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여주군지 제출자료 04---김공량(金公亮, 1472∼1544)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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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29 18:15 조회1,786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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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음집>(정사룡)
김공량 묘갈명(墓碣銘)
※목차는 편의상 편집자 임의로 적은 것임
1. 선계
원래 김씨가 신라 경순왕(新羅 敬順王)부터 이어져 전해 왔으니 여러 김씨 중에서 안동김씨(安東金氏)가 가장 문벌(門閥)이 좋으니라.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한림주서를 거쳐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내신 諱환(丸)은 군의 증조부이시며 조부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의 증직을 받으신 諱종손(宗孫)이시고 부는 군수(郡守)를 지내시고 명나라 홍치황제등극진하사종사관(弘治皇帝登極進賀使從事官)으로 중국에 다녀 오시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을 받으신 諱는 성(城)이시니 이하(以下)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군수공께서 영의정(領議政)을 증직(贈職)받은 허손(許蓀)의 따님을 취(娶)하여 성화 임진년(成火 壬辰年)에 군을 낳으시니 군의 諱는 공량(公亮)이요 字는 필지(弼之)라.
2. 종실 주계군(宗室 朱溪君)에게 수업
군이 나신지 열흘도 못 되어 모부인이 돌아 가심으로 증조모 밑에서 자라시니 자랄수록 말수가 적으시며 장난과 희롱을 않으시고 스스로 글 읽기를 좋아하여 종실 주계군(宗室 朱溪君)에게 수업하시니라.
그때에 군의 외삼촌인 충청공 허종(忠貞公 許琮)의 덕망이 한 세상을 덮었는데 일찍이 군에게 벼슬길에 나가기를 권고하였으나 군께서는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하심으로 허충정공(許忠貞公)이 춘추전(春秋傳)을 읽어 보도록 시험한 결과 군께서 이에 응하시어 춘추전을 외우는데 물이 흘러 가는 것처럼 거침없이 외우심으로 크게 칭찬과 탄식을 받았으며
3. 세상과 인연을 끊으시고 두문불출하여
또한 군께서는 여러번 지방에서 천거(薦擧)를 받으시어 더욱 공부에 힘써서 장차 과거(科擧)에 나가고자 큰 포부를 가졌으나 마침 연산군(燕山君) 때에 정치가 어지러워서 조정대관(朝廷大官)을 함부로 죽임으로 군께서는 드디어 세상과 인연을 끊으시고 두문불출하여 원임고관(原任高官)들과 친교를 맺으시고 백의종군(白衣從軍) 하듯 처세하였으나 항상 편안한 모습으로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며
다만 글과 술로 스스로 즐기시니 자질배(子姪背)와 제자(弟子)들이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재주에 따라 가르치는데 종일토록 강의(講義)를 쉬지 않으시고 춥고 더움으로 인해 강의를 퍠지(廢止)하는 일이 없었다.
4. 성품
또한 군께서는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시어 내상(內喪)을 당하실 때에 모든 일을 분수와 예절(禮節)에 맞도록 처리하시고 계모(繼母)를 섬기실 적에는 항상 얼굴 빛을 환하게 하여 효도를 다 하시며 또한 두 아우를 가르칠 적에는 우애로운 마음으로 정성껏 지도하시고 매양 생신 날에는 세속 사람들과 같이 즐거워하지 않으시고 부모를 사모하는 슬픔에 잠기셨노라. 천성이 순진하심으로 겉모양을 닦지 않으시고 손님을 접대할 때에는 당초의 마음을 변치 아니 하시니라.
가정 갑진 오월 이십칠일 (嘉靖甲辰五月二十七日)에 숙환으로 집에서 별세(別世)하시니 춘추가 七十三세에 하세(下世)하시다.
5. 배위와 자녀
군의 배위(配位) 이씨는 광양현 팽수(光陽縣 彭穗)의 따님이시니 집을 다스리는데 있어 제수(祭需)를 항상 정갈하게 차리시고 손님을 접대할 적에는 술과 안주를 넉넉하게 마련하시어 군께서 곤란한 처지를 당하지 않도록 하심은 모두 내조(內助)에서 이루어짐이라.
또한 숙환에 의하여 별세(別世) 하시니 수는 七十을 사시니라. 군의 장지(葬地)를 먼저 여주 사동(麗州 蛇洞)에 정하였으므로 이에 합장하니라.
三남一녀를 두시니 장남은 완(浣)이요 차남은 척(滌)이니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三남은 주(澍)이니 기해년 문과(己亥年 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지금 훙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로 있는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서 한 세상을 울리고 女는 별제(別?) 이직(李직)에게 출가하니라.
