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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작·봉군·시호를 받은 안동김씨 선조님(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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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15-10-10 15:24 조회2,882회 댓글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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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작·봉군·군호·시호를 받은 안동김씨 선조님(수정본) 봉작(封爵)이란 왕자·외척·공신에게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작위를 봉해주던 제도로서 봉작 외에 ‘○○君’으로 봉해주는 봉군(封君)이 있는데 넓은 의미에서 봉작에는 공·후·백·자·남 외에 군(君)도 포함될 수 있다. 봉작제는 고려 문종 때, 봉군제는 고려 충선왕 때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고려사》 백관지(百官志)에 의하면 국공(國公)·군공(郡公)·현후(縣侯)·현백(縣伯)·개국자(開國子)·현남(縣男)의 등급과 그에 따른 식읍과 관품을 정하고 있다. 봉군제는 대국(大國)을 의식한 상피제(相避制)에서 나왔는데 원(元)의 간섭 아래 있었던 충선왕이 봉작제를 봉군제로 개칭하였다가 공민왕 5년(1356) 7월에 반원정책을 쓰면서 봉작제로 잠시 돌아갔다가 1362년에 원의 압력으로 관제를 개혁할 때 다시 봉군제로 돌아간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는 처음 봉군제를 쓰다가 태조 7년(1398) 정도전이 요동정벌 와중에 일시적으로 봉작제로 돌아갔으며, 태종 1년(1401) 1월에 중국의 명호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다시 봉군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될 때 다시 봉작제가 부활하게 되었다. 군호(君號)는 왕자와 공신, 국구(왕의 장인)에 대하여 성명 대신에 그 사람이 받은 군의 작위로 대신하여 부르는 호칭이다. 시호(諡號)란 왕, 왕비, 왕의 종친, 종2품 이상 문무관, 공신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국왕으로부터 받는 이름을 말하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이 완화, 확대되었다. 우리나라 시호의 효시는 신라 법흥왕 원년(514)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의 증시(贈諡)를 했다는 기록이 그 효시가 된다. 국왕은 시호도감(諡號都監)에서, 일반인은 봉상시(奉常寺)에서 주관해 증시 하였다. 그 절차는 ① 죽은 이의 자손이나 친인척 등이 행장(行狀)을 작성해 예조에 제출한다. ② 예조는 행장을 검토하여 봉상시로 보낸다. ③ 봉상시는 합당한 시호 세 가지[3망(三望)]를 정해 홍문관으로 보낸다.[시장(諡狀)] ④ 홍문관은 시호 삼망(三望)을 의정한 뒤 의정부 사인(舍人)·검상(檢詳) 중 1인의 서경을 받아 시장과 함께 이조로 넘긴다. ⑤ 이조는 시호망단자(諡號望單子)를 작성해 국왕에게 올려 낙점을 받는다. ⑥ 국왕의 낙점 후에 대간의 서경을 거쳐 확정된 시호는 국왕의 교지로 증시 된다. 우리나라에서 시법에 쓸 수 있는 글자는 모두 301자이나 실제로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정(貞)·공(恭)·양(襄)·정(靖)·양(良)·효(孝)·충(忠)·장(莊)·안(安)·경(景)·장(章)·익(翼)·무(武)·경(敬)·화(和)·순(純)·영(英) 등 120자 정도였다. 01. 상락군(上洛君) 김이청[金利請, ? ~ ? ]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증조는 대안군 김은열(金殷說), 조부는 안동김씨 시조인 공부시랑평장사 김숙승(金叔承), 아버지는 상서우복야 김일긍(金日兢), 관직은 안동태수(安東太守), 상락군(上洛君)에 봉군되었다. 02. 문간공(文簡公) 김효공[金孝恭, ? ~ 고종 43년(1256)] 또 다른 이름은 창(敞), 증조는 안동태수 상락군 김이청(金利請), 조부는 예부시랑 김의화(金義和), 아버지는 한림직사관 겸 장야서령 김민성(金敏成),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의 백부로, 관직은 판이부사(判吏部事),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03. 상락백(上洛伯) 김효수[金孝綬, ? ~ ? ] 증조는 안동태수 상락군 김이청(金利請), 조부는 예부시랑 김의화(金義和), 아버지는 한림직사관 겸 장야서령 김민성(金敏成),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의 숙부로, 관직은 밀직부사(密直副使), 상락백(上洛伯)에 봉작되었다. 04. 상락후(上洛侯) 김효조[金孝組, ? ~ ? ] 증조는 아동태수 상락군 김이청(金利請), 조부는 예부시랑 김의화(金義和), 아버지는 한림직사관 겸 장야서령 김민성(金敏成),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의 막내숙부로, 관직은 좌정승(左政丞), 상락후(上洛侯)에 봉작되었다. 05.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김방경[金方慶, 강종 1년(1212)∼충렬왕 26년(1300)]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15대손으로 증조는 예부시랑 김의화(金義和), 조부는 한림직사관 겸 장야서령 김민성(金敏成), 아버지는 한림학사 김효인(金孝印), 관직은 첨의령(僉議令), 작위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사후에 정난정국공신(定難靖國功臣)에 추증되었다. 원종 12년(1271) 진도 및 제주도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고, 충렬왕 즉위년(1274)과 충렬왕 7년(1281) 2차에 걸쳐 일본 정벌을 단행하였다. 