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허공묘지명(許珙墓誌銘) 탁본

페이지 정보

김발용 작성일05-03-06 08:08 조회1,215회 댓글3건

본문

허공묘지명(許珙墓誌銘)

 

hgong0111.jpg hgong0112.jpg

hgong0113.jpg

<소장처 : 규장각>

시대   고려
연대   1291년(충렬왕17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세로 79cm, 가로 63cm, 두께 3cm, 글자크기 1.2cm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57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허공(許珙 : 1233~1291)의 자는 산휘(山輝)이며, 공암현(孔?縣 : 지금의 서울특별시 양천구) 사람이다. 아버지 수(遂)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翰林學士丞旨)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고, 어머니는 신정군부인 장씨(新定郡夫人 張氏)로 합문지후(閤門祗候) □우(□友)의 딸이다. 처음 이름은 의(儀)이다.

고종 말 문과에 급제하여 유경(柳敬)의 천거로 내시(內侍)에 소속하여 정사점필원(政事點筆員)이 되고, 국학박사를 거쳐 각문지후(閣門祗候)가 되었다. 1267년(원종 8) 호부시랑이 되어 신종·희종·강종 등 3조(朝)의 실록을 찬수하였다. 1269년 우부승선·이부시랑·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가 되었으며, 이 때 권신 임연(林衍)이 그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자 청혼하였으나 거절하여 미움을 샀다. 그 해 임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울 때, 많은 조신들이 살해되었으나 양천에 가서 화를 면하였다. 그 뒤에도 전선(銓選)을 맡을 적격자가 없어 추밀원첨서사(簽書事)로 중용되었다. 1274년 추밀원부사 때 전주도도지휘사가 되어 300척의 전함 건조를 담당하였고, 1275년(충렬왕 1) 추밀원지사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온 뒤, 1276년 밀직사사 겸 지공거(知貢擧)를 거쳐 세자조호(世子調護)·밀직사판사를 지냈다. 1279년 첨의부지사(僉議府知事) 때 전함 90척을 건조하게 되자, 경상도도지휘사로 이를 지휘하였다. 1280년 문학참사(文學參事)·세자보(世子保)가 되고, 1284년 수국사(修國史)를 겸해 『고금록(古今錄)』을 찬술하였다. 1288년 첨의중찬(僉議中贊)이 되어 재차 지공거를 겸하였고, 1291년 원나라와 함께 합단(哈丹) 공격에 출전했다가 병사하였다. 벼슬은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청렴하기로 유명하였으며,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291년(충렬 17)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59세였다. 처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윤극민(尹克敏)의 큰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고, 뒤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징(崔澄)의 여섯째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判讀文>

文敬公之墓誌」

  卒匡靖大夫僉議中?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贈諡文敬」

  公許珙墓誌」

公諱珙字山輝孔?縣人也曾祖利涉皇典?署丞祖京皇禮賓少卿知制誥考遂皇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翰林學士丞旨致仕顯宗大王子大師王?第六」

