其人也哉。謹按公諱宗德字道彥。金氏本出新羅敬順王。至高麗有諱方慶。以中興功封上洛公。因貫焉。入我朝北評事諱克楷。以淸白名。松隱處士諱光粹。受俎豆享。晩翠堂諱士元。遊退陶門。是生諱濬禮賓直長。是生諱尙璘贈司僕正。於公爲高祖。曾祖諱賢佐。祖諱履謨。考諱南應。以篤孝稱。妣順天金氏。有女士行。應敎光燁五代孫。處士胄嶷女。公以景廟甲辰七月日生。英廟癸酉中生員。己卯遊大山李先生門。今上己酉。薦學行除義禁府都事。以方守制職帖不果下。甲寅以優老恩授僉樞。丁巳八月日卒。壽七十四。十一月葬于後峴午坐原。縫掖會者數百人。公自幼聰穎過人。資稟近道。旣負笈湖上。專心服事。進修階級。一遵師敎。講究體驗。無時間斷。盖其立志遠大。着工嚴密。博而不務於泛。約而恐失於陋。縷析毫分。無非切實之理。反省自警。皆是誠正之工。而終始主敬。日新又新。故李先生亟稱其篤實可尙。及其學益明而德益崇。則面睟背盎。言厲旨確。動容周旋之間。矩度森然。應事接物之際。德性藹然。見之者莫不以爲有道君子也。孝友之行。出於天性。六七歲人言烏啼引惡氣。公聞其聲。恐妨父母。每爲之失色以懼。及長養志體備至。糊牕溫堗。至老躳親。其遭內艱。年逾六十。執禮無變。不以已衰而或懈。愛諸弟甚篤。倡率同學於湖上。居常聯榻共處。征邁相好。嘗同時染癘。公先起以救。冒寒煑粥數十夜。致羣弟得甦。而公反澌敗幾殊。久乃痊。家貲一委之羣弟。不問其出入。於宗族親故。周恤施與。惟恐其不速行。守道山樊。絶意名利。常歎科擧之學。壞人心志。及兩弟幷中省解榜猝至。公方裁書如不聞。待封緘訖。始取見之。律己齊莊。雖甚疾病。衣衾必整飭。無撥開時。季氏臨終。極整齊無錯亂悽黯。公泣訣而出。斂衽更入曰汝之爲。古人所罕。吾乃言語掩抑。坐立輕遽。汝必不滿於心矣。玆欲以敬謹之容。更見汝矣。其造次必於是。於是而益可見矣。李先生敬禮公甚至。至遣其孫秉運執贄受學。疾革時奄奄不能起坐見賓客。公入必扶起而坐。其招語學者。亦待公爲之。若公豈非得李先生眞訣者哉。遠近學者。亦多從之遊。執經問難相屬。公敎誨無倦色。所纂述有聖學正路,聖學入門,孔門一統,釋學正臟,政本禮書及遺稿若干卷。配韓山李氏。士人時和之女。端拙淸靜。終身如入門日。生一男一女。男慶進。先公夭。系子養觀。女適柳同春。公之弟掌令宗發氏。使姪原進奉公遺事來。示余乞銘其墓。自惟無似。何敢當是役。顧平日景仰公夙矣。間嘗再候公於其第。覿德而心醉焉。故遂不辭而謹敍如右。銘曰。
孔門三千。好學無幾。在古猶然。矧今豈易。卓哉川翁。篤實爲己。受訣湖上。服膺沒齒。
四非必克。三省是事。俛焉孜孜。有進無止。德成行尊。君子有斐。如嶽之停。如玉之粹。
高蹈林泉。軒冕雲視。有來摳衣。玄鍵開示。斯道不亡。大名其施。我銘于墓。昭揭無墜。
천사 김선생 묘갈명과 서문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子思가 <中庸>에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지극한 德이 아니면 지극한 道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지극한 德은 진실로 숭상할 만 한 것이다. 學者가 참으로 능히 진실한 마음으로 刻苦의 공부를 하여 한갓 입으로만 말하지 않고 반드시 몸에 체험하여 涵養하고 實踐하는 공부가 德을 쌓는 터전이 되게 한다면 아마 지극한 道를 이루는 데 또한 가까울 것이니, 近故에 川沙先生 金公같은 이가 어찌 그러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삼가 살펴보니 公의 諱는 宗德, 字는 道彦이다. 金氏는 본디 新羅 敬順王에서 나왔는데 高麗에 이르러 諱 方慶이 있어 中興의 공훈으로 上洛公에 봉해지니 이로 인하여 貫鄕을 삼게 되었다. 우리 王朝에 들어와 北評事 諱 克諧는 淸白吏로 유명하였고, 松隱處士 諱 光粹는 藏待書院에 配享되었고, 晩翠堂 諱 士元은 退陶의 門下에서 배웠다. 이 분이 諱 濬을 낳으니 禮賓寺 直長이고, 이분이 諱 尙璘을 낳으니 贈司僕寺正인데 公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諱는 賢佐이고 조부의 諱는 履模이고 考의 諱는 南應이니 돈독한 효성으로 칭송이 있었다. 모친은 順天金氏이니 女士의 행실이 있었는데 應敎 光燁의 五代孫이고 處士 冑嶷의 따님이다.
