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여주군지 제출자료 05---김공석(金公奭, 1477∼1553) 참고자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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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29 08:56 조회1,073회 댓글1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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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집>(김주)
숙부 북도절도사공 신도비명 병서(叔父 北道節度使公 神道碑銘 幷序)
※목차는 편의상 편집자 임의로 적은 것임
조카 김주가 계축년 가을에 왕명을 받아 연경으로 갈 때 숙부께서 청홍도(淸洪道)의 수영(水營)에서 서거
아아, 어이 차마 우리 숙부의 명을 지어야 하랴. 계축년 가을에 내가 왕명을 받아 연경으로 갈 때 숙부께서 청홍도(淸洪道)의 수영(水營)에서 서거하셨으므로, 곡을 하며 영구를 어루만질 수 없었고 상복을 입고 술잔을 올리지도 못하여 슬픔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지니고 일행을 따라 갔다.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숙부께서 이미 영구히 무덤에 묻히신 뒤였다.
고애자(孤哀子)가 빗돌을 갈고 깨끗하게 한 뒤에 청하기를, “선군의 자취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의당 형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형이 꼭 명을 지어주시오.” 하였다. 아아, 나는 정말로 사양할 수가 없다만, 차마 나의 숙부를 위해 명을 적어야 하는가.
1. 선계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 김씨는 실로 신라가 망한 뒤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투항하여 고려에서 안동을 식읍으로 주었으므로, 자손이 그곳을 가향으로 삼았다. 그 뒤 대대로 빛을 내어 관면(冠冕)을 걸친 이들은 일일이 다 기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휘 환(丸)은 본조(즉 조선)에 벼슬살아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하였다. 이 분이 휘 종손(宗孫)을 낳았는데,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휘 성(城)을 낳았는데, 충무위 중부장(忠武衛中部將)을 지내고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전제 별좌(田制別坐) 임치(任治)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성화(成化) 정유년(성화 13년, 조선 성종 8년)에 공을 낳았다.
2. 무과에 급제하여 내금위(內禁衛)에 배속
공의 휘는 공석(公奭)이고 자는 주경(周卿)이다. 홍치(弘治) 정묘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내금위(內禁衛)에 배속되었다.
3. 조라포 만호(助羅浦萬戶)로 선발, 영남의 삼포(三浦)에서 왜난 수습
경오(중종 5년, 1510) 연간에 영남의 삼포(三浦)에서 왜노(倭奴)가 난을 일으켜 성읍의 사람들을 해치고 도륙하매, 조정에서 염려하여 공을 조라포 만호(助羅浦萬戶)로 선발하였다. 공이 그곳에 이르러보니 왜구는 이미 물러간 뒤였다. 군기(軍器)를 정돈하고 참호를 엄하게 수리하자, 사람마다 모두 생업에 안정하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4.
임기가 차서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고, 사복시주부(司僕寺 主簿),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종성부 판관(鍾城府判官)에 조발(調發)되고, 의영고 령(義盈庫令)으로 전임되었다.
5. 보성군(寶城郡) 수령으로 나가서, 선정
얼마 있다가 보성군(寶城郡) 수령으로 나가서, 요역을 경감하고 부세(賦稅)를 낮추며 해묵은 폐단을 없애려고 힘쓰기를 삼년 동안 하였다.
6. 부친상
그러다가 외간상(外艱喪 : 모친상)을 만났다. 백성들이 공을 사모하여, 심지어 길을 막고 수레를 부여잡으며 호곡하는 자도 있었다.
7.
삼년상이 끝난 뒤,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을 제수받고,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 경흥 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로 전직하였다. 얼마 있다가 경원 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로 개수되었고, 비의(緋依)를 하사받고 당상관에 올랐다.
8.
무자년(중종 23, 1528)에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를 제수받고, 신묘에 함경북도 우후(咸鏡北道虞侯)로 이직되었다. 얼마 안 있어 남도병사(南道兵使)로 진급되고, 체직되어 돌아와 호조, 형조, 공조의 참의를 지냈다.
