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안렴사공파 소개자료 (연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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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2-26 22:37 조회1,645회 댓글0건본문
■ (36세) 1327년 상주목사로서 상산관 중수
<상주여중에 있을때의 상산관>
<현재의 상산관. 상주시 만산동>
<안축의 근재집> 상주객관중영기
1343년(충혜왕4)에 내(=안축)가 상주목사로 명을 받고 이해 4월 주에 도임하여 정사를 보니 근래 가옥한 행정에 시달려 민생과 문물이 流散하고 마을들이 모두 쓸쓸하여 옛적에 公廳이나 學宮 神社와 佛寺가 모두 퇴폐하고 오직 客舍만이 웅대하고 수려하여 이쪽 영남에서는 제일 훌륭하여 廳堂과 基位의 규모와 포치가 굉장하며 스스로 여유가 있고 그 마땅함을 얻었으므로 혼자 내심에 이는 반드시 속인의 범상하게 만든 것이 아니리 라고 생각되어 邑人에게 물었더니 지금 征東省郞으로 있는 金相國 永煦가 세운 것이라 하였다.
이 州가 8방으로 통달하는 거리에 있어 전령과 奉使하는 자가 하루도비는 날이 없었는데 옛적 객관이 좁고 낮으며 또 연대가 오래되어 기둥이 이미 기우러져 있으니 항상 좋지 못함이 손님들의 나무람을 들어왔다.
지난 1327년 4월에 그가 이 州의 목사가 되어 와서 이 객관을 중수할 생각이 있었으나 민생의 노고와 곤궁을 염려하여 차마 공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다만 仁愛로 백성들을 안녕하게 하고 엄중하게 官紀를 바로잡아 왔다.
얼마후 읍인들이 德治에 힘입어 비로소 생활에 희망을 가지게 되니 이러한 힘을 모아 한번 公恩에 보답하려 하였다. 이에 그는 州民을 사역할 수 있음을 알고 재물을 모으고 부역을 명하며 기한을 정하여 起工하니 庶民들이 기꺼이 호응하여 수고로움을 잊고 就役하였으며 豪黨들도 협의하여 힘을 다하니 이렇게 하여 州民을 괴롭히거나 농사에 방해함이 없이 짧은 시일내에 객관이 완성되고 또 本館의 서편에 별도로 小館을 세우니 이제는 비록 사신이나 손님이 많이 오더라도 유숙하는데 여유가 있게 되어 읍인들도 안심하게 되었다.
장하도다. 그가 적은 백성의 힘으로 세웠으나 실은 목사의 지혜로 이룩된 것이다. 州民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송하고 있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이 이러한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시경에 戶와 窓을 얽어 매어 비바람에 대비하는 비유가 있고 書傳에는 아버지가 창업을 하면 자손이 이어서 성공한다는 비유가 있으니 그가 廟堂에 재직하여서 經紀를 세우고 方略을 베풀어서 거듭 王家를 번영하게 한 것을 이것으로도 능히 알 수 있다 하겠다.
<김종직의 점필재집>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내(=김종직)가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해 보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14)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적당한 위치를 잡은 사람은 목사(牧使) 김영후 (金永煦)이고, 기(記)를 쓴 사람은 근재(謹齋)였다.
<상주지> (상주시.군문화공보실, 1989)
---상산지 상권에 「客館(객관) : 在州衙東高麗金永煦爲牧使時改安軸有記嘉靖丙戌火牧使尹宕改構壬亂皆燒 顯廟丙午牧使李松仍舊改構(재주아동고려김영후위목사시개안축유기가정병술화목사윤탕개구임란개소현묘병오목사이송령잉구개구)」기록되었다.
---그리고 다른 기록을 종합해 보면 1340년(고려 충혜왕 1) 이전이라 볼 수 있고 목사 안축이 1343년(충혜왕 4) 記文(기문)을 지었는데
---1307년(◀1327년의 오기) 김상국 김영후가 지었음을 알 수 있고
---1526년(중종 21) 화재를 당하기 전 1500년(연산 6) 목사 윤탕이 개축한 바 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모두 불태웠다.
---1639년(인조 14) 봄에 王山(왕산) 남쪽(현 상주 경찰서)으로 옮겨 세웠다.
---1666년(현종 7) 목사 이송령이 개축하였으며
---1907년(순종 11) 상주공립보통학교로 사용하였고
---1940년에 지방인사 박인양, 조용연, 박정소, 박인수 등이 많은 돈을 내어 상주군으로부터 사서 조각연을 기성회 책임자로 정해 많은 성금을 모아 상주시 남성동 148-1로 옮겨짓고 다시 군에 기부하였는데 상주여중 설립으로 상주여자공립보통학교가 사용하게 된 후 필요에 따라 많은 건물의 변경을 가져와 당초의 모습은 지붕뿐이고 벽체, 창호, 마루 등 제 모습을 찾을 수 없고 보수치 않아 많은 곳의 지붕에 누수가 심하여 1985년 지붕보수를 비롯 1988년까지 중수(가) 계속되었다.
---상산관이 자리한 대지는 경북향교재단 상주향교 소유였으나 향교측이 1985년 12월 30일 경북도교육위원회(상주여자중학교)에 매각하여 건물과 대지가 동일인 도교위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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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홈>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157호 명 칭 상주상산관 (尙州商山館)
분 류 관아건축 수 량 1동 지정일 1982.02.24
소재지 경북 상주시 만산동 산73-1
소유자 상주시 관리자 상주시
<보수내역>
1987/06/16 - 1987/08/20 목공사, 지붕공사 학산건설 장재학 파일보기
1991/10/05 - 1992/06/01 상산관 이건 학산건설(주) 대표 장재학 파일보기
■ 법주사자정국존비
<속리산 법주사 자정국존비>
<자정국존비 비문 일부>
<문화재청 홈>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79호 명 칭 법주사자정국존비 (法住寺慈淨國尊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80.12.29
소재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소유자 법주사 관리자 법주사
속리산 법주사 내에 있는 자정국존의 비이다. 자정국존(1240∼1327)은 국령사·장의사·법주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으며, 도승통이 되기도 하였고, 호는 ‘보명’이다. 비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다. 비몸 앞면에는 자정국사에 관한 비문을 새겼는데,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다.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숙기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이 글씨를 썼다.
이 비(碑)는 고려말(高麗末)의 자정국존(慈淨國尊)의 비로서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3년(1342)에 건립(建立)하였다. 자연암석(自然岩石)의 암면(岩面)을 장방형(長方形)으로 파서 비좌(碑座)를 만들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꽂아 높이 2.13m, 폭 1.07m로 된 화강석비이다. 자정국존(慈淨國尊)(1240∼1327)의 성(姓)은 김(金)씨이며 국령사(國寧寺), 장의사(莊義寺), 법주사(法住寺)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고, 도승통(都僧統)이 되기도 하였으며 보명대사(普明大師)의 호(號)를 받았다.
비문 내용 중에 다음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327년(충숙왕14, 정묘) 12월 1일 아침, 법주사 자정국존이 입적하기 직전 서기를 방장실로 불러 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인 김영후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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