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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여주군지 제출자료 06---김공망(金公望, 1482∼1528) 참고자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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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0-30 09:01 조회2,14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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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이암집>(송인), <국조인물고>

김공망 묘갈명(墓碣銘)

※목차는 편의상 편집자 임의로 적은 것임


1. 선계

공의 휘(諱)는 공망(公望)이고, 자(字)는 위수(渭&#21471;)이며,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25대손이다. 

증조(曾祖) 증조(曾祖) 환(丸)은 승문원판교(承文院判敎)이고, 조(祖) 종손(宗孫)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고(考) 성(城)은 부장(部將)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별좌(別坐) 임치(任治)의 딸에게 장가들어 성화(成化) 임인년(壬寅年 1482년 성종 13년)에 공이 태어났다. 

 

2.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워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일찍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으나 스스로 힘써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워


3. 1506년 연산군 1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년 연산군 1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ㆍ주서(注書)가 되었으며,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겼다가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ㆍ공조 좌랑ㆍ형조 좌랑ㆍ호조 좌랑ㆍ예조 좌랑ㆍ병조 좌랑을 거쳐 재차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있다가 들어와 공조 정랑이 되었다가 형조 정랑ㆍ예조 정랑ㆍ사헌부 지평으로 바뀌었고, 훈련원(訓練院)ㆍ봉상시(奉常寺)ㆍ상의원(尙衣院)ㆍ군기시(軍器寺)의 첨정(僉正), 사복시(司僕寺)ㆍ선공감(繕工監)의 부정(副正)을 거쳐 제용감 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였다. 

 

4. 벼슬하면서 일에 임하여 정성과 마음을 다하였으므로

공이 무릇 벼슬하면서 일에 임하여 정성과 마음을 다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원대한 인물이 될 줄을 알았으며, 3년 동안 구임(久任)하기에 미쳐서는 조정의 논의가 공은 장관(長官)에 합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5. 어머니를 위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어

처음에 공이 살 집을 지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별도로 북당(北堂)을 지어 봉양(奉養)하는 곳으로 만들려 하였었는데, 공의 형 김공석(金公奭)이 보성 군수(寶城郡守)로 체직(遞職)되어 봉양하다가 떠났으므로, 공이 즉시 청원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어 그 가까움을 기뻐하며 정성을 거의 다하려다가,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지름길로 달려가 모시며 보살피다가 상사(喪事)를 당하였는데, 바로 정덕 신사년(辛巳年 1521년 중종 16년)이었다. 공이 집상(執喪)하면서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6. 해주목사(海州牧使)가 되었는데

가정(嘉靖) 계미년(癸未年 1523년 중종 18년)에 상복(喪服)을 벗고 군자감(軍資監)과 장악원(掌樂院)의 첨정(僉正)이 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사도시 정(司導寺正)으로서 외직으로 나가 해주목사(海州牧使)가 되었는데,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공평하게 하여 원한을 풀어주고 간교한 자는 꼼짝 못하게 하자 한 도(道)가 바람에 나부끼듯 따랐다. 

그러자 근방의 고을 수령으로 의롭지 못한 짓을 하려던 자가 사사로이 서로 알리고 경계하면서 혹시라도 공이 알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7. 

5년 동안 있다가 병으로 사직(辭職)하고 돌아와 무자년(戊子年 1528년 중종 23년) 7월 계미일(癸未日)에 세상을 떠났는데, 춘추(春秋)가 47세였다. 9월에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동쪽 사관(蛇串)의 임좌 병향(壬坐丙向)의 터에 장사 지냈다. 

 

8. 성품

공의 사람됨이 강직하여 지조를 굳게 지켜 구차히 화합하지 않아서 세속을 따라 그들이 하는 대로 순종하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었는데, 그가 서로 허여하는 자는 반드시 명망이 있기가 참찬(參贊)인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 같은 분이 그 중 한 사람이었다. 

