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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김순) 할아버지 연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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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3-11 18:48 조회1,6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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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42세)1300년 정치적 소용돌이 중에 아버지 충렬공 별세

기해년(충렬왕 25, 1299, 42세)에 물러날 때가 된 것을 알고 은퇴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43세) 8월에 선공이 세상을 떠나니 유언에 따라 고향에 장례지내고,

<고려사 김방경 열전 부 김흔 열전>
---중 일영(日英)이 한희유가 반역을 음모한다고 무고하였을 때 김흔은 인후(印候)와 더불어 군대를 출동시켜 한희유를 붙잡아다가 좌승(左丞) 합산(合散)에게 고발하여 문초케 하였다. 그러나 한희유 등은 죄행을 시인하지 않았고 일영도 또 달아나 버렸으므로 인후, 김흔 등이 장차 원나라로 가서 황제에게 하소하려 하였는데 왕이 말리었으나 그 말을 따르지 아니 하였다. 그래서 왕도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한희유의 죄가 무고임을 판명케 하였다. 때마침 대사령이 내렸으므로 김흔 등도 죄를 면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귀국하여 복상을 마치고 다시 원나라로 갔다.
당시에 한희유가 재상으로 있었으므로 김흔은 고려로 돌아오려 하지 않고 연경에서 대략 7년간이나 머물러 있었다. 한희유가 죽고 난 뒤에 김흔을 찬성사 자의(咨議) 도첨의사사로 임명되고 삼중 대광(三重大匡)의 작위를 더하여 받았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으로 봉하였으므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만호의 관직은 사양하여 형의 아들 김승용(承用)에게 주었다.

<1300년 충렬공 묘지명, 이진 찬>
---대덕4년(大德4년=1300년) 8월 16일에 병환(病患)으로 인하여 백목동(栢木洞) 영계리(◀앵계리)에서 돌아가시어 9월 초3일에 예안현(禮安縣) 서쪽 산록(山麓)에 유교(遺敎)에 따라 안장(安葬)하였다.

<1350년 충렬공 행장, 안진 발>
---89세에 병환(病患)으로 본댁(本宅)에서 돌아가시니 임종(臨終)시까지 아품이 없이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시니 유언(遺言)에 따라 안동(安東) 조부(祖父)산소(山所  ◀안동府西 一息 花林村)근처에 장사(葬事)하게 되었다.
영구(靈柩)가 떠날 때는 삼관녹사(三官錄事) 80여명이 모두 소복(素服)으로써 제사(祭祀)를 드리고 울음으로서 보내는데 그 때 공(公)을 미워하는 간신(奸臣)들 무리의 모사(某事)로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여서 왕(王)이 또한 후회(後悔)하고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26년에 그는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는 89세였다. 김방경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들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그는 죽은 뒤에 안동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던 자들이 이것을 싫어하여 예식대로 장사 지내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왕이 이것은 잘못이었다고 후회하였다.



15) (49세)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書

(49세)1306년 9월 書하신 <高麗國大藏移安記(고려국대장이안기)>의 기록이 元의 周南瑞(주남서)가 편찬한 <天下同文>에 수록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에도 본문이 축소된 채 수록되어 있다.
이 비는 민지 찬, 김순 서로 만든 것으로, 비의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劉喜海의 海東金石存攷(고)에는 "大德10年9月閔漬撰 金恂書 在江原道淮陽府金剛山"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려국대장이안기>
선수 조열대부 한림학사(宣授 朝列大夫 翰林學士) 겸본국 광정대부 자의도첨의사사사 연영전대학사 동제수사 판문한서사(兼本國 匡靖大夫 咨議都僉議使司 延英殿大學士 同提修史 判文翰署事) 민지(閔漬)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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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大德) 10년 병오년(충렬왕 32, 1306) 9월 일 적음.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判秘書寺事 文翰學士) 김순(金恂)이 씀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국학대사성 숭문관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國學大司成 崇文館學士) 윤보(尹珤)가 전액(篆額)을 씀
고려국 금강산 성불난야 호송대장경 백실사문(高麗國 金剛山 成佛蘭若 護送大藏經 白室沙門) 석(釋) 일목(一牧)이 돌을 세움
선수 강서도 원주로 의춘현 대앙산 당대주지(宣授 江潟 袁州路 宜春縣 大仰山 當代住持) 전법허곡대선사(傳法虛谷大禪師) 희릉(希陵)



16) (53세) 중대광 상락군

경술년(충선왕 2, 1310, 53세) 겨울 선공의 묘에 제사지냈다. 임자년(충선왕 4, 1312, 55세)에 다시 중대광 상락군(重大匡 上洛君)으로 임명되면서 선공의 작위[茅土]를 이어받았다.



17) (57세)1314년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書

(57세)1314년 2월 書하신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의 기록이<옥금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에 수록되어 있다.
이 비는 1314년 (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으로 민지 찬, 김순 서로 만든 것이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한림원직학사 조열대부본국중대광 수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선부사 치사 민(閔)□□ 지음.
중대광 상락군 김순(金恂)이 글씨와 제액(題額)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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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延祐) 원년(충숙왕 1, 1314 ) 2월 일
공덕주(功德主)는 대광 첨의찬성사 판총부사 치사(大匡 僉議贊成事 判總部事 致仕) 원관(元瓘)이고, 성해자조명종대사(性海慈照明宗大師) 화엄종주(華嚴宗主)로 항주로 고려혜인교사(杭州路 高麗惠因敎寺) 주지인 승려 혜복(慧福)이 비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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