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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고려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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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27 11:14 조회1,2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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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107] 

강화의 고려왕릉


나각순

두레 문화기행 연구 위원, 한국사


     고려왕실은 조상숭배의 형태로 왕릉 진전(眞殿) 태묘(太廟) 등을 모셨다. 즉 고려의 왕과 왕비는 사후에 안택(安宅)인 능에 안장되었고, 그들의 초상화를 원찰(願刹)의 진전에 모셔 사후세계의 안녕을 빌었다. 아울러 선왕의 음조(陰助, 돌아가신 조상의 도움)로 살아있는 후손의 왕들이 국태민안의 치세를 유지한다고 믿었다. 즉 고려는 불교국가로서 왕릉을 조성하고 해당하는 왕과 왕비의 진전사원을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묘에서는 유교적 의례를 행하였다.


     고려 왕릉은 거의 도성 밖의 주위에 있었으나 성내에 거의 설치하지 않았으며, 진전사원(眞殿寺院)은 고려 초기에 거의 도성 안에 설치하였으므로 왕릉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진전사원을 도성 밖에 설치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점차 왕릉과 가까운 지점에 위치하였다. 나아가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한 시기에는 왕릉과 진전사원이 가깝게 조성되는 환경이 형성되었다. 이후 고려말과 조선초에는 진전사원이 더욱 가까이 위치하게 되고, 조선 중기에는 능침사(陵寢寺)로 불릴 만큼 더욱 밀접하여 진전보다 왕릉을 수호하는 기능이 강화되었다. 즉 왕릉의 원찰의 형태는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고려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신라와 같이 내부는 횡혈식 석실무덤(굴식 돌방무덤)으로 하고 외부는 흙으로 봉분을 덮은 형태였으며, 봉토의 아래쪽에 호석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한 개풍 장단 일대와 강화도에 고려의 왕릉들이 분포되어 있다.


     고려의 왕릉들은 오랜 세월과 조선시대의 개축 등으로 그 원형이 크게 변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개성에 있는 태조의 현릉(顯陵), 원종의 소릉(韶陵), 7능군의 능들을 통하여 그 기본구조를 살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려 왕릉은 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잡아 좌청룡 우백호의 산줄기가 능 뒤의 주산(主山)에서 좌우로 뻗어내리고, 명당수(主水)는 능의 우측 즉 서쪽에서 시작하여 능 앞 동쪽으로 흘러가는 지세의 가운데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묘역의 선정은 풍수지리사상에 의한 명당자리를 택한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오행사상이 고려시대에 일대를 풍미하였고, 그대로 조선시대에까지 계승된 형태로 보여진다.


     능역은 대략 동서 약 18m, 남북 약 36m의 장방형 구역의 3면에 돌담을 돌리고, 다시 구역 안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낮아지는 4단의 단을 만들어 상설하고 있다. 가장 위 1단에는 봉분과 석상 망주석, 2단에는 장명등을 사이에 두고 문인석을 세우고, 3단에는 무인석, 4단에는 정자각을 비롯한 능비를 세웠다.


     능의 봉분은 높이 3∼5m 정도, 직경 6∼9m 정도로 신라 왕릉처럼 봉분 아래쪽에 면석과 12지 호석을 돌렸고, 그 밖으로 난간석과 석수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명종의 지릉(智陵)에서 보듯이 석실은 장대석으로 네 벽을 쌓고, 판석 3장으로 천장을 덮고 있으며 바닥은 전(塼, 벽돌)을 깔고 현실의 남쪽 중앙에 입구를 만들어 그 앞을 판석 1장으로 막아놓고 그 밖은 적석으로 보강하고 있는 양식으로 연도(羨道, 널길)가 없이 입구를 통하여 매장한 형식을 보인다. 그리고 일부 고려왕릉에서는 성신도(星辰圖, 별자리)를 비롯한 벽화가 그려지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말에는 왕릉을 경비하기 위하여 위숙군(圍宿軍)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1208년에 현지 조사한 결과 이미 5, 6기의 능이 도굴된 것을 발견하기도 하였고, 1280년에는 최탄(崔坦) 등이 왕릉을 도굴하여 보물을 약취한 사건도 있었다. 또 1253년(고종 40)과 1256년에는 강종의 능인 후릉(厚陵)과 예릉(睿陵, 누구의 능인지 밝혀지지 않으나 어느 후비의 능으로 추정됨)이 도굴되기도 하였다. 그런 반면에 전란을 피하여 이장되기도 하였는데,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태조의 재궁(梓宮, 관)이 서울 삼각산의 향림사(香林寺)에 옮겨오기도 하고, 1232년에는 몽고의 침입에 따라 태조와 태조의 부친인 세조(世祖)의 재궁을 강화도로 옮겨 새 능에 안장하였다가, 1276년에 다시 본래의 현릉에 복장하기도 하였다.


     강화는 고려 고종과 원종에 걸쳐 40년간 피난 수도로 국도였던 만큼 고려시대의 왕릉과 그에 준한 묘역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발견되고 있는 것은 오직 석릉(碩陵)·곤릉(坤陵)·홍릉(洪陵)·가릉(嘉陵)의 4기뿐이다. 그것도 조선시대 현종이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에게 명하여 찾아낸 것으로 그 후로 발견된 것이 별로 없다. 단지 소릉(紹陵)의 존재가 기록상 확인되며 구전되고 있는 실정으로 앞으로 도시개발과 더불어 발견 가능성은 있다고 볼 수 있다.


     석릉은 고려 21대 왕 희종의 능으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번지에 위치해 있다. 강화부에서 남쪽으로 21리 지점이다. 능의 면적은 2,498㎡로 1992년 3월 10일 사적 제369호로 지정되었다. 또 희종의 왕비 임씨(任氏)의 소릉(紹陵)이 강화도에 있었다는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나 매몰된 지 오래되고 그 자취를 알 수 없음이 유감이다.


     곤릉은 고려 22대 왕 강종의 왕비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원덕태후(元德太后)의 능으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75번지에 위치해 있다. 강화부에서 남쪽으로 23리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능의 면적은 1,091㎡이며, 1992년 3월 10일에 사적 제371호로 지정되었다. 홍릉은 고려 제23대 왕인 고종의 능으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 180번지 강화청소년야영장 뒤쪽에 위치해 있다. 능의 면적은 298㎡로 1971년 12월 28일에 사적 제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릉은 고려왕조 제24대 왕 원종의 왕비 순덕태후의 능으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 16-2번지에 위치해 있다. 능의 면적은 2,498㎡로 1992년 3월 10일에 사적 제370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발견된 4기의 능역의 규모도 너무 작을 뿐 아니라 망주석과 혼유석 정도의 시설밖에 없어 신뢰감이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당시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면서 고려를 침략한 몽고와의 항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재정이 고갈되고 국운이 풍전등화 같은 장면에서 피난 수도로서의 강화의 지역적 한계는 왕릉을 대규모로 수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석실과 호석 난간석을 갖춘 정형의 왕릉 구조는 찾아볼 수 없으며, 봉분과 초라한 석물이 발견될 뿐이다. ■두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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