代外孫也母新定郡夫人張氏閤門祗侯克友之女也自公之鼻祖至公凡十一世圭」

組蟬聯桂籍相傳之世系也公生而?悟器局離倫十九入成均試二十三以門蔭直受?頭店」

錄事及戊午歲權臣掃迹復政 王室簡文士入政堂公時猶未第以文才吏幹無能」

及者得居是選尋入內侍受大樂署丞是年以直赴第二生登第五人及第旋拜大學博士」

翌年除權知閤門祗候是後歷秘書郎戶部員外郎國學直講吏部郎中直寶文閣國」

子司業充史?修撰官朝散大夫戶部侍郎寶文閣待制知制誥東宮侍講學士至三」

十七己巳拜樞密院右副承宣吏部侍郎翰林侍讀學士太子右?善大夫遷至朝請」

大夫大僕卿知御史臺事國子監大司成翰林學士皆兼三字仍?造化四十歲壬申拜」

銀靑光祿大夫簽書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尋遷樞密院副使右散騎常侍同知院」

事及 朝廷避  上朝官制授中議大夫密直司使監察提憲世子元賓」

判密直四十七己卯拜匡靖大夫知僉議事寶文署大學士同修國史?文學事判版」

圖事集賢殿太學士修國史判軍簿司事五十四丙戌拜僉議侍郎?成事修文殿」

大學士判典理司事越丁亥夏 上國有邊憂七月 主上率兵助戰公請扈駕 上以」

本朝無當留守者不許公再奏云臣雖無氣勇今 主上赴難殊方臣以何心安坐而下」

食其辭至切 上許之及 大駕還朝嘉其功進拜僉議中?至辛卯六月下旬初因」

微恙?淹漸篤八月初八日寅時卒于私第享壽五十九 上聞之震悼追慕而卽以」

三子冠除官八品命有司襄事葬于普賢院西山之麓贈諡曰文敬公公性本耿介淳」

謹節儉不衒飾求媚自居要地十五年間題品人物常以平反濟活爲意及居相位二十年間」

益?忠恪竟?王臣之節弱冠從事至拜侍中常享寵榮一無譴劾三掌禮?揀閱精」

强門下之賢已居樞要半在臺閣已丑歲十一月 主上與世子朝覲 帝庭以公權行尙」

書省事庚寅正月朔方道戌將報以寇賊行指我疆人心??不知所就宗室宰輔及」

致仕舊相會闕庭議避患事皆言率人民入海島宜矣公獨斷曰使人更候寇賊所指」

如其」

所聞則入海島安社稷猶未?也?今 主上入聘 王庭大臣豈擅以徙都遷民之事輕擧哉群議乃寢斥候之果冠賊屯在女眞地由是 朝廷多推之公先娶政堂文學尹公克敏」

之一女生三男二女長子近侍郎將?娶知僉議府事致仕奇公洪碩之女次子朝顯」

大夫將軍監察侍□評娶?成事上將軍廉公承益之女次子大倉署丞冠一女適正丞大夫判秘」

書寺事文翰侍講學士知制誥金?一女適升仕郎秘書少尹知制誥金恂後娶同知」

樞密院事崔公澄之六女生二男二女長子刪定都監判官寵次子東面都」

監判官富一女適守太尉上柱國平陽侯?二女適興威衛保勝別將趙璉 朝廷之」

選多出一門噫公之平生旣備萬全之美天何獨?其壽考耶莫究造物」

之與奪也予有?莩之眷又被其請粗?而誌之銘曰」

魁然我公 儉素謙? 弱冠敏悟 高步泮宮 如期中第 入政堂東」

各專題品 ?化輸忠 早登相位 福祿兼豊 五十六歲 卓拜侍中」

活人爲意 多有陰功 三開棘院 揀盡英雄 下看□? 善保始終」

天胡不壽 大限俄窮 男五女四 蘭玉成叢 王孫作壻 更振家風」

系連十世 積善所鍾 予惟姻舊 慟竭哀悰 鐫銘樂石 馬?爲封」

至元?八年辛卯九月 日  誌」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해석문>

문경공(文敬公) 묘지<題額>

 

돌아가신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이고 추증된 시호가 문경(文敬)인 허공(許公) 묘지

공의 이름은 공(珙)이고, 자는 산휘(山輝)이며, 공암현(孔?縣) 사람이다. 증조 이섭(利涉)은 전구서승(典廐署丞)이고, 조부 경(京)은 예빈소경 지제고(禮賓少卿 知制誥)이며, 아버지 수(遂)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翰林學士丞旨)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는데, 현종대왕(顯宗大王)의 왕자인 대사(大師) 왕충(王?)의 6대 외손이다. 어머니는 신정군부인 장씨(新定郡夫人 張氏)로 합문지후(閤門祗候) □우(□友)의 딸이다. 시조[鼻祖]로부터 공에 이르는 무릇 11대의 세계(世系)에 벼슬아치가 잇달아 배출되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서로 이어져 내려 왔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재능과 도량이 뛰어났다. 19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23세에 문음(門蔭)으로 바로 복두점녹사(?頭店錄事)에 임명되었다. 무오년(고종 45, 1258 )에 권신(權臣)들이 제거되고 정치가 왕실로 돌아가게 되자, 문사(文士)를 간택하게 되어 정당(政堂)에 들어갔다. 공은 그 때 아직 급제하지 않았으나 학문의 재능과 행정 능력에 있어서 능히 따를 만한 자가 없었으므로, 이에 선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곧 이어 내시(內侍)로 들어가고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임명되었다. 그 해에 제2생(第二生)으로 바로 과거에 응시하여 제5인으로 급제하고, 대학박사(大學博士)로 옮겨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제수되고, 이후 비서랑 호부원외랑 국학직강 이부낭중 직보문각 국자사업 충사관수찬관 조산대부 호부시랑 보문각대제 지제고 동궁시강학사(秘書郞 戶部員外郞 國學直講 吏部郎中 直寶文閣 國子司業 充史館修撰官 朝散大夫 戶部侍郞 寶文閣待制 知制誥 東宮侍講學士)를 거쳤다.

