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1577-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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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02 11:33 조회1,697회 댓글0건본문
묘갈명을 통해 본 주요행적
◎만력(萬曆) 정축(丁丑;1577년) 7월7일에 태어나서 몸집이 크고 건장했으며 성품이 기특하고 매우 총민(聰敏)했다.
◀(편집자 주)
외조부(外祖父)는 양언개(楊彦漑)이다. 5세때 1581년 생부(휘 시회, 1542-1581) 돌아가시고 묘는 괴산 능촌리이다. 조부(휘 충갑, 1515-1575)의 묘는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에 있었다. 16세 1592년 양부(휘 시민) 진주대첩에서 순절하시고 묘는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이다.
◎정유년(丁酉年(1597년))에 알성과(謁聖科)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에, 춘방설서(春坊說書)가 되었다. 사서(司書)로 승진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를 제수 받았으며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나아갔다. 해미(海美)와 흥덕(興德)의 원으로 나아갔는데,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베풀어 아전들을 온화(溫和)하게 하고 백성들을 품었다.
◀(편집자 주)
1604년에 김득신을 낳았다. 김치가 해미(海美) 또는 흥덕(興德)의 원으로 나아갔을 때인 듯하다. 김득신의 외조부는 목첨(睦詹)이다.
◀<취묵당기, 1663년 김득신>
예전 辛丑년에(=?1601 辛丑, ◀1611 辛亥, 1613 癸丑의 오기인 듯) 先君(=김치)께서 方下峴(=능촌리 방아재)에 들어가셔서 4년을 머물다(=1615년 양어머니 상) 돌아가셨다. 그후 거의 50년이 흘렀는데, -----
◎을묘년(乙卯年: 1615년)에 양(養)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병형공참의승지(兵刑工參議承旨)에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편집자 주)
왕조실록에는 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이 당시(當時), 광해군(光海君)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윤리를 어겨 대비(大妃)를 폐비(廢妃)한다는 논의를 일으켰다. 공(公)이 분격하면서 크게 말하기를 "시국이 좋지 않구나." 라고 하고 드디어 용호(龍湖)에 거처했다. 성시(城市)에 나아가지 않은 지가 6년이 되었으며,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편집자 주)
1618년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비 때부터 1623년 인조반정 때까지 한양 한강변 용호에 거처한 듯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고,
◀(편집자 주)
왕조실록에는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大北派)로 몰려 유배당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을축(乙丑)년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되었는데, 묵은 병이 다시 재발되어 5월 27일 안동객사(安東客舍)에서 졸(卒)했다. 연세가 49세인데 청안현 (淸安縣) 남쪽 율치(栗峙)에 장례(葬禮)지냈다.
◀(편집자 주)
증평 율리에 전해 오기를, 그가 안동에서 죽은 후 시신을 괴산 능촌으로 모시려 했으나 상여가 이곳 율리재를 넘을 때 명정이 바람에 날려 현재의 그의 산소 자리에 앉으므로 그 곳에 안장했다고 하고 그 후 후손들이 이 곳에 와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부(김충갑, 1575몰)의 묘는 중원 살미 무릉동에, 생부(김시회, 1581몰)의 묘는 괴산 능촌에, 양부(김시민, 1592몰)의 묘는 중원 살미 무릉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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