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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龍洲) 신도비(神道碑)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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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1-05 20:09 조회1,22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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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龍洲) 신도비(神道碑)

<번역>

공은 휘는 경(絅), 자는 일장(日章), 성은 조씨(趙氏)로서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조씨는 고려에 와서 비로소 번창해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 지수(之壽)가 있었는데, 이 분이 시조이며, 중서의 2대손인 휘(暉)와 양기(良琪)는 모두 쌍성총관(雙城摠管)을 지냈고, 또 3대손 예의판서(禮儀判書) 돈(暾)과 한산백(漢山伯) 인벽(仁璧), 우의정 연(涓)은 모두 큰 공적으로 귀히 되었다. 그중 의정(議政) 연은 태종(太宗)을 도와 ‘양경(良敬)’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바로 공의 7대조이다. 증조는 절충장군 증 이조참판(折衝將軍贈吏曹參判) 수곤(壽崑)이요, 조부는 공조좌랑 증 이조판서(工曹佐郞贈吏曹判書) 현(玹)이요, 부친은 사섬시 봉사 증 의정부 좌찬성(司贍寺奉事贈議政府左贊成) 익남(翼男)인데, 2대(代)가 모두 행검과 문예로 잘 알려져 있다. 모친은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유씨(柳氏)로서 본관은 문화(文化)이니 증 승정원 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 개(愷)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14년 10월 6일에 한양의 숭교방(崇敎坊)에서 태어났다. 유 부인이 어질고 또 자식을 가르치고 기르는 데 방도가 있어서 난 지 5세 되는 해에 비로소 취학(就學)하였고, 10세에는 배움이 이미 이루어져서 능히 자력으로 독서하였으며 또 이외에는 달리 취미나 놀이가 없었다. 13세에 유 부인이 작고하였는데, 거상(居喪)에 슬퍼함이 꼭 성인과 같았다. 이듬해에 찬성공(贊成公)이 송 부인(宋夫人)을 맞이하였는데, 부인의 부친 송공이 보고 감탄하기를,

“이 아이가 후일 반드시 귀히 되어 집안이 크게 보답을 받으리라.”

하였다. 약관에 벌써 문장이 훌륭하다는 성가(聲價)가 있어,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과 태상(太常) 차천로(車天輅)가 모두 기재(奇才)로 허여하였다.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뽑혔고, 이듬해 4월에 찬성공이 작고했다. 이이첨(李爾瞻)이 이미 높은 지위에 있어서 공과 사적으로 친숙히 지내려고 한 지 오래였는데, 공의 상중(喪中) 예절을 보고는 예를 지키는 선비라 예가 아니면 친숙할 수 없다 하여, 후히 예로 대접하고 봉급(奉給)을 두터이하여 깊이 친교를 맺으며 하였다. 광해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이첨의 용사가 오래 가자, 공은 친교를 끊고 영남의 거창(居昌)에 돌아가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세상을 피하였다.

계해년 인조(仁祖)가 난을 평정하고 재학사(才學士)들을 불러 모을때, 공이 유일(遺逸)로서 고창현감(高敞縣監)과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형조좌랑에서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전직되어, 백성들의 고통을 묻고 학교를 정비하니 고을 사람들이 치적을 칭송하였으나 1년 만에 돌아왔다.

병인년 상이 선비를 친히 시험보였는데, 공이 장원으로 선발되어 연이어 양사(兩司)에 재직하였다.

정묘년 건주 오랑캐가 동쪽을 침입하여 안주(安州)와 평양을 연이어 함락하였다. 전년에 국가에서 비로소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하였는데, 적이 평양에 이르자 백성들이 호패를 풀어 성가퀴에 걸어놓고 모두 흩어졌다. 이 때 공이 사서(司書)로 있었는데, 문학(文學) 김육(金堉)과 함께 상소하여 호패법을 혁파하여 인심을 수습할 것을 말하니, 이에 호패법이 혁파되었다.

