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와 우리 선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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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1-19 19:38 조회1,308회 댓글1건본문
<백령도와 우리 선조님>
1. 충렬공과 김흔장군
충렬공 67세때 1278년 1-2월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 등에 의한 김방경 무고사건으로 홍다구에 의한 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시고 대청도에 유배되시었습니다. 이때 둘째아들 김흔 장군은 백령도에 유배되었습니다.
얼마후인 1278년 7월초에 장순룡과 함께 상도(개평부)에 도착하여 무고사건에 대한 해명후 충렬왕 일행과 함께 연도(대도,북경,대명부)를 거쳐 동경(요양)을 거쳐 9월초에 고려에 돌아 오시었습니다.
날씨 매우 추운 2월에 심한 고문을 받으시고 대청도에 귀양 갔다가 7월초에 원나라에 들어 가시는 것으로 보아 대청도에서의 유배기간은 4-5개월 정도 였던 것 같습니다.
원나라에 가는 동안 위득유, 노진의, 등은 죽게 되고, 돌아와서 10월에 그 일당 이분희는 백령도로 귀양을 보냈다가 죽여 버렸다는 기록이 고려사 충렬왕조에 실려 있습니다.
---2004. 5. 27. 주회(안) 제공 자료--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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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득유는 더욱 더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어 날마다 노진의, 김복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어 김방경을 모해하였다. 그리하여 김방경의 죄상을 기록한 고발장을 가지고 ★흔도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이 그의 아들 ★김흔, 사위 ★조변, 의남(義男) ★한희유 및 ★공유(孔愉), ★나유(羅裕), ★안사정(安社貞), ★김천록(金天祿) 등 4백여 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또 일본 정벌 이후 군사 기자재들은 모두 응당 관가에 납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방경과 그의 친속들은 모두 자기 집들에 무기를 감추어 두었으며
또 전함을 건조하여 ▲반남(潘南), ▲곤미(昆湄), ▲진도(珍島) 3현에다 두고 무리를 모아 반역을 음모하고 있으며
자기 집이 달로화적의 숙소와 가깝기 때문에 ▲고류동(孤柳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국가에서는 때마침 여러 섬들의 인민들에게 육지 깊이 들어와서 살 것을 명령하였는데 김방경의 부자(父子)는 그에 복종하지 않고 인민들을 해변에 살게 하였으며
동정 당시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초공(梢工-키잡이) 수수(水手-뱃군)로 되게 하여 전투에서 불리한 결과를 초래케 하였으며
아들 ★김흔을 진주(晋州)의 수령으로 삼고 막객(幕客) ★전유(田儒)를 경산부(京山府)의 수령으로 삼고 의남(義男) ★안적재(安迪材)를 합포(合浦)의 수비장(守備將)으로 삼고, ★한희유에게는 병선(兵船)을 장악하는 일을 맡게 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곧 보조를 맞추어 일어나게끔 준비하였다”라는 등의 여덟 개의 조항을 들었다.
이에 ★흔도는 3백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와서 ★석말 천구와 더불어 국왕에게 고하니, 왕과 공주는 비록 그 사실이 무고이며 허망한 일인 것을 알고 있었지마는 하는 수없이 ★유경, ★원부(元傅), ★이분희(李汾禧), ★한강(韓康), ★이습(李褶)에게 명령하여 흔도, 천구와 더불어 함께 심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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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다구(茶丘)는 자기의 조국인 고려에 대하여 오랜 악감을 품은 자였으므로 무슨 짬이라도 있는가 하고 엿보고 있다가 화를 전가시킬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김방경의 사건을 듣고는 중서성에다 자기를 고려에 보내 문초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 ★흔도 역시 이보다 앞서 그의 아들 ★길대를 보내 위득유의 말을 황제에게 보고하도록 한 바 있었으므로 황제는 글을 보내 국왕과 공주가 함께 문초에 참가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왕이 흔도, 홍다구와 함께 다시 김방경과 김흔을 문초하게 되었다. ★홍다구는 쇠줄로 김방경의 목을 둘러 죄고 못이라도 박을 듯이 하였으며 또 형장 가진 자를 꾸짖어 그의 머리를 치게 하였으며 종일토록 알몸뚱이로 세워 놓았다. 날씨는 극히 추워서 그의 피부는 얼어서 먹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
왕이 홍다구에게 말하기를
“먼저 번에 내가 흔도와 함께 이미 문초를 다 끝내었는데 하필 다시 문초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홍다구는 듣지 아니 하였다. 때마침 ★낭가대가 전라도에서 돌아왔다. 왕이 그들과 함께 문초하자고 하였더니 낭가대가 말하기를
“내가 곧 조정에로 돌아가겠는데 황제께서 만일 고려 일에 관하여 물으면 응당 내가 보고 들은 대로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홍다구도 상당히 휘어 들었었다.
