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1---1396년, 익원공의 대마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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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15 23:27 조회1,269회 댓글0건본문
▣ 한국방송통신대학 논문집 제20집, 1995. 8월
박위·金士衡의 대마도 정벌 (노계현)
5. 김사형의 대마도정벌
고려가 종말을 고하고 조선이 건국한 이후도 왜구의 침략은 여전하였다. 조선 태조시에도 고려말기와 같이 일본과는 사절의 내왕으로 선린관계를 유지시켰으나 일본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던 왜구문제는 역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태조때 왜구의 침략도 끊이지 않았으니 그 중의 중요한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393년(태조2년) 4월에 평안도 순천군에 침입한 왜구를 도순무사가 이를 격퇴했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연이어 일어난다. 같은 달 경기도 양주도호부 관내에 왜구의 규모가 30척이나 되는 것이 침략해 왔고, 동년 10월에는 평안도 이성만호가 왜구 40여를 베었다.
그 다음해인 1394년 8월에는 침범한 왜구의 배 9척을 나포하였으며
1396년 8월에 동래현에서 왜선이 동래성을 포위함으로 이중 배 21척을 불살랐다
그리고 1397년 6월에 평안도 안주목사는 배 10척을 동원하여 침범한 왜구의 배 24척중 6척을 대파하였다. 또 같은 달에 황해도 장산갑에서 왜선 10척을 불사르고 평안도 해안에서도 왜구의 배 10척을 불살랐다.
1398년 (정종 즉위년) 10월에는 황해도 웅진현에서 왜구의 배 1척을 불사르고 50명을 베었다.
이와같이 끊임없이 노략질하여 오는 왜구를 무마하기 위하여 조선을 사신을 보내어 달래기도 하고 이선치도책 (以善治盜策 : 선으로써 왜적을 다스리는 정책)을 써서 침략해 오는 왜구에게 음식을 주기도 하고 방종하는 것을 묵인도 해 주었다. 그러나 이 이선치도책은 북쪽의 여진에게는 때로 효과를 보았으나 왜구에게는 별무소득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무제구책 (以武制寇策 : 무력으로써 왜구를 제압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金士衡으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함으로써 왜구의 근원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1396년 (태조5년) 12월(정해) 에 태조는 문하 우정승 ★金士衡을 5도 병마도통처치사로 삼고, 예문춘추관 대학사 南在를 도병마사로 삼고, 중추원 부사 辛克恭을 병마사로 삼고, 전 도관찰사 李茂를 도체찰사로 삼아 전국의 군함을 모아 대마도와 일기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정벌군이 출사함에 태조는 남문 밖까지 나아가 이를 전송하였다. 이때 태조는 ★金士衡 5도 병마도통처치사에게 부월 (임금이 출정군 사령관에게 내리는 것으로서 이것은 임금의 명령으로써 적을 정벌하라는 수권인 동시에 왕의 상징이기도 하다) 과 교서를 내리고 안마와 모관, 갑옷과 활 및 화살, 약상자를 내렸다. 태조는 또한 남재, 이무 및 신극공에게도 가각 모관, 갑옷, 활과 화살을 내렸다.
태조가 내린 교서에 이르기를
"----- 불행하게도 (왜구가) 쥐새끼처럼 몰래 날뛰고 개처럼 훔쳐가는 일들이 거듭 일어났다. 때마다 지방 관헌에게만 (이들을) 쫓든지 잡으라고 해왔다. 이 왜구의 세력이 창궐하여 지방 관헌의 힘만으로서 제어하기 어려우므로 대신들에게 대마도 정벌을 명하였다. ----- 지시를 받은 장수들은 나가 수륙으로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하라. 그러면 변방이 언제나 평안하게 될 것이다. -----" 고 하고 있다.
태조실록에는 ★金士衡이 대마도를 정벌한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金士衡이 출정한 지 57일만인 1397년 1월 말에 돌아온 기사가 있다. ★金士衡이 개선하자 태조는 흥인문 밖에까지 나가 위로하며 맞이하였다. 그리고 2월에 태조는 ★金士衡에게 연회를 베풀어 칭찬하고 서대(물소 가죽으로 만든 띠로서 귀중품임)를 하사하였다.
