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문영공(김순) 할아버지 연보 4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5-03-11 18:49 조회1,373회 댓글0건

본문


18) 만년 풍류

명(銘)하여 이른다.
---노년에 한가로이 물러났으니 하늘의 뜻을 그대로 따르도다.
끝내 작위[茅土]를 이어 받으니 가문에 다시 영광이 되었으나
시정(時政)에 참여하지 않은 채 마음을 비우며 9년을 보내었도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 부 ‘김순 열전’>
---그의 성질은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예서(隸書)에 능하였고 성기(聲伎-노래 잘하는 기생)를 집에 데려다 두고 날마다 악기를 듣는 것으로써 낙을 삼았다.

<1332년 김순처허씨 묘지명, 이제현 찬>
---문영공이 만년에 노래 잘하는 기생을 좋아하였으나, 투기하는 기색이 없었다.

<디지털한국학>
---성격이 관후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으며, 거문고와 퉁소를 즐겼다.



19) (62세) 막내아들 영후(永煦)와 함께 선친 묘소 참배

기미년(충숙왕 6, 1319, 62세)에 또 선공의 묘에 참배하려하자, 임금이 막내아들 영후(永煦)에게 명하여 사명(使命)을 받들고 따라가게 하였으니, 그 행차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20) 동방급제 문량공(文良公) 조간(趙簡) 문병 가서

<역옹패설 전2>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은 문량공(文良公) 조간(趙簡)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방(榜)에서 첫째 자리는 문량공이 차지하였다. 문량공이 늙었을 때 악성 종기로 어깨와 목을 거의 분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의원은 손을 쓸 수 없었는데, 묘원(妙圓)이란 중이,
"이 종기는 뼈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뼈가 반은 썩었을 것인데, 그 썩은 뼈를 긁어내지 아니하면 치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뼈를 긁어낸다면 그 아픔을 참아내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문량공이,
"죽기는 마찬가지니 시험해 보라."
하였다. 중은 드디어 예리한 칼로 살을 베어내니 과연 뼈가 썩어 있었다. 그 썩은 뼈를 긁어내고 약을 바르니 문량공은 기절하여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었다.
문영공이 이 말을 듣고 문병을 가서 문에 앉아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니, 문량공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공이 나를 슬퍼함이 이와 같을 줄 몰랐다. 어찌 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슬퍼하는가."
하였다. 이에 문영공이 말하기를,
"허, 이게 무슨 말인가. 40년 동안 동년급제(同年及第)로서의 교분(交分)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문량공이,
"내가 죽으면 같은 방 안에서는 공(公)을 앞서는 자가 없기 때문일세."
하였다. 문영공이 눈물을 거두고 웃으며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죽지는 않겠다."
하고 돌아갔다.

조간(趙簡)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제(金堤).
1279년(충렬왕 5)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서적점녹사(書籍店錄事)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왕이 문신들에게 시부(詩賦)를 시험할 때 또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황패(黃牌)를 받고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1288년에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왕명에 의하여 새로운 악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벼슬이 점차 올라 보궐(補闕)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자, 왕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기거주(起居注)로 특진시켰고, 다시 첨의사인(僉議舍人)으로서 경상안렴사(慶尙按廉使)에 보임되었다.
1298년에는 좌사의(左司議)로 과거를 주관한 바 있고, 1300년 좌부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 부고시관)가 되어 진사를 뽑았다.
그뒤 좌간의·좌승지를 거쳐 우상시권수밀직부사(右常侍權授密直副使)에 올랐다. 충선왕 때 형조시랑우간의대부(刑曹侍郎右諫議大夫)를 거쳐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충숙왕 때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역임한 뒤 찬성사에 올라 죽었다.
시문에 뛰어나 조선 영조 때 유광익(柳光翼)의 《풍암집화 風巖輯話》에도 수록되어 있다.



21) 성품

공은 성품이 정이 두텁고 곧으면서도 부드러우며, 내실(內實)이 있으면서도 강직(剛直)하여 굴하지 않았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는 것이 조금도 꾸밈없이 자연스러웠으니, 애석하다. 공의 재주와 덕으로써 만일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이익과 혜택이 어찌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았을 것이며, 명성과 지위가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
옛 말에 군자라고 함은 덕행(德行)을 말한 것인가, 공업(功業)을 말한 것인가. 나는 다만 덕행일 뿐이고 공업은 아니라고 말하고자 하니, 왜 그러한가. 덕행은 마음에 달려 있고 공업은 때에 달려 있는 것인데, 마음에 달린 것은 사람이 닦을 수 있으나 때에 달린 것은 하늘이 주는 바이니, 능히 사람이 닦을 수 있는 것을 닦으면 군자가 되는 것이다. 대저 덕행은 충과 효로 바탕을 삼는 것인데, 충효로 당시에 이름을 떨친 이는 우리 판삼사 상군(判三司 相君)이다.



22) 자녀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이며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으로 추증된 허공(許珙)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영돈(永暾)은 지금 도관직랑 지합주사(都官直郞 知陜州事)이고, 차남 영휘(永暉)는 지금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이며, 3남 사순(思順)은 머리를 깎고 자은종(慈恩宗)의 대덕(大德)이 되었으며, 4남 영후(永煦)는 사헌지평(司憲持平)이 되었다. 장녀는 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內侍 中正大夫 親御軍大護軍) 정책에게 시집갔고, 2녀는 대광 상당군(大匡 上黨君) 백이정(白?正)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사인(舍人)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에게 시집갔으니 원의 좌승상(左承相) 아홀반(阿忽反)의 아들이다.

<1332년 김순처허씨 묘지명, 이제현 찬>
장남 영돈(永暾)은 봉상대부 전법총랑(奉常大夫 典法摠郞)이다. 둘째 영휘(永暉)는 흥위위 낭장(興威衛 郎將)이다. 그 다음 사순(思順)은 출가하여 자은종(慈恩宗) 대덕(大德)이다. 그 다음 영후(永煦)는 봉선대부 자섬사사(奉善大夫 資贍司使)이다. 장녀는 대광 청하군(大匡 淸河君) 정책(鄭漬)에게 시집갔으나, 먼저 죽었다. 다음은 대광 상당군(大匡 上黨君) 백이정(白?正)에게 시집갔다. 막내는 강절성 참지정사(江淅省 參知政事)인 왕인 별리가불화(王人 別里哥不花)에게 시집갔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