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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의 휘는 맹헌(孟獻)이요 안동인이며 정축(丁丑 : 태조6년, 1397년)생이다. 선덕 병오(宣德 丙午 : 명나라 선종원년, 142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검열(檢閱)·전랑(銓郞)을 거쳐 벼슬이 예문관 직제학(禮文館 直提學)에 이르렀다. 배(配)는 숙인(淑人) 양성이씨(陽城李氏)요, 좌찬성(左贊成) 양성부원군(陽城府院君) 공소공(恭昭公) 사검(思儉)의 따님이다. 2남3녀를 낳으니 맏이 지정(自埥)은 벼슬이 直長이요, 다음 자양(自壤)은 벼슬이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이다. 딸 윤기(尹沂)는 파평인으로 현령(縣令)이요, 딸 이세부(李世土+缶)는 전의인으로 牧使요, 딸 송순년(宋順年)은 은진인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정랑(正郞)이며 부제학(副提學)으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영평 남면 계류동(永平南面溪流洞) 축좌(丑坐) 언덕에 있는데, 상하분(上下墳)이며 표갈(表碣)이 있다.
* 전랑(銓郞) : 조선왕조 때 이조(吏曹)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일컬음. 내외 관원(官員)을 천거(薦擧)·전형(銓衡)하는데 권한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런 별칭이 붙게 됨
<묘소>(2006. 7. 8. 안사연 참배 촬영>
<동방급제자 명단> (2005. 11. 11. 항용(제) 제공) 세종8년(1426년) 식년시때는 34명의 합격자를 냈다. 이름 생년 자 호 본관 합격등급 고승안(高承顔) 제주(濟州) 丙科1 권형(權衡) 안동(安東) 同進士14 김맹헌(金孟獻) (문) 안동(安東) 同進士1 김문효(金文孝) 미상(未詳) 同進士7 김시석(金視石) 미상(未詳) 同進士16 김신민(金新民) 경주(慶州) 同進士6 김효기(金孝起) 미상(未詳) 丙科6 남수문(南秀文) 경질(景質) 고성(固城) 丙科2 민원(閔瑗) 여흥(驪興) 同進士23 박경손(朴慶孫) 미상(未詳) 同進士12 박려(朴旅) 춘주(春州) 同進士4 배강(裵杠) 흥해(興海) 同進士5 성한(成漢) 창녕(昌寧) 丙科3 손하(孫何) 미상(未詳) 同進士9 신석견(辛石堅) 연빙(淵氷) 영산(靈山) 丙科7 심수(沈粹) 미상(未詳) 同進士8 안자립(安自立) 충주(忠州) 同進士20 양계원(楊繼元) 청주(淸州) 乙科3 양억(楊億) 청주(淸州) 同進士3 오신지(吳愼之) 미상(未詳) 丙科4 우효강(禹孝剛) 단양(丹陽) 同進士15 유의손(柳義孫) 전주(全州) 同進士11 윤미견(尹彌堅) 무송(茂松) 同進士18 임중(任重) 미상(未詳) 同進士24 장아(張莪) 단양(丹陽) 同進士17 전윤승(田允升) 미상(未詳) 同進士22 *정창손(鄭昌孫) 1402 임오 효중(孝仲) 동래(東萊) 同進士10--문정공(휘 질)의 장인 조장(趙章) 횡성(橫城) 同進士2 조전(趙篆) 미상(未詳) 乙科2 진회(陳誨) 미상(未詳) 丙科5 최자연(崔自淵) 양천(陽川) 同進士21 허후(許詡) 하양(河陽) 同進士19 황보량(皇甫良) 영천(永川) 乙科1 황서(黃瑞) 미상(未詳) 同進士13
<각종 문헌 자료 종합> 1)<조선왕조 실록 자료> (2005. 1. 24. 영환(문) 제공) 《 단어 검색 - 김맹헌[전체]...24 》
