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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2. 4. 주회(안) 제공)
1) 오은선생 행장 (?1768, 13대손 김래 찬)
여러 아들들에게 교훈으로 말하기를 "나는 고려 왕조의 옛 신하로써 대대로 재상 가정이었는데, 이미 국가를 보존할 수 없고 또 나라와 더불어 함께 없어지지도 못하였으니 나는 천하의 죄인이다. 내가 죽거든 깊은 산에 장사지내어 봉분도 만들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개의 무덤이라 손가락으로 가르켜 보임이 없게 하라" 고 하였다. 상을 당하자 여러 자식들이 유언대로 장례를 치르니 무덤을 펀펀하게 만들어 언덕과 같은 모양으로 하였다.
그후에 청주 사람들이 風烈을 사모하여 심지어 "遺命平塚(유명평총-유언대로 평평한 무덤을 만들다) 넉 자를 제목으로 내걸어 선비들을 시험(과거)하였다. 세대가 점점 멀어지자 향사가 따라 폐하여져서 먼 후손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묘소를 잃어 버렸다.
숙종4년 무오(=1678)에 ★양성현감(=金吹)이 도산 위에 갔다가 실전된 무덤을 발견하게 되어 그 곁에 조금 새겨 둔 표지를 근거로 삼아 비로소 선생의 묘소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봉분을 만들었으니 아! 기이한 일이로다.
2)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초기 (1802이전, 홍양호 찬)
臨終때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조의 옛 신하로 임금을 바르게 도와 나라를 구하지 못하였고 또 나라가 망함과 같이 죽지 못하였으니 나는 천하에 죄인이라.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과 선인들을 지하에서 뵈이리요. 나의 자손은 나의 뜻을 잘 받아서 내가 죽은 뒤 심산중에 장사지내되 봉분도 하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아서 이 다음 사람이 그 누구의 무덤이라고 손가락질함이 없게 하고 또 내 자손이 고려조정에 벼슬한 사람은 이씨조정에 가서 거듭 벼슬하지 말라"고 하시었다.
저, 포은 정선생이 죽고 목은 이선생이 은신함과 더불어 한머리 죽고 한머리 은익한 것이 다 같이 罔僕之臣이 되었으니 옛적에 殷나라의 三仁(기자 미자 비간)과 같다. 선생이 세상을 버리니 자손이 유언에 따라 陶山 子坐 언덕에 장례 지내되 봉분도 없이 평총으로 하고 표석도 세우지 아니하여 산언덕과 같아서 여러번 병화에 실전되고 말았다.
이조 숙종 戊午년(=1678)에 선생의 증손 양성현감 휘★吹의 실전한 묘소를 찾다가 돌무덤에서 평총한 誌石을 얻어 비로소 선생의 실전된 묘소 광중으로 알고 또다시 실전이 될까하여 이에 봉토를 하고 墓碣을 세웠다. 이 고을 사람들이 선생의 충절을 사모하여 우러러 보지 않는 이 없어서 遺命平塚(유명평총)이라는 네 글자를 제목으로 삼아 다투어 그 충절을 찬양하였고 선비의 실력을 고사하는 데도 시제를 삼어서 재주 있는 선비들의 시로 그 충절을 감탄케 하였다.
3) 고려명신전 (1822, 남공철)
태조가 사렴을 배하여 좌사간을 삼아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드디어 陶山으로 들어가 더욱 문을 닫고 손님을 끊고서 졸할 때에 임하여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나는 고려조의 옛 신하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서 나라를 보존하지 못했고 나라가 망하자 또 능히 몸이 殉國하지 못했으니 천하의 죄인이라.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先王와 先人을 뵙겠느냐. 내가 죽거든 깊은 산 속에 장사 지내고 흙을 쌓아 올리거나 돌을 세우지 말고 자손 중에 이미 벼슬한 자라도 다시는 벼슬하지 말라." 했다.
