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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24 18:08 조회1,310회 댓글0건본문
* 김주 묘
1563년(명종18) 5월, 공이 종계개정진청사 겸 진하사로 연경에 들어 갔을때 이질을 얻었으나, 병을 무릅쓰고 일을 완수하였다. 9월 17일의 초야에 빈관(賓館) 옥하관(玉河館, 현재의 수도빈관<首都賓館> 자리)에서 졸하였다. 향년 52세였다. 이 상서가 부음을 듣고 놀라고 서글퍼하여, 은(銀) 십량을 내고, 제독주사(提督主事) 호정(胡定)이 붉은 빛 단자(段子) 한 필을 보내어 부의에 쓰게 하고,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며 괴로워하고 측은해 하는 뜻이 거듭 언사 사이에서 나타내었다. 명나라 세종도 역시 애도하는 뜻을 가지고 특별히 예부에 명령하여 상례를 잘 치르게 하였으니, 관(棺)은 자작나무로 하고 폐백은 자폐(紫幣)로 하게 하였다.
11월 25일, 먼저 온 통사(通事)가 공의 부음을 알리자, 상이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이틀간 중지하고, 소찬(素饌)을 올리게 하며, 특별히 자헌대부(資獻大夫) 예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성균관사에 추증하였다. 개종계 주청사(改宗系奏請使) 증예조판서(贈禮曹判書) 김주(金澍)에게 전(田) 30결(結)과 외거 노비(外居奴婢) 5명을 하사하라고 정원에 전교하였다. 12월 11일, 공의 영구가 한양에 이르렀다.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을 하였다.
노저(鷺渚) 이양원(李陽元) 공이 공의 관을 호상하고 돌아올 때에 만리 이역의 땅에 행색이 처량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역졸(驛卒)로 하여금 방울을 흔들면서 전도(前導)하게 하니, 소리가 공중에서부터 나서 말하길, “내가 이번 가는 행렬 속에 있다.”라고 하였다. 상여 앞에 방울을 흔들면서 전도하는 일이 이때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1565년 정월 27일, 예장(禮葬)을 내려주었다. 여주(驪州) 백양동(白壤洞) 선영의 국내(局內)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벌에 공을 안장하였다.
1580년 윤4월 23일,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가 졸하였다. 8월 17일, 정부인을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1583년 5월, 비갈(碑碣)을 세웠다. 묘표음기(墓表陰記)는 우암집에 실려 있으나 비갈(碑碣)의 소재는 알 수 없다.
매년 한식날에 묘전에서 시제를 봉행하고 있다.
* 우암사(寓菴祠) (이천 율면 본죽리)
1590년 8월 1일, 공은 3등 공신으로 수충익모 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화산군(花山君)에 책봉되었다. 책훈(策勳)하는 날에 교서가 내려왔다. 이어서 사당에서 신주를 옮기지 말고 늘 제사하도록 명하였다.
1940년대 초 여주 백양동에서 공의 사당 우암사(寓菴祠)를 이천 밤골로 이전 개축(改築)하였다. 6.25 등을 거치면서 퇴락하여 정문과 담장도 무너진지 오래되었다. 1998년 10월 泰相이 어머니(경주김씨)의 생전 소원에 따라 우암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년 일에 불천위제를 모시고 있다.
부조위란 不遷位(불천위)라고 해서 본래 제사는 고조 할아버지까지 4대奉祀(봉사)를 하고 4대가 지나면 墓祭를 지내고 더 이상 제사지내지 않게 되어 있으나,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학덕이 높은 분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영원토록 位牌(위패)를 '옮기지 않고 (不遷불천)' 모시는 것을 허락했는데, 그 위패를 영구히 모시는 사당을 不 廟(부조묘)라 하고, 불천위에 해당하는 조상과 그 배우자는 예외로 영구히 매년 기일에 제사를 받게 된다. 따라서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그 가문의 영광이며 권위로 여기게 된다.
* 김주 신도비
공의 후손 진사 호윤(好胤, 1814년 生, 1852년 생원급제)이 뒷사람이 혹 공의 훈적(勳績)과 덕업(德業)이 탁월함을 잘 모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다시 목판으로 새기려고 하면서 묘지명을 이돈우(李敦宇, 1801∼1884)에게 부탁하였다. 이돈우는 공의 후손 사선의 외손자이다. 명묘지장(明廟誌狀), 국조보감(國朝寶鑑) 및 야사(野史)에 실려 있는 내용을 엮어서 기록하였다.