1.세종15년 : 1 건 사간원에서 이조 정랑 남간과 좌랑 김맹헌 등을 탄핵하매, 허조·안숭선이 피혐하다 》 2.세종18년 : 1 건 이숙묘·남궁계·이선·변치후·이길배·김맹헌·이인손·이맹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3.세종23년 : 13 건 세종 093 23/06/14(기묘) / 양녕 대군의 정자가 참람되다고 종부 소윤 김맹헌이 아뢰다 》 《 세종 093 23/07/08(임인) / 김맹헌·이견기·금유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 세종 093 23/08/04(무진) / 고득종을 성절사로 삼은 것과 종루 조성 감역관에 관한 김맹헌의 상소문 》 《 세종 093 23/08/05(기사) / 고득종이 성절사에 부적합하다는 사헌부의 상소에 끝내 윤허하지 않다 》 《 세종 093 23/08/11(을해) / 성균관 사예를 경차관으로 제수한 것이 부적당하므로 고쳐 임명하다 》 《 세종 093 23/09/02(병 신) / 목효지가 천인으로서 상언한 죄에 관해논의하다 》 《 세종 093 23/09/24(정사) / 판한성부사 유계문에게 다시 외임을 제수하라는 장령 김맹헌의 상소문 》 《 세종 093 23/09/29(임술) / 조명간과 벽단의 행성이 부실 공사로 무너지자 축성문제를 의논하다 》 《 세종 094 23/10/05(무진) / 김맹헌이 상피하는 법을 어긴 이조와 유계문의 죄를 묻기를 청하다 》 《 세종 094 23/11#19(임오) / 대간에게 박중림·김맹헌 등이 경찬회를 파하기를 청하다 》 《 세종 094 23/11#20(계미) / 박중림·성득식·홍심·김맹헌 등이 사리각 경찬회를 파하기를 청하다 》 《 세종 094 23/11#27(경인) / 사헌부에서 신하의 아뢰는 일을 막는 것에 관해 봉장을 올리다 》 《 세종 094 23/12/15(정미) / 사헌부에서 임금의 병을 중국에 알려서 약재를 받게 만든 고득종의 처벌을 청하다 》
4.세종24년 : 3 건 세종 095 24/01/20(임오) / 형조에서 정갑손·이의흡 등을 사핵하여 아뢰니, 의금부에 다시 사핵하게 하다 세종 095 24/01/24(병술) / 하연이 윤삼산을 포양했다는 날짜에 대한 배강과 하연의 말이 달라 논의하다 세종 095 24/01/28(경인) / 정갑손·이의흡·홍심·김맹헌·배강·박추·최중겸의 죄를 정하다
5.문종1년 : 1 건 《 문종 010 01/10/27(임진) / 황보인·남지·김종서 등에게 관직을 내려주다 》
6.단종 즉위년 : 1 건 《 단종 002 00/07/04(을미) / 《세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이호문이 기록한 황희의 일에 대해 의논하다 》
7.단종1년 : 2 건 단종 005 01/01/09(정묘) / 원효연·이인전 등이 상중에 자급을 올린 일, 상피의 법 등을 아뢰다 》의논하다 》
8. 단종 005 01/01/04(임술) / 김계희·정신석·김맹헌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
세조1년 : 1 건 《 세조 002 01/12/27(무진) /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② 》 세조2년 : 1 건 《 세조 005 02/08/25(임술) / 예조에서 내선한 윤씨가 난신 이휘의 누이임을 아뢰었느나 허물하지 않다 》
2)<대은암서> (2005. 1. 23. 안사연 현장 답사기)
東州先生文集卷之二 序 大隱庵序
大隱庵在明禮坊水下洞。枕橋臨溪。前對南山。正直國祀中麓。始國家定鼎漢陽。有金公孟獻。上洛公方慶五(*六의 오기)代?若齋九容之子(*孫子의 오기)。以直提學在徙中。撤松都屋材。結構于?。傳僉正自讓,郡守禮生,節度使胤宗,進士震紀。至吾外王父都事公大涉。家再傳爲吾(=이민구)有。內屋經先君(=이수광)中繕。名之曰大隱庵。客堂則吾所創置。今歸外孫申弼華 -----
