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현감 김춘 묘갈명-고봉 기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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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5-03-06 12:41 조회1,570회 댓글0건본문
茂朱縣監金春墓碣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公諱春。字景仁。其先安東人新羅敬順王苗裔也。有諱方慶。仕高麗。任大將。策功封開國公。後四世而有諱九容。爲集賢殿提學。號惕若齋。以文名於世。高祖王父諱仲舒。戶曹參議。曾祖王父諱自琓。臨陂縣令。自開國公以下。蟬聯甚茂王文諱允岡。授司猛。考諱應商。贈司憲府持平。皆不仕。妣宋氏。贈吏曹判書礪元君。行韓山郡守諱演孫之女也。公以弘治癸亥十一月丙子生。五歲母歿。哀慕不懈。九歲而丁父憂。拜跽奠獻。如成人。蓋其天性然也。及長。常以未服母喪。爲無窮之慟。嘉靖癸巳正月。値母諱日。設位哭奠。遂廬墓側朝夕躬執爨。以供祀事。雖隆寒盛暑。益虔不少弛。再期之內。哭泣無時。坐立有常處。未嘗窺山外。妻病瀕。危亦不顧。自以象子不得恒奉祠堂。造素軸。題考妣之位。奉以自隨。出入必告。朔望及俗節。必奠。得新物則薦。其誠殆終無間焉。事聞。命旌閭。辛丑。薦授昭格署參奉。換文昭永崇殿及顯陵。丙午。轉內資寺奉事。戊申。遷敦寧府直長。己酉。陞司甕院主簿。移拜通禮院引儀兼漢城府參軍。庚戌。出宰茂朱縣監。辛亥十二月二十九日。以疾卒于官。享年四十九。明年四月。窆于金溝縣南夏雲山先塋之側。公資稟質實。內外如一。嘗受學於其舅醉隱宋公。篤志力行。處兄弟友。與朋友信。凡事上接下。無不敬謹。而其孝行尤卓然。人莫能及也。娶宗室長興令種孫之女。溫柔貞淑。事母克孝。如公之爲其親者。久而無子。晩生一男。人謂孝誠所感。公歿後。哀疚成疾。癸丑二月棄世。祔葬于公塋。男名顧言。能服先訓。謹飭自將。娶長興府使柳忠貞女。生三男二女。餘皆幼。銘曰。
人之慕親。天性則然。稟拘物隳。嘅多不全。
如公所爲。寔全其天。銘以貞之。式昭後賢。
무주 현감(茂朱縣監) 김춘(金春)의 묘갈명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공의 휘는 춘(春)이요, 자는 경인(景仁)이니, 그 선대는 안동인(安東人)으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휘 방경(方慶)은 고려 때 벼슬하여 대장에 임명되고 공신에 책록되어 상락군개국공에 봉해졌다. 그 후 4대 뒤에 휘 구용(九容)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집현전 제학으로 호는 척약재(惕若齋)이며 문학으로 세상에 유명하였다. 고조의 휘는 중서(仲舒)인데 호조 참의를 지냈고, 증조의 휘는 자완(自琓)인데 임피 현령(臨陂縣令)을 지냈다. 개국공(開國公) 이하로는 대대로 높은 벼슬이 계속되었다. 고조의 휘는 윤강(允岡)인데 사맹(司猛)에 제수되었으며, 선고의 휘는 응상(應商)인데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는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선비는 송씨(宋氏)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여원군(礪元君)에 봉해졌으며 행 한산 군수(行韓山郡守)인 송연손(宋演孫)의 따님이다.
공은 홍치(弘治) 계해년(1503, 연산군9) 11월 병자일에 태어났는데, 5세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9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절하고 무릎 꿇으며 제수를 올리기를 성인(成人)과 같이 하였으니 이것은 타고난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장성하자 항상 어머니 상복을 입지 못함을 무궁한 애통으로 여겼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28) 1월에 모친의 기일(忌日)을 만나자, 신위(神位)를 설치한 다음 통곡하고 제수를 올리고는 마침내 어머니의 묘 옆에 여묘(廬墓)를 살았는데, 아침저녁으로 몸소 불을 때고 음식을 장만해서 제사를 받들었으며 아무리 심한 추위와 무더운 여름철이라도 더욱 경건히 하고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기(再期) 이내에는 곡하고 울기를 무시로 하였으며, 앉고 서는 자리가 일정한 곳이 있었다. 일찍이 묘소 밖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처의 병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공은 스스로 중자(衆子)라서 항상 사당을 받들 수 없다 하여 흰 두루마리에다가 고비(考妣)의 신위를 써 가지고 받들어 모시고 다녔으며, 나가고 들어올 때에는 반드시 여기에 아뢰고 삭망 및 시속의 명절에는 반드시 음식을 올렸으며, 새 식물(食物)을 올리곤 하여 정성이 시종 변함이 없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정려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신축년(1541, 중종36)에 천거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제수되었다가 문소전(文昭殿)ㆍ영숭전(永崇殿) 및 현릉(顯陵) 참봉으로 옮겼다. 병오년(1546, 명종1)에 내자시 봉사(內資寺奉事)로 전직되었다가 무신년(1548)에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으로 천직되었으며, 기유년(1549)에 사옹원 주부(司甕院主簿)로 승진되고 통례원인의 겸 한성부참군(通禮院引儀兼漢城府參軍)으로 이직(移職)되었다. 경술년(1550)에 무주 현감으로 나갔는데, 다음 해인 신해년(1551) 12월 29일에 병으로 관청에서 별세하니 향년 49세였다. 다음 해 4월 금구현(金溝縣) 남쪽 하운산(夏雲山) 선영의 옆에 안장하였다.
공은 자품이 질박하고 성실하여 안과 밖이 똑같았으며, 일찍이 외삼촌인 취은(醉隱) 송공(宋公 송세림(宋世琳))에게 수학하였는데, 뜻이 독실하고 행동을 힘썼으며 형제간에 우애하였고 붕우 간에 신의를 지켰다. 그리하여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접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효행이 더욱 드높아 남들이 따를 수 없었다.
종실인 장흥령(長興令) 이종손(李種孫)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온순하고 정숙하여 시어머님을 효성으로 받들어서 마치 공이 어버이를 받들 듯이 하였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다가 늦게야 1남을 낳으니, 사람들은 하늘이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 하였다. 공이 별세한 뒤에 부인은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계축년(1553, 명종8) 2월에 세상을 버리니, 공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의 이름은 고언(顧言)인데 가정 교훈을 잘 받들어 몸가짐을 삼갔다. 장흥 부사 유충정(柳忠貞)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으니, 모두 다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어버이를 사모함은 / 人之慕親
본성에서 나온 것이네 / 天性則然
그러나 기품(氣稟)에 구애되고 물욕에 빠져 / 稟拘物隳
천성을 온전히 보전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은데 / 嘅多不全
공의 행실은 / 如公所爲
실로 그 천성을 보전하였네 / 寔全其天
비석에 명문을 새겨서 / 銘以貞之
후현들에게 밝히노라 / 式昭後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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