 

9. 배위와 자녀

공의 배위(配位) 숙인(淑人) 이씨(李氏)는 경주(慶州)의 명망 있는 집안으로, 증조(曾祖)인 사화(思和)는 부사(府使)이고, 조(祖) 익배(益培)는 좌랑(佐郞)이며, 고(考) 복형(復亨)은 주부(主簿)이고, 외왕부(外王父) 성현(成俔)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이다. 

숙인이 홍치(弘治) 경술년(庚戌年 1490년 성종 21년)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자애로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는데, 시집오게 되어서는 시어머니를 효도로 섬겼고 동서간에는 화기(和氣)로 대처하였으며, 친족에게는 긍휼하고 이웃에게는 화목하였으며 은혜로 종들을 어루만졌다. 

제사를 받듦에는 그 정성을 다하였고 여공(女工)을 다듬어 나감에 있어서는 그 정교함을 극진히 하였으며, 평상시에는 채색(彩色)의 옷을 입지 않았고 음식을 구비하지 않았으며, 말을 꾸미지 아니하였고 얼굴빛은 사납게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덮은 이불이나 입은 옷은 반드시 직접 빨면서 자부(子婦)나 여종이 그 수고로움을 담당하겠다고 청원하여도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갑자년(甲子年 1564년 선조 원년) 3월 기묘일(己卯日)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享年)이 79세이다. 김이 등이 관[관]을 부여잡고 돌아와 6월 임오일(壬午日)에 공의 묘소에 부장(附葬)하였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4남 중 순(淳)은 종사랑(從士郞)인데 먼저 죽었고, 다음이 바로 이(이)인데 현풍 현감(玄風縣監)이며, 다음인 운(운)은 부사직(副司直)이고, 다음인 준(浚)은 만호(萬戶)이다. 딸은 습독(習讀) 조섬(趙섬)에게 출가하였다. 

종사랑은 2남 2녀를, 현풍 현감은 2남 1녀를, 부사직은 3남 3녀를, 만호는 1남 1녀를 낳았고, 외손(外孫)은 1남 5녀이며, 증손(曾孫) 또한 약간 명이다. 

 

10. 묘갈명

나 송인이 현풍 현감과는 서로 알고 지낸 지가 대체로 오래 되었는데, 어느 날 상복(喪服) 차림으로 와서 묘갈문(墓碣文)을 청하기를, “그대의 선군(先君) 또한 우리 아버지를 아시는 터였다.” 하므로, 송인이 사양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 가장(家狀)을 추려서 명문(銘文)을 지었는데,


명은 다음과 같다. 

의지는 굳세고 기상은 높아, 마치 수레바퀴가 방정(方正)하게 구르는 듯한데, 어찌 두루 다니는 것을 이롭게 여기랴? 수명이 길지 않았던 것은 그 허물 다시 누가 감당하리, 배위가 매우 훌륭하여 집안에 감춰진 상서 있도다. 자손 중에 현량(賢良)한 이 많으니 장차 오래도록 더욱 번창하리로다. 이렇게 돌에다 문장을 새겨 영원토록 빛나게 하도다. 



<우암집>(김주)

화산군 연보

6세, 정축(丁丑), 중종 12년(1517)

? 재주와 성품이 총명하고 뛰어나며 행동거지가 장중하여, 숙부이신 목사공(牧使公 : 公望)이 기특하게 보시고 사랑하여, 크게 될 그릇이라고 여겼다.


17세, 무자(戊子), 중종 23년(1528)

? 7월, 숙부 목사공(김공량)의 상을 당하였다.



<조선문과방목>

김공망(金公望) More Info.

       연산군(燕山君)12년(1506년), 별시(別試) 정과12(丁科12)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82년, 임인

  자(字)   위수(渭?)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성(金城)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종손(金宗孫)

  증조부(曾祖父)   김환(金丸)

  외조부(外祖父)   임치(任治)

  처부(妻父)   이복형(李復亨)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유학(幼學)

  품계(品階)   

  관직(官職)   목사&(牧使&)


댓글목록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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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