또한 위도(葦島), 강화도 제언(堤堰), 제천 의림지(義林池), 밀양 수산제(守山堤), 정읍 눌제(訥堤) 등을 개축 및 수축하는 등 수리사업의 대가이기도 하시다. 묘소는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산19-1에 있고, 경기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7 사적 제223호 숭의전(崇義殿)에 제향되어 있으며, 경북 예천군 관현리 185-1 물계서원(勿溪書院)에도 제향되었으나 지금은 훼철되어 복원되지 않고 있다. 06. 상락공(上洛公) 김흔[金忻, 고종 38년(1251)∼충선왕 1년(1309)] 증조는 한림직사관 겸 장야서령 김민성(金敏成), 조부는 한림학사 김효인(金孝印),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의 둘째아들, 작위는 아버지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에 습봉되고, 관직은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이르렀다. 아버지를 따라 삼별초를 토벌하였고, 충렬왕 16년(1290) 원나라 반란군의 잔당인 합단(哈丹)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왔을 때 이를 충청남도 연기(燕岐) 정좌산(正左山)에서 격파하였다. 현재 세종자치시 연서면 용암리 208-5(연기대첩비공원)에 연기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07.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 고종 45년(1258)∼충숙왕 8년(1321)] 증조는 한림직사관 겸 장야서령 김민성(金敏成), 조부는 한림학사 김효인(金孝印),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의 세째아들, 관직은 판삼사사(判三司事), 상락군(上洛君)에 봉군되고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아버지를 따라 일본 정벌에 종군하였고, 묘소는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533-7에 있다. 08. 충숙공(忠肅공) 김승용[金承用, 원종 9년(1268)~충숙왕 16년(1329)] 증조는 한림학사 김효인(金孝印), 조부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 아버지는 전법판서 김선(金愃), 관직은 밀직사사(密直司事),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성절사로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다가 병이 들어 신안(新安)여관에서 별세하였다. 묘소는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 482에 있다. 09.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 ?∼공민왕 7년(1358)] 증조는 한림학사 김효인(金孝印), 조부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 아버지는 전법판서 김선(金愃), 관직은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충혜왕 복위 3년(1342)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어 영창군(永昌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단소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58(금수단)에 있다. 10. 문숙공(文肅公) 김영돈[金永旽, 충렬왕 11년(1285)∼충목왕 4년(1348)] 증조는 한림학사 김효인(金孝印), 조부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 아버지는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 충혜왕 복위 3년(1342) 조적(曺頔)의 난을 다스린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관직은 좌정승(左政丞),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합천 8경 중 제5경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9호인 함벽루(涵碧樓,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산1-1)는 충숙왕 8년(1321) 당시 합주지주사였던 김영돈이 창건한 것이다. 단소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773(도정사)에 있다. 11. 상락후(上洛侯) 김영후[金永煦, 충렬왕 18년(1292)∼공민왕 10년(1361)] 증조는 한림학사 김효인(金孝印), 조부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 아버지는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 충혜왕 복위 3년(1342) 심양왕 고(暠)를 따르지 않고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공신이 되어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작위는 상락후(上洛侯), 관직은 우정승(右政丞),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77호 상산관(商山館, 경북 상주시 만산동 699)은 충숙왕 15년(1328) 당시 상주목사였던 김영후가 중수한 건물이다. 단소는 아들 상락군 김천(金蕆), 손자 안렴사 김사렴(金士廉)과 함께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모정리 산8(재실:167)에 있다. 12. 상락군(上洛君) 김후[金厚, ? ~ ? ] 증조는 한림학사 김효인(金孝印), 조부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 아버지는 충숙공(忠肅公) 김승용(金承用), 상락군(上洛君)에 봉군되고, 관직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다. 