공 몰후 357년(1920년) 庚申 7월에 12대손 장성군수 연하(演夏) 근서(謹書), 13대손 각경(珏卿) 추기(追記)하였다.
2004년 4월 화산군종회에서 문단공 교지 기록에 의거 1字 수정하고(資憲大夫⇒正憲大夫) 거북좌대에 용머리갓 높이 7자로 규모를 크게 하여 개수(改竪)하였다. 구 신도비 탁본(2003년 10월) 그대로 비문과 서체를 똑같이 제작하였고, 3월 27일 구 신도비를 현 위치에서 3m 뒤에 매립하고, 4월 2일 신도비를 세웠으며, 4월 5일 70여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화산군 한식차례와 화산군종회 정기총회를 겸하여 신도비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 문단공 김주 시장(諡狀)
1790년(정조14) 4월 11일, 태상시(太常寺)가 시호를 의논하였다. 시장(諡狀)은 1789년 맹춘에 이복원(李福源)이 지은 것이다. 이복원은 金思義의 처부이다. 3망을 올렸는데, 문간(文簡), 문단(文端), 정민(貞敏)이었다. 상(정조)이 문단에 비점을 쳐서 내려 보냈다. 시법(諡法)에 따르면 박학능문(博學能文 ‘박학하고 문장에 능함’)을 문(文)이라 하고 수례집의(守禮執義 ‘예를 지키고 의리를 고수함’)를 단(端)이라 한다. 1793년 봄, 연시연(延諡宴)을 행하였다.
공은 1544년 시강관이 된 이후 주역(周易), 강목(綱目), 서전(書傳) 등을 진강(進講)하였는데, 특히 서전(書傳)에 능통하였다. 후에 여러번 전경문신(專經: 특정한 경전에 전공을 지닌 문신)에 올랐고, 1560년에는 문장양망(文章養望)으로 선발되어 왕명을 받들어 배율(排律)을 지어 올렸으며, 오상(吳祥), 정유길(鄭惟吉), 민기(閔箕), 심수경(沈守慶 ), 이량(李樑), 이이(李珥), 임수(林洙)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문장양망으로 선발되어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렸다. 또한 임당 정유길(鄭惟吉)과 함께 문형(文衡)에 천거되기도 하였다. 초서(草書)를 잘 썼다.
*광국공신 녹권 *광국공신 회맹록 *광국지경록
광국공신(光國功臣)은 조선시대에 종실의 계통을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로, 1590년(선조23) 그 동안 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오거나 또는 주문(奏文)을 지은 이로서 공로가 뚜렷한 사람 19인을 선정, 이들을 다시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논공한 뒤 공신에 책봉한 것이다. 1590년 8월 1일, 공은 3등 공신으로 수충익모 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화산군(花山君)에 책봉되었다. 책훈(策勳)하는 날에 교서가 내려왔다. <광국공신 녹권>은 한석봉이 썼는데, 현재 하회마을 충효당 영모각에 소장되어 있다. <광국지경록>은 조선 선조 때의 종계변무(宗系辨誣) 완수를 축하해 펴낸 시집 1책으로, 현재 청주고인쇄박물관에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이어서 사당에서 신주를 옮기지 말고 늘 제사하도록 명하였다. 공의 장자 정남(正男)은 일찍 죽었는데, 증 형조좌랑에 추증하였다. 또 차남 후남(厚男)은 광릉참봉(光陵參奉)에 배수되었다. 공의 부친(김공량) 에게 순충적덕 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경연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홍문관대제학 지춘추성균관사(兼知經筵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弘文館大提學 知春秋成均館事) 안원군(安原君)을 추증하였다.
1591년 선조가 임해군, 광해군을 비롯하여 개국공신이하 광국공신 및 자손 등을 거느리고 會盟式을 거행하였다. 공의 둘째아들 전력부위 충좌위 부사용 義南과 셋째아들 생원 季南이 참석하였다. (현재 광국공신會盟錄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 안원군 김공량 묘와 묘갈
*안원군 김공량 묘갈 탁본 전후면 (2003년 10월)
화산군 33세, 1544년 5월 27일, 부친 판서공(判書公) 김공량(金公亮, 1472∼1544)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송별하며 부의(賻儀)를 내리셨다. 이어서 9월 17일, 모친 정부인(貞夫人) 이씨의 상을 당하였다. 세자가 또 부의를 보내었다. 10월 20일에 고(考)와 비(?)를 여주(驪州) 백양동(白壤洞) 선영 안 정좌(丁坐) 벌에 합장하였다.
