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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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김수녕(金壽寧) 1437(세종19)∼1473(성종4)--(전)

1. 문도공 소개 및 연보

 

조선의 문신. 자는 이수. 호는 양소당(養素堂). 전서공(휘 성목)의 현손이다. (성목(成牧)- 익정(益精)- 숙(潚)-수녕(壽寧)). 절충장군(折衝將軍) 숙(潚)의 아들. 1453년(단종1) 생원(生員)이 되고, 이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급제하고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집현전수찬에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헌납·예문관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인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1463년에 집의에 오르고 그 뒤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465년에는 좌승지가 되었다. 1468년 호조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즉위년) 공조참의가 되고 이어 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47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직시에는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명 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사재(史才)가 있어서 1458년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고령산(高嶺山) 고령사(高嶺寺) 서남34리(西南三四里)이나 현재 실전이다.

 

   <養素堂 金先生(壽寧) 간략 年譜>

(왕조실록발췌. 2005. 9. 28. 태영(구) 제공)

1歲 1436年[世宗18 丙辰]

아버지 절충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과 어머니 순흥안씨와의 4男2女중 次男으로 태어났다.  

이 해(歲) 正月26日에 할아버지 김익정(金益精)이 卒하였다. 할아버지는 1396年(太祖5年)5月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고 대사헌과 3조참판을 역임 하였다.

 

2歲 1437年[世宗19 丁巳]

물시계인 행루(行漏)· 앙부일구등을 제조, 간의대(簡儀臺)를 설치.

 

3歲 1438年[世宗20 戊午]

왜선의 삼포평균분박(三浦平均分泊) 엄수를 지시. 장영실, 자동 물시계 옥루(玉漏)를 제작.

 

6歲 1441年[世宗23 辛酉]

장영실 등이 세계 최고(最古)의 측우기(測雨器)를 설치하고, 양수표(量水標)를 세움.

 

7歲 1442年[世宗24 壬戌]

이 때에 이미 글을 잘지어 신동(神童)이라 일컬어으며 외조부(外祖父)인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기이하게 여기며 “이 아이가 훗날 마땅히 세상에 크게 날릴것이다.”라고 하였다.

 

8歲 1443年[世宗25 癸亥]

통신사와 대마도주가 계해조약(癸亥條約) 체결. 세견선(歲遣船)을 5척으로 약정.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9歲 1444年[世宗26 甲子]

양전산계법(量田算計法) 제정. 무과삼관법(武科三官法) 실시.

 

11歲 1446年[世宗28 丙寅]

수양대군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

훈민정음 반포(頒布).

 

12歲 1447年[世宗29 丁卯]

《용비어천가》의 주해 완성.

 

15歲 1450年[世宗32 庚午]

동활자 경자자(庚子字) 주조. 정음청(正音廳)을 설치.

 

16歲 1451年[文宗1 辛未]

독서당에 들어가다. 최항.김수온.서거정.유성원.이극감.이승소.강희맹.허조등13인이며 이 때의 대제학은 정인지였다. 국방강화를 위해 군사(軍士)를 늘림. 문종이 창안한 화차(火車)를 제작하여 배치. 김종서(金宗瑞) 등이 《고려사》 136권을 개찬.

 

17歲 1452年[文宗2 壬申]

김종서 등이 《고려사절요》편찬. 《동국정운(東國正韻)》을 과거과목 신설.

 

18歲 1453年[端宗1 癸酉]

봄(春)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 해(歲) 가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으로 뽑혀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을 제수(除授)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 인 등을 죽이고 정권장악. 안평대군(安平大君) 사사(賜死)됨. 이징옥(李澄玉)의 난.

 

20歲 1455年[世祖1 乙亥]

9月에 수찬(修撰)이되어 병조판서 이계전, 예문제학 박팽년, 예조참판 하위지, 직제학 강희안, 직집 이승소 응교 서거정등과 관제(官制)를 편찬하다.

 

21歲 1456年[世祖2 丙子]

사육신(死六臣)사건.

