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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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8. 안렴사공 묘소발견과 영모재 건립

     (2003. 2. 4. 주회(안) 제공)

 

안렴사공 할아버지 사후 273년후에 묘소발견 및 영모재 조성 내용을 찾아 보았습니다.

안렴사공 묘소 발견 및 영모재 조성 (1678)

 

 1) 오은선생 행장 (?1768, 13대손 김래 찬)

숙종4년 무오(=1678)에 ★양성현감(=金吹)이 도산 위에 갔다가 실전된 무덤을 발견하게 되어 그 곁에 조금 새겨 둔 표지를 근거로 삼아 비로소 선생의 묘소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봉분을 만들었으니 아! 기이한 일이로다.

 

 2)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초기 (1802이전, 홍양호 찬)

이조 숙종 戊午년(=1678)에 선생의 증손 양성현감 휘★吹의 실전한 묘소를 찾다가 돌무덤에서 평총한 誌石을 얻어 비로소 선생의 실전된 묘소 광중으로 알고 또다시 실전이 될까하여 이에 봉토를 하고 墓碣을 세웠다.

 

3) 안렴사김공 묘갈록 (1830, 남공철)

世代가 점점 멀어져 葬地를 잃었는데, 숙종4년 戊午(무오-1678) 에 공의 증손 양성현감 ★吹(취)의 잃어버린 무덤을 찾음으로 인하여 그 작은 表石을 자세히 살펴보아 비로소 공의 幽宅(유택)인 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봉분을 만들어 해마다 時享 지내기를 계속하였다.

 

 4) 안렴사공 신도비문 (1840이전, 남공철)

公이 돌아 가신제 300여년만에 後孫이 처음으로 石槨中의 誌文을 얻어서 살펴보니 公의 墓所인지라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陶山 子坐의 언덕에 모셨다.

 

 5) 여말의충절 김사렴 (1996, 김재윤 청주교대 교수)

공이 타계한 지 273년만인 1678년(숙종4년 戊午)에 후손들이 공의 증손인 양성공 吹의 실전된 묘소를 탐색하던 중, 석곽 중의 誌石이 발견되어 자세히 살펴본 결과 뜻밖에도 공의 묘소로 확인되었다. 당시의 그 기쁨이 얼마나 컷을 것인가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묘소가 알려지게 됨으로써 혹시 어떤 화가 미치지 않을까 조심스럽고 또한 다시 실전하지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작은 징표만을 남겨 미봉을 한 채 내려오다가, 조선 왕조가 망한후 1938년(戊寅) 2월에 가서야 봉분을 개축하고 신도비와 비각등 제반 石儀를 마련하여 어엿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도산 자좌의 양지바른 언덕으로서 그 앞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있고 그 사이로는 금강 줄기가 유유히 굽이치고 있다.

 공의 이러한 충절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공의 학덕을 길이 추모하고 기리기 위하여 1678(戊午)에 공의 묘소 아래에 永慕齋(영모재)를 건립하고 講學의 도장으로 일구었는데, 송천서원이 이룩되면서 齋室로 이용해 왔고, 1988년 戊辰에 齋直舍와 함께 중수 개축하였다.

 

 6) 영모재 안내서

안렴사공 묘소

공이 하세하신 뒤에 유명에 따라 평총을 하였는데 병란과 시세혼란으로 실전되었다가 1678년(몰후 273년만인 숙종4년 무오년)에 지석의 발견으로 묘지를 확인하여 미봉을 하였고,

1938년(무인) 2월에 다시 봉축하고 석의를 갖추었다.

 

 7) 영모재 안내서

○ 영모재와 재직사

영모재는 1678년(戊午) 안렴사공의 학문도덕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강학의 도장으로 일구었는데

송천서원이 이룩되면서 재실로 써내려 왔고, 1988년(戊辰)에 대폭 중수하였으며 재직사도 동시에 개축하였다.

 

 8) 영모재 안내판

○ 永慕齋에 대하여

안렴사공의 산소를 숙종4년에 찾으니 공의 충절을 사모하던 士林들이 慕(茅?)亭 비슷이 영모재를 묘하에 세우고 詩書를 강론하였다.

그후 최명곡(★최석정) 선생이 주무가 되어 松泉에 서원을 세워 공을 주벽으로 선현 7선생을 모시고 춘추 원향을 올리게 되었다. 7현의 향축문도 최명곡 선생이 撰하시었다.

영모재는 송천서원 전신으로 공의 묘소의 재궁으로 쓰여 오고 묘지명이 [사모할모자] 慕亭里로 전하여 왔다.

 

 9) 1999도산유적정화보수기 (2000, 영모재)

○ 영모재의 보수

영모재는 1678년(숙종4)에 창건된 이래 많은 보수공사가 있었고, 특히 1988년에 대폭적인 중수사업을 시공하였으나 지금에 蓋瓦(개와)가 파손되어 누수가 됨으로써 도리, ○목이 부식하여 장차 倒壞(도괴)의 우려가 있어 이를 모두 교체 개○하고 재실 전체를 일신하게 개보수하였다.

소요공비 2,500만원은 본 종회에서 2,100만원, 익원공파에서 100만원, 서운관정공파에서 300만원을 헌성하였다.

 

○ 조경정화사업

예년 묘역관리와 정화에 정성을 기울여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왕년에 진천종친회장을 역임하신 故 思永 宗長이 위선 지성이 투철하여 소영하는 조림사업을 계기로 관상수를 헌수하여 가꾸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사되거나 부실하게 된 것이 있었는데

그 令胤(영윤) 聖演 족친이 금반사업에 적극 협력하여 관상수 다수를 영단 복원처를 비롯한 묘역 전체에 식재 미화하는 한편 다시 헌성금 60만원을 헌납하는 등 위선의 지성을 다하였음을 특기하여 둔다.

 

○ 敍上(서상) 공사는 乙卯(1999) 早春부터 계획하여 양년간 사업으로 시행되었는바 어간에 익원공, 서운관정공 양파 및 좌랑공파를 비롯하여 각 소파와 독지 자손들의 참으로 심저에서 용출하는 정성이 아니면 성수하지 못하였을 것이라 사유되어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한편 계제에 이 중대한 사업을 주간하여 不避風雨 不顧家事(불피풍우 불고가사)하고 심시늬 고난을 격어 내면서 설계, 시공, 재원조달과 중역에 이르기까지 헌신적 사명을 다한 在澤 파종회장과 在均총무의 막중한 노고를 치하하고 영모재와 신도비 공사를 맡아 완벽하게 시공을 한 正會 종친의 성력을 가상하며 또한 수시로 협조와 조언을 주신 문로 및 종회임원 여러분의 성의를 절감하면서 여사한 기운으로 더욱 종문의 영광과 발전이 있을 것을 (北+異)望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서기 2000년 庚辰 4월 일

대종회 고문, 전 안렴사공파종회장 在華 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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