완(浣)은 첨사 강석경(僉使 姜碩卿)의 딸에게 장가 들어 二남幾녀를 낳으니 남에는 충남(忠男) 효남(孝男)인데 모두 어리고 녀는 장중제(張仲悌)에 출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니라. 척(滌)은 박양근(朴養根)의 딸에게 장가 들어 一남을 낳으니 이름이 인남(仁男)이요, 주(澍)는 종실 진양수 영(宗室 鎭陽守 渶)의 딸에게 장가들어 二남一녀를 낳으니 이름이 순남(順男) 정남(正男)이요 모두 어리니라
6. 묘갈명
이에 명(銘)하여 가로되
높고 화려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좋은 공부와 훌륭한 학덕을 전해 받아
학문이 성취되고 행실이 도타와서
벼슬과 녹봉을 헌신짝과 같이 버리시고
스스로 몸을 낮추어 그 종적을 감추고 숨어 사시니
평소에 쌓은 덕에 의하여
신발이 문 앞에 가득하도다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취하는 바를 반대로 버리니
비록 편안하게 세상을 마쳤으나
마침내 배운 바 학문과 재주를 다 쓰지 못하고
숨은 덕이 빛났으니
높은 명망과 좋은 칭송을 받은 것이 부끄럽지 않도다.
지금은 운수가 막힌 것 같지만
후세에 운수가 대통하리라
<이암집>(송인)
김공망 묘갈명(墓碣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일찍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으나 스스로 힘써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워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년 연산군 1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우암집>(김주)
김주 묘표음기(墓表陰記)
---부친은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휘 공량(公亮)이다. 모친은 전주이씨 현감 팽수(彭穗)의 따님이시다. ---
김주 시장(諡狀)
---고(考) 휘 공량(公亮)은 일찍이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학문이 이루어진 뒤 과거에 합격하여 장차 큰일을 하리라 기대되었으나, 연산군 시절의 정치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주계군이 화를 만나자,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완전히 끊고, 백의(白衣)로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 자식인 공이 귀하게 되자, 보조공신(補祚功臣) 이조판서(吏曹判書) 안원군(安原君)에 추증되었다. 사적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자세하다. 비(?)는 증 정부인(贈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인데, 현감(縣監) 팽수(彭穗)의 따님이시다. ---
김주 신도비명(神道碑銘)
---고(考) 휘 공량(公亮)은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에게 수업하였고, 과거에 합격하여 장차 큰일을 하리라 기대되었으나, 주계군이 화를 만나자, 마침내 벼슬을 살지 않았다. 그 일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려 있다. 공이 귀하게 되자, 보조공신(補祚功臣) 이조판서(吏曹判書) 안원군(安原君)에 추증되었다. 비(?)는 증 정부인(贈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인데, 현감(縣監) 팽수(彭穗)의 따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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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1544, 중종 39)에 홍문관 교리(弘文?校理),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을 하다가, 부친과 모친의 상을 당하였다.
화산군 연보(年譜)
8세, 기묘(己卯), 중종 14년(1519)
부친 판서공(判書公 : 公亮)은 주계군(朱溪君) 성광(醒狂) 이심원(李深源) 공의 문인으로서, 장차 사문(師門)에 앙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를 보지 않았다. 내구(內舅)인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 상공(相公)께서 벼슬에 나아도록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등이 권력을 휘둘러 여러 현인들을 무고하여 죽였다. 매서(妹?)이신 문강공(文剛公) 박세희(朴世熹)도 역시 화를 입었다. 이에 마침내 세상사에 대한 뜻을 끊어버리고 문을 닫아걸고 궤안(?案)을 청소하고 학문을 하였다. 자제나 조카 및 학자 가운데 배움을 청하여 오는 자들이 있으면, 자질에 따라서 가르침을 베풀어서, 종일토록 강독하고 풀이하여, 추위나 더위라고 해서 그만두지를 않았다. 공의 학문과 행실은 대개 이러한 가정(家庭)의 전통에서 얻은 것이다.
33세, 갑진(甲辰), 중종 39년, 인종 즉위년(1544)
? 5월 27일, 판서공(判書公)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송별하며 부의(賻儀)를 내리셨다. 성 안에서 상복을 입었는데, 중추에 퇴계 이황 공이 압구정 뒷산에 올랐다가 공을 추억하는 시를 지어, “지난해 등잔불 켜고 책상머리에서 벗하였더니, 책을 읽으려다가 그대가 도리어 곁에 있는 듯 생각이 드는구려. 미륵의 모습과 하해 같은 도량, 성안의 가까운 거리에서도 모습을 보기 어렵다니(去年燈火伴書床, 欲讀思君却置傍. 彌勒形貌河海量, 城中咫尺阻音光)”라고 하였다. 이 시의 세 번째 구절은 공의 참 모습을 그려내었다.
? 9월 17일, 모친 정부인(貞夫人)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또 부의를 보내었다.
? 10월 20일에 고(考)와 비(?)를 여주(驪州) 백양동(白壤洞) 선영 안 정좌(丁坐) 벌에 합장하였다.
35세, 병자(丙子), 명종 원년(1546)
? 8월 15일, 부모의 묘도(墓道)에 비갈(碑碣)을 세웠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판서가 명을 짓고, 동종(同宗)의 동고(東皐) 김로(金魯) 교리가 글씨를 썼다.
? 12월에 상기를 마쳤다.
경인, 선조 23년(1590)
8월 1일(경오)에 광국공신과 정난공신에게 녹권(錄券)을 반사한 기록이 있다. 수충익모 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화산군(花山君)에 사후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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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부친에게 순충적덕 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경연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홍문관대제학 지춘추성균관사(兼知經筵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弘文館大提學 知春秋成均館事) 안원군(安原君)을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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