묘는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 482 아버지 충숙공 김승용 묘하에 있다. 13.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 ? ~ ? ] 증조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 조부는 전법판서 김선(金愃), 아버지는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 문온공(文溫公) 김구용(金九容)의 아버지로, 상락군(上洛君)에 봉군되고, 관직은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단소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58(금수단)에 있다. 14. 상락백(上洛伯) 김진[金鎭, 충숙왕 2년(1315)~우왕 1년(1375)] 증조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 조부는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 아버지는 문숙공 김영돈(金永旽), 보조공신에 작위는 상락백(上洛伯), 관직은 판자혜원사를 역임하였다. 단소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773(도정사)에 있다. 15. 상락군(上洛君) 김천[金蕆, ? ~ ? ] 증조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 조부는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 아버지는 상락후(上洛候) 김영후(金永煦), 상락군(上洛君)에 봉군되고, 관직은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이르렀다. 단소는 아버지 상락후 김영후(金永煦), 아들 안렴사 김사렴(金士廉)과 함께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모정리 산8(재실:167)에 있다. 16. 문온공(文溫公) 김구용[金九容, 충숙왕 복위 7년(1338)∼우왕 10년(1384)] : 문온공파조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증조는 전법판서 김선(金愃), 조부는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 아버지는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 관직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시호는 문온(文溫)이다. 우왕 10년(1384) 행례사(行禮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세공마 5천필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윈난성 따리[대리(大理)]로 유배를 가던 중 쓰촨성 루저우 영녕현 강문참에서 순국하였다. 단소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58(금수단)에 있고, 전북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644 용장서원(龍章書院)과 경북 예천군 관현리 185-1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척약재 김구용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로는《말은 언제 오나/조돈만(趙敦萬)/돌담출판사/2013》, 《강궁(强弓)/신광철/맥결/2008》이 있다. 17. 안정공(安靖公) 김구덕[金九德, ?∼세종 10년(1428)] : 안정공파조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증조는 전법판서 김선(金愃), 조부는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 아버지는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 문온공(文溫公) 김구용(金九容)의 셋째동생, 따님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었고, 손녀가 세자빈[문종]에 간택되어 휘빈(徽嬪)이 되었다. 관직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가남면 송림리 산67에 있다. 18. 충강공(忠康公) 김사안[金士安, ?∼공양왕 3년(1391)]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증조는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 조부는 상락후(上洛候) 김영후(金永煦), 아버지는 상락군(上洛君) 김천(金蕆), 익원공(翼元公) 좌정승 김사형(士衡)의 친형, 배위는 당숙인 상락군 김묘(金昴)의 따님으로 문온공(文溫公) 김구용(金九容)의 매제, 관직은 전라도관찰사, 시호는 충강(忠康)이다. 19. 상락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 충혜왕 복위 2년(1341)∼태종 7년(1407)] : 익원공파조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의 현손, 증조는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 조부는 상락후 김영후(金永煦), 아버지는 상락군(上洛君) 김천(金蕆), 군호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작위는 상락백(上洛伯), 관직은 좌정승[左政丞, 당시 최고위직],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 정종의 즉위를 도운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태조 5년(1396)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제작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일본 교토의 류코쿠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7호로 지정되어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49(입구:214-2)에 있으며,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819 도암서원(道巖書院) 부조묘에 제향되고 있다. 20. 