 

22歲 1457년[世祖3 丁丑]

正月에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춘추관사 신숙주, 춘추관 편수관 이극감, 춘추관 기주관 한계희, 강희맹, 성임, 김지경,과 더불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찬술(撰述)하다.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영월로 유배. 노산군(단종) 죽음.

 

23歲 1458年[世祖4 戊寅]

正月에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이 완성되자 각기 1자급을 제수받다.  2月에 직강(直講)이 되어 전지15결을 받다. 4月에 세조(임금)를 윤대하여 책을 만들어 나누어 주어 익히게 하고, 가뭄에 기황이 심하니 사치를 경계하고, 음란한 풍속이 방종하니 예전의 좋은 풍속을 위해 통금을 해야 한다고 논 하다.  

 

25歲 1460年[世祖6 庚辰]

5도(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체찰사인 한명회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다.하삼도민(下三道民) 4,500호를 평안·강원·황해도에 이주시킴. 여진정벌

 

26歲 1461年[世祖7 辛巳]

正月에 성균사예(成均司藝)가 되고  대독관(對讀官)이 되어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하삼도 백성을 서북으로 옮기는데 대한 계책에 대해 출제하다.7月 변방의 방비에 대해 치계하다.

월간경도감(刊經都監) 설치.

 

27歲 1462年[世祖8 壬午]

세자필선(世子弼善)이 되어 月2회 친강과 부시를 짓도록 하다.

5月에 경회루에서 대소 신료들이 입시한 가운데 《중용(中庸)》을 진강(進講)하다.

8月에 오탑.호(醐)철릭 2령을 하사 받다.

 

28歲 1463年[世祖9 癸未]

4月 관직을 집의(執義)로 다시 6月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제수 받고 당상관에 오르다.

7月 《오월춘추(吳越春秋)》를 수교(晩校)하다.

9月 서거정(徐居正)등과 함께《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을 명 받다.   

홍문관(弘文館) 설치.

 

29歲 1464年[世祖10 甲申]

2月에 관직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10月에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제수 하다.  

전폐(箭幣)를 주조.

 

30歲 1465年[世祖11 乙酉]

4月 관직을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로 삼고 5月에 다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제수하고 11月에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삼다.

 

31歲 1466年[世祖12 丙戌]

모친(母親) 상(喪)을 당 하였다.

밀산군(密山君) 박중손(朴仲孫)의 신도비(神道碑)를 찬(撰)하다.

전법(科田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32歲 1467年[世祖13 丁亥]

12月 예조참판(禮曹參判) 이함장(李諴長)의 묘갈명(墓碣銘)을 찬(撰)하다.

이시애(李施愛)의 난. 규형(窺衡)과 인지의(印地儀)를 이용한 삼각측량법을 발명.

 

33歲 1468年[世祖14 戊子]

2月 상정소(詳定所)에 나아가 《주역구결(周易口訣)》을 참정(參定)하다.

8月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 하다.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제수 되다.

남이(南怡)· 강순(康純) 등이 반역으로 사형됨.

 

34歲 1469年[睿宗1 己丑]

관직을 중추부 동지사(中樞芬知事)로 삼았다.

4月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찬술(撰述)하는데 참여하다.

《경국대전》 완성

 

35歲 1470年[成宗1 庚寅]

正月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사간원 대사간(行司諫院大司諫)으로 삼다.

대사간으로서 40여 건의 명상소문을 남기다.

 

36歲 1471年[成宗2 辛卯]

4월 좌리공신(左理功臣) 4등에 책록 복창군(福昌君)으로 관작을 제수하다.

6月 가정대부(嘉靖大夫)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 하다.

9月 가정대부(嘉靖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제수하다.

 

37歲 1472年[成宗3 壬辰]

春正月 인재(仁齋)(강희안姜希顔)의 행장(行狀)을 엮다.

5월 신숙주.한명회.강희맹.양성지.정난종등과《예종실록》편찬에 참여하여 완료하다.

3月 가정대부(嘉靖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제수하다.