그 후에 다시 문초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귀국을 받들기를 하늘을 받들 듯이 하고 귀국을 사랑하기를 친어버이를 사랑하듯이 하는데 어찌 하늘과 어버이를 배반하고 거슬러 스스로 자신의 멸망을 초래하는 일을 하겠는가? 나는 차라리 원통하게 죽을지언정 감히 무근거한 고발을 승인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홍다구는 반드시 그를 자복시키려고 모진 고문을 가하였기 때문에 몸뚱이가 온전한 데라곤 없었으며 죽어 넘어졌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였다.
홍다구는 왕의 측근자들을 가만히 달래기를
“지금 한창 아주 춥고 비, 눈이 그치지 않는 때여서 왕도 역시 심문에 피로하였다. 만일 김방경으로 하여금 죄를 인정하게 한다면 그 한 사람에게만 벌을 줄 것이며 법에 따라 다만 귀양을 보내게만 될 것이니 고려를 위해서도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홍다구의 말을 믿기도 하고 또 고문받는 정상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김방경에게 이르기를
“황제가 어질고 거룩하신 분이니 장차 그대의 실정을 밝혀주고 죽이지는 아니 할 것인데 어째서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느냐?”라고 한즉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왕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합니까? 저는 병사의 몸으로 출세하여 직위가 재상에까지 이르렀으니 저의 간과 골이 땅바닥에 구르게 된다 하더라도 나라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하겠거늘 어찌 일신을 아끼어 근거 없는 죄명을 둘러쓰고 국가를 배반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홍다구를 돌아다보며
“나를 죽이려거든 죽여라! 나는 부당한 일을 가지고 굴복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갑옷을 감추어 두었다는 죄를 논하여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白翎島)에 귀양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김방경이 귀양 가게 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가 가는 길을 막고 울면서 그를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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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후(印候)가 ★김방경을 귀양 보내는 것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하여 ★원나라로 갔을 때 황제가 묻기를“★김방경이 갑옷을 얼마나 감추어 두었던가?”라고 하므로 인후는
“46부(副-벌)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니 황제는
“★김방경이 그래 이것을 믿고 반역하려고 음모했단 말인가? 고려에서는 주, 현의 조세를 모두 왕경으로 운반하고 있는데 배들을 만들고 양곡을 저축했다는 말을 무엇 때문에 의심하는 것인가? 또 ★김방경은 자기 집을 왕경에다 지었다 하니 만일 그가 반역을 음모했다면 하필 집은 왜 지었겠는가? 빨리 홍다구를 돌려 보내고 국왕은 풀이 자라나는 때를 기다려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이 드디어 ★원나라로 떠나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황제의 지시로 ★김방경의 부자와 위득유, 노진의 등도 왕을 따라서 오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장순용을 보내 ★김방경을 소환하였다.
★김방경과 김흔이 귀양 갔던 섬에서 되돌아 오니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손을 만지면서
“오늘 또다시 시중(즉 중찬)부자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하였다”고 말들 하였다.
노진의는 요가채(姚家寨)에 이르러 혓바닥이 헐어서 갑자기 죽었는데 임종시에 말하기를
“나는 위득유 때문에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라고 하였다. 위득유가 이 말을 듣더니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고 항상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황제는 왕에게 말하기를
“★김방경을 고발한 자들은 모두 죽었으니 이미 상대해서 송사를 진행할 만한 대상이 없을 뿐더러 나도 이미 ★김방경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길로 ★김방경을 용서해 주고 왕을 따라 귀국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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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28권 - 세가 제28 > 충렬왕 1 >
충렬왕 무인 4년(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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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김방경과 그 아들 ★김흔을 문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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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병진일에 왕이 흔도, 홍다구를 ▲흥국사에 모이게 하고 ★김방경을 문초하였으나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므로 ★김방경을 대청도에, ★김흔을 백령도에 귀양 보내었다.