안동군(安東君) 김철[金哲, 공민왕 5년(1356)~세종 2년(1420)] : 정의공파조 호는 양파(陽坡),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첨의령 김방경(金方慶))의 현손, 증조는 천오위대장군 김론(金惀), 조부는 금오위대장군 김영요(金永曜), 아버지는 검교중추원사 김행(金杏), 공양왕(恭讓王) 폐위에 공을 세워 안동군(安東君)에 봉해졌으며, 개국원종공신으로, 관직은 공조(工曹)·예조(禮曹)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단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중평리 432에 있다. 21. 안동군(安東君) 김성경[金成景, 공민왕 22년(1373)~ ? ] 정의공파 호는 삼림(三林), 증조는 금오위대장군 김영요(金永曜), 조부는 검교중추원사 김행(金杏), 아버지는 정의대부 안동군 김철(金哲), 태종 8년(1408) 안동군(安東君)에 봉해지고, 관직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아버지 김철(金哲)의 공훈으로 안동군에 습봉된 것으로 보인다. 22.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종숙[金宗淑, 정종 2년(1400)∼성종 1년(1470)] 증조는 상락군(上洛君) 영삼사사 김천(金蕆), 조부는 익원공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 김승(金陞), 배위 경주이씨와 사이에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좌의정 문정공 김질(金礩), 차남은 형조판서 효소공 김작(金碏), 3남은 여주목사 영가부원군 김적(金磧), 4남은 공조판서 풍양군 김무(金碔)이다. 벼슬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아들과 손자의 공훈으로 증 영의정, 상락부원군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 포천시 내촌면 내리 산12-1(입구:112-1) 막내아들 풍양군 김무(金碔) 묘소 위에 있다. 23. 문정공(文靖公) 김질[金礩, 세종 4년(1422)∼성종 9년(1478)] : 익원공파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좌정승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으로, 조부는 동지밀직사사 김승(金陞),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金宗淑), 배위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따님 동래정씨이다. 군호는 상락군(上洛君), 세조 1년(1455) 세조가 보위를 잇는데 공을 세워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녹훈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은 좌의정(左議政),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묘소는 경기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산92(입구:772)에 있다. 24. 효소공(孝昭公) 김작[金碏, 세종 9년(1427)∼성종 19년(1488)] : 익원공파 자는 위경(衛卿), 호는 동곡(桐谷), 좌정승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으로, 조부는 동지밀직사사 김승(金陞),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김宗淑), 좌의정 문정공(文靖公) 김질(金礩)의 둘째 아우이다. 관직은 형조판서(刑曹判書),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묘소는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 산105-1(입구:651)에 있다. 25.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김적[金磧, ? ∼ ? ] : 익원공파 자는 자고(子高), 좌정승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으로, 조부는 동지밀직사사 김승(金陞),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김宗淑), 좌의정 문정공(文靖公) 김질(金礩)의 세째 아우이다. 관직은 여주목사, 사후에 아들 영의정 문경공(文敬公) 김수동(金壽童)의 공훈으로 보조공신(補祚功臣)에 녹훈되고 영의정과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 산111(입구:599-3)에 있다. 26. 문도공(文悼公) 김수녕[金壽寧, 세종 19년(1437)∼성종 4년(1473)] : 전서공파 자는 경태(景泰), 호는 노촌(老村), 증조는 검교근시 김휴(金休), 조부는 이조참판 김익정(金益精),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김숙(金潚), 어머니는 대제학 문숙공 안숭선(安崇善)의 따님 순흥안씨,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은 호조참판(戶曹參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27. 풍양군(豊陽君) 김무[金碔, 세종 23년(1441)~ ? ] : 익원공파 자는 미보(美甫), 좌정승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으로, 조부는 동지밀직사사 김승(金陞), 동지중추부사 김종숙(金宗淑), 좌의정 문정공(文靖公) 김질(金礩)의 네째 아우이다. 중종반정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관직은 공조판서(工曹判書), 풍양군(豊陽君)에 봉해졌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묘소는 경기 포천시 내촌면 내리 산12-1(입구:112-1) 아버지 동추공 김종숙(金宗淑) 묘하에 있다. 28. 