대은암은 명례방 수하동에 있는데, 침교(枕橋)가 계곡에 닿아 있고, 앞으로는 남산(南山)을 마주보고 있는데, 곧바로 국사당(國祀) 중록(中麓)으로 이어진다. 나라를 한양에 도읍으로 하여 정립할 즈음, 김방경의 6대손이며 김구용의 손자인 김맹헌이 직제학으로 있을때 개성(松都)에 있는 가옥의 자재를 뜯어다가 지었다.。첨정 김자양, 군수 김예생, 절도사 김윤종, 진사 김진기에 전해 내려와 이민구의 외할아버지 도사 김대섭(1549-1594)에 이르렀다. 집은 다시 전해져 이민구에게 있는데, 내옥(內屋經)은 선군 이수광(1563-1628) 시절에 수선하여 이름 짓기를 대은암 이라 하였다. 객당(客堂)은 이민구(1589-1670)가 처음 지어 세운 것인데, 지금은 이민구의 외손 신필화(申弼華, ?-?)에게 돌아갔다. ---이하 생략---
3) 예문관 직제학(禮文館 直提學) 김맹헌지묘(金孟獻之墓) (2003. 5. 8. 윤만(문) 제공)
음각(陰刻)에 이르기를 ‘이씨 묘는 남쪽에 있고 공의 묘는 뒤에 있다.’하였다. 공인(恭人) 양성이씨지묘(陽城李氏之墓) 음각(陰刻)에 이르기를 ‘직제학 김맹헌의 처는 김공 묘와의 거리가 겨우5~6척쯤 된다.’하였다. 직제학공의 낙하동주계축(洛下同舟契軸)의 서·발(序·跋)이 세상에 전하므로 부록(附錄)한다.
【낙하동주계축(洛下同舟契軸)의 서(序)】 격언(格言)(格言 이상은 떨어져 나가 전하는 글을 볼 수 없다)··· 복전(服前)에 익히는 것이 지당한 언론(言論)이다. 작위(爵位)가 높아졌다하여 남에게 교만하지 읺고 가난한 까닭으로 하여 그 마음이 비루(卑陋)해서는 안된다. 저 사람은 비록 갚지 않더라도 나는 마땅히 베푸는 일을 늦추지 않고 저 사람이 비록 공정치 못하더라도 사정(私情)을 두지 않는다. 저 사람의 선(善)하지 못한 일을 보고 고(告)하지 않음이 없고 나의 허물과 악한 것을 듣고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기지 않음이 없으며 곤궁한 자가 있으면 덕과 슬기로 다투는 일[心競]을 아낀다. 인리(隣里)에는 서로 도울 의리가 있는데 더구나 복심(腹心)과 같은 벗이겠는가. 마땅히 힘써 도와야 하고 뜻하지 않은 근심이 있을 경우 역시 덕과 슬기로 서로 다툰다. 우물에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갈 수 있다. 더구나 사생(死生)을 같이 하는 동지(同志)이겠는가. 마땅히 힘을 다하여 구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을 집행하기 금석(金石)과 같이 하고 이러한 의리를 수행하기 사시(四時)가 정해진 것처럼 한다. 공경심은 오래된 바에 쇠하지 않고, 신의(信義)는 이미 통달이 된 곳에 이지러짐이 없어야 귀신도 들어주어 마침내 화평(和平)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어버이를 섬겨야 어버이가 기뻐하고, 이렇게 하여 윗 사람을 섬겨야 윗 사람이 신임할 것이니 인덕(仁德)에 도움이 되는 바 역시 크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제자(諸子)에게 조금이라도 신의를 이지러뜨리거나 시작은 있고 끔이 없는 경우, 우리 제공(諸公)들은 충성스레 간곡히 고하여 한 번 꾸짖고 두 번 꾸짖고 세 번까지 꾸짖으면 나의 도리는 다하는 것이요, 저 사람이 오히려 옳게 여기면 저 사람은 힘쓰지 않아 군자의 도를 잃는 것이요, 또한 우리들이 평소 생각했던 바가 아니므로 어찌 마땅히 그치지 않겠는가. 아! 사군자(士君子)의 행동은 한 번 실수를 하면 만가지 일이 와해(瓦解)된다. 원컨대 제자(諸子)들은 이에 유의하였으면 매우 다행이겠다.