9. 찰리사(察里使)로 천거해서 의항(蟻項)을 파서
호남의 조운(漕運)은 바닷길이 험악해서 계속 썩은 것이 실려 오므로, 대신이 의론하여 공을 찰리사(察里使)로 천거해서 의항(蟻項)을 파서 그 길을 통하게 하였다. 서너 달도 채 안 가서 완공하였다.
10. 의주(義州)의 목사가 되었다.
특별히 명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려지고 의주(義州)의 목사가 되었다. 의주는 상국(중국)과 국경이 이어져 있어서 사납고 교활한 무리가 몰래 중국 사람들과 결탁하여 서로 판매를 하면서 사단을 일으키고 있어서 모두 다스리기 어렵다고들 하였다. 하지만 공은 약속을 분명히 하니 간악하고 부정한 것이 저절로 제거되어 사사로이 감히 법을 어기려 하지 않았다. 마침 중국 사신이 왔는데, 접대하는 때에 여러 가지 주선하는 일들을 모두 예법에 맞게 하고 이바지하여 대는 비용을 턱으로 지시하여 당장에 마련하니, 중국인이 칭송하였다.
11.
경자년(중종 35, 1540)에 전라우수사에 배수되고, 신축에 북새(北塞)의 총병(摠兵)이 되었으며, 갑진년(중종 39, 1544)에 다시 호남 도총병마사가 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2.
정미년(명종 2, 1547)에 청홍도 병마사로 옮겼다가 다시 중추부(中樞府)로 들어와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훈련원 도정으로 옮겼다.
13. 여주(驪州) 사동(蛇洞)의 선영 곁에 장례
임자년(명종 7, 1552)에 다시 청홍도 수사에 배수되었으나, 불과 1년이 안되어서 질병으로 생을 마치시니 향년 77세였다. 다음 해 2월 25일에 터를 가려 여주(驪州) 사동(蛇洞)의 선영 곁에 장례지내졌다.
14. 성품
공은 천성이 인자하고 자상하며, 일을 처리할 때는 강직하고 사리에 밝았다. 온 힘을 다하여 나라를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어서, 조치할 바를 생각하면 밤낮으로 여러 날을 계속하였다. 고을 수령의 부절(符節)을 찼을 때는 백성들 사이에 사랑을 끼쳤다. 병마를 통솔할 때는 사람들이 즐겨 공을 위해 일하려고 하였다. 몸가짐을 맑고 근실히 하며, 마음을 보존해서 우아하고 고요하였으며, 산업을 도모하지 않고 화려하고 분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록 직위가 2품에 이르렀어도 쌀을 담는 항아리가 자주 비었다. 비록 궁검(弓劒)으로 발신하였지만 담박하기가 유학자 같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의 병을 간호하여 약을 달여 올릴 때는 옷에서 띠를 풀지 않았다. 제사는 지극히 정성되이 하여, 제수로 올리는 물건을 몸소 점검하고 진설하였다. 형제를 대할 때는 경건하면서도 화평하였고, 노복을 다스릴 때는 관대하면서도 장엄하였다. 친족과 친구들 가운데 궁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인정을 다하여 물품을 조달해서 구하였다. 수명은 가까스로 공의 어짊과 걸맞았지만, 지위는 덕에 부합하지 않았다. 아아, 슬프도다.
15. 배위와 자녀
전부인 임씨는 일찍 졸하셨다. 후취부인 이씨는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는데, 안악(安岳)의 명망 있는 집안인 이조좌랑 휘 희순(希舜)의 따님이요, 대사간 휘 평(枰)의 손녀이다. 공보다 15년 앞서 졸하였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장남은 탁(濯)으로,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이다. 차남은 황(滉)으로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이다. 딸은 종실 안남도정(安南都正) 수련(壽鍊)에게 출가했다.