길안군(吉安君) 김의동[金義童, ? ~ ? ] 익원공파 증조는 동지밀직사사 김승(金陞), 조부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金宗淑), 아버지는 좌의정 문정공(文靖公) 김질(金礩), 길안군(吉安君)에 봉해지고, 여주목사를 역임하였다. 29. 문경공(文敬공) 김수동[金壽童, 세조 3년(1457)∼중종 7년(1512)] : 익원공파 자는 미수(眉叟), 호는 만보당(晩保堂), 좌정승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의 현손, 증조는 동지밀직사사 김승(金陞), 조부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金宗淑),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김적(金磧), 중종반정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은 영의정(領議政),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묘소는 대구 동구 송정동 133(장등산)에, 재실은 대구 동구 신룡동 193에 있다. 30. 영안군(永安君) 김수경[金壽卿, 세조 11년(1465)∼중종 20년(1525)] : 익원공파 자는 난수(嬾叟), 호는 양한재(養閑齋), 증조는 동지밀직사사 김승(金陞), 조부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金宗淑), 아버지는 여주목사 김적(金磧), 영의정 문경공(文敬公) 김수동(金壽童)의 동생이다. 관직은 병조참의(兵曹參議), 중종반정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경기 포천시 내촌면 내리 산12-1(입구:112-1) 할아버지 동추공 김종숙(金宗淑) 묘소 좌측 능선 가까이에 있다. 31. 화산군(花山君) 김해[金瀣, 성종 21년(1490)∼중종 29년(1534)] : 익원공파 증조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金宗淑), 조부는 여주목사 김적(金磧), 아버지는 영안군 김수경(金壽卿)이다. 증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화산군(花山君)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 포천시 내촌면 내리 산12-1(입구:112-1) 아버지 영안군 김수경 묘소 아래에 있다. 32. 안원군(安原君) 김공량[金公亮, 성종 3년(1472)∼중종 39년(1544)] : 안렴사공파 자는 필지(弼之), 호는 양곡(楊곡), 증조는 승문원판교 김환(金丸), 조부는 사헌부감찰 김종손(金宗孫), 아버지는 군수 김성(金城), 화산군 문단공(文端公) 김주(金澍)의 아버지다. 사후에 아들 김주(金澍)의 공훈으로 보조공신(補祚功臣)이 되어 증 이조판서, 안원군(安原君)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귀백리 143-3(입구:181-1)에 있다. 33. 화산군(花山君) 김주[金澍, 중종 7년(1512)∼명종 18년(1563)] : 안렴사공파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 증조는 감찰 김종손(金宗孫), 조부는 군수 김성(金城), 아버지는 안원군(安原君) 김공량(김公亮), 시호는 문단(文端), 1563년 예조참판, 양관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태조[이성계(李成桂)=이인임(李仁任)의 이들]의 호적을 바로 잡는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베이징 의 조선관인 옥하관(玉河館, 현 서우두[수도(首都)]호텔 자리가 아니라 중국 최고인민법원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그 공훈으로 선조 23년(1590)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증 예조판서,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귀백리 산5(입구:170-3)에 있다. 34. 상락군(上洛君) 김충갑[金忠甲, 중종 10년(1515)∼선조 8년(1575)] : 제학공파 자는 서초(恕初), 호는 구암(龜岩), 증조는 장예원사의 김수형(金壽亨), 조부는 김언묵(金彦黙), 아버지는 진사 김석(金錫), 관직은 안악군수, 사후에 아들 김시민(金時敏)의 공훈으로 보조공신(輔祚功臣), 증 좌찬성, 상락군(上洛君)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산26 백현능원에 있다. 35.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 중종 20년(1525)∼선조 25년(1592)] : 제학공파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증조는 장예원사의 김수형(金壽亨), 조부는 김언묵(金彦黙), 아버지는 진사 김석(金錫), 관직은 대사간, 1592년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서 영원산성에서 부인 전주이씨,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선조는 공의 충절을 기려 `일우고성 만고삼강(一隅孤城 萬古三綱)'이라고 쓴 어필(御筆) 현판을 하사하였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고,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402-3 충렬사에 제향되고 있으며,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 357 원주역 앞에 의재공의 충렬비(忠烈碑)와 충렬탑(忠烈塔)이 있다. 36. 충민공(忠愍公) 김흠[金欽), 중종 32년(1537)∼선조 25년(1592)] : 익원공파 자는 거경(居敬), 증조는 청도현감 김선손(金善孫), 조부는 선전관 김결(金潔), 아버지는 충의위전도부위 김승석(金承碩), 관직은 청주목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자감정으로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申砬)장군과 함께 왜적과 대항하다 순절하였다. 