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도성의 동쪽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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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8 14:08 조회1,619회 댓글1건본문
낙산공원(駱山公園)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동숭동 산2-10번지일대) 면적 : 152,443㎡ (46,114평)
낙산은 산모양이 낙타(駱駝/camel)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일명 타락산) 또는 낙산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서울 종로구와 동대문구.성북구에 걸쳐 자리한 산으로 서울도성의 동산(東山)에 해당된다. 낙산은 남산(南山) 인왕산(仁王山)· 북악산(北岳山) 과 함께 서울 내사산(內四山) 의 하나로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右白虎) 인왕산에 대치되는 동쪽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된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가 한양(漢陽) 에 도읍(都邑)할 당시 낙산을 좌청룡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산세가 길게 뻗치지 못한데다가 산 또한 인왕산에 비해 허(虛)하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조선말기에 와서 낙산 끝자락에 있는 도성의 동문인 동대문, 즉 흥인지문에 갈지(之)자를 하나 더 넣어 동대문 이름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효종 때는 왕의 아우 인평대군의 거소인 석양루가 있었고, 이화정과 영조 때의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등 많은 정자는 왕족 문인 가인(歌人)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조선 단종이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강원도 영월 오지로 귀양가 있는 동안, 왕비였던 정순황후는 매일 이 낙산에 올라 부군이 계시는 동쪽의 먼 영월쪽 하늘을 바라보다가 일생을 마쳤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서쪽 산록에 있던 쌍계동은 암석이 기이하고 수림이 울창하여 물이 흐르는 절경으로 삼청 인왕 백운 청학동과 더불어 도성안 5대 명승지(名勝地)로 꼽혔다고 한다.
낙산은 일제강점 전까지는 깨끗한 수석과 무성한 수림으로 시민들의 산책장소 였으며, 동촌(東村) 이씨의 세거지(世居地)를 비롯하여 조선 초기 청백리(淸白吏) 하정 류관이 기거하였고, 후일 지봉 이수광이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한 곳인 비우당 등 유적이 많은 곳이다.
서울육백년사
산 동쪽 즉 도성 안에 해당되는 곳의 산록 · 계곡을 따라서는 쌍계동(雙溪洞) · 이화정동(梨花亭洞) · 백동(栢洞) · 신대동(申垈洞) 등 옛날의 동명이 말해주듯 골짜기를 따라 시냇물과 수림의 자연풍경이 좋고, 그 자연풍경을 따라서 옛날부터 시인 묵객(墨客)들이 집을 짓고 정자와 대(臺)를 마련하여 청한(淸閑)한 생활을 즐겼던 것이다. 그리고 광복이 되자 낙산 동록에 자리잡은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고쳐지면서 독립한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청년 학도들이 학문을 연마하는 여가에 임천간(林泉間)을 산책하며 심신을 수양하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전의 이화정이 있던 부근 이화동 1번지의 이화장(梨花莊)은 광복 후 이승만대통령의 소유가 되었다. 1960년 4월, 학생의거로 정국이 바뀐 후 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기까지 1개월간은 실의의 찬 노정객(老政客)의 우울한 심정을 경내외(境內外)의 화송천석(花松泉石) 좋은 이곳에서 달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종조(世宗朝,1419∼1450)의 청백리(靑白吏)로 유명하던 하정(夏亭) 유관(柳寬)이 동대문 밖에 살며 여름철 장마비 내리는 날 방안에서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하면서 우산없는 백성들을 걱정하였다는 곳도 바로 이 낙산 동쪽이었다. 유관이 살던 집은 불피풍우(不避風雨)의 보잘것 없는 건물이었지만 그의 외(外) 5 대손(代孫) 되는 선조조(先祖朝)(1568∼1608)의 문사(文士) 지봉(芝峰) 이수광(李忌光)이 유관의 옛집터에 서재를 지어 이름을 “비우당(庇雨堂)”이라 하고,「동지세유(東池細柳) 북령소송(北嶺**松) 타낙청운(駝駱晴雲) 아차모우(峨嵯暮雨)전계세족(前溪洗足) 후포채지(後圃採芝) 암동심화(岩洞尋花) 산정대월(山亭待月)」 등의 8경시(景詩)를 읊었던 것을 보면 원근의 풍경이 매우 가려(佳麗)했던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국민일보 2002.07.07, 18:27
[서울 낙산공원 33년만에 복원] 조선 도성 한양·4대문이 한눈에
◇역사 속의 낙산=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낙산은 낙타의 등을 닮았다고 해서 예로부터 낙타산 혹은 낙산으로 불렸고 궁중에 우유를 공급하던 소를 키우던 곳이라 해서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불렸다.
