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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사위 채홍철(1262-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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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3-09 12:26 조회1,70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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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사위 채홍철(1262-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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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철(蔡洪哲)

1262(원종 3)∼1340(충혜왕 복위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무민(無悶), 호는 중암거사(中菴居士).

1283년(충렬왕 9) 과거에 급제하여 응선부녹사(膺善府錄事)에 보임되고, 그뒤 다섯 차례 전직하여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로 장흥부(長興府)에 출보되었다가 물러나 14년을 한거(閑居)하며, 불교와 음악·의약 등을 연구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의부정(司醫副正)으로 부름을 받고,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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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각종 기예에 모두 능하였는데, 특히 의약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불교에 심취하였다.

일찍이 자기집 북쪽에 전단원(#전29檀園)을 지어 선승(禪僧)을 기거하게 하는 한편 많은 사람들에게 의약과 의술을 베풀었으며, 집 남쪽에는 중화당(中和堂)을 두어 국로(國老) 8인을 맞아 기영회(耆英會)라 칭하였다.

〈자하동신곡 紫霞洞新曲〉이라는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이곡(李穀)·이제현(李齊賢)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동문선》에 〈복주영호루 福州暎湖樓〉 등 시 몇 편이 있고, 저작으로 《중암집 中菴集》이 있다.



■ 충렬공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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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취 박씨(前娶 朴氏)는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또다시 손씨(孫氏)를 재취(再娶)하여 딸 한 분을 나셨는데 그 따님은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 채의(蔡宜)에게로 출가(出嫁)하였다.



■ 《고려사》 제108권 - 열전 제21 >

채홍철

채홍철의 자는 무민(無閔)이요 평강(平康) 사람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응선부 녹사(膺善府錄事)로 임명되고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나가 장흥 부사(長興府使)로서 은혜로운 정치를 하였다.

이윽고 벼슬을 그만두고 14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면서 중암 거사(中菴居士)라 자칭하고 불교, 선교(禪), 거문고, 글씨 그리고 약을 짓는 것으로 일상사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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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김방경(金方慶)이 북방 국경 지방을 수비하고 있을 때에 용강(龍岡) 고을 관비(官婢)와 관계하여 한 여식을 낳았던바 채홍철이 그에게 장가들어 채하중(蔡河中), 채하로(蔡河老) 두 아들을 낳았다. 채하중은 따로 전기가 있다.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2001.12월, 김용선,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p.862

249. 채홍철(蔡洪哲) 묘지명

-전거 [가정집]12  -연대 충혜왕복위 원년(1340)

 

---부인 김씨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으로 역시 아들이 귀하게 되자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해졌는데15> 아버지 아무개<金方慶>16>는 벼슬이 첨의중찬 상락공에 이르렀고 (元) 세조 황제의 조정에 공이 있어 중봉대부 도원수에 제수되었다. 부인은 유순하고 아름답고 정숙하고 착하여 규문(閨門)의 법도를 잘 지켰으며, 자녀 5명을 낳았다.


*15>[고려사]에는 金方慶이 北界를 다스리러 나갔을 때 龍岡의 官婢를 좋아하여 딸 한 명을 낳았는데, 채홍철이 부인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고려사] 108 채홍철전).

한편 [김방경 묘지명]에는 김방경이 孫氏와 결혼하여 딸 한 명을 낳았는데, 통례문지후 蔡宜에게 시집갔다고 적혀 있다.

[채홍철 묘지명]에 그의 이름이 蔡宜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채홍철이 통례문지후를 역임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채의와 채홍철은 같은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6>⇒[김방경 묘지명] (이책 pp.662-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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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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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