4) 안렴사김공 묘갈록 (1830, 남공철)
臨終때 여러 아들들에게 訓戒하기를 "나는 고려왕조의 옛 신하로서 집안 대대로 정승이 되었는데, 이미 국가를 보존할 수 없고 또 나라와 더불어 함께 없어지지 못하였으니 나는 천하의 죄인이다.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우리 임금과 조상들을 저승에서 뵙겠는가. 내가 죽거든 깊은 산에다 장사지내어 봉분도 만들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손가락질을 하여 아무개의 무덤이라고 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죽으니 여러 자식들이 유언대로 장례를 치렀는데 봉분을 안 모으고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
후일에 선비를 시험(과거)을 본 적이 있는데, 遺命平塚(유명평총-유언대로 평평한 무덤을 만들었다)을 제목으로 삼았다. 世代가 점점 멀어져 葬地를 잃었는데, 숙종4년 戊午(무오-1678) 에 공의 증손 양성현감 ★吹(취)의 잃어버린 무덤을 찾음으로 인하여 그 작은 表石을 자세히 살펴보아 비로소 공의 幽宅(유택)인 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봉분을 만들어 해마다 時享 지내기를 계속하였다.
5) 안렴사공 신도비문 (1840이전, 남공철)
臨終時에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시며 遺言하시기를 "나는 麗朝의 옛 臣下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나라를 保存치 못하고 나라가 亡하여도 또 따라 죽지 못하였으니 天下의 罪人이라. 무슨 面目으로 地下에 들어가 先王과 先祖들을 뵈올 것인가. 내가 죽거든 깊은 山中에 묻고 封墳도 하지 말고 表石도 세우지 말고 자손 중에서 이미 벼슬한 사람은 다시는 벼슬하지 말라" 警戒하시었다. 때문에 生存時의 文蹟과 其他 事蹟 및 生卒日時와 墓所등을 모두 紛失하여 傳하지 못하고 野史나 遺乘에 傳하는 것은 다만 이러한 것 뿐이다.
公이 돌아 가신제 300여년만에 後孫이 처음으로 石槨中의 誌文을 얻어서 살펴보니 公의 墓所인지라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陶山 子坐의 언덕에 모셨다.
6) 여말의충절 김사렴 (1996, 김재윤 청주교대 교수)
공은 임종이 다가오자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며 유언하기를 "나는 고려조의 옛신하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나라를 보존치 못하였고,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따라 죽지 못하였으니, 천하의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러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돌아가 선왕과 조상님들을 뵐 수 있단 말이냐?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파묻고 봉분도 하지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라. 그리고 우리 자손 중에서 고려조에 이미 벼슬했던 사람은 다시는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말라." 고 말하였다. (고려명신전 참조)
한 나라의 흥망을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당연한 사리인데 고려 왕조를 보존치 못한 것을 마치 공 혼자만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을 볼 때 우리들은 그 충절의 깊이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스스로 죄인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죽어서도 후세 사람들이 자기 무덤을 가리키면서 손가락질할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공의 선비정신과 그 인품이 얼마나 고결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공의 이 유언은 그 자손들이 그대로 받들어 평총을 하고 표석도 세우지 않았다. 그뒤 많은 세월동안 병란과 시세 혼란으로 공의 묘소를 알 길이 없었다. 또한 공의 학문도덕과 그 고매한 인격으로 미루어 볼 때 생존시에 썼던 기록물이나 시문과 저서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 세상에 아무러한 행적도 남기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그 어느 것 하나도 찾아볼 길이 없고, 공의 생졸일시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은 살아 있으면소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 처소를 알 수 없게 하였고, 죽어서도 후세 사람들이 그 묘소를 알 수 없게 하였다. 이는 그 후손들이나 공의 충절을 흠모하는 이들에게 참으로 통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공의 충절은 수백년이 흘러도 더욱 새로워져 조선 숙종은 공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유명평총' 넉자와 '일편도산 만고수양' 여덟 자를 과거시험 제목으로 내걸어 당시의 선비들에게 공의 충절을 기리고 또 널리 알렸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혹자는 공의 이러한 충절을 한낱 구시대의 낡은 가치관으로 貶視(폄시)하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공직자들에게 국가에 대한 봉공정신이 공의 충절의 단 10분의 1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싶은 것이 필자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똑같은 염원이 아닐까 생각된다.