1546년 8월 15일, 부모의 묘도(墓道)에 비갈(碑碣)을 세웠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판서가 명을 짓고, 동종(同宗)의 동고(東皐) 김로(金魯) 교리가 글씨를 썼다. 12월에 상기를 마쳤다.
* 병사공 김공석 신도비와 묘
*병사공 김공석 신도비 전후면 (2003년 10월)
화산군 41세, 1552년(명종7) 공의 숙부 김공석(金公奭, 1477∼1553)이 다시 청홍도 수군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가 되었으나, 불과 1년이 안되어서 계축년 가을에 조카인 공이 사은사로 왕명을 받아 연경으로 갈 때 청홍도(淸洪道 *충청도)의 수영(水營)에서 질병으로 생을 마치시니 향년 77세였다. 다음 해 2월 25일에 터를 가려 여주(驪州) 사동(蛇洞)의 선영 곁에 장례 지내졌다.
1555년 고애자(孤哀子) 김탁이 빗돌을 갈고 깨끗하게 한 뒤에 4촌형안 공에게 청하기를, “선군의 자취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의당 형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형이 꼭 명을 지어주시오.” 하였다. 이에 김주(金澍)가 숙부 병사공(兵使公) 김공석(金公奭)의 신도비문을 지었고, 당대의 명필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고, 박영(朴詠)이 전(篆)을 써서 세웠다.
*우암집
화산군께서는 조선조 중종, 인종, 명종조에 8문장의 한 분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문장과 경학에 출중하셨는데, 1563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연경(燕京)에 가셨다가 임무를 완수하시고 그곳 객관 옥하관(玉河館)에서 52세를 일기로 돌아 가셨다. 가전(家傳)하기를 옛날 문집이 원래 7책이었다고 하나, 임진·병자의 병란을 거치면서 가승(家乘)과 유집(遺集)을 모두 잃어 버렸다.
1789년 4월, 6대손 래(禾來)가 1백 편에도 미치지 않았지만 몇해동안 모은 시문 등과 래의 당질(堂姪) 득현(得顯)이 수집한 십여 단의 기록을 합하여 우암유집(寓庵遺集) 7권1책을 목판본(木版本)으로 간행하였고, 1934년 3월, 문연(文演)이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대가들의 책상자를 샅샅이 뒤지고 명산에 비장되어 있는 것을 두루 채집하여 주연(?演), 연하(演夏)와 의논하여 우암집(寓庵集) 6권3책을 목활자본(木活字本)으로 중간(重刊)하였다.
*경진보
현존하는 안동김씨 最古의 족보는 임진왜란 12년전인 1580년(선조13)에 간행한 경진보이다. 억령(億齡)이 序를, 제현(齊賢)이 跋, 찬(瓚)이 선조시문 跋을 지었다.
同宗 중에 유식한 인사들은 일찍이 이에 개탄하여 혹은 사사로이 보첩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전해주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것이 소홀하고 틀리는 등 여러 폐단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胤先(=익 조카)이 原稿를 正言공 익에게 위탁하였던 바 己卯연간(=1579)에 익이 이를 수정하려고 뜻을 두고 일가의 보첩을 만들었으나 또한 간행도 못하였다.
그후에 곽(=제현의 부)이 화성원이 되어 귀양살이를 하던 지금의 선공부정인 柳希潛(류희잠)에게 부탁해서 원고를 정리시켜 족보를 완성하니 譜가 무릇 7권이 되었으나 다만 외파에 이르러서는 派列의 門別이 많으므로 도리어 宗系를 상세히 바로 잡을 수가 없음을 제현이 항상 고민하여 왔었다.
그런데 丁丑 년간에 마침 玉山(현재의 전남 해남군)으로 出宰(출재)의 명을 받아 부임초에 京中에 거주하는 여러 宗長들게 품의하고 또한 지금의 강화부 伯令공 오와 상의하여 本譜와 대조하고 근일에 편찬한 파평윤씨와 전성이씨 등의 姓譜를 모방하여 外孫의 지파는 삭제하고 다만 同姓 자녀만 기록하니 그 근원의 분파가 역력히 일목요연하게 나타나고 간략하고도 상세하고 간단하고도 긴요하니 다시 前日의 廣大하고 복잡한데 비할 바가 아니었다.
