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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에 소개된 김광국, 김덕오, 김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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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2-30 13:17 조회1,25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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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진흥원 홈페이지에는

『육인재문집』과 저자 김광국(金光國 ; 1682~1775) 이라는 분이 소개되어 있는데,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관(大觀), 호는 육인재(六忍齋)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문의 군사공파 광국(金光國) [1709 ~ 1783](숙종35~정조7)를 설명하고 있는데, 생몰년대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수안김씨 두 분 (김덕오, 김하구)이 소개되어 있어 부기하여 둡니다.



김광국 / 金光國

인물 자 대관 / 大觀

인물 호 육인재 / 六忍齋

인물 년도  1682~1775

등록일  2004-05-31

프로필

김광국(金光國 ; 1682~1775)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관(大觀), 호는 육인재(六忍齋). 승지 준원(俊元)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담(湛)이다. 권두인(權斗寅)·권두경(權斗經) 등을 선배로 섬겼고, 이광정(李光庭)·권만(權萬) 등과 도의교를 맺었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41년 지평이 되었다.

이듬해 정언을 거쳐 장령·필선·헌납을 역임하고 1755년에 서장관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에 이어 1759년에 승지, 1760년에 황주목사, 1766년에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1769년 도승지가 되고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

1779년(정조 3) 내의원의관이 되었다.


六忍齋文集 

『육인재문집』은 김광국(金光國 ; 1682~1775)의 시문집이다. 김광국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관(大觀), 호는 육인재(六忍齋)이다.


이 책은 1932년 현손 택현(澤鉉) 등이 간행하였다. 권1·2는 시 179수·소(疏) 1편·서(書) 10편, 권3은 잡저 9편·서(序) 2편·명(銘) 1편·상량문 3편·애사 11편, 권4에는 제문 18편·행장 3편·광지(壙誌) 1편, 권5는 가장·행장·묘갈명·묘지명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 중 「의변향중사변소(擬辨鄕中事變疏)」는 그가 살고 있는 안동에 안택준(安宅駿)이 김상헌(金尙憲)의 서원을 세우려 하자 반대하여 올린 변소(辨疏)이다. 「답예안사림서(答禮安士林書)」·「여이노원서(與李魯原書)」는 당시 안동지방에 큰 시비가 벌어지고 있던 『도산언행록(陶山言行錄)』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상김영부사흥경서(上金領府事興慶書)」는 옥계(玉溪)의 유림을 대신하여 지은 것으로, 옥계서원을 세워 김응조(金應祖)가 봉향하려고 한 김자수(金子粹)와 향선배(鄕先輩)인 김언기(金彦璣)·김팔원(金八元)·정사성(鄭士誠) 등을 함께 배향하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잡저 중 「신임기사(辛壬紀事)」는 언제나 신해년만 되면 흉년이 들었다는 지난날의 사실을 인용하여 증명하고, 앞으로 다가오는 신해·임자년에 대비하여 미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다. 「정순천부문(呈順天府文)」은 두곡정사(杜谷精舍)의 유생을 대신하여 부사에게 올린 글로, 그가 살고 있는 면내에 서원을 세우고 본향의 은덕군자(隱德君子)였던 홍우정(洪宇定)을 봉향하여 후생들의 귀감이 되게 해달라고 청하는 내용이다. 「내성사림통열읍문(乃城士林通列邑文)」은 안동지방의 백병산(白屛山)에 설치한 은점(銀店)은 산을 파헤쳐 지기(地氣)가 끊겼을 뿐만 아니라, 불량배들이 들끓고 좀도둑이 도처에서 일어나니 빨리 점포를 철거하여 그 무리를 해산시켜야 한다고 호소한 글이다.


김광국은 권두인(權斗寅)·권두경(權斗經) 등을 선배로 섬겼고, 이광정(李光庭)·권만(權萬) 등과 도의교를 맺었다. 1705년 진사시 합격, 173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그는 선현의 종사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벼슬을 그만두고는 경사(經史)를 궁구하였다. 또한 애민의식의 발로로 흉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안동김씨 홈페이지>

23) 김광국(金光國)[1709 ~ 1783](숙종35~정조7)

字 仲觀, 乙卯 文科, 諡貞肅

승정원도승지겸경연참찬관(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 춘추관예문관수찬관(春秋館藝文館修撰官), 직제학상서원정지(直提學尙瑞院正至), 호조참판(戶曹參判), 제호조판서(除戶曹判書)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대관(大觀). 승지 준원(俊元)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담(湛)이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41년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이듬해 정언(正言)을 거쳐 장령(掌令)·주서(注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1755년에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司諫)에 이어 1759년에 승지(承旨), 1760년에 황주목사(黃州牧使), 1766년에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1769년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이어 병조참판(兵曹參判)이 되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卒하였다.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이다.

