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효자(孝子) 김창구(金昌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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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1-04-21 22:14 조회2,752회 댓글0건본문
조선조 영조(英祖)때의 효자. 본관은 구안동 김씨.낙포(洛圃) 익원공 (翼元公)김사형(金士衡)의 후손 첨지 호빈(好彬)의 아들. 그의 선조들은 서울에서 살다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고조가 비로서 강화(江華)에 들어옴으로서 이곳에 정착 하게 되었다. 그는 효행으로써 부친이 첨지중추부사에 오를 수 있도록 지극한 효행을 하였다.
그의 부친이 38세에 중병으로 기절하였다가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았는데 그의꿈에 저승에가니 마침 같은 나이가된 아전 한사람의 구원을 얻어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58세 까지는 살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때 8살박이 창구(昌九)는 이 말을 듣고 몹씨 비통히 여겨 아버지의 장수(長壽)를 빌기 시작하여 조용하고 청결한 곳에 독(항아리)에다 성미를 저장하였다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기도 할 때마다 쓰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니 아버지의 연세가 58세가 되자 이해 정월22일 그동안 모아 두었던 쌀을 메고 지고 향촉을 갖추어 먼저 마리산(摩利山)에 올라 3일간을 기도하고 다음에는 고려산 정상에 올라 또 3일간을 기도하였는데 이때 눈보라가 심하였는데도 촛불이 꺼지지 않고 밝은 촛불빛이 그대로 밝혀지고 있엇다. 마지막 기도하던 그 날 어머니 선씨(宣氏)의 꿈에 큰 무지개가 기도처인 고려산(高麗山)에서 향교(鄕校)앞 우물에 꽂히였다. 이꿈을 해몽하는 이에게 가서 물어보니 꿈 풀이는 다음과같다.
우물정(井)자에는 여덟개의 뿔이 있으니 8이요 +자로 둘려잇으니 80세는 무난히 살 수있을 것이요. 3일간 기도하고 제사드렸으니 3세를 더하여 공의 수는 83를 살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꿈 해몽과 같이 살았다고 하니 신기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후 14년 1691년 이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백약이 무효라 공은 얼음같이 찬 샘물에 목욕재개하고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하늘에 빌었더니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얼음이 긴 손가락 모양으로 솟아있었다. 그 생김새가 마치 어린애와 비슷하였다고 전한다. 또 어머니가 물고기가 잡수시고 싶다고 하시기에 공은 얼음을 깨고 고기를 나꾸어 드렸더니 차츰 병환이 낫기 시작하여 3년 간을 더 사시다가 돌아 가시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자 여막을 짓고 시묘(侍墓)하다가 아버지의 엄명이 있어 중지하고 철저히 예절을 갖추어 조석으로 곡.상식을 봉행하였다.(1744)
그 후 강화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과 김광세(金光世)(1769) 때에는 부역을 면제하는 특혜를 내렸으며 조정에 품의하여 영조(英祖)48년 (1772)에는 특명으로 그 집을 해동검루(海東黔婁) 김창구지문(金昌九之門)이라는 정문을 내리고 그 아버지는 중추원 (中樞院)직책에 특명하여 효행을 기리었다.
그 후 얼마 아니되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니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묘소앞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을 지냈는데 그는 여막에서 살면서 사당집을 세우고 비석을 세워 조상의 높은 덕을 기렸다. 그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했으면 하고 항상 말씀이 있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더욱 한이되어 이를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반듯이 원을 풀어 드리고자 아버지 사당에 말씀드리고 어버이가 생전에 입던 의복을 개나리 봇짐하고 도보로 금강산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 때의 나이가 64세 였는데 험란한 길로 금강산에 올라 손에 옷을 받쳐 들고 슬피 통곡하면서 "아버지께서 구경하시고 싶어하신 곳이 이 산이외다" 하면서 봉우리 마다 돌아보고 같은 말씀을 드리니 보는 사람마다 감격하여 눈시울을 적시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여막에서 시묘살이 할때에는 항상 범 한마리가 함께 지키고 있었는데 새벽이면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였으며 여막에 오를때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함께 안내하는 신화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범이 나타나지 않는지라 이상히 생각하였는데 그날 밤에 현몽하기를 범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어느 사냥꾼에게 피살되어 내일이면 내 가죽을 벗기게 되리라" 한다. 이에 그는 범을 잡아다 놓은 집을 찿아 헤메다가 한 마을에서 범의 가죽을 벗기고 있는지라 자세히 보니 과연 그것이 시묘를 같이 하던 호랑이였다. 이에 그는 사냥꾼에게 전후 사정을 일일히 말하고 그 가죽이나마 돌려줄 수 없는가를 애원하였더니 전후 사정에 감동되어 범의 가죽을 돌려 받아 그 집안의 가보로 간직 하였으나 1924년과 1925년 때 대홍수로 말미아마 분실되었다고 한다. 또 여막에서 시묘살이 할때 묘소옆에서 샘물이나와 애용하였는데그 우물을 속칭 효자정(孝子井)이라하여 지금도 그 터가 남겨져있고 매일 묘소에 오르내릴때 돌 하나씩을 들어다 모아 쌓았는데 하나의 단소가 되어 그대로 존재하고있다.
1766년 강화유수 이은(李殷)이 선두포 별장으로 특임하여 공의 효행을 우대 하였고 두 손자욱이 남아있는 묘소는 지금 선원면 선행리로 노적봉 밑에 있으며 강화(江華)의 효행 가운데서도 가장 기이한 사건으로 전해저 내려오고 있다.
