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1---1281년(70세) 7월, 2차 일본정벌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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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15 23:21 조회1,540회 댓글0건본문
1281.4. 중순 (동로군의 몽골 한족부대, 합포에 도착)
東路軍의 몽골·漢族 부대는 大都로부터 2개월에 걸쳐 행군, 4월 중순에 고려의 合浦에 도착, 고려군과 합류했다.
忠烈王은 그의 희망대로 再征 직전에 征日本行省의 左丞相을 겸직하게 되었다. ★金方慶도 都·洪茶丘와 同格인 征일본도원수에 임명되었다. 忠烈王은 東路軍이 모두 合浦(합포: 마산)에 집결하자 都·洪茶丘·★金方慶이 나란히 뒤따르게 하여 全軍을 閱兵(열병)했다. 이것은 제1차 원정 때보다 고려군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1281.5.3 (합포 출발)
東路軍이 합포를 출발한 날은 1281년 5월3일이었다. 東路軍과 江南軍이 이키島에서 합류하기로 한 것은 6월15일이었기 때문에 아직 40여 일이 남아 있던 시점이었다.
1281.5.21 (대마도 앞바다 도착)
東路軍이 對馬島 앞바다에 나타난 날은 5월21일. 일부 병력이 世界村 大明浦에 상륙, 對馬島 수비대를 격멸했다.
大明浦는 지금의 佐賀村이라는 것이 通說이다. 佐賀村은 대마도 東岸의 要津으로서 예로부터 외국선의 정박지로 알려져 있다.
1281.5.26 (이키도 아시베만 집결)
對馬島에 상륙하여 점령한 東路軍은 이어 이키島로 진발했다. 도중 大風을 만나 장병 130명, 梢工(초공) 36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이키의 아시베(芦邊)만에 집결한 것은 1281년 5월26일이었다.
아시베灣에 집결한 東路軍은 船匿城에 鐵砲와 短弓을 쏘면서 상륙을 개시했다. 이키軍은 상륙하는 東路軍에게 바위를 굴리고 長弓을 쏘면서 항전하다가 玉碎(옥쇄)했다. 현재, 아시베(芦邊)町의 이키神社에서는 이 젊은 무사를 祭神으로 받들고 있으며, 아시베港 뱃머리에도 그의 騎馬像이 세워져 있다.
1281.6.6 (하카타만 상륙)
이키島를 점령한 東路軍은 10일간 휴식하고 소부대만 잔류시킨 뒤 6월6일 하카타灣으로 침입했다. 그런데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발도로경질주)를 타고 하카타 灣岸으로 접근하던 東路軍은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동쪽 카시이(香椎)로부터 서쪽 이마즈(今津)까지의 해안선에 연 20km에 걸쳐 防壘(방루)가 축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높이 2m 전후의 방루에는 무수한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일본병들이 빈틈없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東路軍은 즉각 작전을 변경, 防壘가 없고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던 시카노시마(志賀島)에 상륙, 그곳으로부터 「海의 中道」를 통해 내륙부로 진입하려고 했다. 시카노시마에서는 100여m에 불과한 「海의 中道」만 건너면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나온 하카타 동북쪽 半島에 상륙할 수 있었다(지금 시카노시마는 연육교로 하카타 동북부와 연결되어 있음).
東路軍은 300척의 함대를 동북쪽 나가도(長門)로 파견, 간몬(關門)해협을 차단함으로써 혼슈(本州)로부터의 증원군을 저지하려고도 했다.
이런 작전은 일본軍 측도 예상하고 있었다. 우선, 시카노시마에 상륙한 東路軍에 대해 오토모 요리야쓰(大友賴泰)의 부대가 공세를 걸었다. 그것을 아키다(秋田城次郞)가 이끄는 關東軍이 측면으로부터 엄호하여 東路軍을 해상으로 내몰았다. 시카노시마 쟁탈전은 6월6일 밤부터 8일간 계속되어 東路軍이 하카타灣으로부터 퇴각한 것은 6월13일이었다.