公은 景宗 甲辰(1724年) 七月 二十八日에 태어났고, 英祖 癸酉(1753年)에 生員試에 합격하였고, 己卯(1759年)에 大山 李先生의 門下에 遊學하였고, 今上[正祖] 己酉(1789年)에 學行으로 천거되어 義禁府都事에 除授되었으나 마침 三年喪중에 있었기 때문에 職帖은 내리지 않았다. 甲寅(1794年)에 나라로부터 노인을 우대하는 恩典으로 僉樞에 除授되었고, 丁巳(1797年) 八月 十八日에 세상을 마치니 享年이 七十四歲였다. 十一月에 後峴 午坐의 언덕에 安葬하였는데 道袍를 입고 葬禮에 모인 사람들이 수 백 이었다.
公은 어려서부터 聰明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資稟이 道에 가까웠다. 蘇湖里에 가서 李先生을 따라 배우고 부터는 專一한 마음으로 복종하고 섬겨 덕에 나아가고 학문을 닦는 단계를 한결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준수하였으며 講究하고 體驗하기에 잠시도 쉬지 않았으니, 대개 그 立志가 遠大하고 工夫가 嚴密하여 널리 공부하되 범범하기에 힘쓰지 않고 簡約하되 卑陋한 데 빠질까 두려워하였다. 실오라기나 털끝만한 것까지 분석함이 절실한 이치가 아님이 없었고 돌이켜 살펴보고 스스로 경계함이 모두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敬>을 주장하여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였던 까닭으로 李先生이 자주 그 독실함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셨다. 그 학문이 더욱 밝고 덕이 더욱 높기에 이르러서는 얼굴에 환한 氣像이 나타나고 등 뒤로 후한 德容이 넘치며, 말은 엄정하고 뜻은 확고하였으며, 용모를 움직이는 사이에는 법도가 엄하고 사물을 맞이하는 즈음에는 德性이 가득하니 이를 보는 사람들이<道가 있는 君子>라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孝友의 행실이 天性에서 나왔는데 예닐곱 살 때 사람들이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惡氣를 끌어 온다”라고 하니 公이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어버이께 해가 될까 하여 매양 失色하고 두려워하였다. 자라기에 미쳐서는 어버이의 뜻과 몸을 봉양함이 아울러 지극하여 창에 종이를 바르고 방에 불을 때는 일을 늙을 때까지 몸소 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나이가 예순이 넘었으나 喪禮대로 따름이 변함이 없어서 이미 노쇠하였다고 하여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러 아우들을 사랑함이 매우 독실하여 함께 데리고 大山先生의 門下에 가서 같이 배우고, 평상시에 지낼 때는 자리를 같이 하여 한 곳에 거처하며 형제간에 友愛하여 서로 좋아하였다. 일찍이 형제가 동시에 전염병에 걸렸는데, 公이 먼저 일어나 구원하기에 추위를 무릅쓰고 죽을 끓이기를 수십 일 밤을 하여 여러 아우들을 소생하게 하였으나 公이 도리어 점차로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가 오래되어서야 회복하였다. 家産은 일체 여러 아우들에게 맡기고 그 쓰임새를 묻지 않았으며, 一族이나 親舊에게 救恤하고 施惠히기에 오직 빨리 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山林에서 道를 지키고 名利에 뜻을 끊어 항상 科擧의 學問이 사람의 心志를 무너뜨림을 탄식하였다. 두 아우가 함께 나란히 鄕試에 합격하기에 이르러 榜目이 갑자기 도착하자 公은 마침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마치 듣지 못한듯하다가 봉투를 다 붙이고 나서야 비로소 이것을 취하여 보았다. 자신을 다스림이 가지런하고 엄숙하여 비록 질병이 심하더라도 의복과 침구를 반드시 바르게 정돈하여 열려서 속이 보이게 하는 때가 없었다. 季氏가 臨終에 매우 整齊하여 정신이 혼란하거나 마음이 서글픈 氣色이 없었는데, 公이 울면서 臨終을 살펴보고 나와서는 옷깃을 여미고 다시 들어가 말하기를 “자네의 이 모습은 古人에게서도 드문 바이거늘, 나는 곧 말이 막혀서 나오지 않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가볍고 급하게 하니 자네가 반드시 마음에 불만스러울 것이다. 이에 敬虔하고 謹嚴한 모습으로 다시 자네를 보자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그 급하고 구차한 때라도 반드시 <敬>으로 하였음을 여기에서 더욱 잘 알 수 있다.