선조 38년(1605)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단소가 충남 논산시 상월면 산성리 339에 있다. 37. 효헌공(孝獻公) 김찬[金瓚, 중종 38년(1543)∼선조 32년(1599)] : 익원공파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증조는 부평부사 김성동(金誠童), 조부는 부호군 김려(金濾), 아버지는 형조참의 김언침(金彦沉), 관직은 이조판서,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묘소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23호로 지정되어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42-1에 있다. 38. 소의공(昭懿공) 김수[金睟, 명종 2년(1547)∼광해군 7년(1615)] 서운관정공파 호는 몽촌(夢村), 증조는 대사헌 김희수(金希壽), 조부는 첨지중추부사 김노(金魯), 아버지는 전한 김홍도(金弘度), 관직은 호조판서를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묘소는 충북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 산29-3에 있다. 39.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명종 9년(1554)∼선조 25년(1592)] : 제학공파 자는 면오(勉吾), 증조는 김언묵(金彦默), 조부는 김석(金錫), 아버지는 안악군수 김충갑(金忠甲),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로서 3,800여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적군을 7일간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물리쳤으나 순성 중 시체사이에 숨어있던 왜적의 유탄을 이마에 맞고 며칠 후 순국하였다.[진주대첩]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고, 김시민 선무공신교서는 보물 제1476호로 지정되어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5에 있고, 묘하에 있는 충북도기념물 제12호인 충민사(忠愍祠)와 경남 진주시 남성동 213-1에 있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고 있다. 김시민 장군 동상은 진주성에 이어 2014년 고향인 충남 천안시 동남구 삼용동 508에도 건립되었다. 40. 충장공(忠壯公) 김제정[金濟鼎, 선조 11년(1578)∼인조 5년(1627)] : 전서공파 자는 첨중(僉中), 증조는 좌부장 김구년(金龜年), 조부는 목사 김사철(金師哲), 아버지는 첨추 김인(金鏐),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인산방어사로서 의주부윤 이완(李莞, 이순신장군 조카)과 함께 청군에 맞서 싸웠으나 전사하였다. 영조 50년(1774)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묘소는 세종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496(학당부락)에 있다. 41. 충숙공(忠肅公) 김시약[金時若, 명종 19년(1564)∼인조 5년(1627)] : 제학공파 자는 손오(巽吾), 호는 금헌(琴軒), 증조는 김언묵(金彦默), 조부는 진사 김석(金錫), 아버지는 안악군수 김충갑(金忠甲), 형이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과 관군으로 군공을 세우고,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창성부사로서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성이 함락되자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증 병조참판,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초혼묘가 충북 괴산군 청천면 덕평리 산38-2에 있고, ‘충효삼문(忠孝三門)’ 정려는 덕평리 산38-13에 있다. 42. 안흥군(安興君) 김치[金緻, 선조 10년(1577)~인조 3년(1625)] 제학공파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 증조는 진사 김석(金錫), 조부는 안악군수 김충갑(金忠甲), 생부는 부사 김시회(金時晦), 양부는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관직은 경상도관찰사, 아버지 김시민의 공훈으로 안흥군(安興君)에 봉해졌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남봉공은 조선조 최고의 역술가로 그에 관한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역술서인 『심곡비결([深谷秘訣)』을 지었다. 묘소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리 산8-1(입구:381-2)에 있다. 43. 충무공(忠武公) 김응하[金應河, 선조 13년(1580)∼광해군 11년(1619)] : 부사공파 증조는 예조정랑 김인상(金麟祥), 조부는 병조정랑 김인(金軔), 아버지는 김지사(金地四), 어영대장 김응해(金應海)의 형이다. 선천부사 재임 시인 광해군 11년(1619)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을 따라 좌영장으로 후금정벌에 나섰다가 심하의 사르후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순국하였다. 명나라 신종(神宗)은 요동백(遼東伯)에 봉작하고, 조정에서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중하였으며, 충무(忠武)의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민통선 내)에 있고,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1-1에 있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5호인 포충사(褒忠祠)와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 153-1에 있는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28호인 대통묘(大統廟)에서 제향되고 있다. 44. 