1281.6.8
전황에 대해 高麗史節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金方慶은 6월8일 일본군과 力戰하여 참수 300여 급을 얻었지만, 洪茶丘는 일본군에 돌파되어 패주했다. 王萬戶가 이끄는 弓弩(궁노)부대의 구원에 의해 洪茶丘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다음날 6월9일에도 패전을 거듭했다. 게다가 陣中에 疫病(역병)이 나돌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3000명에 달했다>
한편 300척의 함대를 구성, 나가도(長門)로 향했던 東路軍의 一枝軍은 다시 2隊로 나뉘어 角島(츠노시마)와 蓋井島(후다오이지마)를 점거했다. 나아가 나가도國 豊浦郡의 도이가하마와 黑井村의 야츠가하마에 상륙을 개시했던 것은 6월8일부터 9일에 걸친 양일 간이었다.
이때 도이가하마의 경비를 맡고 있었던 것은 나가도의 수비군과 가마쿠라 막부 직속의 무사 正上左京亮의 부대였는데, 3500명 규모의 몽골軍에 패해 田耕村의 고센가하라까지 퇴각했다. 그러나 위급함을 들은 나가도의 守護軍은 關東으로부터 내려온 아다치 모리무네(安達盛宗) 부대 등의 증원을 얻어 6월15일 고센가하라 전투에서 몽골군을 패퇴시켰다.
야츠가하마에서는 그곳 城主 아오야마(淸山玄蕃丞)가 일족을 이끌고 나가도 守護가 파견한 부대와 함께 약 2000명의 몽골 상륙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城主가 전사한 가운데 일본군은 厚母(아쓰모)까지 퇴각했다. 이 방면의 몽골군도 6월13일 厚母분지에서 패퇴하고 말았지만, 그때까지의 전반적인 전황은 결코 東路軍에게 불리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江南軍과 연합하여 전략적 요충 하카타를 再공략하기로 했던 것이다.
江南軍은 사전 약정된 이키島가 아닌 平戶島에, 그것도 근 보름이나 늦게 도착했다. 江南軍은 平戶島 앞바다에 도착한 후 하카타灣岸의 방위가 견고한 것을 알고 松浦에 상륙하려고 했지만, 이곳도 松浦黨(마쓰라도우)의 격렬한 저항을 받고 물러났다.
1281.7.27 (양 8.19) (평호도 앞바다 강남군과 합류, 웅도 점령)
東路軍은 이키島로부터 平戶島 앞바다로 항행, 7월 상순에야 江南軍과 합류할 수 있었다. 이런 작전상의 불협화음이 바로 연합군이 지닌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東路軍과 江南軍을 총괄한 최고사령관은 蒙將 아타하이(阿塔海)였다. 그는 도원수들을 소집해서 일본 본토 공략을 위한 작전회의를 열었다. 공략 목표는 역시 일본 鎭西軍의 본거지인 大宰府였다. 아타하이는 일본군의 반격과 전염병 창궐로 탈락자를 낸 東路軍을 재편성하고, 하카타灣의 공격부서를 정했다.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平戶島로부터 동쪽으로 逐次(축차) 이동, 이마리(伊萬里)灣 입구인 다카시마(鷹島) 근해에 집결했던 것은 7월27일(양력 8월19일)이었다. 연합군은 먼저 응도를 포위, 즉각 점령했다.
연합군의 대선단이 鷹島 앞바다에 집결, 이 섬을 점령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鎭西사령부는 즉시 하카타灣 일대의 軍船을 鷹島 근해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일본 水軍으로서는 艦隊戰을 감행할 수 없었다. 수천 척에 달하는 연합군의 大함대가 鷹島 근해에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日本 水軍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은 연합군이 放心하는 틈을 타 夜襲(야습)을 감행하는 것뿐이었다.
『7월27일, 軍을 이동하여 鷹島에 이르니 곧 일본군의 軍船이 습격해 왔다. 이에 張百戶 장군은 즉각 대비, 부하들과 함께 주야로 응전했다. 일본군은 다음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 江南軍으로 참전했던 張百戶라는 장군의 墓碑(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1281.윤7.1 (양력 8.23) (강력한 태풍 몰아치기 시작)
東路軍과 江南軍이 합류함으로써 戰列을 再정비한 연합군은 하카타灣을 향해 진격하려 했던 직전에 뜻밖의 사태에 직면했다. 7월30일 밤부터 강력한 西北風이 몰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입춘 후 210일을 전후하여 일본 일대에 불어오는 颱風(태풍)이었다.