윤리관이 타락된 이 시점에 새롭게 음미하며 효행이 진작되어 미덕을 가꾸어 예의의 나라로 면모를 되살리고 싶을 뿐이다. " 내용이 너무 길어 죄송합니다 "
참고문헌 : 강도지(江都誌) 강화사(江華史)
강도인물고(江都人物考) 경기인물지(京畿人物誌)
그의 부친이 38세에 중병으로 기절하였다가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았는데 그의꿈에 저승에가니 마침 같은 나이가된 아전 한사람의 구원을 얻어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58세 까지는 살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때 8살박이 창구(昌九)는 이 말을 듣고 몹씨 비통히 여겨 아버지의 장수(長壽)를 빌기 시작하여 조용하고 청결한 곳에 독(항아리)에다 성미를 저장하였다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기도 할 때마다 쓰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니 아버지의 연세가 58세가 되자 이해 정월22일 그동안 모아 두었던 쌀을 메고 지고 향촉을 갖추어 먼저 마리산(摩利山)에 올라 3일간을 기도하고 다음에는 고려산 정상에 올라 또 3일간을 기도하였는데 이때 눈보라가 심하였는데도 촛불이 꺼지지 않고 밝은 촛불빛이 그대로 밝혀지고 있엇다. 마지막 기도하던 그 날 어머니 선씨(宣氏)의 꿈에 큰 무지개가 기도처인 고려산(高麗山)에서 향교(鄕校)앞 우물에 꽂히였다. 이꿈을 해몽하는 이에게 가서 물어보니 꿈 풀이는 다음과같다.
우물정(井)자에는 여덟개의 뿔이 있으니 8이요 +자로 둘려잇으니 80세는 무난히 살 수있을 것이요. 3일간 기도하고 제사드렸으니 3세를 더하여 공의 수는 83를 살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꿈 해몽과 같이 살았다고 하니 신기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후 14년 1691년 이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백약이 무효라 공은 얼음같이 찬 샘물에 목욕재개하고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하늘에 빌었더니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얼음이 긴 손가락 모양으로 솟아있었다. 그 생김새가 마치 어린애와 비슷하였다고 전한다. 또 어머니가 물고기가 잡수시고 싶다고 하시기에 공은 얼음을 깨고 고기를 나꾸어 드렸더니 차츰 병환이 낫기 시작하여 3년 간을 더 사시다가 돌아 가시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자 여막을 짓고 시묘(侍墓)하다가 아버지의 엄명이 있어 중지하고 철저히 예절을 갖추어 조석으로 곡.상식을 봉행하였다.(1744)
그 후 강화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과 김광세(金光世)(1769) 때에는 부역을 면제하는 특혜를 내렸으며 조정에 품의하여 영조(英祖)48년 (1772)에는 특명으로 그 집을 해동검루(海東黔婁) 김창구지문(金昌九之門)이라는 정문을 내리고 그 아버지는 중추원 (中樞院)직책에 특명하여 효행을 기리었다.
그 후 얼마 아니되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니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묘소앞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을 지냈는데 그는 여막에서 살면서 사당집을 세우고 비석을 세워 조상의 높은 덕을 기렸다. 그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했으면 하고 항상 말씀이 있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더욱 한이되어 이를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반듯이 원을 풀어 드리고자 아버지 사당에 말씀드리고 어버이가 생전에 입던 의복을 개나리 봇짐하고 도보로 금강산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 때의 나이가 64세 였는데 험란한 길로 금강산에 올라 손에 옷을 받쳐 들고 슬피 통곡하면서 "아버지께서 구경하시고 싶어하신 곳이 이 산이외다" 하면서 봉우리 마다 돌아보고 같은 말씀을 드리니 보는 사람마다 감격하여 눈시울을 적시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여막에서 시묘살이 할때에는 항상 범 한마리가 함께 지키고 있었는데 새벽이면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였으며 여막에 오를때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함께 안내하는 신화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범이 나타나지 않는지라 이상히 생각하였는데 그날 밤에 현몽하기를 범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어느 사냥꾼에게 피살되어 내일이면 내 가죽을 벗기게 되리라" 한다. 이에 그는 범을 잡아다 놓은 집을 찿아 헤메다가 한 마을에서 범의 가죽을 벗기고 있는지라 자세히 보니 과연 그것이 시묘를 같이 하던 호랑이였다. 이에 그는 사냥꾼에게 전후 사정을 일일히 말하고 그 가죽이나마 돌려줄 수 없는가를 애원하였더니 전후 사정에 감동되어 범의 가죽을 돌려 받아 그 집안의 가보로 간직 하였으나 1924년과 1925년 때 대홍수로 말미아마 분실되었다고 한다. 또 여막에서 시묘살이 할때 묘소옆에서 샘물이나와 애용하였는데그 우물을 속칭 효자정(孝子井)이라하여 지금도 그 터가 남겨져있고 매일 묘소에 오르내릴때 돌 하나씩을 들어다 모아 쌓았는데 하나의 단소가 되어 그대로 존재하고있다.
1766년 강화유수 이은(李殷)이 선두포 별장으로 특임하여 공의 효행을 우대 하였고 두 손자욱이 남아있는 묘소는 지금 선원면 선행리로 노적봉 밑에 있으며 강화(江華)의 효행 가운데서도 가장 기이한 사건으로 전해저 내려오고 있다.
윤리관이 타락된 이 시점에 새롭게 음미하며 효행이 진작되어 미덕을 가꾸어 예의의 나라로 면모를 되살리고 싶을 뿐이다. " 내용이 너무 길어 죄송합니다 "
참고문헌 : 강도지(江都誌) 강화사(江華史)
강도인물고(江都人物考) 경기인물지(京畿人物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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