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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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10. 안렴사공 기록찾기 (1800년대)

       (2003. 2. 2. 주회(안) 제공)

 

1800년대 안렴사공 기록은 아래 열거한 바와 같습니다.

안렴사공의 외현손이 되시는 남공철 선생이 1822년에 고려명신전 일민편에 안렴사공 행적을 수록하였고, 1830년에는 묘갈명을 찬하였고, 1840년이전에 안렴사공 신도비문을 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안렴사공의 13대손 김래는 ?1768년에 오은선생행장을 찬하고, 1789년에는 6대조 화산군 김주 선생의 <우암유집>을 편집 간행하였고, 1830년에는 남공철 선생을 찾아가 안렴사공의 遺事(유사)를 보여주고 비석을 세우는데 쓸 비문을 요청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오은김선생 청시상언초 (1818, 이의병)

1818년(순조30년 무인) 2월의 陵幸時에 이의병을 장두로 하여 김사렴에게 賜諡(사시)의 명을 내리기를 청하였다.

 

2) 고려명신전 일민편에 안렴사공 수록 (1822, 남공철)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은 1822년(순조 22)에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지은 전기집(傳記集)인데, 이 책 일민편에 안렴사공의 행적을 수록하였다. 이 내용은 대동기문(1925간행),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디지털한국학 등에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3) 안렴사김공 묘갈명 찬 (1830, 남공철)

이 자료는 성회 종친님께서 입수 구입하여 사비를 들여 번역하여 소개해 주신 자료임

 

4) 안렴사공 신도비 찬 (1840이전, 남공철)

☞☞노은정을 건립한 김상기의 증손녀가 남유용에 출가하여 남공철을 낳았으므로 김상기는 남공철의 외고조부가 된다. 남공철은 1822년 고려명신전을 지을 때 일민편에 안렴사공을 수록하였고, 1830년 안렴사공(휘사렴) 묘갈명과 1840년이전 신도비명을 찬하였다.

*****김공언---3/4김훈---김효길---김색---김지석---김상기---김봉구---김석태---따님(+남유용)---남공철

 

 5) 오은김선생 請諡上言草 (1818 이의병)

신의 몸들은 본조 4백여년내 여조를 위하여 절의를 남긴 분에게 표창한 의식을 삼가 생각하여 보면 아름답게 하지 않은 것이 없이 정몽주 같이 이하 조견 여러분에 이르기까지 다 이미 표정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고 두문동 70여인에 이르기까지 다 비석을 세워 절의를 표하게 하였으나 유독 김사렴 한 사람만이 여기에 빠져서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몸들은 감히 천리길에 짚신감 발로 서로 이끌고 와 법가 앞에서 부르며 부르짖어 엎드려 비옵건대 천지 부모님께서는 굽어 살피사 김사렴에게 賜諡(사시)의 명을 내리옵소서

 

당저무인2월 능행시 (1818년, 순조30년 무인 2월)

장두 신 이의병

 

 6) 고려명신전 (1822, 남공철)   안렴사공 신도비명 (1840이전, 남공철)

公轍이 일찍이 高麗名臣傳을 짓는데 吉再와 趙 (조견)과 南乙珍(남을진)과 元天錫(원천석)과 徐甄(서견) 및 公의 史實을 모아 逸民篇에 편입하였는데

再는 문하주서로서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선에 들어가 은거하고

 의 이름은 개견변( )을 땃는데 자신이 나라가 망하여도 죽지 못하였으니 개와 같다고 하여  자로 이름을 짓고 머리를 가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치었고

乙珍은 태조와는 潛邸時(잠저시)로부터 親舊임으로 왕이 된 뒤에 반드시 데려 오고져 하여 누차 벼슬을 주고 불렀으나 나가지 않으니 왕이 그 뜻을 嘉尙히 여겨 그 살고 있는 고을을 봉하여 沙川伯을 삼고

天錫과 甄은 혹은 원주에 살고 혹은 衿川에 살더니 당시의 사람들이 망명한 죄로 벌을 주자하니 왕이 이르되 "백이숙제와 같은 인물이니 사면하고 불문에 부치라"고 하였으며

또 두문동의 諸賢 약간인을 모아 아울러 부록에 편집하였다.

