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집 교정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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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20 14:09 조회1,334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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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湖遺稿附錄
●諸賢酬唱
次韻。答金應霖,林士遂在東湖見寄。二首。 甲辰春。兩君寄詩來。癸卯冬。余下鄕。病未還朝。 032_244b
雪盡花開病臥村。消磨未盡只詩魂。榮枯輾轉回雙?。倚伏冥茫隔九?。芝朮養生?益古。煙霞八骨語
▶ 032_244c
無煩。山中風味君知否。世事都無一句論。
金君韶奏鳳來儀。林子兼將百步威。故國春風留病客。神交書札到柴扉。半成山屋謀曾拙。全落湖海事太違。知我不才君最甚。可無容得會稽歸。 時應霖爲銓郞。故屬以外浦。
游軒先生集卷之一
●與金應霖澍 034_022a
?顔老中樞。是我同庚友。一別且十年。秋月阻携手。脈脈不得見。新霜已滿首。以我料故人。百年容易負。
▶ 034_022b
惟玆赤子心。彼此同昔有。窮達置在天。在我無薄厚。時方向爾隆。爾道當可久。得君如仁宗。毋落王曾後。
忍齋先生文集卷之一 詩
七言律詩
●送應霖。以奏請使赴京。 金澍 032_286c
九虎當關?闔深。封章一奏貢丹?。?應天聽因人聽。可得兪音是德音。班?夔龍曾識面。望懸綸?想
▶ 032_286d
虛襟。紫泥佇?諸卿貴。好語先馳鴨水?。
河西先生全集卷之八
五言律詩
●示金應霖 033_158b
嫩日消殘雪。新春屬上元。?鹽憐客況。杯酒亦君恩。十載南山豹。何時北海鯤。君民堯舜志。與子可堪論。
河西先生全集卷之六
七言絶句
●見金應霖?, 兪絳之, 柳興伯昌門, 李廷瑞元祿 復書。 033_123c
吏部郞官有故人。五年南北阻音塵。今因爲養初通信。各是先朝侍講臣。
<주석 보완>
1. 황해도청 芙蓉堂 : 화산군 숙부 김공망이 1526년 개축
■ 황해도지 (1982.1)
**芙蓉堂 : 황해도청 뜰에 있는 海西 8경의 하나다. 조선조 연산군 6년 목사 尹哲과 판관 鄭子芝가 창건했고, 중종21년 목사 ★金公望이 개축하면서 堂을 연못 안에 지었다. 연꽃이 활짝 피는 여름에는 그 淸楚한 모습이 물에 비치어 더욱 아름답다.
도청앞 뜰안에 있는 芙蓉堂은 연산군 6년에 목사 尹哲, 판관 鄭子芝가 지었고 25년 후인 중종21년에 목사 ★金公望이 개건했다.
건축의 규모가 宏大(굉대)하고도 優雅(우아) 典麗(전려)하여 韓--- 부용당이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즉 왜란때 의주로 피난갔던 선조는 서울이 수복된 뒤에도 還都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해주에 들러 이 부용당에서 1개월 여 머루는 것을 비롯, 여기서 멀지않은 州民 집에서 선조의 손자 인조가 탄생하는 등 해주가 왕실, 정부와 깊은 인연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芙蓉堂 : 堂在海州客館西牧使★김공망改建송시열撰記 (林下筆記 : 李裕元(1814?1888))
林下筆記 奎4916 李裕元(1814?1888)이 隨意?隨錄한 것을 總集한 雜著. 筆寫本으로 著者의 여러 著述 중에서도 代表的인 것이다. 1871年(高宗 8)에 그의 寓居地인 天摩山 嘉梧谷 林下廬에서 脫稿하였다는기록으로 보아 이 책은 그가 宦海의 바쁜 생활속에서 틈틈이 써두었던 수록류를 한데 모아 이때에 와서 成冊한 것으로 보인다.
■ 김공망 연보 ***화산군(김주)의 숙부
○1482(성종 13) ~ 1528(중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위수(渭 馬 ). 환(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손(宗孫)이고, 아버지는 오위부장(五衛副將) 성(城)이며, 어머니는 임치(任治)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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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년 제용감정(濟用監正), 내자시 정이 되어서는 재물관리를 철저히 하였고,
○이어 해주목사가 되어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생을 안정시켰고, 형옥(刑獄)을 공평히 처리하여 도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인근 고을의 수령 중에서 사욕을 취하고자 하여도 김공망이 알고 있다면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5년간의 지방관 임기를 마친 후 신병(身病)으로 사직했다가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2. 황해 金川 三聖臺
■ 황해도지 (1982.1)
**金川 三聖臺 : 金川郡(금천군) 月城面 구 兎山邑(토산읍) 동쪽 임진강 岸頭에 있다.
兎山面 동쪽 임진강 변에 있다. 수십 길의 절벽 위에 기암괴석이 重疊(중첩)한 가운데 가장 높은 세 石臺가 天然的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것이 三聖臺이다.