 

38歲 1473年[成宗4 癸巳]

7月 3日에 卒하니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문도(文悼)라 시호(諡號)하니 두루 묻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일찍 죽은 것을 도(悼)라 하였다. 슬하에 1男2女를 두었다.

천자(天資)가 명민(明敏)하고 조숙하여 반고(班固)의 문을 본받아 학문이 해박(該博)하며 문장(文章)을 짓는 것이 뛰어나고 간고(簡古)하며 필(筆)을 잡으면 바로 성취하여 전인(前人)의 말을 답습하지 않았다. 사조실록(四朝實錄)을 편찬할때에 대개의 서사는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니 이름을 세상에 내어 일대의 문학에 용모와 재주가 뛰어났다. 그러나 글로 써 둔 것이 없어서 시문(詩文)으로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적다.

 

2. 각종 시문 소개

 

  1) 차문천판상시운(次文川板上詩韻) (2003. 10. 22. 은회(익) 제공)

문천판상시를 차운하다-김수녕(金壽寧)

盛漢當千載(성한당천재) : 한 나라는 천 년을 갔고

匈奴値百年(흉노치백년) : 흉노는 그 나라가 백년을 갔었노라

掃?長白嶺(소분장백령) : 요나라 재앙을 장백산 고개에서 쓸어버리고

歇馬黑龍川(헐마흑룡천) : 말은 흑룡강 물 가에서 쉬게 하리라

聖德元和上(성덕원화상) : 성덕은 당나라 헌종인 원호의 위 시대이요

戎功大雅前(융공대아전) : 훈공은 시경 “대아”편의 앞이도다

燕然須勒頌(연연수륵송) : 두현이 연연산에 공을 기록하듯 기록하여

留取後來傳(류취후래전) : 모아서 후세에 전하게 하리로다

 

  2) 차삼척죽서루와수목교(次三陟竹西樓臥水木嬌) (2003. 10. 22. 은회(익) 제공)

삼척 죽서루 와수목교의 시를 차운하다-김수녕(金壽寧)

?牙古木截前灘(사아고목절전탄) : 늙은 나무로 베어 떼 만들어 앞 여울에 걸쳤니

步步寒心幾駭瀾(보보한심기해란) : 걸음걸음 조심하며 몇 번이나 물결에 놀랐던가

平地風波人不識(평지풍파인불식) : 평지에도 풍파 있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到橋猶作畏途看(도교유작외도간) : 이 다리에 이르러 도리어 두려운 길이라 여긴다오

 

  3)길성(吉城)에서 현판 위의 시에 차운하여[次吉城板上詩韻]   (2004. 3. 8. 태서(익) 제공)

김수령(金壽寧)

깊숙한 마운령 상상봉 꼭대기에 / 窈窕磨雲最上端

비틀비틀 늙은 말이 안장을 못 이기네 / ??老馬不勝鞍

조도 3천 리를 옛말로 들었더니 / 舊聞鳥道三千里

양장 108구비를 이제 올랐구나 / 今陟羊腸百八盤

안개와 이내에 옷이 반이나 젖었는데 / 宿霧輕嵐衣半濕

낭떨어지 벼랑에 두 눈이 아찔하네 / 懸崖絶壁眼雙寒

여보게 동정 일을 말하지 말게 / 憑君莫話東征事

서풍에 귀밑머리가 또 세려고 하옵네 / ?髮西風又欲斑

 

  4) 생각나는 대로[謾成] - 金壽寧 (2004. 4. 10. 태영(군) 제공)

동ㆍ서로 떠다니는 몸 얼굴에 가득한 먼지 / 蓬轉東西滿面塵

흰 구름 높은 데선 고향만 바라보네 / 白雲高處望鄕頻

나라 은혜 못 갚았으니 수고를 사양하리 / 未成報國寧辭勩

전원에 일찍 못 감은 가난의 탓이로세 / 不早歸田正坐貧

삼경(은자의 집)엔 아직도 대 옮길 흥이 깊은데 / 三徑尙深移竹興

청문에 외 심는 사람 감사하네 / 靑門多謝種苽人

세상일을 마치고는 물러 가리니 / 世間事了終須退

봄날에 청려장 짚고 녹야의 봄을 찾으리 / 藜杖相尋綠野春

 