탁(濯)은 박세도(朴世燾)의 딸을 아내로 맞아,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수남(壽男)이고, 딸 가운데 장녀는 유학 이천석(李天錫)에게 출가했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황(滉)은 홍사원(洪士元)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홍남(洪男)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안남도정은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보(?)는 금천부정(錦川副正)이고, 차남 신(伸)은 능성부정(綾城副正)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16. 신도비 명(銘)
명(銘)은 이러하다.
김 성(金姓)은 청구(靑丘 : 우리나라)에서 관적(貫籍)이 드러나
기틀을 계림에서 열어 박씨, 석씨를 이었지.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여 판도를 바치고
대대로 가문이 이어져 자주(紫朱) 복식의 고관이 많았네.
공이 다시 분발하여 깃과 날개를 떨쳐
멀리 가문의 명성을 이어 직분을 다하리라 기대되었네.
관위는 2품으로 뛰어 부모를 현달하게 하고
작위는 중천(구천)에까지 미쳐 우로(雨露)같은 성은이 흡족하였지.
동장(銅章 : 지방관의 상징)으로 고을을 다스려 어질다는 명성 있고
대독(大纛 : 장군 깃발)으로 장군 권한 나누어 간성(干城)이 되었네.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하고 절약하여 시루에 먼지 남길 정도로 청렴하였고
남을 대할 때는 온화하여 봄볕이 돌아오듯 하였네.
고희(일흔) 지나 일곱 해에 갑자기 돌아가시매
부음을 들은 이들 모두다 눈물을 떨어뜨렸다네.
사동(蛇洞)의 벌은 천장(遷葬)에 길한 곳이라
4대를 장사지냈으매 새로 매장하기 알맞으리.
옥수(玉樹)를 거두어 유궁(무덤)에 깊이 감추니
저 산 바위에 새겨서 무궁토록 비추리라.
화산군 연보
10세, 신사(辛巳), 중종 16년(1521)
8월, 할머니 정부인(貞夫人) 임씨(任氏)의 상을 당하였다. 이 때 숙부 병사공(兵使公 : 公奭)이 외직으로 나가 보성군(寶城郡)의 군수가 되었는데, 병사공이 정부인을 모시고 그리로 갔었다. 그런데 이 해에 이르러 관아의 집에서 임종을 하신 것이다. 9월에 널을 받들어 여주(驪州) 사동(蛇洞)의 선영(先塋)에 임시로 빈소를 마련하였다가, 다음 해 3월에 할아버지 참판공(參判公)의 묘 곁에 부장(?葬)을 하였다.
27세, 무술(戊戌), 중종 33년(1538)
---숙모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 : 숙부 公奭의 부인 安岳 李氏)의 상을 당하였다.
42세, 계축(癸丑), 명종 8년(1553)
---숙부 병사공(兵使公 : 公奭)의 상(喪)을 만났다.
44세, 을묘, 명종 10년(1555)
2월 27일, ---
숙부 병사공(兵使公 : 公奭)의 신도비문을 지었다.
<호음집>(정사룡)
김공량 묘갈명(墓碣銘)
---계모(繼母)를 섬기실 적에는 항상 얼굴 빛을 환하게 하여 효도를 다 하시며 또한 두 아우를 가르칠 적에는 우애로운 마음으로 정성껏 지도하시고 매양 생신 날에는 세속 사람들과 같이 즐거워하지 않으시고 부모를 사모하는 슬픔에 잠기셨노라.
<이암집>(송인), <국조인물고>
김공망 묘갈명(墓碣銘)
처음에 공이 살 집을 지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별도로 북당(北堂)을 지어 봉양(奉養)하는 곳으로 만들려 하였었는데, 공의 형 김공석(金公奭)이 보성 군수(寶城郡守)로 체직(遞職)되어 봉양하다가 떠났으므로, 공이 즉시 청원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어 그 가까움을 기뻐하며 정성을 거의 다하려다가,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지름길로 달려가 모시며 보살피다가 상사(喪事)를 당하였는데, 바로 정덕 신사년(辛巳年 1521년 중종 16년)이었다. 공이 집상(執喪)하면서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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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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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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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