상이 강도(江都)로 출행(出幸)하면서 세자를 시켜 호외(湖外)에 내려가 무군(撫軍)케 하니, 공이 수행하였다. 적이 얼마 후 강화(講和)조약을 맺고 돌아갔다. 공이 지평(持平)으로서 상소하여, 공신이 종횡하여 명을 받지 않고 호서절도사 유임(柳임王+林)이 선왕의 능침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는데도 후한 뇌물을 받고 가볍게 용서해 준 것과 간관 윤황(尹煌)이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상의 뜻을 거슬리자, 이조(吏曹)에서 상에게 아첨하여 문득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의망(擬望)한 것을 말하고, 이어서 강홍립(姜弘立)의 죄상을 논하니, 상소가 주달되자 지평에서 체직되었다.

무진년 교리(校理)로서 별묘(別廟)를 주장하는 최명길의 잘못을 논하였다. 봉양을 위하여 현(縣)을 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서당(書堂) 선발에 들어갔으므로, 사퇴하였으나 회답이 없었고, 다시 지평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큰 옥사가 있어서 인성군(仁城君) 공(珙)이 연루되었는데, 목성선(睦性善)과 유석(柳碩)이 상소하여 전은(全恩)을 말하니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역적을 두둔한다고 논하였으나 동료들의 의론으로해서 되지 않자 사피(謝避)하니, 공이 계(啓)를 올리기를,

“전날 혼조(昏朝) 재위시에 사람을 모함할 때에는 반드시 ‘역적을 두둔한다’하니, 그 때에 상헌이 앙옥절탄(仰屋竊歎)한 지가 오래였는데, 오늘날 자기가 스스로 그것을 답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읍니다. 상헌을 체직시키소서.”

하였다. 옥당(玉堂)이 둘 다 체직하기를 청하자 상이 특별히 모(某)는 체직치 말게 하니, 공이 다시 사피하자 이에 체직하였다.

신미년 헌납(獻納)에서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전직되었다가 이윽고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다. 장묘(章廟)를 추존하는 일로 해서 상이 쟁론하는 자에게 화내어 옥당관(玉堂官) 다섯 사람을 잡아들여 다스리게 하니, 공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사친(私親)을 높이는 방법이 나라를 망친 전철(前轍)에 가깝지 않습니까? 신이 옥당에 있을 때, 추숭(追崇)하자는 의론을 배척하기를 여러 신하들과 다름이 없이 하였으니 같이 그 죄를 받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회답이 없다가 얼마 후 부교리(副校理)로 개임하니 동료인 오전(吳전立+專)등과 차자를 올려서 전례(典禮)의 옳지 못함을 논하였다.

상이 특별히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내보내니, 양사(兩司)가 쟁론하여 유임시키기를 청하다가 상이 노하니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옥당은 그래도 논집(論執)하여 마지않았으나 상이 그대로 임명하였다. 이듬해에 통제사(統制使) 변흡(邊?)이 장정을 검열하는데 독책하기를 무상하게 하므로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흡의 상소로 인하여 끝내 하옥되고 이어서 파면되었다.

계유년 다시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을해년 집의(執義)가 되어, 낙수(洛水)가 마르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목릉(穆陵)과 유릉(裕陵)에 변이 있는 것을 인하여 상소하여 유연(遊宴)과 후궁을 선발한 것과 영조(營造)에 관한 일을 말하면서,

“전하의 명철하심으로도 홀로 깨닫지 못하고 이런 일을 행하여 의심치 않으시니, 어찌 하늘이 전하의 마음을 꾀어 나라를 망치고야 말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집의에서 체직시켰다. 얼마 후 다시 집의가 되어 감시(監試)에 불법(不法)이 있다 하여 파방(罷榜)할 것을 논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그 계를 중지시키매 공이 사피하니, 옥당이 차자를 올려 체직시켰다.

