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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2. 15. 주회(안) 제공)
1)화해사전(華海師全)에서 고려말의 학자 ★신현(申賢)의 학문과 언행을 모아 엮은책인 화해사전(華海師全)은 7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중 5권 '제자서술' 에 안렴사공과 제친우(원천석,김사안,김사렴,이숭인,이색,신덕린)들과의 대화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7권 '운곡거의'에 원천석이 원주 치악산에서 주관하는 제사 참여자 명단에 안렴사공 휘자도 보입니다.
이밖에도 화해사전에는 1권 '본조문대' 란에 우탁, 박전지, 김태현, 김승용, 안우기, 김륜, 김영돈, 민적, 김영후, 안목, 김승택, 안진, 민사평, 김영후, 백이정 5권 '제자서술' 란에 우탁-김륜, 정오, 백이정, 권보, 백이정-이제현, 김영돈, 김영후 7권 '운곡거의' 란에 김승용의 휘자도 보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번역본을 찾아 더 공부해야 겠습니다. 우선 안렴사공파보(1988 무진보)에 화해사전 5권 '제자서술'란의 안렴사공 기록이 '안렴사공과 제친우와의 결별'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이를 소개해 봅니다.
이를 보면 안렴사공께서는 고려말의 우탁-신현-신용희-우현보 로 이어지는 유학계보로 신현의 문인이었음을 알 수 있고, 역성혁명 전후에 원천석, 이숭인, 이색, 신덕린 등과 친밀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천석(元天錫) 1330-?(충숙왕17) 김사렴(金士廉) 미상() 김사안(金士安) ?-1391(공양왕3) 이숭인(李崇仁) 1347-1392(충목왕3-태조1) 이색(李穡) 1328-1396(충숙왕15-태조5) 신덕린(申德隣) 미상()
우탁(禹倬) 1263-1342(원종4-충혜왕복3) 신현 신용희 우현보(禹玄寶) 1333-1400(충숙왕복2-정종2) 정도전(鄭道傳) 1342-1398(충혜왕복위3-태조7)
2) 안렴사공파세보 (1988 무진보)에서 오은공과 제친우들과의 최후결별 ★운곡 원천석 선생이 ★오은 김사렴을 찾아가니 그 아우 ★석루 사안이 시석하고 있었다. 그때 ★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 ★순은 신덕린이 와서 최후의 결별로 만나서 그리든 회포와 처세할 것을 한담할 적에,
★오은이 이르기를 "전에 ★간재 신문헌 (=신용희) 선생에게 '이치는 한 가지라 하니 일리라는 것은 어느 물건이고 다 있는 것이 모두 일리니이까' 하고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글에 능하여 물리에 연구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분요하여 연구할 여가가 없었으나 이로부터 어둡게 숨어 살아 매양 한가하고 무사하니 단지 그 가르침에 따라 나의 나머지 여생을 사물 탐구하는 데 두어 낙의 무궁한 맛에 족할까 하노라"
★목은 왈 "(앞에 한 말은 생략) 누가 ★우역동(=우탁) 에게 종사하지 아니하였으리요만은 그의 자손(?양호 우현보)이 소몰당한 ★신문정공(=신현) 집에 부쫓아 간 것이 같이 미움을 받았고, 또 연달아 정도전의 일이 겹쳐서 나라를 배반했다고 독설의 혐의를 입어 천만가지의 간교로 돌려대어 신우 양가를 윤몰시켰다. 후에 이것을 아는 군자들은 우역동문에 제자록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 간교스러이 한 것이 심하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석루, 도은, 순은 의한 말은 생략---
★오은께서 듣고 슬퍼서 일러 왈 "혹독함이여, ★우역동 선생은 ★신선생 부자 (=신현,신용희)를 제자로 삼았고 우역동의 손자 ★양호(=우현보) 대에는 ★신선생 부자를 스승으로 삼은 것과 더군다나 또 4월의 상전세주가 되므로 화를 입은 것이다. 다만 우선생가 에는 문인록만 없애고 신선생문인즉 자손 성명을 윤몰시키고 그의 문헌 전적을 모두 불사르고 전함이 없게 하였으니 아프고 아까움이여, 오지 우리 친구 ★원처사가 알고 기록하기를 잊지 마시오. 내가 이 말을 듣고 근심걱정이 배나 간절하여 항상 마음이 흔들리고 초조하여지노라"
☞안렴사공파세보 설명 이태조 등극하니 오은공께서는 오근촌으로 와서 은거하고 있는 중 원운곡 선생이 오은공을 만나 보려고 오근촌으로 온 때, 오은공의 아우 석루 사안이 오은을 모시고 있는 자리에 들어가자 곧 뒤따라 도은 목은 순은이 같이 들어와서 담화를 나누고 고회를 푸는 망국신으로 최후의 모임으로 알 수 있고, 그만치 친분이 두껍기에 서로 위로하러 온 것이다.
3) 오은공 말씀 중에 "근자에 자기 행적을 남이 모르게 하고 몸을 숨겨 있어서 항시 한가무사" 라고 한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오은공의 은거처인 오근촌으로 찾아왔고 교분이 특별히 두터운 것을 알 수 있다. 신우 양선생을 앙모하였기에 그들의 화당한 사실을 잊지 말고 기록하여 주기를 부탁한 것이다. 그 글로 보아 자신이 가지고 있언 문헌과 시서는 손수 불사르고 일반 사적은 혁명당시에 험의가의 손으로 윤몰시킨 것으로 알 수 있다. 고증문 華海師全, 梧隱公諡狀文
☞편집자(김주회) 의견 운곡 원천석 선생 등이 청주 도산에 은거하고 있던 안렴사공 할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아우되시는 석루 사안 공이 시석하고 있었다. "石樓 사안"이라고 되어 있는 점을 볼 때 충강공 사안 공의 자나 호가 "石樓"이었을 것이다. 또한 충강공(김사안)의 졸년이 1391년(공양양3년) 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점을 볼 때, 이태조 등극(1392년) 이전에 안렴사공께서 청주 도산으로 은거하시었고, 위 모임도 1391년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고충지 (1982, 안렴사공파종회)>에서 청시상언중--- 대개 공양때 이조개국공신들을 지방으로 나누어 보낼 적에 조견, 김사렴이 명을 받들어 조견은 영남 김사렴은 호서 안렴사로 나갔다. 려조가 혁명이 되니 조견은 돌아가 과천 관악산에 숨고 김사렴은 그 고장 청주북쪽 오근리에 숨었으니 두 사람의 의리에 처함이 대략 같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고려혁명 직전에 권신의 혁명과업 수행 정책으로 예비작업에 밀리어 지방 안렴사로 축출당한 것이다. 안렴사 김사렴 공께서는 정포은이 학살당하니 청주북쪽 오근촌에 은익하였다. 이태조 등극하면서 직간 잘하는 공을 좌사간 벼슬을 주어 수차 부르니 나가지 아니하고 도산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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