청문: 소평(召平)이 진(秦) 나라 때에는 동릉후(東陵侯)로 봉하여졌다가 진 나라가 망한 뒤에는 청문(靑門)에서 외를 심으며 생활하였다.  <동문선>

   *출전 : 역사정보통합검색 고전국역총서 동문선 제17권

 

3. 문도공 졸기  (2003. 3. 29. 이왕섭(전의인) 제공)

  ■1473년(성종 04) 07월 03일(임진) 김수녕(金壽寧)의 졸기(卒記)

    1473년(성종 04) 07월 03일(임진) 김수녕(金壽寧)의 졸기(卒記)

 

복창군(福昌君) 김수녕(金壽寧)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수녕은 자(字)가 이수(이臾)이고, 호(號)가 양소당(養素堂)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절충 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의 아들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왔으며, 7세(歲)에 속문(屬文)에 능하니 당시에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외조부(外祖父)인 좌참찬(左參贊) 안숭 (安崇善)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다른 날 마땅히 세상에 크게 날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년)인 나이 18세가 되던 해 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가을에 문과(文科)에 제1인으로 뽑혀서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을 제수(除授)받았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역임하였다. 당시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가 함길도(咸吉道)·평안도(平安道)·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충청도(忠淸道) 5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어서,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천순(天順) 신사년(1461년)에 한명회가 그를 보내어 변방(邊方)의 일을 아뢰었는데, 임금을 면대하여 말하는 것이 심히 자세하므로, 세조(世祖)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비록 천리(千里)를 격(隔)하였지만 한명회와 더불어 면대해 말하는 것과 같도다.”

 

하고, 특별히 1자급(資級)을 더하였다. 임오년(1462년)에 세조(世祖)가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서 예문관(藝文館)의 여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옛날의 제왕(帝王)의 득실(得失)을 논란하게 하였는데, 김수녕이 경사(經史)를 증거하면서 시비(是非)를 변석(辨析)하니 문득 말할 때마다 임금이 감동하여 들었고, 또 명하여 자급을 더하게 하였으며,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으나 일 때문에 파면당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년)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 병술년(1466년)에 다시 좌승지(左承旨)로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임명되어서 형조 참의·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무자년(1468년)에 관계(官階)가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경인년(1470년)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다. 세조(世祖)와 예종(睿宗)의 두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참찬(參撰)하였는데, 당시 좋은 사재(史才)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신묘년(1471년)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복창군(福昌君)에 봉(封)해져서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다가 이 해에 다시 복창군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38세였다. 문도(文悼)라고 시호(諡號)하니 두루 묻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중년(中年)에 일찍이 죽은 것을 도(悼)라고 한다. 김수녕은 천자(天資)가 명민(明敏)하고 학문이 해박(該博)하며, 문장(文章)을 짓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고 간고(簡古)하며, 필(筆)을 잡으면 바로 성취하여 전인(前人)의 말을 답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글로 써 둔 것이 없어서, 이 때문에 시문(詩文)으로서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적다. 바깥으로는 온화(溫和)하고 안으로는 강직(剛直)하여서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달관(達官)이나 귀요(貴要)라 하더라도 종일토록 마주 대(對)하여 일찍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할 수가 없었으나, 만약 그 적당한 사람일 때에는 비록 위포(韋布)의 선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신발을 끌고 나아가 맞아들였다.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항상 녹(祿)만을 받아서 먹었는데, 남의 집을 빌어 살면서도 종신토록 처세함이 둥글고 넓었으며, 작은 연고를 가슴에 끼어두지 아니하였다. 다만 익살이 많아 큰 소리를 치니 군자(君子)의 근묵(謹默)하는 위용(偉容)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그의 단점으로 여기었다.