상이 또 다시 문천군수(文川郡守)로 내보내니, 정온(鄭?)이 차자를 올려 간하기를,

“전하는 모(某)를 어떠한 사람으로 여기십니까? 그 사람은 효도와 우애를 독실히 행하고 몸가짐을 청고(淸苦)하게 하고 또 문학과 박람(博覽)이, 좌우에 두고 고문에 응하게 할 만한데 그 한 마디 말이 지나치게 고지식하다 해서 선뜻 호오(好惡)의 마음을 보이셔서야 되겠읍니까?”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여 군기시 정(軍器寺正)에 임명하였다. 암행어사로 호남 지방에 나갔다가 이미 복명하자, 상이 말하기를,

“모(某)가 민간에 출입하여 수령의 정치와 민생의 질고(疾苦)를 자세히 알아서 다른 어사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병진년 사간으로 응지(應旨)하여 봉사(封事)를 올려서, 왕자의 전택(田宅)이 제도를 벗어난 것과 장릉(章陵)의 빈전(殯殿) 역사에 대한 상격(賞格)이 법도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이어서 좌상 홍서봉(洪瑞鳳)이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판 것까지 언급하고, 무인 이대하(李大廈)가 말〔馬〕을 바친 일을 열거하며, 재이(災異)를 인하여 묵상(墨相)을 출척, 허물을 신칙하여 하늘의 뜻에 따르는 실지로 삼기를 청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서봉의 아들 명일(命一)과 이대하가 상소하여 공을 힐문(詰問)하기를 청하니, 상이 정원에 명하여 불러서 힐문케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대하가 말을 바친 일은 숨길 수 없으니, 그의 고향에서 이를 전하는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신이 비록 용렬하나 남의 말을 인용하여 그 말을 증명하겠읍니다. 우리나라 2백년간에 간관을 이렇게 대우한 적이 없었으며, 이전에 등롱금(燈籠錦)의 일은 당개(唐介)가 풍문에 들은 것인데도 언박(彦博)같이 어진 사람을 상의 앞에서 맞대놓고 배척하였지만, 언박은 사죄할 뿐이었고, 그 자식을 시켜 자신을 변명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인종(仁宗)이 비록 당개를 좌천시키기는 했지만 힐문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읍니다. 더구나 신이 들은 바는 당개에 비해서 더욱 절실하고 서봉의 탐오는 또 말 한 필을 받은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고, 인하여 서봉 부자의 탐오하고 방종하여 거리낌이 없는 상태를 차례로 열거하였다. 대신 중에,

“모(某)는 이미 간관에서 체직되었고 왕부(王府)의 일은 엄중한 것이니 불러서 힐문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어서 공이 마침내 투옥되었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민형남(閔馨男)이 상소하여,

“간관을 가둔 것은 우리나라 2백년간에 없던 일입니다.”

하였고, 경연관 유백증(兪伯曾)도 상에게 그렇게 말하니, 상이 말하기를,

“그를 가두게 한 것은 대신이다.”

하므로 백증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째서 대신의 말을 따르십니까? 나라 사람들이 분해하며 이 일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읍니다.”

하자, 김상헌이 상소하여 극력 백증을 공격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모(某)가 이미 서봉(瑞鳳)에게 잘못하였으므로, 그가 정승의 자리에 있게 되자, 스스로 배척당할까 의심하여 무실(無實)한 말을 주워 모아 한번 헐뜯어서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 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사실 서봉에게 잘못한 일이 없었으므로 상이 답하지 않고, 이튿날 교서를 내려,

“상헌이 감정을 품고 서로 헐뜯어서 그 말이 분노에 차 있으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이조판서 상헌을 체직하고 백증 또한 체직하라.”

하였다. 상은 공이 충직하고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서봉이 원공(元功)으로서 상이 총애하여 남달리 대우하던 터였으므로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고, 공도 또한 문책하지 않았다.

