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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1---1274년(63세) 10월, 1차일본정벌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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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15 23:18 조회1,8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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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 10. 3

그런데 그 출정을 앞둔 6월 중순에 高麗 국왕 元宗이 재위 15년에 타개했다. 元의 大都에서 세자 諶(심)과 황녀 쿠츠르가이미시(쿠빌라이의 딸인 齊國大長公主)의 결혼식이 거행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세자 諶(忠烈王)의 즉위식전과 元宗의 服喪(복상)이 잇달아 거행되는 바람에 출정의 시기가 연기되었다.

원정군이 合浦를 출항한 것은 元宗의 유해가 開京 교외 소릉에 안장된 9월12일의 다음 달, 즉 1274년 10월3일이었다.

征東行營의 소재지였던 마산시립박물관 뒷산 주변은 현재 추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산중턱에 위치한 박물관의 아랫동네(자산동 18번지) 큰길가에 蒙古井(몽고정)이 있다. 몽고정은 몽골의 둔진군에게 用水를 공급했던 우물로 추정되고 있다.

麗蒙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위해 출항했던 뱃머리는 박물관 정원 분수대에서 내려다보면 대우백화점이 보이는데, 그 왼쪽 일대이다. 제1차·제2차 麗蒙연합군 함대의 출항지였던 合浦洞(합포동) 일대는「마산의 자갈치」인 오동동과 馬山灣의 맨 안쪽인 산호동 사이의 동네다. 그 옆으로는 마산수출자유단지가 펼쳐 있다.

 


1274.10.5

麗蒙연합함대는 출항 이틀 후인 1274년 10월5일(이하 麗蒙연합군의 日本정벌 관련 날짜는 모두 음력) 오후 4시경, 對馬島 아랫섬의 사스우라(佐須浦)에 상륙했다. 사스우라가 바로 지금의 코모다이다. 對馬島의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와는 아랫섬의 「中央山地」를 가운데 둔 반대측 북서해안에 위치해 있다.

 


1274.10.6

다음날인 10월6일 麗蒙軍은 다시 전함 7, 8척으로부터 약 1000명의 軍勢를 상륙시켜 맹공을 가했다. 전투는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2시간 만에 對馬島軍은 전멸했다.

「對馬島史」에는 연합군의 主力은 對馬 중앙부 아소우(淺茅)灣에 집결, 그 일부가 코모다에 내습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코모다 이외에 對馬의 주요 거점들인 히타카츠(比田勝), 미네우라(三根浦), 카시우라(加志浦) 등지에도 상륙, 거기서도 在地武士들과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군은 이후 열흘 가까이 對馬島에 머물며 약탈을 감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對馬島를 정복한 연합군은 이즈하라港 등지에서 약 열흘간 휴식을 취한 후 다음 공격목표인 이키시마(壹岐島)로 진발한다.

 


1274.10.14

對馬島를 초토화하고 출항한 麗蒙연합군의 함대가 이키시마 북부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74년 10월14일 오후 4시경이었다. 大船 2척으로부터 약 400명의 몽골군이 상륙하자 가쓰모토의 村人들은 이를 세도우라(지금의 아시베港)의 후나카쿠죠(船匿城)에 급보했다. 城主는 이키의 守護代인 다이라노 케이류우(平景隆)였다. 가쓰모토에 상륙한 麗蒙연합군은 하카타(博多)港 공격에 편리한 세도우라를 점령하려고 동쪽으로 진격해 갔다.

세도우라에서 平景隆은 일족의 郎黨(낭당: 武家의 家臣) 100기를 이끌고 서쪽의 가쓰모토를 향해 출진했지만, 中途의 히츠메城(勝本町 新城) 앞에 이르면 연합군의 대부대와 조우하게 된다.

 


1274.10.15

다음날인 10월15일, 연합군은 이른 아침부터 히츠메城을 포위, 맹공을 가했다. 치열한 격전지였던 큐슈의 이키섬. 이곳은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옆에는 예사롭지 않은 무덤이 있다. 원구 천인총이다. 당시 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과 연합군이 함께 묻혀 있다. 7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키섬에는 당시 전쟁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지역 토산품 가게에서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목제품이 있다. 귀신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현지인들은 무쿠리 고쿠리라고 부른다. 무쿠리 고쿠리 무슨 뜻일까?