김태서 (2004-02-07 00:13:00, Hit : 68, Vote : 0)
일기도·대마도를 정벌하러 떠나는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내린 교서
조선왕조실록
《태조 010 05/12/03(정해) / 일기도·대마도를 정벌하러 떠나는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내린 교서 》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으로 오도 병마 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남재(南在)로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삼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극공(辛克恭)으로 병마사(兵馬使)를 삼고, 전 도관찰사(都觀察使) 이무(李茂)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5도(道)의 병선(兵船)을 모아서 일기도(一쨓島)와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려고 떠날 때에, 임금이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이를 전송하고, 사형에게 부월(쯘鉞)과 교서(敎書)를 주고 안장 갖춘 말[鞍馬]·모관(毛冠)·갑옷·궁시(弓矢)·약상자(藥箱子)를 내려 주었으며, 재·무·극공에게는 각각 모관·갑옷·궁시를 내려 주었다. 교서는 이러하였다.“예로부터 임금 된 자는 항상 중외(中外)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힘을 쓰는데, 불행히도 쥐나 개 같은 좀도둑이 생겼을 때에는 오로지 방백(方伯)에게 책임을 지워서 몰아 쫓고 잡게 하였으며, 그 세력이 성해져서 방백(方伯)이 능히 제어하지 못할 때에야 대신(大臣)에게 명령하여 출정(出征)하게 하는 것이니, 소호(召虎)가 회이(淮夷)를 정벌한 것과 윤길보(尹吉甫)가 험윤(탮훋)을 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무릇 용병(用兵)의 도리를 한결같이 옛일을 따라서 일찍이 경솔한 거조가 없었던 것은 이들 백성들이 동요될까 염려하였던 것인데, 이제 하찮은 섬 오랑캐가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노한 지가 3, 4차에 이르러서, 이미 장수들을 보내어 나가서 방비하게 하고 있으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수륙(水陸)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一擧)에 섬멸하지 않고는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 경은 의관(衣冠)의 명문(名門)이며 조정에서는 재상의 큰 재목이라, 기품(氣?)이 삼엄(森嚴)하고 입지(立志)가 홍의(弘毅)해서 서정(庶政)을 처리할 때는 다 이치에 맞고, 인재(人材)를 천거하면 모두 그 소임에 합당하여, 밝기는 허(虛)와 실(實)을 잘 알고, 슬기로움은 외적의 난을 제어할 것이다. 이에 제도 병마 도통처치사(諸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절월(節鉞)을 주어 동렬(同列)을 시켜 돕게 하고, 널리 막료(幕僚)를 두어서 그 위엄을 중(重)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부복(俯伏)해서 명령을 들을 것이요, 적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肝膽)이 떨어질 터이니, 경은 앉아서 계책을 세워서 장수와 군사들을 지휘하여 두 번 출병할 일이 없게 하여, 만전(萬全)을 도모하여 나의 생각에 맞게 하라. 혹시나 장수나 군사가 군율(軍律)을 어기거나, 수령(守令)들의 태만한 일이 있거든 법대로 징계할 것이며, 크거나 작은 일을 물론하고 즉시 처결(處決)하라.”도당(都堂)에서 한강(漢江)까지 전송하였다.
김윤만 (2004-11-06 11:31:54, Hit : 37, Vote : 0)
익원공(사형)의 제1차 대마도 정벌
조선 초의 제1차 대마도 정벌
-왜구들의 끊임없는 노략질과 조선의 대마도 정벌 -
조선이 건국 초기부터 유지한 대왜구 유화책은 시간이 갈수록 왜구들의 준동으로 무색해 졌다. 조선이 건국된 이듬해인 1393년의 3월, 고만량(지금의 충남 보령 서쪽 22리 지역)에 일단의 왜구들이 침입하여 대담하게도 조선의 군선 3척을 빼앗아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1394년에 다시 경상도와 전라도에 각각 쳐들어 왔다. 조선 조정은 늘어나는 왜구의 침입에 골치를 썩이며, 왜구 격퇴에 애를 쓰고 있었으나 해안지방에 예기치 않게 출몰하는 왜구를 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1396년(태조 5년) 8월 9일에는 1백 20척의 왜구선단이 경상도의 동래, 기장, 동평성을 함락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뿐만아니라 대담하게도 조선수군의 군선 16척마저 빼앗아 달아나는 등 그 약탈의 수준이 가히 정규전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왜구들은 같은해 8월 18일에 경상도에 다시 쳐들어와 통진포의 군선 9척을 또 빼앗아 갔다. 아마도 왜구들은 아예 조선수군의 군선을 빼앗는 쪽으로 침탈목적을 바꾼 모양이었다.