정축년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리고 묘당(廟堂)에서 척화자(斥和者) 10인의 신하의 죄를 의론할 때, 공이 일찌기 망령된 말로 묘당을 헐뜯었다 하여, 또한 의론 대상에 끼어 있었다. 도승지 이경석(李景奭)이 계(啓)를 올려서,

“이 사람은 착한 무리이온데, 또한 이것으로 이 사람을 죄준다면 인심이 승복치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옳지 못하게 여기니, 죄주지 말라.”

하였다.

무인년 사간으로서 들어가 사례하니, 상이 문정전(文政殿)에서 인견(引見)하고 국가의 치욕을 말하자, 이에 상에게 아뢰기를,

“사람들이 간혹 조정과 중국이 이미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으니, 중국과 통신하여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일을 비밀리에 붙여서 아는 사람들이 없지만, 이미 앞서서 행하였다.”

하였다. 봉양을 위하여 군(郡)을 청하자, 흥해군수(興海郡守)를 삼으니, 대신(臺臣)이,

“모(某)는 뜻이 곧고 곧아서 조정에 두면 허물을 바로잡아 보익(補益)됨이 매우 많으니 외직(外職)에 두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사정이 절박하니 보내야 한다.”

하였다. 이때, 대간(臺諫)에서, 김상헌이 거짓 죽는 체하여 이름을 사고 상을 따라 출성(出城)치 않은 것을 탄핵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묻자, 공이 말하기를,

“거가(車駕)가 성을 나올 때, 지조가 굳었던 자는 정온(鄭?)과 김상헌 두 사람뿐이었으니 상을 줄지언정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기묘년 사직하고 거창(居昌)으로 돌아갔다. 경진년에 사간으로 또 상소하여 시무책(時務策)을 올렸다.

계미년 일본(日本) 통신부사(通信副使)로 파견되었다. 부산에서부터 수륙(水陸) 4천리를 가서 그 나라 국도(國都)에 도착하여 이미 사명(使命)을 전하자 크게 연회를 베풀고 마술과 교묘하고 기이한 여러 가지 놀이를 벌여 환심을 사려 했으나, 공이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왜인이 마음으로 경계하고 꺼려서 다시는 음기(淫技)를 벌이지 않았다. 지나는 길에 유숙할 때, 선물을 모두 받지 않았다. 일본기행(日本記行)에 관백설(關白說)이 있다. 돌아와 부산에 이르렀다.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의성(宗義成)이라는 자가 온갖 간교를 다 부려서 미덥지 않았으므로 공이 안색으로 용납하지 않고 사양하고 받는 데도 의리가 있으니 의성이 마음으로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서 문서를 통해 자못 공을 헐뜯는 말을 하니, 조정에서 물리쳤다. 공이 복명하자, 멀리 사신갔다 온 공로를 포상하여 통정(通政)에 승진시키고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임명하니,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후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삼았는데, 대신이 상에게 아뢰어 도내(道內)를 탄압(彈壓)하기 위하여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전직시켰다. 이때, 판관(判官) 기진흥(奇震興)이라는 자가 평소 공을 두려워하고 미워했으므로 방백(方伯)에게 참소하여 아속(衙屬)이 너무 많은 것을 문책하자, 공이 곧 사직하고 아산(牙山)으로 돌아가니, 부임한지 겨우 18일 만이었다. 공은 망제(亡弟)의 처와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모친이 차마 떨어질 수 없어서 공이 조정에 청하여 함께 데리고 갔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을유년(인조 23, 1645) 5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喪)에 분곡(奔哭)하고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상소하여, 백성의 곤췌(困?)?재이(災異)?변괴와 임금이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뇌물받는 것과 상이 조회보기를 게을리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이어서 권계하는 말 수천 마디를 진술하니, 상이 깊이 느껴 받아들이고 지론(至論)이라 하였다. 궁중에 옥사가 있자 환관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니, 또 상소하기를,

“궁중에 옥사가 있는 것은 한(漢)나라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쇠하는 나라의 정치입니다. 마땅히 유사에게 회부하여 정형(政刑)이 한 곳에서 나오게 하여 정치의 대공 무사함을 보이소서.”