"이는 두 번에 걸친 몽고 침략,몽고군과 고려군의 침략으로 남자는 모두 살해돼 전멸했기 때문에 그 공포감과 처참함 잔학함을 나타내는 말로 예전부터 우는 아이를 달래때 사투리로 무쿠리 고쿠리 온다는 식으로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로 부터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연합군에 대한 공포는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1274.10.17

이키島를 초토화시킨 麗蒙연합군은 이어 肥前(히젠: 지금의 나가사키縣) 마쓰우라(松浦)郡의 다카시마(鷹島)를 습격했다.

1274년 10월17일, 麗蒙연합군은 다카시마(鷹島)로 침입, 이 섬의 阿翁과 船黨津의 해안으로부터 상륙했다. 한편 松浦黨의 무사들도 다카시마의 殿浦에 상륙, 남방의 곶(岬)에 日本山城을 구축하여 내습하는 麗蒙연합군에 항전했지만,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특히 다카시마 해역은 제2차 원정 때의 主戰場이었다. 지금도 다카시마 해역에선 麗蒙연합군의 유품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지금도 해마다 일본 나가사키와 큐슈 앞바다에서는 7백년전 유물들이 건져지고 있다. 깊숙한 바다속에서 잠자고 있던 오래된 유물들 유물표면의 조개껍데기들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칼과 갑옷들도 함께 나오고 있다. 갑옷 이 유물들은 일본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거대한 규모의 닻이다. 길이가 무려 7미터나 된다. 거대한 닻을 사용했던 7년전의 배 그것은 바로 고려몽고 연합군의 일본 상륙작전에 사용되었던 배 전함이었던 것이다.

고려 몽고 연합함대가 정박했다가 폭풍을 만난 곳이 바로 나가사키현 타카시마다. 이곳엔 7백여년전의 침몰선이 인양돼 있다. 배는 오랜 세월에 부식되어 사라졌지만 그 조각들이 남아있다. 인양된 유물은 도자기, 돌절구 등 다양하다. 그런데 인양된 유물 중에는 예사롭지 않은 것이 있다. 1994년 타케시마 해역의 고우자키항에서 출토된 소나무 닻이다. 놀랍게도 닻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발견됐다. 그런데 인양시 닻에는 이 두개의 돌이 함께 놓여 있었다 이 돌의 크기는 2미터. 이것은 닻의 하나가운데 박았던 돌이다. 닻돌이라고 한다. 하카다만 연안의 해저에서 인양된 닻돌은 모두 6개.

麗蒙연합군은 이어 大宰府 공략을 위해 하카타灣으로 진격한다. 연합군 함대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玄界島(겐카이도)의 西水道를 거쳐, 하카타灣에 그대로 침입했다. 6차례의 蒙使 파견, 특히 두 번에 걸친 趙良弼의 장기체재에 의해 규슈의 지리·풍속 등을 사전에 탐지해 두었기 때문인 것 같다.

 

 

1274.10.19

10월19일, 우선 일부 병력은 하카타灣의 서부 해안 이마쓰(今津)에 拔都魯輕疾舟를 대고 상륙하여 외곽에 거점을 확보했다. 다음날인 10월20일, 여명과 함께 하카타灣의 중앙부인 早良川(사와라가와)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 이키노하마(지금의 오키노하마), 하코자키(箱崎)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전개된다.

10월19일 이마쓰(今津) 해안에 상륙한 몽골군 支隊는 이마쓰의 監視隊를 밀어내고 포진, 그 일부가 다음날 하카타灣 중앙부인 모모치(百道) 해변에 상륙할 主力軍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東進하여, 모모치하마의 남방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했다. 그때 祖原지구의 방어를 책임진 것은 하라다(原田) 一族과 마쓰우라(松浦)黨이었는데, 몽골군의 集團戰法과 新兵器의 위력 앞에 무참히 패퇴했다. 지금은 공원화한 소하라山에는 「元寇戰跡」碑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 麗蒙연합군의 本陣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1274.10.20

10월20일, 드디어 ★金方慶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메이노하마(姪浜) 앞 小戶海峽을 항행하여, 여명과 더불어 사와라가와(早良川)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早良川의 지금 이름은 무로미가와(室見川)이다.

