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水亭 小史>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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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28 18:04 조회1,248회 댓글0건본문
13. 김택인, 이서구, 성해응
?김택인(金宅仁) 1753- 확(?)의 후손. 금수정을 중수(重修)하였다 한다. 문온공 종손가 15세손 宅仁=1753년생 16세손 義友는 1771년생 연천현감 역임.
?이서구(李書九) 1754(영조 30)∼1825(순조 25). 조선 후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 아버지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영의정을 증직받은 원(遠)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을 증직받은 평산신씨(平山申氏)로 부사 사관(思觀)의 딸이다.
--영조 30년(1754) 출생했다. 그리고 抱川郡(포천군) 永中面(영중면) 梁文里(양문리)에서 살았다. 선조 제12子(자)인 仁興君(인흥군)의 6대손이다. 인품이 고결하고 學(학)과 德(덕)을 겸비해서 淸濁(청탁)을 분명히 했다.
--翌年(익년)에 이조판서에 오르고 다시 호조판서로 옮기었으나 兇賊(흉적) 李敬臣(이경신)이 사사건건 헐뜯고 모함하여 다시 귀양을 갔다가 돌아왔다. 그 후에도 글을 계속 올리어 이서구를 비방하므로 관직을 버리고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先代墓舍(선대묘사)로 와서 두문불출하고 15년을 살았다.
?성해응(成海應) 1760(영조 36)∼1839(헌종 5).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용여(龍汝), 호는 연경재(硏經齋). 포천출생. 아버지는 부사를 지냈고 문장으로 정조의 인정을 받은 대중(大中)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진사 덕로(德老)의 딸이다.
---앞서 1788년 정조가, 그의 아버지 대중과 이의준(李義駿)·이서구(李書九)에게 명하여 존주(尊周)에 관한 글을 모아 편찬하게 하였을 때 그도 한때 그것을 보좌하였는데, 그의 사직 후 이서구의 위탁을 받아 정리한 끝에 1825년 《존주휘편 尊周彙編》의 편수를 마쳤다.
척재(?齋) 이서구(李書九·1754~1825)도 금수정에 유람하며 칠언율시(七言律詩) 1수(首)를 남겼는데, 정자의 승경(勝景)과 봉래가 남긴 암각시(岩刻詩)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翠柏丹楓擁一邱 잣나무 단풍나무 둘러싼 언덕
名亭勝槪水纖 좋은 경치 이름난 정자 물 서쪽에 자리했네.
川聲暮挾平郊雨 저물녘 시냇물 소리는 들판의 빗소리인듯
山勢遙圍小縣秋 작은 마을 휘감은 산 빛은 가을이어라.
客子登臨分物色 나그네는 올라와 경치를 구경하는데
主人高臥自風流 속세를 떠난 주인은 그대로 풍류일세.
蓬萊仙侶今安在 봉래신선은 지금 어디에 있는고
惟見銀鉤石上留 그가 쓴 초서(草書)만이 돌위에 남아 있구나.
〔「척재집(?齋集)」금수정(金水亭)〕
커다란 바위에 洞天石門이라고 새긴 단정한 해서체의 암각문이 있다. 成海應의 [東國名山記]에 이글씨는 한석봉의 글씨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를 통해서 종택이나 금수정으로 올라갔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바위뒷쪽에는 또 암각문이 있는데 이 글씨는 瀾石이라고 되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이 글씨는 중국황제의 사신 허국이 쓴 것이며 원래 廻瀾石이란 글자인데 회자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廻자의 한 부분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한다.
14. 김하종
?김하종(金夏鐘) 1793(정조 17)∼?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의성. 자는 대여(大汝), 호는 유당(#유78堂)·유재(#유78齋) 또는 설호산인(雪壺山人). 화원으로 첨사(僉使)를 지낸 득신(得臣)의 아들이며, 건종(建鐘)의 동생이다. 그 역시 화원이었으며 벼슬은 첨사를 지냈다.
김하종 [풍악권] <금수정>. 개인 소장
15. 이상수
?이상수(李象秀) 1820(순조 20)∼1882(고종 19).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인(汝人), 호는 어당(?堂). 연주(演周)의 아들로, 어머니는 윤씨이다.
봉래가 위 글자들을 암각한 시기나 금수정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시등금수정기(始登金水亭記)>〔이상수(李象秀)「오당집(梧堂集)」권13〕에 의하면 봉래가 김씨(金氏)로부터 이 정자를 얻어 기거하다가 떠난 뒤에 다시 김씨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며, 또 속전(俗傳)에는 여기서 봉래가 기거할때는 이름도 봉래정(蓬萊亭)이라 불렀는데, 뒤에 김씨가 돌려 받으면서 금수정이라 고쳤다고도 한다. 그러나 각자시(刻字詩)에서 보면, 봉래가 이곳을 들러 당시 주인인 금옹(琴翁)과 더불어 금(琴)을 타고 음영(吟?)하며 승경(勝景)을 즐긴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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