하고, 또 궁금(宮禁, 궁궐)을 맑게 하고 뇌물을 근절시킬 것을 말하니, 상이 그대로 따르고, 체직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였다. 모친의 병환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임명하였다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전직시켰다.

상이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하자 공이 두 개의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하나는 진계(進階)를 사양한 것이었고, 하나는 강씨를 사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었다. 소가 주달되자 대사헌에서 체직되었다.

이산(尼山)의 상변사(上變事)가 있자 상이 출병케 하니, 공이 즉시 입경(入京)하였다. 이에 이조참판에 임명하니 또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돌아갔다. 대제학에 임명하고 다시 대사간을 삼으니 상소하여 사퇴하고 또 이응시(李應蓍)와 조석윤(趙錫胤)의 일을 말하기를,

“전하께서 간쟁하는 말을 들으시는 것이 점점 게을러져서, 이제 게으를 뿐 아니라 간하는 자를 억누르고 꺾고 내몰아서 스스로 이목(耳目)의 총명을 가리십니다.”

하니, 대사간에서 체직되었다.

정해년(인조25, 1647) 도승지에서 대사간으로 전직되어 미처 사은하기도 전에 특별히 형조판서에 임명되니, 상소하여 사퇴하고 인하여 시무(時務)를 아뢰면서, 일을 말하다 죄를 받은 이경여(李敬輿)?홍무적(洪茂績)?심노(沈노?+魯)?이응시(李應蓍)등을 관대히 용서하여 언로를 열 것을 청하였다. 얼마후, 예조판서가 되어 재생(裁省)의 일을 겸임케 하였다. 흉년으로 해서 민역(民役)을 면제하여 어려움을 덜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공에게 아울러 담당케 하여 대소의 낭비를 줄여 백성을 편하게 해주었다. 이조판서에 전직되자 연거푸 사퇴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공도(公道)를 넓히고 경쟁을 억제하며 수령천거법(守令薦擧法)을 거듭 밝혔다. 겨울철에 대뢰(大雷)가 있자 상에게 아뢰기를,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은 무슨 큰 죄가 있다고 해도(海島)에 안치합니까? 용서하고 데려오소서.”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하루는 상이 대신들을 인견하니, 대신들이 대부분 이형장(李馨長)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일을 말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형장은 국사를 미봉(彌縫)했다고는 할 수 있지만 충성을 다 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턱을 끄떡이며,

“그 말이 옳다.”

하였다. 형장은 당초 상인(商人)으로 정명수(鄭命壽)를 잘 섬겨서 조종하는 세력을 잡아 종횡으로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거족(巨族)들이 대부분 마음을 쏟아 그를 섬겼다. 명수는 본래 서읍(西邑) 관속의 천인으로 포로가 되어 단지 말솜씨로 나라의 비밀을 염탐하여 구왕(九王)에게 사랑을 받은 자이다. 근래 우리나라의 대소사를 명수가 모두 알고 있는데, 이것은 실로 형장이 힘써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해에 북사(北使, 청나라에서 오는 사신)가 올때, 관반(館伴) 이행원(李行遠)이 신병을 일컫고 나오지 않자, 대신들이 상에게 아뢰어 공으로 대신케 하였다. 명수가 공을 보고 사사로이 묻기를,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디에 있소. 구왕(九王)이 데려다 기르려 하오.”

하므로, 공이 정색을 하면서,

“하국(下國)의 일을 상국에서 어떻게 미리 알고서 이런 말을 하시오.”