正言공 익의 손자인 천안군수 昉이 선대의 뜻을 잘 이어받아 職工을 모집하여 刻字를 시작하였으나 行狀과 序文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을 이제 강화부사 오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로부터 이를 다시 교정하여 비용을 들여 출간하였다.
<주석 보완>
김권(金權) / 肅宗 39 增廣 進士
김권(金權)
경종(景宗) 3년 (계묘, 1723년), 증광시(增廣試) 병과28(丙科28)
인적사항
생년(生年) 계유1693(癸酉1693)
자(字) 여중(汝中)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가족사항
부(父) 김성징(金聖澄)
조부(祖父) 김황(金?)
증조부(曾祖父) 김석기(金碩基)
외조부(外祖父) 임성(林?)
처부(妻父) 윤휘전(尹彙全)
이력 및 기타사항
전력(前歷) 진사(進士)
관직(官職) 지평(持平)
○禾來래는 ?1768년 안렴사공 행장을 짓고, 1789년 우암집을 엮었으며, 得顯득현과 權권은 1739년 기미보 발행에 참여하였고, 演夏연하는 외부주사 歷참사관 검사도사무관 승통정대부 정3풍 행장성군수를 지냈으며, 화산군 김주 신도비를 서하였다.
1900년대 초반의 유학 가문
유생들의 명부인 1928년 해동청금록(海東靑衿錄), 1929년 <조선청금록>에 등재된 화산군 후손은 다음과 같다.
--권1 경기도 광주군
★김사필(金思弼) 여뢰(汝賚) 류암(柳庵) 안동인(安東人) 변무공신 화산군 주 후(辨誣功臣 花山君 澍 后) 참봉(參奉)
★김재형(金在衡) 천교(天交) 우암(又岩) 안동인(安東人) 변무공신 화산군 주 후(辨誣功臣 花山君 澍 后) 직원(直員)
--여주군
★김세경(金世卿) 문백(文百) 만포(晩浦) 안동인(安東人) 안렴사 오은 사렴 후(按廉使 梧隱 士廉 后)
이천군 원(元) 음죽(陰竹:경기도 이천 일부와 충북 음성군에 걸쳐 있던 지명)
★김각경(金珏卿) 우일(佑一) 송석(松石) 안동인(安東人) 변무공신 화산군 주 후(辨誣功臣 花山君 澍 后) 의관(議官)
--권5 충청남도 홍성군 원 결성(結城:현 충남 홍성군 일부 지역)
★김원회(金元會) 종린(鍾麟) 안동인(安東人) 문단공 우암 주 후(文端公 寓庵 澍 后)
★김연규(金演圭) 치정(致貞) 시남(枾南) 안동인(安東人) 문단공 우암 주 후(文端公 寓庵 澍 后) ※枾 - 시(?)의 본자(本字)
★김영회(金英會) 공일(供日) 안동인(安東人) 문단공 우암 주 후(文端公 寓庵 澍 后)
예산군 원 대흥(大興:현 충남 예산군 대흥면 일대)
★김두회(金斗會) 주원(周元) 서암(瑞岩) 안동인(安東人) 문단공 우암 주 후(文端公 寓庵 澍 后) 유문학(有文學)
--권7 전라남도 장성군
★김연하(金演夏) 벽농(碧農) 안동인(安東人) 화산군 주 후(辨誣功臣 花山君 澍 后) 군수(郡守) 문학덕행 당세아유(文學德行 當世雅儒)
26) 김문연(金文演)
1900년대 초반 외부주사로 종사에 헌신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 1919년 항우전, 몽학지남
○ 1926년 안렴사공파 세보 <병인보> 발간에 참여하여 서문을 짓고, 몽학지남2000자
○ 1933년 (=청천파)김재철 조문객 명단에 주연 등과 함께 명단이 있고
○ ?1934년 주연 등과 함께 우암집을 보완 중간하고 권말에 전 외부주사 문연이 중간발을 썼다.
○ 1935년 대동보 <을해보> 발간에 참여하여 서문을 짓고
○ 1940년(庚辰 仲夏) 안동 녹전 죽송리 재실 음수재 현판을 書하였다.
○ 족보에 김문연 찬 [원류고증] 이 있다.
--우암집 (寓菴集 ) : 조선 중기의 문신 ★김주(金澍)의 시문집. 6권 3책. 목활자본. 1789년(정조 13) 6대손 내( 嗜 )가 편집, 간행하였고, 1934년(고종 11) 후손 문연(文演) 등이 보완, 중간하였다. 권두에 이복원(李福源)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문연 · 주연(胄演)의 중간발(重刊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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