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용주 조경선생

페이지 정보

김발용 작성일05-01-03 13:42 조회1,369회 댓글3건

본문

 


dydwnwhrud002.jpg조경(趙絅)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ㆍ주봉柱峯.

 1586년(선조 19년 병술생丙戌生) 10월 6일 한양의 숭교방 흥덕동에서 출생.
1612년(26세, 광해군 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로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광해군이 간신 이이첨李爾瞻의 말을 잘 들어 정사를 그르치는 일이 많아서 이이첨에게 여러 번 직언直言해도 듣지 아니하므로, 그와의 관계를 끊고 난세亂世의 과거와 벼슬을 단념하고 1616년 거창居昌에 은거하였다. 1623년(37세, 인조 1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로써 천거되어 고창현감高敞縣監과 경상도사慶尙都事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亂이 평정된 후 형조좌랑刑曹佐郞과 목천木川(현 천안天安) 현감縣監을 지냈다.

 1626년(40세)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서 정언正言ㆍ헌납獻納 등의 요직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627년(41세)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播遷하고 조정에서 화和ㆍ전戰 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持平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조吏曹 정랑正郞, 해서海西ㆍ호남湖南 지방의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거쳐, 1636년(50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간司諫으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고, 이듬해에는 집의執義로서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청淸나라를 공격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재임시인 1643년(57세) 2월부터 11월까지 일본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오사카大阪와 고베江戶에서 왕명王命을 전하면서 일인日人들의 간교한 환대를 물리치고 일왕日王과 도쿠가와德川정권을 탁월한 시문詩文으로 감동시켰다. 1644년(58세)부터 1649년까지 승정원承政院의 도승지都承旨,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成,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 홍문관弘文館ㆍ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좌참찬左參贊, 좌찬성左贊成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이조판서吏曹判書 재임시 이도吏道를 쇄신하고 인재등용에 공정을 기하여 명망을 얻었다.

  병자호란 후 청淸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 요구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1650년(64세, 효종 1년)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의주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신묘辛卯 삼권보三卷譜의 서문을 썼다. 1658년(72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1년(75세, 현종 2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예송禮訟논쟁(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 -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 의 복상기간을 두고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간의 정권주도권을 둘러싼 이념논쟁)에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臺諫의 논박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669년(83세) 2월 6일 별세하여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문간文簡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安東 김씨金氏(1584년 갑신생甲申生, 1650년 경인졸庚寅卒)는 이판吏判 찬瓚의 따님으로 부지런하고 삼가서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고, 자랑하거나 사치하지 않아 아내의 도리로서 예전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바가 없었다. 1자子 3녀女를 두었으며 묘는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한바위 녹문산 덕래곡에 합장하였고 별묘別廟는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 있다. 문정공文正公 미수眉? 허목許穆이 묘지명墓誌銘ㆍ신도비명神道碑銘ㆍ시장諡狀을 지었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 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에 각각 제향되었다. 1695년(숙종 21년)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글씨에 뛰어났고 『용주집龍洲集』과 일본 견문록인 『동사록東?錄』을 남겼으며 포천인의 빛나는 발자취를 전하는 사찬私撰 군읍지인 『견성지堅城誌』 편찬에 최초로 참여하였다.

dydwnwhrud001.jpgdydwnwhrud005.jpg
 
▲ 조경선생 묘소와 재실 영모재

tjqhd_426.jpg
▲ 조경선생 묘갈을 살펴보는 주회종친.


용주 조경선생은 익원공파 눌암(訥菴) 휘 찬(諱 瓚) 선조님의 사위로 우리문중 선조님들의 신도비를 많이 지으셨습니다.

용주선생 찬 선조님 신도비

chan001.jpg
▲ 눌암(訥菴) 휘 찬(諱 瓚) 신도비.

sum_0191.jpg
 
하담 (휘 時讓) 신도비.

dmdgk0026.jpg
 ▲ 충무공 휘 응하(諱 應河)
신도비.

dmdgk0004.jpg
▲ 김응해(金應海)장군
신도비.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대부님 덕분에 반가운 소식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욘주선생의 글이 우리 문중에 많았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정중
작성일

  하담 할아버님 신도비를 보니 더욱  반갑네요 지난 여름 뙤약볕아래 답사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