李先生이 公을 공경으로 禮待함이 매우 지극하였는데 그 손자 秉運을 보내서 제자의 예를 드리고 배우도록 하기에 이르렀고, 병환이 위독하실 때 정신이 혼미하여 능히 일어나 앉아서 손님을 볼 수 없었으나 公이 들어오면 반드시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았고, 學者들을 불러서 말씀하실 때도 반드시 公을 기다려서 하였으니, 公같은 이는 어찌 李先生의 眞訣을 얻은 이가 아니겠는가?
遠近의 學者들이 또한 많이 따라 배워서 經傳을 들고 어려운 점을 묻는 이가 서로 이었는데, 公은 가르치기에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纂述한 책으로는 <聖學正路>, <聖學入門>, <孔門一統>, <釋學正贓>, <草廬問答>, <政本>, <禮書>및 얼마간의 遺稿가 있다.
配位는 韓山李氏이니 士人 時和의 따님인데 단정하고 조심스러우며 맑고 고요하여 몸을 마치도록 처음 시집온 날처럼 하였다. 一男一女을 두었으니 아들 慶進은 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아우 宗發의 손자 養觀을 慶進의 양자로 들였고, 딸은 柳同春에게 출가하였다.
公의 아우 掌令 宗發氏가 조카 原進에게 시켜서 公의 遺事를 받들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고 그 墓碑銘을 구하였다. 스스로 생각함에 보잘 것 없는 내가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으랴만 돌아보건대 평일에 公을 공경하여 오래전부터 우러렀는데, 중간에 일찍이 그 댁에서 公을 두 차례 뵙고서 德을 살피고 심취했던 까닭으로 드디어 사양하지 않고 삼가 서술하기를 이상과 같이 하였다. 銘文은 다음과 같다.
孔子 門下의 삼천 제자에서도/孔門三千
學問을 좋아함이 많지 않았는데,/好學無幾
옛적에도 오히려 그랬거늘/在古猶然
하물며 지금 어찌 쉬우랴?/矧今豈易
倬然하도다 川沙翁이여,/卓哉川翁
爲己의 學問에 독실했네./篤實爲己
大山先生에게 眞訣을 받아/受訣湖上
평생 가슴에 새겨 잊지 않았네./服膺沒齒
顔子의 四非에 능하고/四非必克
曾子의 三省을 일삼아/三省是事
부지런히 힘쓰고 힘써서/俛焉孜孜
나아감은 있어도 그침은 없었네./有進無止
德行이 이루어져 높았으니/德成行尊
君子의 文彩가 있었도다./君子有斐
산악처럼 亭亭하고/如嶽之停
구슬처럼 粹美했네./如玉之粹
林泉에 高尙하게 隱居하여/高蹈林泉
世間의 벼슬을 덧없이 보았네./軒冕雲視
옷깃을 여미고 배우러 오는 이에겐/有來摳衣
그윽한 이치를 열어 보였네./玄鍵開示
이 道가 망하지 않았으니/斯道不亡
큰 이름이 베풀어졌네./大名其施
내가 墓碑에 銘을 새기니/我銘于墓
밝게 걸려서 떨어짐이 없으리./昭揭無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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