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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여주군지 제출자료 06---김공망(金公望, 1482∼1528) 참고자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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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30 12:39 조회1,18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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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심원(李深源)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연(伯淵), 호는 성광(醒狂)·묵재(默齋)·태평진일(太平眞逸). 효령대군 보(補)의 증손으로, 평성군(枰城君) 위(#위16)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천채씨(仁川蔡氏)로 부사 신보(申保)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1478년(성종 9) 주계부정(朱溪副正)에 제수되어 성종의 신임을 받았으나, 임사홍(任士洪)의 무고로 장단·이천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472 김공량 생, 1482 김공망 생, 이심원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487년 종친과시강경사(宗親科試講經史)에서 장원급제하여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제수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뒤 조광조(趙光祖)·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한 유림들의 계(啓)에 의하여 1517년(중종 12)에 신원(伸寃)되었으며, 또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이 세워지고, 흥록대부주계군(興祿大夫朱溪君)으로 증직되었다.

충경사(忠景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성광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이심원의 아들 이유녕(李幼寧)

1495(을묘) 진사시, 연산군(燕山君)2년(1496년) 식년시(式年試) 을과2(乙科2)

이조/정랑&(吏曹/正郞&), 한림&(翰林&)


○ 이심원의 사위이자 문인 송세충(宋世忠)

송여해(宋汝諧)의 아들이며, 송기수(宋麒壽)의 아버지이다.

     ※김희수는 송여해 묘비를 서하였고, 송기수는 김첨의 처부임. 송기수의 딸은 김성립의 모친이고 허난설헌의 시모임


▣ 문화유적총람 CD

§ 대전 송여해 묘비(宋汝諧墓碑)

분류번호: 300-310-191-098

주소지: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시대분류: 조선 시대

관리자:

유적종류: 묘비(묘표)

유적내용:

송여해(문종 2년;1452-중종 5년;1510)는 송유의 증손,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한 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던 중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옥천으로 귀양갔다. 중종 반정 후 안동 부사로 근무중 순직했다. 후에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이다.

[前面] 有明朝鮮國 通訓大夫安東大都護府事兼安東鎭兵僉節制使 宋公之墓 淑人延城李氏之墓附左.

정광필이 짓고 김희수 씀.

크기: 높이 111cm, 폭 60cm, 두께 14cm

참고문헌: 《대전시사》


송세충(宋世忠)

1468(세조 14)∼1527(중종 2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서가(恕可). 안동대도호부사 여해(汝諧)의 아들이며, 이심원(李深源)의 문인이다.

1498년(연산군 4) 사마시를 거쳐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를 거쳐 성균관전적·형조좌랑·예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경상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뒤 호조정랑·병조정랑·경기도사·사재감첨정·장령·한성부서윤 등을 지냈다. 그 당시 공무처리에 철저하였던 까닭으로 함안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늙은 어머니가 있어 나아가지 않고 광흥창수(廣興倉守)에 머물렀다가 뒤에 가평군수를 지냈다.

이심원의 외손자 송기수(宋麒壽)는

송여해(宋汝諧)의 손자이고, 송세충(宋世忠)의 아들이다.

1507년 생, 1531(신묘) 생원시/진사시,  중종(中宗)29년(1534년) 식년시(式年試) 병과6(丙科6), 호당&(湖堂&),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 이심원의 사위 유부(柳溥)

유순정(柳順汀)의 조카이다. 1472(임진) 진사시, 연산군(燕山君)7년(1501년) 식년시(式年試) 병과11(丙科11),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 이심원에게 수학 윤탁(尹倬)

1472(성종 3)∼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중(明仲), 호는 평와(平窩). 현감 사은(師殷)의 아들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자 이심원(李深源)에게 수학하였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거쳐 전적이 되었으나, 1504년 갑자사화 때 삭녕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사성·대사성·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역임하였으나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다시 파직되었다.

1525년 대사성을 거쳐 152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뒤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그뒤 1531년 성균관동지사(成均館同知事)를 거쳐 1534년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학문이 높아 조광조(趙光祖) 등 여러 대신들에게 도학(道學)을 가르쳤고 송인수(宋麟壽)·이황(李滉) 등이 그의 강수(講授)를 이었다. 홍섬(洪暹)·원황(元滉) 등 같은 벼슬에 있던 자들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 이심원의 문인 한승정(韓承貞)

1478(성종 9)∼1534(중종 2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성지(成之). 아버지는 한성부판관 사무(士武)이며, 어머니는 현감 변보(邊保)의 딸이다.

이심원(李深源)의 문인이다.

1507년(중종 2) 진사가 되고, 151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을 거쳐 정언·전라도사·장령 등을 지냈다. 당시의 권신 김안로(金安老)와 동문이었으나, 김안로가 세도를 부리자 절교하였고, 지평으로 있을 때는 김안로를 탄핵하여 크게 미움을 받았다.

그뒤 장악원정·사복시정을 거쳐, 대사간으로 특진된 뒤 예조참의를 지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세가인 김안로에게 아부를 하였으나 교제를 끊을 만큼 청렴하였으며, 죽은 뒤 집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몇 권의 책뿐일 만큼 청빈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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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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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