궁궐과 가까워 계곡을 중심으로 관리들이 많이 모여 살았으며 조선시대 여진족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인 북평관(현재 이대부속병원 맞은편) 터 같은 역사적 유물과 각종 정자가 즐비했다.
◇복원된 낙산=낙산공원에 오르면 조선의 도성인 한양,4대문 안이 한눈에 들어온다.오른쪽으로는 인왕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동대문에서 혜화문으로 연결되는 2.1㎞의 옛 성벽도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성벽에서 삼선동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조선시대 청백리로 유명한 정승 유관의 집을 외손자인 지봉 이수광이 손질해 지은 ‘비우당(庇雨堂)’이 나온다. 비우당은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집필한 곳으로 서울시가 최근 복원했다.
010716 조선일보 [이규태코너] 낙산
낙산 개발
병자호란에 소현세자와 후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 살았던 심양 남대문 밖에 야판전이라는 들판이 있다. 북경에 사행길 가던 우리 사신이면 반드시 이 야판전을 거쳐가면서 회포에 젖고 시 한수 써 남기게 마련인데, 바로 두 왕자가 답답함과 울적함을 잊고자 이 곳에 채소를 가꾸며 소일했던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때 볼모 왕자를 따라가 모시던 나인으로 홍덕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이 야판전을 오가며 채소를 가꾸어 김치를 담가 세자와 왕자에게 바쳤는데, 볼모에서 풀려 고국에 돌아온 후에도 이 홍덕이 김치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에 효종은 낙산 중턱의 채소밭을 홍덕에게 주어 김치를 담가 대게 했으며, 그래서 한말까지 낙산에 「홍덕이 밭」이라는 지명이 전해내렸던 것이다.
산 생김새가 낙타 등처럼 생겼다 해서 낙산으로 불리는 이 산은 한양 풍수의 좌청룡을 이루는 풍수산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난개발로 황폐화된 이 낙산의 자연과 역사를 복원하기로 하고 지금 진행 중이라는 보도를 접하고 보니, 「홍덕이 밭」 터를 찾아 김치의 성지 하나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세계적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김치의 종주국으로 김치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하여 관광자원으로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낙산에는 신대우물이라 하여 신숙주의 손자로 중종·명종 때 대학자요 시인인 신광한이 살았던 집터에서 솟아나는 우물에서부터, 대한민국의 초대 내각을 조각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살았던 이화장 등 고금 문화재가 비일비재하다.
이 낙산의 동대문쪽 기슭 중턱에는 우산각이라는 청빈문화의 메카가 있다. 태조 때부터 세종까지 4대 임금을 섬긴 정승 유관이 살았던 집으로, 방에 비가 새 우산을 받고 살았다 해서 얻은 이름이다. 이 집은 그 후 유관의 외손으로 물려져 4대손인 판서 이희검이 살았는데, 사는 집이 어찌 이다지 누추할 수 있느냐고 하면 『이 사람아, 우산에 비하면 이것도 과람하다』고 말했다는 집이다. 임진왜란 후 이 집을 찾아든 것이 이희검의 아들이요 대학자인 이수광으로, 비를 근근이 가린다는 뜻인 비우당으로 당호를 짓고 청빈철학을 계승했던 것이다. 낙산 복원에서 빠져서는 안 될 정신복원이 바로 이 우산각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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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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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서울에 우리 문중과 관련 있는 이런 유적지를 그동안 모르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