 

 7) 안렴사김공 묘갈명 (1830)

斯文(사문) ★金 (김래)가 어느날(???) 찾아와서 그의 선조인 고려 안렴사 梧隱 선생의 遺事(유사)를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가는데 절반도 아직 못 보아 그를 위하여 대단히 감개스러워 비로소 上述한 여러 선생들 외에 과연 또 고려에 한 충신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 심정은 고통스럽고 그 사실은 기이한데 다만 나는 孤陋(고루)하여 그런 사실을 아직 듣지 못하였으니 이를 마땅히 士官이 크게 떠벌이어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되리라고 하였다.

 

★김래가 또 말하기를 "선조의 무덤을 오랫동안 잃어버려 복구하려다 그만둔 지가 이미 93년인데 자손들이 零替(영체)하여 아직까지 碑文을 새겨 드러내지 못하고 이제야 비석을 세우니 공에 대한 글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자네의 선조는 실로 살아서나 죽었어도 明夷(명이)의 卦(괘)를 自處하여 400년이 지난 후에 무덤이 비로소 나타났으니, 이는 天道가 크게 밝아 반드시 충신의 자취를 세상에 밝히어 사람들의 耳目에 비치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名望은 一世에 신임을 받고 문장은 百代에 중하게 여겼던 것이지마는 족히 숨은 덕을 발휘하지 아니한 까닭이다" 라고 하였다.

 

나(=남공철)는 선생(=김사렴)에게 외손이 되니 어찌 글로써 그분이 어떠했는지를 힘껏 밝히려 하지 않았겠는가. ★김내가 더욱 간절히 청하니 나 또한 마침내 굳이 사양하지 못했다.

銘에 이르렀다.

 

庚寅 (순조30-1830) 년 7월 하순에

외손자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치사 봉조하

★南公轍 짓다.

 

8) 안렴사공 신도비문 (1840이전, 남공철)

대체로 슬픈 일이로다. 지금에 와서 공의 후손  +英(영)과 亨道(형도)와 瑞霖(서림)이 찾아와 碑銘(=비문)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기에 公轍(공철)이 이에 여러 선생의 事蹟을 말미에 실리어 썩지 않고 오래 전하고자 하니 이 글을 읽는 자는 碑를 가리켜 史記라고도 할 것이고 道理도 명확하다고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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銘文(???)에 하였으되 과감하고 강직한 태위공(=방경)이시며 공이 크고 높으시도다. 탐라를 평정하고 일본을 양차 정벌하여 이름은 중국까지 떨치고 금패는 번적거렸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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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黨 언덕에 4척 높이 무덤이 있으니 봉분도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라 한 것은 스스로 그 자취를 감추려 함이니 나라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은 어찌 그 極함이 있으리오

거북바탕과 용머리 碑石이 墓門에 새겨 있으니 여러 강호제현 께서는 이 銘言(=碑文)을 敬虔(경건)히 하소서

가선대부 예조참판 동지 경연 실록사 성균관 대사성 규장각 직제학 지제교 外裔(예외) 南公轍(1760-1840) 지음

 

 9) 고충지 (1982)

고려명신전을 찬수한 남공철 선생이 신도비문을 지었으니 신도비문으로써 안렴사공의 사적은 대개 추측으로 알 수 있다.

신도비는 이왕조 제도에 2품이상의 고관이나 명유라야 국명에 의하여 건립케 된다 하였으니 안렴사공의 전직이 2품이상의 직품이 틀림없고 고려국정이 혼란한 공양왕 4년에 충진하기로 유명한 조견선생과 정당문학을 거쳐 문하시랑인 김사렴은 지방관직인 안렴사로 출방당하였다.

그해 정포은 선생이 박해를 당하여 죽고 이태조 등극하니 영남에 있던 조견은 과천으로 관악산 속으로 숨었고 호서지방에 있던 김사렴은 주북 오근 (청주 북쪽 오근촌) 으로 은퇴하였다.

이태조의 누증불기하고 도산 속으로 은닉하였다. 여조 최말기에 안렴사 직위는 공양원년 12월에 개정된 직제로 종2품직에 해당된다.

따라서 남공철 선생께서도 오은공의 직품이 2품이상에 해당되기에 신도비문을 찬수한 것이다. 오은공의 사전직에 정당문학 문하시랑이었던 참고문헌 해동인물지 및 안동김씨 보승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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