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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지 제출자료12---김구용과 여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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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19 18:58 조회1,90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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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김흔---女+민적

--------민종유---민적(+김흔의 딸)---민사평(+김륜의 딸)---女+김묘---김구용

--------민종유---민적(+재취)---민변-----민제------원경왕후(+태종), 민무회(+김익달의 딸)



척약재 김구용은

18세 1355년 과거에 합격하였다. 덕령부 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24세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하였다.

26세 1363년 정언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


척약재의 외조부 민사평(1295-1359)은 충주(忠州) 여흥(驪興)이 본향이고 1344년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물러나와 한가로이 지낸 것이 8년, 1359년 나이 65세로 집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제민의 형제가 초상을 주장하여 예(禮)를 극진히 하여서 대덕산(大德山) 감응사(感應寺) 남쪽 둔덕에 장사하였다.


♠솔내영환 (2004-10-01 09:23:05, Hit : 21, Vote : 0) 

익재 이제현과 우곡 정자후, 그리고 죽헌 김륜 은 모두 철동(수철동=앵계리 동쪽)에 살았습니다. 이들은 당대의 문장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단한 분들이어서 [철동삼암-鐵洞三庵]이라 불리웠습니다.

정승 죽헌(김륜)이 돌아가시자 그의 사위인 급암 민사평이 그집에 살게 되었으며, 이 집에서 척약재(문온공 김구용)과 내서사인공 김제안 형제가 외할아버지인 급암선생께 수학하였습니다.  물론 이 삼암선생에게서도 어린시절 많은 지도를 받았구요...

이렇게 하여  삼암(익제,우곡,죽헌)의 학맥이 급암에게로 이어지고, 또 척약재와 김제안공에게로 이어져 왔습니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갈 때, 척약재도 호종하여 피난한 듯


이때 척약재의 외조모 김씨(김륜의 딸, 민사평의 배위)는 1361년 홍건적을 피하여 영남으로 갔다가 다시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았는데, 1374년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고을 남방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 (驪江之西) 기슭에 장사하였다.


척약재의 어머니 민씨(민사평의 딸, 김묘의 배위)는 1361년 겨울에 도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 갈 때 친정 어머니(◀김륜1277-1348 여, 민사평 배위)를 모시고 떠났는데, 그 뒤에 여흥(驪興)에 살면서 십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1374 민사평처 김씨 묘지명) 서울로 가지 않고 성묘를 하며 지켰다.

1379년 56세로 병으로 죽으니 척약재 김구용은 어머니 여흥군부인 민씨(閔氏) (◀민사평1295-1359 여, 김묘 배위)를 조모 김씨(金氏) (◀김혼1239-1311 여, 김승택 배위)의 무덤 곁 (추정 : 여주 남 십리 발산 근처)에 장사하였는데, 거리가 십 몇 보나 되었다.


♠ <영환종친 게시자료>

척약재 선조의 어머니는 급암 민사평의 무남독녀이신 여흥군부인이심

여흥군부인 민씨 할머니의 묘소는 여주 남 십리 에 모셔저 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 실전하고 묘소를 찾지 못하고 있음. 

여주 발산 근처에 수차 답사한 결과 비슷한 묘소를 찾았으나 조선 중기에 썼다는 다른 집안 묘이었음.  왜 비슷하다라고 추정하는냐 하면 고려시대의 묘는 거의 장방형의 사각 무덤인데 이 묘가 사각 묘이어서 고려시대 묘임에 틀림 없을 터이데 묘주인은 조선 중기의 인물이라니 의심이 들었음. 묘지는 고려시대는 주로 장망형이고 조선초기에는 육각형의 묘소가 잠깐 등장하다가(익원공묘소) 원형으로 바뀌었음.



민사평 묘지명 (1359년, 이달충(李達衷) 찬)

동문선 제125권 


----- 내가 급암공(及菴公) (◀민사평1295-1359) 과는 친족으로 인친(姻親)이 되어 서로 두터운 정의가 있는 터이므로, 그가 돌아가매 슬픈 마음이 더욱 심하였는데, 그 부인 (◀김륜1277-1348 딸) 으로부터 묘명(墓銘)의 청탁이 두 번이나 왔으니, 어찌 감히 비루한 솜씨라고 해서 사양하리요.


공의 이름은 사평(思平)이요, 자는 탄부(坦夫)이며 호는 급암(及菴)이니, 충주(忠州) 여흥(驪興)이 본향이다. 아버지 이름은 적(?)이니, ----- 어머니 김씨는 선수진국상장군 관고려군만호 중대광 상락군(宣授鎭國上將軍管高麗軍萬戶重大匡上洛君)김흔(金?)의 따님으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에 봉하였고, -----

공이 원정(元貞) 을미년(◀1295년) 12월 무진일에 나서, 5세 때에 (◀1299년 을해) 어머니(◀김흔의 딸)를 여의고, 조부 충순공에게서 자랐는데, 자질이 범인에 뛰어나서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태재(太宰)김 정열공(金貞烈公) (◀김륜 1277-1348) 이 본래 사람을 잘 안다는 이름이 있었는데, 그의 딸을 공의 아내로 삼게 하였고,  ----- 다음해에 (◀1344년)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였다. ----- 물러나와 한가로이 지낸 것이 8년, 나이 65세로 지정(至正) 기해년 7월 무신일에 집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부음이 들리매 왕이 차탄하며 슬퍼하고 문온공(文溫公)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 문사와의 교유를 좋아하여 일찍이 졸재(拙齋) 최선생(崔先生)과 친분이 두터웠고, 더욱 그의 글을 좋아하여 그의 문집을 자기 재력으로 간행하였으니, -----