고려軍이 상륙한 지점에는 현재 초현대식 건물 「후쿠오카(福岡) 타워」(높이 123m에 전망대가 있음)가 들어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그 바로 남쪽에는 후쿠오카 박물관, 동쪽엔 일본 프로야구단의 하나인 「다이에 호크스」의 홈그라운드인 「후쿠오카 돔」이 이웃해 있다.

이 전투에서 고려軍은 白道原을 완전히 확보하고 東進하여 현재 후쿠오카의 중심부인 鳥飼·別府·赤坂를 강습했다. 하카타의 이키노하마 앞바다로 침입한 몽골軍의 主力도 이키노하마와 하코자키(箱崎)에 상륙하여 少貳·大友·島津의 부대를 패퇴시켰다. 이로써 일본군 측의 하카타灣 해안방위선 30km가 모두 붕괴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20일의 하카타의 하코자키 지구 전투에서는 상륙한 麗蒙연합군을 島津久經의 부대가 용감하게 맞싸웠고, 하카타의 이키노하마의 전투에서도 少貳景資(經資의 동생으로 前線사령관)의 부대는 노도와 같이 몰려오는 몽골군에게 밀리면서도 힘껏 항전했다. 그는 스스로 長弓을 쏘아 몽골군의 副元帥(부원수)를 馬上으로부터 추락시켰다.

하카타灣岸에 있어서 양군의 主力戰은 10월20일 새벽부터 일몰까지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 있어서 일본군은 그 편성·장비·전투법의 어느 면에 있어서도 연합군보다 열등했다.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아주 오래된 유물의 복사본이 있다. '몽골습래회사'.바로 여기에 고려몽고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담겨 있다. 그림은 당시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한 일본인 무사의 활약상을 커다란 줄거리로 삼고 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이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물체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쿠마모토현 타케자키 마을. 이절에는 희귀한 사료가 전해지고 있다. 7백년전의 전쟁을 전하는 두루마리 그림이다. 몽고 습래 회사, 바로 고려 몽고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담겨 있다. 고려 몽고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는 것이다. 몽고습래회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물체는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7백년전의 상황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림은 당시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일본무사 스에나가의 활약상을 커다란 줄거리로 삼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인 스에나가는 실존인물이다. 절의 뒤쪽에는 실제로 그의 무덤이 있다. 당시 이 지역의 영주였던 스에나가는 전쟁에서 자신이 싸운 모습을 화가에게 전달해 그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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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만여명으로 이루어진 고려군을 이끌고 1274년 10월 지금의 마산인 합포를 떠난다. 연합군의 상륙지는 모두 세곳. 그중 ★김방경부대는 소하라 지역으로 상륙한다.

1274년, 일본 본토인 하카다 연안에 고려 몽고 연합군이 속속 상륙한다. 본격적인 진격을 앞두고 고려 몽고 연합군은 이곳에 진을 친다. 몽고습래회사 그림의 이 장소는 소하라 라는 곳이다. 해안가 바로 위. 고려 몽고 연합군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야산에 진을 쳤다. "저쪽에서 몽고와 고려군이 상륙합니다 그리고 이 소하라 산이라는 낮은 산에 진을 친다 이 진을 친곳이 에마키에 이렇게 그려져 있는 곳이다" 큐슈중심부로 나가기 위해선 소하라를 지나야 한다. 여기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몽고습래회사의 주인공인 타케자키 스에나가의 첫 전투라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스에나가가 싸웠던 전투 장면으로 유명한 몽고습래 회사 화면에도 일본군은 소하라에서 싸웠다는 기사가 나온다 스에나가가 싸우는 그 장면은 소하라 진입한 고려군과 일본의 무사들이 싸웠던 전투 장면이라고 추정"