충익공(忠翼공) 김시양[金時讓, 선조 14년(1581)∼인조 21년(1643)] : 제학공파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증조는 김언묵(金彦默), 조부는 진사 김석(金錫), 아버지는 비안현감 김인갑(金仁甲), 1636년 청백리에 뽑히고, 관직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묘소와 신도비는 충북 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어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산24에 있다. 45. 화산군(花山君) 김경운[金慶雲, ? ~ 인조 2년(1624)] : 문온공파 증조는 김수문(金秀文), 조부는 김침(金忱),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응함(金應緘),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 당시 선천부사로 전부대장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서울 안현(길마재, 무악재)전투에서 힘껏 싸우다가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녹훈되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46. 민숙공(愍肅公) 김언[金琂, 선조 21년(1588)~인조 15년(1637)] : 안렴사공파 자는 여윤(汝潤), 증조는 김공연(金公衍), 조부는 김계현(金繼賢), 아버지는 진사 김낙서(金洛瑞),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성천부사로 관병과 의병을 모아서 청군과 싸우다가 칼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 공으로 좌찬성에 추증되고, 민숙(愍肅)의 시호를 받았다. 단소는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남이면 팔봉리 산30-5(입구:68)에 있다. 47.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 김자점[金自點, 선조 21년(1588)∼효종 2년(1651)] : 익원공파 호는 낙서(洛西). 증조는 판결사 김언(金漹), 조부는 강원도관찰사 김억령(金億齡), 아버지는 김탁(金琢), 어머니는 좌의정 유홍(兪泓)의 따님 기계유씨이다.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녹훈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도원수의 중책을 맡았다. 인조 22년(1644)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사건을 다루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인조와 귀인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자신의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을 혼인시켜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친청파 제거작업의 일환으로 광양에 유배되었다가 아들과 함께 복주되었다. 낙서공과 관련된 전국의 보(洑)‧소(沼)‧방죽을 살펴보면 (1)장호원 청미천의 자재미보(자점보) (2)황해도 봉산군에 어지둔(於之屯) (3)황해도 재령군 경우궁(景祐宮) 보(湺) (4)위치 미상 호남의 자점보(自點洑) (5)충주시 주덕읍 삼청리 자점방죽(김자점 집터) (6)잠실 '새내 물막이공사' (7)부평 원통이고개의 전설, 이렇듯 축조한 보와 저수지가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 등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바로 낙서공께서 수리사업의 대가였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48. 화성군(花城君) 김삼걸[金三傑, 선조 7년(1574)∼효종 9년(1658)] : 익원공파 자는 사호(士豪), 증조는 화산군(花山君) 김해(金瀣), 조부는 3도관찰사 김덕룡(金德龍), 아버지는 대호군 김굉(金굉)이다. 관직은 첨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증 호조참판에 화성군(花城君)에 봉군되었다. 49. 안풍군(安豊君) 김득신[金得臣, 선조 37년(1604)∼숙종 10년(1684)] : 제학공파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柏谷), 증조는 안악군수 김충갑(金忠甲), 조부는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 안흥군(安興君) 김치(金緻), 관직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할아버지 김시민의 공훈으로 안풍군(安豊君)에 봉해졌다. 백곡은 1만번 이상 읽은 책이 무려 36권 『사기(史記)』의 ‘백이전(伯夷傳)’은 11만 3천번을 읽었으며 그의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했을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묘소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60호로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리 산8-1(입구:381-2) 아버지 안흥군 묘하에 있고, 독서당으로 이용하던 취묵당(醉墨堂)은 충북도 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되어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산4에 있다. 그리고 증평군에서는 율리삼거리에서 백곡 묘소에 이르는 약 500m의 길을 김득신 문학길로 명명하였다. 50. 화은군(花恩君) 김천주[金天柱, 인조 1년(1623)∼현종 2년(1661)] : 제학공파 자는 여중(汝重), 증조는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조부는 안흥군(安興君) 김치(金緻), 아버지는 안풍군(安豊君) 김득신(金得臣), 증조부 김시민의 공훈으로 증 이조판서 화은군(花恩君)에 봉해졌다. 