날이 바뀌어 閏 7월1일, 현행 양력으로는 8월23일이었다. 연합군 장병들은 크게 요동치는 함내에서 배멀미로 곤죽이 되었다. 태풍은 점점 거세어져 집채만 한 파도가 함대를 습격했다. 西北風이었기 때문에 鷹島 남단과 松浦 사이의 伊萬里灣에 정박하고 있던 연합군의 함대는 정면으로 강풍을 받았다.
연합군의 함대는 거친 파도와 바람에 휩쓸려 서로 충돌하거나 육지의 바위에 부딪혀 대부분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연합군 함대는 東路軍 900척과 江南軍 3500척, 합계 4400척. 서북풍이 불기 시작했을 때 응도 남단의 바다로 피난을 개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응도 남단 해역뿐만 아니라 응도의 북쪽 해역, 黑島 및 伊萬里灣 안쪽과 灣內의 御廚沖 방면의 해역과 玄界灘 등지에도 散開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풍의 계절이었던 만큼 바다가 거칠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시기에 海國 일본을 공략한다는 것은 무모했다. 태풍으로 큰 타격을 받은 연합군 중 일부는 간신히 鷹島의 船唐津으로부터 床浪·殿浦(토노노우라)에 이르는 南海岸에 漂着, 거기서 伐木하여 新造한 배를 타고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전원 전사했다. 鷹島에는 태풍의 피해를 받은 다수의 몽골군 장병이 도주해왔는데, 일본軍이 그들을 초토하기 위해 龍面庵이라는 곳에 진지를 설치했다. 사령관은 少貳景資로서 이 구릉지에 「御館」이라고 쓰인 標石이 남아 있다. 鷹島의 船唐津과 中川原은 일본군과 몽골군이 격렬하게 교전했던 곳으로서, 승리한 일본군은 몽골의 패잔병을 다수 참수하여 현재도 「首除(쿠비노키)」라고 하는 地名이 남아 있다. 그 전적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鷹島에 표착한 異賊 수천인, 이 가운데 깨어진 7, 8척의 배를 수리하여 몽골·고려인 약간이 타고 도주했다. 이것을 본 鎭西軍이 少貳景資의 지휘로 수백 척이 鷹島로 몰려갔다. 배가 없어 도주하지 못한 異國人 1000여 명이 항복을 구걸했지만 모두 붙들어 中河 하구에서 목을 쳤다>
위에 나오는 「中河(나카가와)」는 지금도 鷹島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작은 하천에 지나지 않지만, 이른바 「蒙古襲來遺蹟」으로서는 빠트릴 수 없는 현장이다. 궁지에 몰린 패잔병들도 최후의 항전을 감행, 日本 軍兵들도 다수 전사했다고 한다.
鷹島로부터 배후의 이마리灣 연안 지역 또는 灣內 御廚沖 방면에 산개해 있던 연합군 함대도 태풍에 의해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뉴스가 전해지면 하카타灣 방면에 포진했던 鎭西軍도 잔적토벌에 나섰다.
1281. 윤 7.7 (고려로 귀환)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이 초토전은 閏 7월7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아타하이·都·洪茶丘·★金方慶·范文虎 등 사령관들은 간신히 침몰하지 않은 군선들을 타고 고려로 돌아갔다.
현재, 鷹島의 남해안 床浪에서는 水中考古學에 의한 해저유적조사가 시행되어 인양된 다수의 침몰선박 및 해저유물이 鷹島町 新崎免의 町立 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鷹島 해저유물은 床浪지구뿐만 아니라고 남해안 전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鷹島의 南岸 床浪(토코나미)灣은 연합군 함대의 피해가 가장 컸던 장소였다. 이 해역의 실크層(두께 3m)의 모래층을 흡입기로 빨아 올리면, 아직도 700여 년 전의 遺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鷹島의 역사민속자료관에는 鷹島 해역에서 인양된 생활용품과 船具·무기가 다수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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