딸 하나를 낳아 명문 집 자제인 홍복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김앙(金昻)에게 시집보냈고, 외손자가 둘인데, 공이 몹시 귀여워하고 잘 교양하여 모두 과거에 올랐었다. 맏이는 제민(齊閔)이니, 지금 덕녕부 주부(德寧府注簿)이고, 다음은 제안(齊顔)이니 직한림원(直翰林院)이며, 외손녀가 넷인데 맏이는 명문의 아들 감문위 참군(監門衛參軍)김사안(金士安)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아직 모두 어린 나이다. 제민의 형제가 초상을 주장하여 예(禮)를 극진히 하여서 경신일에 대덕산(大德山)감응사(感應寺) 남쪽 둔덕에 장사하였다. 그 명에 이르기를, -----




■ 민사평처 김씨 묘지명 (1374년, 이색(李穡) 찬)

동문선 제126권 


부인의 성은 김씨이며, 언양군(彦陽郡)이 본향이다. -----아버지의 휘는 윤(倫)이니 -----

13세에 민(閔)씨의 집으로 시집와서 ----- 딸 하나를 낳아서 판군기시사 김묘(金昴)에게 출가시키니, 김묘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의 18세손이다. 김씨의 자녀로 아들은 제민(齊閔)ㆍ제안(齊顔)ㆍ구덕(九德)이 있고, 딸은 밀직부사 김사안(金士安)과, 전 개성 윤 이창로(李彰路)와, 전 종부령 최유경(崔有慶), 전 낭장허호(許顥)와, 전 전객부령허의(許誼)와, 낭장 겸 박사이존사(李存斯)와 문하 주서김섬(金贍)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제민이 이름을 구용(九容)이라 고치고 그 아들 흥위위 녹사(興威衛錄事) 명선(明善)을 보내어 행장에 의하여 명(銘)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외조부 급암공(及菴公) (◀민사평1295-1359) 은 천성이 순진하고 솔직하여 장벽을 세우지 않고 날로 시와 술로서 스스로 즐겼으며, 집안의 살림살이는 묻지 않고 오직 부인 (◀김륜1277-1348 여) 에게만 맡겼는데, ----- 기해년에 (◀1359년) 급암공이 돌아가고 겨우 3년 상을 마치자 신축년에 (◀1361년) 홍건적을 피하여 영남으로 갔다가 다시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았는데, 일찍이 스스로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 손자 제안(齊顔)이 옳은 죽음을 얻지 못하였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겠느냐.’ 하였으니, 그 강렬(剛烈)함이 그 아버지의 풍도에 있었다 한다. 갑인년 (◀1374년) 9월 19일에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그 해 12월 15일에 고을 남방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 (◀驪江之西) 기슭에 장사하였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급암(及菴)의 장사 때에 (◀1359년) 시로써 만사(挽詞)를 도운 바 있었으니 부인의 묘명(墓銘)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나는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



■ 김묘처 민씨 묘지명 (1379년, 이색(李穡) 찬)

동문선 제128권 


나의 벗 김구용(金九容)씨가 금년(◀우왕5년, 1379) 윤 5월 갑진(甲辰)에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 민씨(閔氏) (◀민사평1295-1359 여, 김묘 배위)를 조모 김씨(金氏) (◀김혼1239-1311 여, 김승택 배위)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는데, 거리가 십 몇 보나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참군사(?軍事) 명선(明善)을 보내어 명(銘)을 구하였는데,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행장(行狀)을 상고하니,


----- 시호 문온(文溫) 급암선생(及菴先生) 휘 사평(思平)은 그 아버지요, -----

신축년(◀1361년) 겨울에 도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 갈 때 어머니(◀김륜1277-1348 여, 민사평 배위)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이 편안하였다. 그 뒤에 여흥(驪興)에 살면서 십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1374 민사평처 김씨 묘지명) 부인의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다.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안 할 것이니, 내 어찌 차마 떠나겠는가. 내 어찌 차마 떠나겠는가.” 하였다. (우왕5년, 1379▶) 5월 계사일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56세였다. -----


아들이 셋인데 맏은 구용이니, 전(前)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中正大夫三司左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編修官)이었고, 다음은 제안(齊顔)으로 중의대부 중서 병부랑중 겸첨서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中議大夫中書兵部郞中兼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奉善大夫典敎副令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이요, 다음은 구덕(九德)인데, 전(前) 좌우위(左右衛) 보승산원(保勝散員)이었다.

딸이 아홉인데 밀직부사 김사안(金士安) ㆍ 전(前) 개성윤(開城尹) 이창로(李彰路) ㆍ 전 종부령(宗簿令) 최유경〈崔有慶〉 ㆍ 전(前) 낭장(郞將) 허호(許顥) ㆍ 전 부령(副令) 허의(許誼) ㆍ 겸박사(兼博士) 이존사(李存斯) ㆍ 문하주서(門下注書)김첨(金瞻)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아직 시집가지 못하였다. 그 명(銘)이 다음과 같다. -----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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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