왜구들은 같은 해 8월 23일에는 영해성을 들이쳤고, 11월에는 모두 5회에 걸친 약탈을 자행했다. 실로 왜구들이 쌀 창고에 드나드는 쥐**들처럼 설쳐 댓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조선 조정은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펼쳐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교린정책의 외교노선을 거두어 들이고 마침내 고려 말에 했던 것처럼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치기로 작정한다. 아울러 조선 조정은 다음과 같은 지휘체계로써 마침내 대마도 정벌계획의 수립에 이르렀다.
오도병마도통처치사 문하 우정승 : 김사형
도병마사예문춘추관대학사 : 남제
병마사중추원부사 : 신극공
도체찰사전도관찰사 : 이무
당시 정벌군의 지휘체계와는 별도로 정벌선단의 규모가 어땟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5도의 병선을 모아서" 추진했다는 내용이 눈길을 끌 뿐이다. 고려 말의 박위가 대마도를 칠 때 동원한 선단의 규모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조선의 대마도 정벌계획이 막 추진되던 무렵, 영해의 축산도(丑山島)에 정박중이던 왜구의 배 60여 척이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조선의 강경한 대마도 정벌계획을 감지한 왜구들은 급작스레 그 침략의 발톱을 감추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그 같은 왜구들의 투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조선 태조대에 정말 대마도를 정벌했을까?
조선의 남변이 거듭된 왜구의 약탈로 황폐화되자, 마침내 대마도 정벌선단을 구성하고 그 작전에 돌입했다. 그리하여 1396년(태조 5년)의 12월 3일 엄동설한의 날씨 속에서 태조 이성계는 문하 우정승 김사형을 비롯한 정벌선단의 지휘관들을 소집하였다. 이성계의 손에는 군율을 대행케 한다는 의미의 부원(도끼)이 있었고, 부월은 김사형에게 건네졌다. 이어 이성계는 교서를 통해 대마도 정벌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내가 즉위한 이래 용병(用兵)하는 도는 한결같이 옛것을 따라서 일찍이 가벼이 처리하지 않음은 백성들이 요동할까 우려했음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찮은 섬오랑캐들이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입한 지 서너 차례나 되어 이미 장수와 군사들을 보내 나가서 막도록 했다. 그러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 물길과 뭍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치 않으면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
<중략>
부월을 주어 한가지로 도열시켜 돕게하고 널리 막료를 두어 그 위업을 무겁게 하도록 하노라. 그러므로 제장들은 부복하여 명령을 받들것이요. 도적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떨어질 것이로다."
<태조실록 권 18, 태조 4년 윤 9월 초 8일 기사(己巳)>
<후략>
일찍이 왜구토벌의 위업을 남긴 이성계는 분명한 왜구토벌 의지를 만천하에 뚜렷이 밝힌 셈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벌선단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중간에 정벌선단이 뱃머리를 돌리기라도 한 것일까.
여기서 다시 검토해 볼 점은 왜구들의 투항 사례다. 조선의 강력한 토벌책이 현실화되면서 일부의 왜구들이 줄줄이 항복한 점은 아무래도 정벌선단의 토벌실시를 의문 속에 휘말리게 하기에 넉넉하다.
김사형이 이끌었던 정벌선단이 귀환할 때, 태조가 친히 흥인문 밖까지 출영하여 그들의 노고를 위로했다는 점은 우리를 아리송하게 만든다.
<전해종, "15세기 동아정세" "한국사~9집", 국사편찬위원회, 1973, 279쪽>
<이해철, "세종시대의 국토방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4, 재인용>
정벌과정의 노고를 위로했던 것일까.
또한 같은 해 2월 8일에는 의안백화, 좌정승 조준, 봉화백 정도전 등으로 하여금 김사형과 명에 다녀온 사은사 일행에 대해 잔치를 벌이게 조치한 점으로 볼 때 아무래도 태조조에 어떻게든 대마도 정벌이 펼쳐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출전 : 한민족의 대외 정벌기/박선식/청년정신/2004.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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