석대 밑에는 임진강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江岸에는 또 작은 정자도 지었으니 이곳 臺上의 정자에 오르면 사방으로 확 트인 경관이 절경을 이룬다.
3. 송도(松都) 벽란((碧瀾)나루 식파정(息波亭)
●양촌선생문집 제14권
기류 記類
식파정기(息波亭記)
이공(李公)의 휘(諱)는 원(原)이다.
송도(松都)의 서북쪽 여러 산골의 물이 모여서 긴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르는데, 건너다니는 곳을 벽란((碧瀾) 나루라고 한다. 국도(國都)와 가깝기 때문에 건너는 사람이 많고 산 근방이기에 물살이 빠르며 바다가 가까우므로 조수가 거세어서, 건너다니는 사람들이 매우 병폐로 여겨, 국가에서 관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강 기슭 벼랑 밑에 전부터 초루(草樓)가 있었는데, 나루를 맡아 보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강은 바다와 하늘에 닿고 산은 들판 언덕에 가로 놓여 이리저리 구불구불하고 광막하여 아무리 보아도 가이없으니, 매우 뛰어난 경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둘러 건너는 나루터이지 유람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오직 건 너기에만 급하게 여기므로, 올라가 눈여겨 구경할 틈이 없게 된다.
임오년(壬午年) 가을에 철성(鐵城) 이공(李公)이 사명을 띠고 와서 우도(右道)의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적에 여기에 와 머무르며 둘러보고 찬탄하다가, 벼랑 위로 올라가 마땅한 자리를 보게 되자,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사토(砂土)를 깎아내어 새로 정자를 세우고, 식파정(息波亭)이라 편액하니, 대개 경치 좋은 데다 정자를 지음으로써, 건너다니는 괴로움을 풀게 한 것이다.
순찰하는 여가에 반드시 와서 쉬되, 오기만 하면 며칠 밤씩 지내며 읊조리고, 돌아가기를 잊었으며, 또한 전 사람들의 초루시(草樓詩)에 차운(次韻)하여 그 뜻을 표시하였는데, 정자의 경치가 좋아 옛 초루에 비하면 십배 백배뿐이 아니었다.
그 이듬해 여름에 체대(遞代)되어 돌아와서 나에게 기(記)를 청하니, 내가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공은 천성이 인후(仁厚)하여 선(善) 좋아하기를 싫어할 줄 몰랐는데, 어려서부터 개연(慨然)히 지조[志節]가 있어, 일찍이 범 문정공(范文正公)의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즐긴다’는 말을 사모하여, 언제나 스스로 외고 읊조리며 자신도 그와 같이 하기를 기대(期待)하였기 때문에, 그 문무의 재략(才略)과 중외(中外)에 나타난 공적이 우뚝이 빼어나서, 족히 범공(范公)에게 필적할 만하고 그 품은 마음도 범공과 같이 컸다.
대개 악양루(岳陽樓)는 천하에 좋은 경치로서, 무릇 구경하는 사람들의 슬픔과 즐거움이 모두 그 자신의 느낌에 관계되었으나, 범공의 근심과 즐김은 홀로 천하와 관계되었었고, 지금 공은 이 정자에서 이미 다른 사람들과 같이 즐기고, 또한 그 근심을 물결이 자도록[息波] 하기에 미루어 갔으니, 이는 그 마음에 근심함과 즐거워함이 모두 남을 돌보기에 있은 것이고, 자신의 한 몸에는 관계되지 않은 것임을 볼 수 있다.《시경》에 이르기를 '마음속에 재덕(才德)이 갖추어 있으므로 밖에 나타나는 것도 그와 같다’ 하였으니, 뒷날 묘당(廟堂) 위의 보상(輔相) 자리에 있게 되면, 세상을 위해 근심하고 즐거워한 공효를, 송(宋) 나라의 범공(范公)만이 독차지하게 하지 않을 것을 또한 점칠 수 있다.
■ 600년 서울 땅이름 이야기 (2000년 5쇄, 김기빈)
한편 한강의 별명 또는 위치에 따른 이름도 다양하여 여러 시문(詩文)이나 문서 등에 사용되었는데,
빙고 곧 얼음창고가 있는 있는 서빙고 앞 한강을 빙호(氷湖)
옥수동 앞을 동호(東湖)
금호동 앞을 금호(金湖)
동작동 앞을 동호(銅湖) 또는 동작강
마포 앞을 마호(麻湖) 또는 마포강
서강 앞을 서호(西湖) 또는 서강(西江)
용산 앞을 용호(龍湖) 또는 용산강(龍山江)
노량진 앞을 노강(鷺江) 또는 노들강
김포 북쪽을 강의 어른이란 뜻에서 조강(祖江)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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