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하여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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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3-01 13:33 조회1,328회 댓글1건본문
일부 교정하여 보았습니다. 교정 부분은 짙게 표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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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7일(일) 11시에 여주종합터미널 2층 봉황부페에서는 조선조 중기의 문장가 우암(寓庵) 김주(金澍)선생의 시문등을 모은 <우암집>을 국역한 <국역 우암김주문집> 출판기념회가 여주문화원과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문단공문중회(김주 후손 종중) 공동 주관으로 180여명의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전국의 문단공 김주 후손과 많은 안동김씨 인사들이 참석하였고, 여주지역 향토사학계 인사 여러분이 참석하여 여주의 역사인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우암 김주 선생의 문집 국역 발간을 축하하였다.
김주의 고조부인 김환(金丸)은 충북 청원군 오창에서 이곳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에 이거하여 1442년 문과급제한 후 승문원 판교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550년 가까이 대대로 이곳에 세거(世居)해 내려와 귀백리와 율극리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김주의 묘소도 귀백리 선영에 있다고 한다.
이번에 국역 간행된 우암집에 의하면, 김주는 22세때인 1533년 가을에 여주로 와서 선영에 성분하고 나서, 모재 김안국을 이호촌(梨湖村)으로 찾아가 인사 올리니 모재는 깊이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고 이별에 즈음하여서는 눈으로 전송하면서, "이 사람의 문장은 마땅히 괴애 김수온과 점필재 김종직의 사이에 있을 것이다." 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우암 김주 선생은 30세때인 1541년 이후 여러차례 한강가의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하게 되는데, 이 때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금호 임형수 등과 많은 교분을 쌓았으며, 당시 정유길, 민기, 심수경, 이량, 이이, 임수 등 여러 학자들과 함께 문장양망으로 선발되어 당시 8문장(八文章)이라 칭송되었다. 경학에도 출중하여 특정한 경전에 전공을 지닌 문신을 일컫는 전경문신에 여러번 뽑히었으며, 정유길과 함께 문형(文衡)에 천거되기도 하였다.
우암 김주 선생은 당시 8문장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만큼 많은 작품들이 유집(遺集) 7책으로 엮어져 가전(家傳)되어 왔는데, 왜란과 호란을 겪는 와중에서 안타깝게도 대부분 유실되었다고 한다. 1789년 후손 김래, 김득현 등이 여러 곳에서 산재한 시문등을 수집하여 문집 초간본 <우암유집> 7권 1책을 간행하었고, 그 후 1934년 후손 김문연, 김주연 등이 중간본 <우암집> 6권 3책을 간행하여 현재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문집을 후손가에서는 한문을 모르는 세대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고려대 한문학교 심경호 교수에게 역주를 의뢰하였고 2년 여에 걸친 국역 작업과 편집을 거쳐 이번에 간행하게 된 것이다.
우리 여주 지역에는 역사적으로 출중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고 그 유적들도 많이 남아 있는데 고려시대의 대문호 백운거사 이규보, 목은 이색, 척약재 김구용을 비롯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번에 <국역 우암김주문집>이 간행됨으로써 우암 김주 선생이 여주의 역사적 인물로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와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손가에서는 지난 2월에 우암집 원본과 광국지경록, 안동김씨 족보 등을 여주향토사료관에 기증하는 등 여주향토문화 발전에도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어 앞으로의 활동이 주목되고 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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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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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항용 선생님! 감사합니다.
뭐든지 선생님 손을 거쳐야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진다니까요.
매년 3.1절이면 봄맞이 겸 전국을 유람하곤 했는데
오늘은 아시다시피 여러가지 일이 있어 사무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 둘 대동. 게임에 몰두 중)
화창한 바깥을 내다보면 봄바람에 태극기는 나부끼고 또다시 역마살이 발동하기도 하고,
타국살이 걱정에 온갖 회포와 설움이 천만갈래 일기도 하지만,
아이 둘과 사무실에서 밀린 일 처리하고 있으니, 이 또한 색다른 맛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