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당(晩保堂) 김수동(金壽童)과 이요정(二樂亭) 신용개(申用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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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3-09 15:43 조회1,602회 댓글1건본문
만보당(晩保堂) 김수동(金壽童)의 묘소, 묘비, 신도비, 재실
묘소와 묘비, 신도비는 대구시 동구 송정동 장등산에 안장되고 향사일은 음 2월 한식일과 10월 15일인바 지역유림들이 향사하고 있다. 재실 만보정은 대구시 동구 신룡동에 있다.
원래 김수동(1457∼1512) 묘는 경기京畿 양천현陽川縣 남쪽 15리 지점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 양주에 있었던 김수동 묘비는 신용개(신숙주의 손자) 撰, 김희수(서운관정공파) 書로 세운 것이다. <이오의 대동금석서>
신용개(1463∼1519)는 신숙주의 손자로 그의 문집 이요정집에 <永嘉府院君 金壽童 挽詞 二首>, <永嘉府院君金公墓誌銘>, <永嘉府院君金公神道碑銘>가 실려 있다.
◇ 김희수(金希壽, 1475~1527)는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 본관은 안동. 관찰사 자행(自行)의 손자로 해서(楷書)에 뛰어 났으며 글씨로 <계주문(戒酒文)>. <영상김수동비(領相金壽童碑)>(양주). <영상성희안비(領相成希顔碑)>등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京畿 양천현陽川縣
동편으로 양화도(楊花渡)까지 17리이고, 서편으로 부평부(富平府) 경계까지 15리이며, 남쪽으로 같은 부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으로 북포(北浦)까지 3리이다. 서남쪽으로 같은 부 경계까지 13리이고, 동남쪽으로 금천현(衿川縣) 경계까지 20리이며, 서북쪽으로 김포현(金浦縣) 경계까지가 13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31리이다.
--- 신증 ★김수동묘(金壽童墓) :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만보당(晩保堂) 김수동(金壽童)
1457(세조 3)∼1512(중종 7).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미수(眉?), 호는 만보당(晩保堂).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사형(士衡)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적(?)의 아들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7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주서·홍문관정자·의정부사인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올랐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전한(典翰)·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 3)에는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받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그해 여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다시 이듬해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 聖學心法》 4권을 구하여 왔다.
그뒤 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경기관찰사·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홍문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04년 47세 때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해 갑자사화 때 그는 폐비 윤씨의 회릉추숭(懷陵追崇)을 주장, 시행함으로써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506년 어머니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단상(短喪)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이때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연산군에게 충실하였다고 사림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1510년 영의정에 올라, 그때 일어난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품성이 단정하였으며,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신숙주의 손자 신용개(申用漑)
<조선 문과방목>
신용개(申用漑)
성종(成宗)19년(1488년), 별시(別試) 3(3)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63년, 계미
자(字) 개지(漑之)
호(號) 이락(二樂)
본관(本貫) 고령(高靈)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문경(文景)
>>> 가족사항
부(父) 신면(申?)
생부(生父)
조부(祖父) 신숙주(申叔舟)
증조부(曾祖父) 신장(申檣)
외조부(外祖父) 정호(丁湖)
처부(妻父) 박건(朴楗)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83(계묘)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호당&,문형&(湖堂&,文衡&), 좌의정%(左議政%)
<디지털한국학>
신용개(申用漑)
1463(세조 9)∼1519(중종 1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개지(漑之), 호는 이요정(二樂亭)·송계(松溪)·수옹(睡翁). 영의정 숙주(叔舟)의 손자이며, 관찰사 면(#면14)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해에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그뒤 수찬·교리를 역임,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직제학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502년 왕을 기피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으로 서용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 이듬해 성희안(成希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뒤 대제학·우참찬과 대사헌을 거쳐서 이조·병조·예조의 판서를 역임, 우찬성이 되었다.
1516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518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다. 인품 또한 꿋꿋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 당시 선비들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성종은 그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御衣)를 벗어서 입혀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이요정집》이 있고, 편서로는 《속동문선》·《속삼강행실도》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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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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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장기 파견 준비에 바쁘시겠네요.
전국에 소재한 묘비, 묘갈, 신도비 등을 소재지별로 집대성한 <금석기>에
이요정 선생이 짓고, 유연재 할아버지가 글씨를 쓰신 경우가 아주 많이 나옵니다.
요샛말로 하면, 두 분이 콤비셨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