하였다. 명수가 누차 물었으나 계속 대답치 않으니, 명수가 노한 빛을 띠고 다시 세 아들에 대한 일은 말하지 않았다. 명수가 항상 공에게 분노를 품고 말하니, 공이 이를 알고는 나라에 우환을 끼칠까 염려하여, 상소하여 문형(文衡, 대제학을 이름)과 주사(籌司, 비변사를 이름)의 임무를 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명수가 세 아들에 대하여 물은 것은 대개 이미 몰래 그 사실을 알려준 자가 있어서였다.

무자년(인조 26, 1648) 좌참찬(左參贊)에 전직되었는데 인대(引對)하는 길에, 정온이 죽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깊은 산속에 은거하여 중과 같이 고통을 감수하며 몸을 마쳤으니, 그 충성심이 포상할 만함을 말하고, 또 상소하여 그 일을 말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대사헌으로 전직되었다. 이때, 남방에 큰물이 졌으므로 수성(修省)하라는 내용의 상소 수천 자를 올렸다.

기축년(인조 27, 1649) 5월에 상이 위독하였다. 공이 내의원(內醫院)의 일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크게 악화되어 입시(入侍)하자 상이 훙(薨)하였다. 대신이 고사를 인용하며 유교(遺敎)를 짓고자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유명(遺命)이 없는데 유교를 짓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이미 성복(成服)을 마치자, 내지(內旨)가 있어 대상(大喪, 임금의 喪事)을 위하여 무당을 모아 기양(祈?)하면서 이것이 궁중의 전례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선왕의 법에 ‘귀신을 빌어 대중을 미혹시키는 자는 목을 벤다.’ 하였읍니다.”

하고, 상소하여 물리쳤다.

김자점(金自點)이 죄로 정승에서 면직되자, 공이 복상(卜相)되었으나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유태(李維泰)라는 자가 상소하여 두서너 명의 선비를 헐뜯어 배척하였는데, 공을 가장 심하게 헐뜯었다. 이는 공이 일찌기 사헌부에 있을 때, 원두표(元斗杓)가 자기 당을 세워 권세를 모으려 한다는 것을 논핵하였으므로 유태가 이를 가지고 공을 공격한것이다. 공이 상소하여 이조판서에서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유태가 이런 사람을 소인이라 하니 길인(吉人)이 아니다.”

하고, 공으로 예조판서를 삼았다. 그해 9월에 장례에 참석하여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에 찬례(贊禮)하고 사직하니, 대제학을 체직하고 좌참찬을 삼았다. 장릉(長陵)의 지석문(誌石文)을 지은 공로로 정헌(正憲, 정이품 문무관의 품계)에 승진되었다.

경인년(효종 1, 1650) 북사(北使)가 왔는데 사문(査問)하는 일로 이유를 삼았다. 이미 도착하자, 상공?육경(六卿)?정원(政院)?양사(兩司)를 모았다. 이미 벌여 앉자 타락죽〔駱漿〕을 대접하는데 공이 홀로 이를 받지 않았다. 사신이 노한 빛을 띠고 지난해에 대행왕(大行王)을 조제(弔祭)할 때 곡하지 않은 것을 책문(責問)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이에 대해서는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읍니다.”

하니, 사신이 말이 없다가 또 묻기를,

“사표(謝表)에 황부왕(皇父王)의 조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이며, 표(表)를 지은 자는 누구요.”

하므로, 승문원에 알아보니 유계(兪棨)인데, 현재 직책이 없이 외방에 있었다. 또,

“표를 지은 후, 먼저 표를 본 자는 누구요.”

하고 묻자, 공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대제학이 먼저 보았소. 이것으로 허물을 삼는다면 내가 책임을 지리다.”

하였다.

영의정 이경석(李景奭)도 주문(奏文)한 일로 문책 대상에 연좌되었다. 명수가 사신의 뜻으로, 본국에서 죄를 논하라 하고 사적(私的)으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安置)케 하였다. 상이 노자를 후히 주고, 또 연도(沿道)의 수령에게 명하여 후히 해서 보내게 하였다. 백마는 의주(義州) 남산에 있는데 매우 높아서 항상 안개가 끼어 해를 보는 날이 적었고, 안개가 없으면 바람이 불어서 4월에도 추위가 겨울 같았다.

