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1---1274년(63세) 10월, 고려사 김방경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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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15 23:20 조회2,144회 댓글0건본문
충렬공께서는 63세때인 1274년 여몽연합군을 이끌고 제1차 일본원정 길을 다녀 오셨습니다. 합포(경남 마산)에서 출발하여 대마도, 일기도를 점령하고 하카타만(현재의 후쿠오카)에 상륙하였으나 태풍으로 인하여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에 둘째아들 김흔, 큰사위 조변도 충렬공과 함께 합류하고 있습니다. ***셋째아들 김순은 1281년 2차 일본원정길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 고려사 104 열전 17 (김방경)
○ <원종> 15년에 제(帝)가 일본을 치고자하여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조(詔)하여 전함(戰艦)을 감조(監造)하게 하니 조선(造船)을 만약 만양(蠻樣)에 의거하면 공비(工費)가 많고 장차 일국(一國)이 근심하였다.
김방경이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가 되어 먼저 전라(全羅)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어 자문(咨文)으로 중서성(中書省)의 격문(檄文)을 받고 본국(本國 고려(高麗) )의 조선양식(造船樣式)을 써서 독촉하여 만들었다.
이해에 원종(元宗)이 훙(薨)하고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매 김방경이 홍다구와 더불어 단기(單騎)로 와서 진위(陳慰)하고 합포(合浦)에 돌아와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과 부원수(副元帥) 홍다구·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전함(戰艦)을 사열(査閱)하였다.
김방경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박지량(朴之亮)·★김흔(金)·지병마사(知兵馬事) 임개(任愷)로 부사(副使)를 삼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김신(金侁)으로 좌군사(左軍使)를 삼고 위득유(韋得儒)·지병마사(知兵馬事) 손세정(孫世貞)으로 부사(副使)를 삼고 상장군(上將軍) 김문비(金文)로 우군사(右軍使)를 삼고 나유(羅裕)·박보(朴保)·지병마사(知兵馬事) 반부(潘阜)로 부사(副使)를 삼아 3익군(翼軍)이라 이름하니 ★김흔(金)은 곧 ★김수(金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蒙古軍)·한군(漢軍) 25,000명, 아군(我軍) 8,000명, 초공(梢工)과 인해(引海)·수수(水手 수부(水夫) ) 6,700명, 전함(戰艦) 900여 소()로써 합포(合浦)에 머물러 여진군(女眞軍)을 기다리니 여진군(女眞軍)이 기일(期日)에 늦을까 하여 이에 발선(發船)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서 쳐서 죽임이 심히 많았다.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언덕위에 진(陣)을 친지라 박지량(朴之亮)과 김방경의 서()인 ★조변(趙)이 쫓으니 왜가 항복을 청하다가 다시 와서 싸우거늘, 홍다구가 박지량과 조변(趙)과 더불어 1,000여 급(級)을 격살(擊殺)하고 배를 삼랑포(三郞浦)에 버리고 길을 나누어 나아가매 죽인 바가 대단히 많았다.
왜병(倭兵)이 갑자기 이르러 중군(中軍)을 쳐서 검(劒)이 좌우로 부딛쳤으나 김방경은 의연하여 조금도 물러가지 않고 한 효시(嚆矢)를 빼어 소리를 가다듬어 크게 외치니 왜(倭)가 놀라 피하여 달아나므로 박지량(朴之亮)과 ★김흔(金)·★조변(趙)·이당공(李唐公)·김천록(金天祿)·신혁(新奕) 등이 힘껏 싸워 왜병(倭兵)이 크게 패하여 엎어진 시체가 삼대와 같았다.
홀돈(忽敦)이 말하기를,
“몽인(蒙人)이 비록 싸움에 익숙하였으나 어찌 이에 비하리오.”
하였다. 모든 군사가 같이 싸워 해가 저무니 이에 해산(解散)하였다.
김방경이 홀돈(忽敦)·홍다구(洪茶丘)에게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1,000리(里)에 현군(縣軍) 하면 그 칼날을 가히 당치 못한다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이미 적경(敵境)에 들어와서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즉 맹명(盟明)이 배를 태우고 회음(淮陰)이 물을 등짐이라 다시 싸우기를 청한다.”
하매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소적(小敵)이 견수(堅守)하면 대적(大敵)에게 사로잡힌다.’고 하였으니 피핍(疲乏)한 군사를 채찍질하여 날로 불어나는 무리를 당적함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회군(回軍)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유복형(劉復亨)이 유시(流矢)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오르므로 드디어 군사를 끌고 돌아올 때 마침 밤에 크게 풍우(風雨)가 있어 전함(戰艦)이 암벽(岩壁)에 부딛쳐 많이 파손(破損)되고 김신(金侁)은 물에 떨어져 죽었다.
합포(合浦)에 이르러 노획한 기장(器仗)을 제(帝) 및 왕에게 바치니 왕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장일(張鎰)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김방경을 먼저 돌아오도록 명하여 상주국 판어사대사(上柱國判御史臺事)를 더하였다.
▶해상왕국 고려의 造船과 관련해서는 KBS1TV 역사스페셜 (http://www.kbs.co.kr/history/)에서 방영된 다음을 보면 대본과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 1999. 03. 20 방영 <영상복원 - 해상왕국 고려의 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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