경신일에 왕이 궁궐 내에서 친히 기도를 드렸다.
계해일에 장군 인후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김방경을 귀양 보낸 것을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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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일에 황제가 해동청(매) 한 연(連-한 쌍)과 부마 금인(駙馬金印)과 말 안장을 주었다. 왕이 동궁(東宮)에서 전송연의 술을 마시었다.
계묘일에 왕이 하직하고 귀국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겁설(숙위의 뜻) 단안(丹安), 독구(禿丘)로 하여금 북경까지 전송하게 하였다.
또 탈탈아 등 세 명의 관원을 보내 동문 밖에서 전송하게 하였으며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왕을 따라 귀국하라 하였다. 황태자 역시 사람을 보내 전송하였으며 황자 탈환(脫歡), 황녀 망가대도 모두 이르렀다. 여러 관원들이 달달(達達)의 노래와 춤으로 왕을 위로하면서 술잔을 권하니 왕은 홀적 가운데서 노래를 잘 하는 자를 시켜 감황은곡(感皇恩曲-은덕을 감사하는 곡조)을 불러서 답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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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 임자일에 왕이 왕륜사에 갔다.
계축일에 ★김방경을 첨의(僉議) 중찬(中贊) 상장군(上將軍) 판 감찰사사(判監察司事)로 임명하고 은 10근을 주었다.
조인규, 인후를 경상도에 파견하여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 호적에 등록하게 하였다.
갑인일에 왕이 ★김방경을 불러다가 비밀히 의논하고 이날 밤에 밀직사(使) 이분희(李汾禧)를 백령도에 그 아우 지신사 이습을 조홀도에 귀양 보내었고 그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사람을 보내 모두 바다에 넣어 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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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일에 중찬 ★김방경이 왕과 공주를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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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계미일에 ★원나라에서 속노가(速魯哥)를 보내 이분희 형제를 죽이고 지득룡(池得龍)을 귀양 보낸 일 및 종전군 진수군의 처부(妻婦)들을 조사하여 데려간 일에 대하여 물었다.
갑신일에 재상들이 왕에게 친히 ★원나라에 입조하기를 청하였으므로 그것을 허락하였다.
신묘일에 경한 죄를 범한 자들을 석방하였다. 왕이 ★원나라에로 떠나갔다. 참문학사 박항, 지밀직사사 홍자번, 우부승지 김주정 등이 왕을 따라갔다.
병신일에 왕이 압록강을 건넜다.
정미일에 왕이 ★원나라에 도착하였다.
이달에 속노가가 중찬 ★김방경, 판 밀직 허공을 데리고 ★원나라로 돌아갔다.
2. 충렬공과 김흔장군을 모함했던 이분희 --
이분희(李汾禧)
?∼1278(충렬왕 4). 고려의 무신. 본관은 염주(鹽州:延安). 최우(崔瑀)의 문객으로 대장군인 송(松)의 아들이다. 아우 습(#습04)과 함께 김준(金俊)의 심복이 되어 행수지유(行首指諭)가 되고 뒤이어 장군이 되어 원종의 총애를 받았다. 임연(林衍)이 김준을 제거한 뒤 임연에게 포섭되어 대장군·직문하(直門下)가 되었다가 뒤이어 상장군이 되었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추밀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지주사(知奏事)가 되었다. 그해 왕을 수행하여 서북면에 나가 원나라에서 오는 공주를 맞았다.
1276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세자의 조호(調護)가 되었다.
1277년 위득유(韋得儒)와 노진의(盧進義) 등이 김방경(金方慶)을 무고하여 원나라 장수 흔도(#흔05都)와 홍다구(洪茶丘)의 국문을 받게 되자, 흔도와 홍다구에게 붙어서 김방경을 모함하였다.
이듬해 김방경의 무죄가 드러나자 백령도로 유배되어 바다에 던져져 죽었고, 가산은 몰수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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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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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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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여기는 인천 연안 부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