원두표(元斗杓)가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서,

“섭왕(攝王, 九王의 이름)이 두 신하(조경?이경석)의 일에 대하여 전적으로 ‘이들이 두 마음을 품고 우리를 배반하였다’합니다......”

하고 돌아와서는 또,

“저들이 그대로 그만둘 것 같지는 않으니, 보전하려면 일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들을 생각해 눈물을 흘리며 사신을 보내어 변명할 것을 의론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두 신하를 변명하되, 편벽되게 경중을 두지 말라.”

하였다. 이때, 마침 중국 사신이 도착하였으므로 변명하려던 일은 끝이 났다. 그 칙서에는,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모은 것은 본래 왜(倭)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요, 진정으로 나와 상대하여 힐난하자는 것이다.’하고는 어떻게 하라는 말은 없었다. 명수가,

“대군(大君)이 사신으로 오면 일이 해결됩니다.”

하였다. 이때, 대군은 연경에서 돌아온 지 겨우 한 달 남짓하였다. 상이 굳이 보내려 하고 대군도 가기를 청하였다. 상이 변방의 추위를 묻고 후사(厚賜)하였다.

11월에 정경부인이 졸(卒)하였다. 우상(右相) 이시백(李時白)이 상에게 아뢰어 유사로 하여금 부물(賻物)을 내리고 본도(本道)에 명하여 장례의 예를 갖추게 하였다.

다음 달에, 대군이 사행(使行)에서 돌아왔는데, 두 신하의 방환(放還)을 허락하였으나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였다. 상이 또 후사(厚賜)하고 말하기를,

“북경(北京)의 기별을 들으니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도다.”

하였다. 공이 이미 백마에서 돌아오자 상소하여, 자신이 일을 그르쳐 국가에 치욕을 끼친것을 말하고, 또 서토(西土)의 인심과 풍속을 말하면서 정인수(鄭麟壽)와 한익문(韓翼文) 두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재행(才行)으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상이 군직(軍職)을 주어 서울에 있게 하였으나, 공이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매 수사(修史)하는 일로 부르니, 공이 청(淸)나라의 문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사퇴하였다. 상의 명에 따라서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말하고, 이어서 노릉육신(魯陵六臣)을 정표(旌表)할 것과 정온(鄭?)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말하였다.

계사년(효종 4, 1653) 부모 봉양을 위하여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이듬해 봄에 풍악(楓嶽, 금강산)을 유람하고 이어서 사직하고 돌아왔다. 겨울에, 기내(畿內)에 비린내 나는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였다. 상소하여 말하기를,

“김홍욱(金弘郁)이 하옥되어 죽은 후로, 군도(君道)가 날로 지나치고, 국사(國事)는 날로 그릇되고, 재이는 날마다 나타나며, 인심은 날로 흩어지고, 충언과 곧은 의론은 전하의 뜰에서 아주 끊어져 버렸읍니다.”

하니 상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근심함이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도다.”

하였다.

을미년(효종 6, 1655) 공이 이미 70을 넘으매 기로(耆老)라 하여 상이 본도(本道)에 명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이듬해 봄에 또 하사하였다. 가을에 또 월봉(月俸)을 내리니 공이 사양하며 받지 않고 열 번이나 상소하였으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영돈령(領敦寧) 김육(金堉)이 차자를 올려 재이(災異)를 말하였는데 상이 화를 내므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이 상소하여 간하고 이어서 심성(心性)을 닦으라는 경계를 올리니, 상이 말하기를,

“농촌에 있으면서도 간할 것을 잊지 않으니 충신의 마음이다.”

하였다.

정유년(효종 8, 1657)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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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비로소 조경선생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