편저 <선배수간(先輩手柬)>,<간독(簡牘)>

1778년(정조2) 무술보 편찬 서문 찬(戊戌譜 編纂 序文 撰)



김덕오 / 金德五

인물 자 성겸 / 性兼

인물 호 치헌 / 癡軒

인물 년도  1680~1748

등록일  2004-05-31

프로필


김덕오(金德五 ; 1680~1748)의 본관은 수안(遂安). 자는 성겸(性兼), 호는 치헌(癡軒). 경북 영해(寧海)출신.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진화(振華)이며, 어머니는 웅천주씨(熊川朱氏)로 후정(後挺)의 딸이다.

172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이색(李穡)의 옛 집터에다 치헌(癡軒)이라는 집을 짓고 그 속에서 학문탐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역』을 즐겨 읽어 그 묘리를 깨달았으며, 수학(數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癡軒先生文集 

『치헌선생문집』은 김덕오(金德五 ; 1680~1748)의 시문집이다. 김덕오의 본관은 수안(遂安). 자는 성겸(性兼), 호는 치헌(癡軒). 경북 영해(寧海)출신이다.


이 책은 1779년(정조 3) 이상정(李象靖)의 교감을 거쳐 문인 권전(權口), 아들 대연(大淵) 등이 편집하였던 것을 1870년 외손 남공수(南公壽)·갑수(甲壽)형제가 다시 편집하여 김대진(金岱鎭)의 교정을 받다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상정과 김대진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남공수의 발문이 있다 권1·2는 시와 만장 106수, 서(書) 7편, 권3은 서(書) 13편, 기(記) 3편, 제문 7편, 뇌사(口辭) 5편, 권4는 잡저 4편, 권5는 부록으로 저자에 대한 화운(和韻) 18수, 발(跋) 2편, 만사 13수, 묘표·치헌기(癡軒記)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몇 편의 기와 제문 등을 제외하면 모두 역학을 연의(演義)한 것이라 하여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만큼 시·서(書)·잡저 등은 주로 역리를 배경으로 한 논리들이 대부분이다. 김대진도 서문에서 이 점을 논급하고 있으며, 특히 저자가 남국주(南國柱)에게 답한 「여남하중(與南厦仲)」에서 그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저자는 이 서간에서, 남국주가 쓴 『역범통록(易範通錄)』에서 『주역』과 『홍범(洪範)』 등을 동일범주에 넣고 논한 데 대하여 여러 가지 예시를 들어 조리 정연하게 견해차를 밝혔다. 잡저의 「책(策)」 등도 태극이나 역학사상을 그 배경으로 깔고 서술하였다. 이 책 외에 역학의 태극·역괘(易卦)·경세(經世)·기윤(朞閏) 등을 설명한 『사학의변(四學疑辨)』과 『기연의변(朞演疑辨)』 등의 저서가 있다.

그는 출사의 뜻을 단념하고 평생 역학(易學) 연구에 몰두한 바, 문집에 실려있는 여러 편의 글에서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역학의 전개 양상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김덕오의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진화(振華)이며, 어머니는 웅천주씨(熊川朱氏)로 후정(後挺)의 딸이다. 172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이색(李穡)의 옛 집터에다 치헌(癡軒)이라는 집을 짓고 그 속에서 학문탐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역』을 즐겨 읽어 그 묘리를 깨달았으며, 수학(數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김하구 / 金夏九

인물 자 정보 / 鼎甫

인물 호 추암 / 楸菴

인물 년도  1676~1762

등록일  2004-06-02

프로필


김하구(金夏九 ; 1676∼1762)의 자는 정보(鼎甫), 호는 추암(楸菴), 본관은 수안(遂安)이다. 세희(世熙)의 아들이며 영덕(盈德)사람이다. 그는 어릴적부터 글재주가 있어 문장동자(文章童子)로 불렸다.

1702년(숙종 28) 사마시에 합격하고 171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723년(경종 3) 대학관(大學官)에서 청암도찰방(靑岩道察訪)이 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창의(倡義)하여 안무사(按撫使)의 막하에서 종군하였다. 1729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감찰(監察)이 되고 이듬해 병조좌랑(兵曹佐郞)에서 해남현감(海南縣監)이 되어 『여씨향약백록동규(呂氏鄕約白鹿洞規)』를 따라 향약을 실시하였다. 같은 해 모함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으나 그 뒤 벼슬길에 발을 끊고 추나무 밑에 집을 짓고 추암(楸菴)이라 자호(自號)하며 거문고로 여생을 보냈다. 1759년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楸庵集 

『추암집』은 김하구(金夏九 ; 1676∼1762)의 시문집이다. 김하구의 자는 정보(鼎甫), 호는 추암(楸菴), 본관은 수안(遂安)이다.


이 책은 신치달(申致達)과 김만보(金萬寶)가 편집하여 두었던 것을 치달의 아들 대중(大重)이 김성련(金聖鍊)과 함께 간행하였다. 문집 중 시는 대부분 귀양에서 풀려나 한가롭게 지내며 만년의 심회를 읊은 것들이며, 특히 묘지명(墓誌銘) 가운데 「격암남공묘갈명(格菴南公墓碣銘)」은 방술가로서 일화와 전설로만 알려진 남사고(南師古)의 생애를 사실적으로 알려주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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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국(金光國)---1932년 현손 택현(澤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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