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우리 선조님 20---김응하 충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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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1-19 09:36 조회1,246회 댓글1건본문
忠烈錄<古 貴 923. 55-G417c> 朴承宗 編, 1621년(광해군 13년) 간행 2권 1책, 목판본, 20. 7cm. x 32. 7cm. 1619년(光海君10) 明의 요청으로 建州 後金을 치는데 원병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전 사한 宣川府使 金應河(1580-1619)의 공훈을 기리려고 편찬한 책. 목판본으로서 간행 년대는 이이첨이 쓴 서문의 刊期로 볼 때 光海君 13년(1621)으로 추정된다. 간행된 시 기가 비교적 오래된 탓인지 책장의 4면이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서두에는 大北派의 영수로서 정국을 주도하던 李爾瞻의 서문이 실려 있다. 당시 後金의 기세는 날로 극성 하여 明은 遼東의 대부분을 失陷당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경험이 있던 楊鎬 , 劉綎 등을 지휘관으로 삼아 大軍을 일으켜 후금의 본거지를 토벌하려 했다. 동시에 조선에 대해서도 원군의 파병을 종용하였는데 光海君은 마지못해 姜弘立, 金景瑞 등에 게 약 1만여의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게 했으나 '深河의 전투'에서 朝明연합군은 대패 하고 강홍립 등은 후금군에 투항했던 것이다. 강홍립 등의 투항은 明의 의구심을 더하 기에 충분했고 동시에 出兵 회피를 비난했던 조선의 在野 사대부들을 격동시켰다. 바 로 이러한 시점에서 '金應河가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했다'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는 조선정부로서는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는데 이러한 논리는 이 책 의 전면에 흐르고 있다. 곧 책 전체가 김응하를 찬양하는 내용 일색으로, 光海君에게 김응하를 顯彰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인 [進忠烈錄箋], 朴承宗이 쓴 祭文, 朴希賢이 쓴 傳記文 성격의 [金將軍傳], 이이첨이 쓴 [哀金將軍歌], 韓纘男이 쓴 발문, 沈喜壽 朴 弘耉 趙挺 李好閔 柳希奮 李慶全 李廷龜 尹昉 柳夢寅 洪命元 李 光 權盼 金 李安訥 등 당시 요인들이 쓴 추모시 등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밖에도 함께 참 전한 명나라 장수들과 전사한 將卒들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쓴 [祭劉都督文], [祭喬遊 擊文], [戰亡將士賜祭祭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金將軍傳]에서 '그가 後金軍의 칼을 맞고서도 버드나무에 의지해 끝까지 항전했다'라든지 '죽어서 시신이 되어서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으며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라는 이야기를 후금 병사의 傳聞으로 전하고 있는 것 등은 김응하의 공훈을 강조하려는 본서의 의도에서 볼 때 주목되는 대목들이다. 이것은 책의 도처에서 李廷龜를 위시한 非北人系 학인들 이 후금군에게 투항했던 姜弘立 金景瑞에 대해 가차없이 매도하고 있는 것과도 크게 대조되는 것이다. 요컨대 본서는 17세기 전반 '明淸交替'라는 국제적 전환기에 극히 미묘했던 조선과 명의 관계, 당시 지식인들이 대부분 지녔던 華夷觀의 실제적 모습, 그리고 외교문제를 둘러싼 조선 조정의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여 겨진다. (한명기)
重刊忠烈錄 古 4650-168 1798년(정조 22년) 重刊. 金魯奎(朝鮮) 編. 1책(零本). 肖像. 圖. 木版本. 32. 5 21cm. 선조∼광해군대의 무신으로 명나라를 도와 후금 정벌에 나섰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 한 金應河(1580∼1619)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그의 행적과 관련 기록들을 묶어 편찬한 책. 김응하의 본관은 안동이고 고려의 명장 方慶의 후손으로 자는 景義이며 철원 출신 이다. 1604년(선조 37) 무과에 발탁되었으나 처음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평 소부터 그의 재주를 아끼던 朴承宗이 병조판서가 되자 비로소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여러 사람의 질시를 받아 파직당했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박승종이 전라관 찰사로 나가자 다시 기용되어 비장이 되었다. 1610년에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영의정 이항복에 의해 경원판관으로 발탁된 뒤 三守郡守·北虞侯를 역임하였다. 1618 년(광해군 10)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金景瑞의 휘하 에 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 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 섰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천명의 휘하군사로 수만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神宗은 그가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처자에게는 백금을 하사하였다. 조정에서도 그의 전사를 가상히 여겨 영 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忠武이다. ≪충렬록≫은 1621년(광해 13)에 初刊되었고 다 시 1798년(정조 22)에 중간되었다. 중간충렬록의 서문은 閔鍾顯이, 초간충렬록의 서문 은 李廷龜가 썼다. 卷首를 비롯하여 모두 8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책은 이 중 4 권1책만이 남은 영본이다. 목록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卷首는 김응하의 초상과 전투 당시를 표현한 忠烈錄圖, 그의 世譜, 遺墨, 명의 신종황제가 내린 詔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忠烈錄圖는 擺陳對賊, 援 督戰, 矢盡劒擊, 兩帥投降의 제목을 가진 4개의 그림 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림에 대한 해설에서 이 중간본의 충렬록도는 舊本의 것과 약간 의 차이가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구본은 遇賊擺陳, 倚柳射賊, 死後握劒, 兩帥投降이 라는 제목을 달아 당시 상황을 표현하였고, 또 구본의 네번째 그림의 밑에는 龍灣祠宇 圖가 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이 사당이 없어지고 따로 鐵原, 宣川, 昌城, 鍾城, 慶源 등지에 사당이 있어서 다 그릴 수 없으므로 뺐다고 하였다. {권1}에는 贈判書致祭文, 贈領議政致祭文, 鐵原褒忠祠賜額致祭文, 宣川義烈祠賜額祭文, 昌城忠烈祠賜祭文 등의 賜祭文과 御製詩를 실었고, {권2}에는 旌褒事實을 {권3}에는 遺文, 碑文, 告祝祭文 등 을 실었다. {권4}에는 諸家記述이라는 제목으로 明人 茅元儀가 찬한 ≪武備志≫ 朝鮮 考·명인 曹學佺이 찬한 ≪名勝志≫ 寧遠衛篇·≪兩朝從信錄≫·金堉 찬의 ≪海東名臣 錄≫·≪定齋集≫·≪月沙集≫ 등의 문헌기록에서 김응하에 관한 사실을 발췌하여 실 었다. 그 이하 목록에 보이는 傳·箋을 실은 {권5}, 悼詩를 묶은 {권6}, 詩文別錄을 묶은 {권7}, 附錄의 {권8}은 남아있지 않다. 목판 그림은 비교적 사실적인 표현으로 당시 금나라와 조선의 병사들의 모습과 무기, 전투 장면에 대한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 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희라)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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