황명 영락14년(명나라 성조14년, 1416년) 병 신 9일 일
【계축서후발(契軸序後跋)】 평울(平蔚)은 한 시골과 같고 사족(士族)은 약간인데 대성(大姓)인 남(南)씨는 그 하나이다. 나는 늦게 태어났고 들은 것이 고루(固陋)하여 늘 말하기를 남회(南薈)는 무사(武士)라 하여 그 사람됨을 깊이 고찰하려 하지 않았다. 하루는 죽계(竹溪) 안공 충원(安公 忠元)이 나의 박곡(朴谷) 누추한 곳에 왔다. 술이 거나하게 되어서 고향의 현인(賢人)을 논평함에 있어 회(薈)가 무인(武人)이 아니요 곧 유사(儒士)라 하였다. 내가 놀라 그 업(業)을 물으니 말하기를, ‘우리 집에 남공(南公)의 동주계축(同舟契軸)이 있소, 보지 않겠소?’하였다. 내가 보자고 보채었더니 얼마 아니되어 안공(安公)이 소매에 넣고 왔다. 그 서문(序文)을 읽고 그 명록(名錄)을 보니 2백년전 옛 사람의 안면(顔面)과 규범(規範)이 순간 눈 앞에 숙연(肅然)하였다. 내 더욱 놀라워하고 다행하게 여겼다. 회(薈)가 무인(武人)이 아님을 알았을 뿐 아니라 실로 일시의 교제가 서로 마음이 맞았음에 탄복하였다. 열명(列名)된 11인 가운데 서문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을해생(乙亥生)으로서 끝에 자리한 것으로 보아 이를 지은 것 같다. 경서(經書)를 익히 읽어 문리(文理)가 창달(暢達)하고, 궁달간(窮達間)의 세정(世情)을 잘 서술하였다.내 따라서 간절히 느낀 바가 있다. 한퇴지(韓退之)가 풍숙(馮宿)에게 준 글에 ‘붕우(朋友)의 도(道)가 결절(缺折)된지 오래라.’하였다. 한(韓)의 옛날과의 거리가 그다지 현격한 것이 아님에도 ‘결절된지 이미 오래라.’하였다. 더구나 남회(南薈) 한(韓)과의 거리가 한(韓)의 옛날과의 거리보다 심하니 붕우의 도가 어찌 있겠는가. 그런데 믿음을 금석(金石)과 같이, 의리를 사시(四時)와 같이 하고 복심(腹心)으로 사생(死生)을 서로 기약한다고 까지 하였다. 나의 생각에는 이 11인이 과연 끝까지 반복(反覆)한 사실이 없었겠는가. 한 배에 같이 탔다가 만약 동서남북을 만나는 경우 과연 복심(腹心)으로 사생(死生)할 사람들인가. 그 후 회(薈)는 책을 버리고 검(劒)을 배워 무인(武人)으로 세상을 살았는데 저 10인의 경우 필경 또 어떠하였겠는가. 모두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서문(序文)의 내용이 순박 간절하고 명록(名錄)이 모두 갖추어졌으며 옛 군자가 ‘만사와해(萬事瓦解)’로 서로 권면(勸勉)하고 서로 경계하였으니 국초(國初)에 인품(人品)이 옛날에 가까웠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인(武人)이냐 문사(文士)냐를 굳이 논할 것이 없다. 아! 지금과 남(南)과의 거리와, 남(南)과 한(韓)의 거리는 또 어떠한가. 세상이 변하는 강하(江河)는 날로 각박하여 심한 경우 배 안이 적국(敵國)이요, 한 방(房)이 오랑캐다. 옛 도[古道]를 보기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아! 개탄스럽다. 안공(安公)은 예[古]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한 마디 말을 청하였다. 사양할 수 없어 짐짓 축(軸)의 시말(始末)을 보고 써서 보낸다.
만력(萬曆) 경신(庚申 : 명나라 신종48년, 1620년) 늦가을에 기성후인(箕城后人) 황여일(黃汝一)은 발(跋)을 짓다. 《출전 : 가보(家譜)번역판/편집인 김재희(金在熙)/1996.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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