 "이 두루마리 그림에는 1281년의 두 번째 침략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이곳 이키노 마츠바라 지방입니다

소바라로부터 赤坂에 이르는 戰場에서는 鳥飼瀉 부근이 습지대였던 것이 일본군에겐 다행스러워 한동안 연합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카타 지구에서는 少貳·島津 부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일거에 동남방이 뚫렸다. 몽골군은 奉行所를 습격, 하카타町의 민가와 氏神을 모신 쿠시다(櫛田: 즐전)神社를 불태웠다.


특히 大友賴泰가 수비하고 있던 하코자키(箱崎)지구가 뚫리자 鎭西軍 전체가 大宰府의 최종 防衛라인인 미즈키(水城: 수성)로 퇴각했다. 이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들이 최고로 숭배하던 武神을 모신 신사 ♥崎宮(거기궁: 하코자키구우)이 兵火로 소실되었다.

하코자키궁은 당시 전쟁을 기리는 신사다. 이곳 유물 창고에는 일본 원정때 연합군이 사용한 활이 보관돼 있다. 연합군측의 장군이 썼던 활이라고 한다. 활의 크기는 1m20cm미터 남짓, 전형적인 우리 활의 모양이다. 재질은 뽕나무와 대나무로 되어있고 나무로 된 몸체는 가운데가 쇠로 연결돼있다. 활의 양끝은 고래뼈를 붙였다

소바라 및 아카자카(赤坂) 지구에 있어서 일본군의 善戰에도 불구하고 하코자키(箱崎) 지구에서 劣勢(열세)에 처한 大友·島津 부대의 패퇴에 의해 일본군은 하카타灣으로부터 50여 리 밖 大宰府의 서쪽 방벽인 미즈키(水城: 수성)로 일제히 철퇴했다. 후쿠오카 일대는 방어전을 전개할 만한 요새지가 별로 없는 평야지대이기 때문이었다.

오토모(大友)·시마즈(島津), 양군의 철퇴에 따라 하코자키팔번궁의 宮司는 御神體를 받들어 宇美(粕屋郡 宇美町)의 極樂寺로 피란했다. 그 직후 일본 3大 社殿의 하나인 하코자키神社는 몽골군에 의해 불탔다.

 

몽골군은 하카타灣에 상륙하면 곧장 大宰府로 진격해서 이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몽골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일몰인 데다 地理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10월20일의 전투에서 主力병기인 短弓의 화살이 다했기 때문이다.

10월20일 밤, 연합군은 勝勢에도 불구하고 陸上 교두보에서 野營하지 않고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를 타고 하카타灣에 떠 있던 군함 千料舟로 물러났다. 육지에서 宿營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夜襲(야습)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귀함 후 연합군 수뇌부는 전투를 계속할 것인가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作戰會議(작전회의)를 열었다.

★金方慶이 말하기를, 『우리 兵들이 이미 敵陣에 침입해서 잘 싸우고 있어 「지금부터 一步」라는 상황에 있다. 옛날 秦(진)의 명장 孟明(맹명)은 (상륙 후에) 스스로 (타고 온) 배를 불태웠고, 漢의 淮陰侯 韓信(회음후 한신)은 背水陣(배수진)으로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故事에 따라 決戰을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했다.


高麗의 사령관 ★金方慶은 하카타 교두보에서 野營한 뒤 다음날 일본군과 決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총사령관 ♥都와 右副元首(우부원수) 洪茶丘는 이 이상 싸워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지지 않을 것이니 만큼 철병해야 할 것이라고 거부했던 것이다.


한편 지휘부의 견해가 엇갈린 상황에서 歸艦(귀함)한 麗蒙연합군은 10월20일 심야로부터 21일 새벽에 이르는 사이에 하카타灣으로 몰아닥친 大폭풍우로 궤멸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1274.11.20
高麗史에는 『이번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의 총수가 무려 1만3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 병력은 꼭 한 달 후인 11월20일 合浦로 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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