37세인 기사년(원종 10, 1269)에 추밀원우부승선 이부시랑 한림시독학사 태자우찬선대부(樞密院右副承宣 吏部侍郞 翰林侍讀學士 太子右贊善大夫)에 임명되고, 조청대부 대복경 지어사대사 국자감대사성 한림학사(朝請大夫 大僕卿 知御史臺事 國子監大司成 翰林學士)에 이르렀는데, 모두 지제고(知制誥)[三字]를 겸하면서 덕화(德化)를 이루는 데 참여하였다. 40세인 임신년(원종 13, 1272)에는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簽書樞密院事 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고, 곧 이어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동지원사(樞密院副使 右散騎常侍 同知院事)에 올랐다. 조정이 원의 관제(官制)를 피하게 되자 중의대부 밀직사사 감찰제헌 세자원빈 판밀직(中議大夫 密直司使 監察提憲 世子元賓 判密直)에 임명되었다. 47세인 기묘년(충렬 5, 1279)에는 광정대부 지첨의사 보문서대학사 동수국사 참문학사 판판도사 집현전대학사 수국사 판군부사사(匡靖大夫 知僉議事 寶文署大學士 同修國史 ?文學事 判版圖事 集賢殿大學士 修國史 判軍簿司事)가 되고, 54세인 병술년(충렬 12, 1286)에는 첨의시랑찬성사 수문전대학사 판전리사사(僉議侍郞贊成事 修文殿大學士 判典理司事)가 되었다.

정해년(충렬 13, 1287) 여름 상국(上國, 元)의 변방에 일이 생기자, 7월에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투를 돕게 되었다. 공이 임금을 호종하기를 청하였으나, 남아서 우리 조정을 지킬 사람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다시 글[奏]을 올려 “신이 비록 용기가 없으나 지금 임금께서 외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터에 신이 어찌 마음 편안하게 앉아서 밥을 먹고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말이 지극히 간절하였으므로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돌아오게 되자,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승진하여 임명하였다.

신묘년(충렬 17, 1291) 6월 하순에 처음 가벼운 병이 들었는데, 오래 되면서 점차 위독해져서 8월 초8일 인시(寅時)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59세이다. 임금이 부음을 듣자 슬퍼하고 추모하여 곧 셋째 아들 관(冠)에게 8품의 관직을 내려주고, 담당 관리에게 일을 도와주도록 명하였다. 보현원(普賢院)의 서산 기슭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문경공(文敬公)이라고 하였다.

공은 성품이 본래 지조가 굳건하며 순박하고 신중하고 검소하였으며, 그럴싸하게 꾸미며 자랑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 중요한 지위에 있던 15년 동안 사람을 평가하면서 항상 잘못된 일이 없는지 다시 살펴 구제하도록 하였으며, 재상의 지위에 있던 20년 동안 더욱 충성스럽고 조심을 다하여 끝까지 신하의 절조를 드러내었다.

약관의 나이에 벼슬하여 시중으로 임명되기까지 항상 총애와 영예를 누리면서 한 번도 견책을 받거나 탄핵된 일이 없었다. 세 차례 과거[禮?]를 주관하여 밝고 강한 이를 가려 뽑았는데, 문하의 훌륭한 인재들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의 반은 대각(臺閣)에 있다.