공이 타계한 지 273년만인 1678년(숙종4년 戊午)에 후손들이 공의 증손인 양성공 吹의 실전된 묘소를 탐색하던 중, 석곽 중의 誌石이 발견되어 자세히 살펴본 결과 뜻밖에도 공의 묘소로 확인되었다. 당시의 그 기쁨이 얼마나 컷을 것인가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묘소가 알려지게 됨으로써 혹시 어떤 화가 미치지 않을까 조심스럽고 또한 다시 실전하지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작은 징표만을 남겨 미봉을 한 채 내려오다가, 조선 왕조가 망한후 1938년(戊寅) 2월에 가서야 봉분을 개축하고 신도비와 비각등 제반 石儀를 마련하여 어엿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도산 자좌의 양지바른 언덕으로서 그 앞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있고 그 사이로는 금강 줄기가 유유히 굽이치고 있다.
공은 고려의 망국한과 나라를 받들지 못한 죄책감, 고려를 찬탈한 혁명 역도들에 대한 비분강개한 심경을 스스로 달래 가면서, 세상을 등지고 오직 학문과 후학육성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마치었다. 후세인들이 공의 학덕과 충절을 추앙하고 흠모하였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은 공에 대해서 "충성이 밝기로는 일월과 같고, 절개가 굳굳하기로는 산악과 같다. (忠昞日月 節高山岳)" 고 칭송하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공의 고충대절을 비유하여 말하기를 "공의 충절은 백이숙제를 뛰어넘고, 만고에 변치않을 강목과 상도를 더욱 굳건히 심어 놓았다. (其孤忠大節 不讓於夷齊 樹萬古之綱常) "고 늘 일컬어 오기도 하고 또한 "공의 절개와 충성은 일월과 같이 밝고, 도산 기슭에 어린 충절은 백이숙제와 같이 드높도다. (貞忠與日月幷明 陶山一丘與首陽齊高)" 고 하였다. 공의 이러한 충절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공의 학덕을 길이 추모하고 기리기 위하여 1678(戊午)에 공의 묘소 아래에 永慕齋(영모재)를 건립하고 講學의 도장으로 일구었는데, 송천서원이 이룩되면서 齋室로 이용해 왔고, 1988년 戊辰에 齋直舍와 함께 중수 개축하였다.
7) 고충지 (1982, 안렴사공파종회) 17. 오은안렴사공 충절찬양시 (1982년 7월 19일 발견) 오은 안렴사공의 충절을 부시찬양한 시문 1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개성인 오○재 10대손 김영택씨 가세장시첩에서 고증문이 발견되었음 시제 일편도산 만고수양 古風
등오은김선생묘소유감 김죽산상희
독오은김선생행장유감 전주인 이범학
이상 2수의 시문은 김崙會 가 소장 선인들의 시집에서
8) 고충지 (1982, 안렴사공파종회) 오은안렴사공 일사
영모재는 건립당시에는 청주 治北 甲齋로 송천서원의 전신으로 건립된지 30여년만인 1708년 숙종 무자에 유림들이 청주 서쪽 송천에 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오은 안렴사공께서 외로이 隱向하여 옛 임금을 사모하고 섬기는 마음을 표현하는 뜻에서 마주 향하여 선다는 公孫樹의 열매인 은향(오능)을 제수에 꼭 쓰고 있다. 오능은 흔하지 아니한 과실이다. 그 열매가 많이 열지 아니하며 흉년에 구하기가 극히 어렵다 할지라도 궐하지 아니하고 세제때 제수에 꼭 올리고 있다. 옛 임금에게 마주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의 상징을 표현하는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木+銀 오능나무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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