묘소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리 산8-1(입구:381-2)에 있고, 김천주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775-1에 사충문(四忠門)이 세워져 있다. 51. 안흥군(安興君) 김욱[金昱, 효종 9년(1658)∼숙종19년(1693)] : 익원공파 자는 자양(子陽), 증조는 3도관찰사 김덕룡(金德龍), 조부는 대호군 김굉(金굉), 아버지는 화성군 김삼걸(金三傑)이다. 관직은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안흥군(安興君)에 봉군되었다. 50. 동은군(東恩君) 김가교[金可敎, 인조 23년(1645)∼영조 8년(1732)] : 제학공파 자는 백유(伯孺), 증조는 안흥군(安興君) 김치(金緻), 조부는 안풍군(安豊君) 김득신(金得臣), 아버지는 화은군 김천주(金天柱), 관직은 별제(別提), 고조부 김시민의 공훈으로 동은군(東恩君)에 습봉되었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산26 백현능원에 있다. 51. 화성군(花城君) 김중정[金重鼎, 현종 10년(1669)∼숙종 30년(1704)] : 부사공파 자는 대수(大受), 증조는 충무공(忠武公)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 조부는 전라우수사 김익련(金益鍊), 아버지는 전라우수사 김세구(金世龜), 관직은 도총도사를 역임하였고, 숙종 6년(1680) 복선군(福善君)과 허견(許堅)의 역모[경신대출척]를 다스린 공으로 보사공신에 녹훈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화성군(花城君)에 봉해졌다. 52. 화천군(花川君) 김협[金浹, 숙종 20년(1694)∼영조 19년(1743)] : 부사공파 자는 윤보(潤甫), 충무공(忠武公)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의 현손으로, 증조는 전라우수사 김익련(金益鍊), 조부는 전라우수사 김세구(金世龜), 양부는 화성군 김중정(金重鼎), 관직은 훈련도정을 역임하였고,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53. 정숙공(貞肅公) 김광국[金光國, 숙종 35년(1709)∼정조 7년(1783)] : 군사공파 자는 대관(대(大)觀), 증조는 김추(金樞), 조부는 동지중추부사 김수기(金壽基), 아버지는 김담(金湛), 관직은 병조참판, 정조 3년(1779) 내의원의관에 임명되었고, 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정조 2년(1778) 안동김씨 족보 무술보(戊戌譜)를 편찬하고, 서문(序文)을 찬하였다. 묘소는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분지촌 갑좌에 있다.

댓글목록

김영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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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택, 묘, 구용  묘소  오가리  (금수정)  금수단으로 고치는 것이 좋을 듯 싶네요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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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김수[金睟] 묘소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 산29-3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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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예 대부님! 많이 알려진 것보단 공식 명칭인 금수단이 옳을 것 같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
발용 아우님 정보 고맙습니다. 부탁이 있는데 선조님들의 묘소 또는 비석 등 이미지 사진이 있으면 사이사이에 올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쁠 것 같은데 가능할까요?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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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네요. 지적 감사합니다.ㅣ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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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김철[金哲, ? ~ ? ] 정의공파조
경북 안동시 임동면 중평리 432번지
명성쉼터는 철거되었습니다.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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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태영조카님 자료 연결 감사합니다.
살펴보니 좌정승 김효조(金孝組), 밀직부사 김효수(金孝綏) 2분이 추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료 정리되는대로 추가하겠으며 그렇게 되면 총 49분이네요.
더 이상은?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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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충렬공 백부 문간공 김창을 추가하여 딱 50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