기축년(충렬 15, 1289) 11월에 임금과 세자가 천자의 궁정에 조회하러 갔을 때 공은 권행상서성사(權行尙書省事)로 있었다. 경인년(충렬 16, 1290) 정월에 삭방도(朔方道)를 지키는 장수가 “구적(寇賊, 哈丹賊)이 우리의 강토를 쳐들어오려고 하여 인심이 흉흉하니 어떻게 하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종실과 재보(宰輔)와 은퇴한 원로 재상들이 대궐에 모여서 난리를 피할 일을 논의하였는데, 모두들 “인민을 거느리고 섬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홀로 단정하여 말하기를 “사람을 보내 다시 구적들을 살피게 하여 그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한다면, 그 때 섬으로 들어가 사직을 편안하게 하여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임금이 원[王庭]을 방문하고 있는데, 조정의 대신들이 어찌 함부로 도읍과 백성을 옮기는 일을 가볍게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여러 논의가 이에 잠잠해졌다. 적의 동향을 살펴보니 과연 구적이 여진(女眞) 땅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상당히 우러러보았다.

공은 처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윤극민(尹克敏)공의 큰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근시낭장(近侍郎將) 정(정)으로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기(奇)□□공의 딸과 결혼하였고, 2남은 조현대부 장군 감찰시사(朝顯大夫 將軍 監察侍史) 평(評)으로 찬성사 상장군(贊成事 上將軍)인 염(廉)□□공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3남은 대창서승(大倉署丞) 관(冠)이다. 장녀는 정승대부 판비서시사 문한시강학사 지제고(正丞大夫 判秘書寺事 文翰侍講學士 知制誥) 김변(金?)에게 시집갔고, 2녀는 승사랑 비서소윤 지제고(升仕郞 秘書少尹 知制誥) 김순(金恂)에게 시집갔다.

(공은) 뒤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징(崔澄)공의 여섯째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 총(寵)이고, 2남은 동면도감판관(東面都監判官) 부(富)이며, 장녀는 수태위 상주국 평양후(守太尉 上柱國 平陽侯) 현(?)에게 시집갔으며, 2녀는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조연(趙璉)에게 시집갔다.

조정에 등용된 인사들이 (공의) 한 가문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니, 아, 공의 평생은 이미 온전한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그러나 하늘은 어찌하여 홀로 그의 장수를 아까워하는가.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 조물주가 명을 주고 빼앗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잠시 (공의) 보살핌을 받았고, 또 묘지명을 청하여 왔으니, 서툴게나마 서술하여 글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우리 공은 조용하고 검소하고 겸손하였으며

총명하여 약관의 나이에 성균관[泮宮]에 높이 올라갔다.

기약한 대로 과거에 급제하여 정당(政堂)의 동쪽에 들어가

오로지 각각의 인물을 가려 뽑고 임금을 도우며 충성을 다하였다.

일찍이 재상의 지위에 오르니 복과 녹이 모두 풍족하였고

56세에 우뚝하게 시중(侍中)이 되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뜻을 두니 음공(陰功)이 많이 있으며

세 차례나 과거[棘院]를 주관하여 영웅을 다 뽑았다.

□ 허물을 보이지 않고 한결같이 잘 지켰으나

하늘은 어찌 수(壽)를 내리지 않아 죽음이 급하게 다가왔는가.

5남 4녀를 두었으니 자손이 창성하고

왕손(王孫)이 사위가 되어서 가풍(家風)을 다시금 떨치게 되었으니

가계가 10세를 연이어 오면서 선을 행한 것이 모여진 것이로다.

나는 오직 오래된 인척(姻戚)으로 슬픔과 기쁨을 다하여 애통해 하며

좋은 돌에 명(銘)을 새겨 말갈기 같은 무덤에 봉하여 넣는다.

지원(至元) 28년 신묘년(충렬 17, 1291) 9월 일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1291년 문영공(김순) 장인 허공의 묘지명!!!
처음 보는 귀한 자료입니다.
1291년에 문영공께서는 승사랑 비서소윤 지제고(升仕郞 秘書少尹 知制誥)이었군요.
그리고 허공의 5남 4녀중 둘째사위였군요.
아침부터 눈이 번쩍 뜨이고 신이 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그렇네요. 실타래 같은 수수께끼들을 푸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