 

4. <金壽寧先祖님의 關聯資料목록> (2005. 8. 29. 태영(군)제공)

文集名

著者

本貫

出版社

關聯內容

備考

四佳集
사가집

徐居正 서거정
1420 ~ 1488

達城

民族文化推進會

詩外多數
60여수이상

韓國學
中央硏究院

私淑齋集
사숙재집

姜希孟강희맹
1424 ~ 1483

晋州

世宗大王記念事業會

詩外多數

韓國學
中央硏究院

畢齋集
 점필재집

金宗直김종직
1431 ~ 1492

善山

民族文化推進會

詩外多數

韓國學
中央硏究院

保閑齋集
보한재집

申叔舟신숙주
1417 ~ 1475

高靈

民族文化推進會

韓國學
中央硏究院

三灘集
삼탄집

李承召이승소
1422 ~ 1484

陽城

民族文化推進會

韓國學
中央硏究院

六先生遺墨
육선생유집

朴彭年박팽년
1417 ~ 1456

順天

民族文化推進會

詩  序文

 

成謹齋集
梅竹軒遺稿

成三問성삼문

昌寧

民族文化推進會

 

訥齋集
눌재집

梁誠之양성지
1415 ~ 1482

南原

 

 

學易齋集
학역재집

鄭麟趾정인지
1396 ~ 1478

河東

 

 

太虛亭集
태허정집

崔恒최항
1409 ~1474

朔寧

 

 

梅月堂集
매월당집

金時習김시습
1435 ~ 1493

江陵

 

 

所閑堂集
소한당집

權擥권람
1416 ~ 1465

安東

 

 

晉山世稿
진산세고

姜希顔강희안
1417 ~ 1464

晋州

 

詩. 行將
詩10數

 

秋江集
추강집

南孝溫남효온
1454 ~ 1492

宜寧

 

 

集식우
乖崖集괴애

金守溫김수온
1410 ~ 1481

永同

 

文. 詩

 

樗軒集
저헌집

李石亨이석형
1415 ~ 1477

延安

 

詩. 文

 

 

5. 각종 문헌 자료 소개

  1)[신증동국여지승람] 내의 김수녕(金壽寧) 자료 소개 (2003. 4. 5. 윤만(문) 자료 제공)

▣ 제2권 p211<용인현 누정(樓亭)>

--신정(新亭) : 객관 동쪽에 있다. ○김수녕(金壽寧)이 지은 기문에, “용인은 작은 고을이다. 왕도와 인접한 까닭으로 밤낮으로 모여드는 대소 빈객이 여기를 경유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이는 대개 남북으로 통하는 길목인 때문이다. 옛 원관(院館)이 작아서 겨우 하룻밤을 묵을 수 있으나, 매우 더운 때이면 답답하고 트이지 않아서, 손님이 와도 더운 느낌과 번울(煩鬱)함이 가실 수 없어, 오랫동안 애먹었다. 천순(天順; 명나라 영종의 연호) 4년 겨울에 박군이 이 고을 원으로 와서, 세부(稅賦)를 누구럽게 하고 정사를 민첩하게 하니, 온갖 폐단이 다 없어지고, 아전과 백성이 두려워 하였다. 하루는 군이 아전에게 의논하기를, ‘내가 재목을 모아, 정자를 지어서 내객(來客)을 위해 납양(納凉)하는 곳을 만들고자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군의 정사에 덕을 보았은 즉, 모두 ‘힘껏 하기를 원한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공인(工人)은 힘써 일하고, 역군[役夫]도 부지런히 하였다. 새벽으로 밤으로 일한 보람이 드러나서, 달이 못되어 완성하였다. 시작할 때에 백성이 정자인 줄을 몰랐는데, 완성한 뒤에야 바라보고, ‘사또는 예전에 말하던 신명(神明)이라는 이가 아닌가. 정자를 지었는데 우리들은 어찌 알지도 못했나.’ 하였다. 서로 더불어 감탄하면서 새로 지은 것을 경사로 여겼다. 지금 세상에 원된 자를 보면, 술취한 꿈속에서 세월만 보내고 관부(官府)를 주막같이 여겨서, 기울어진 뒤에 버티고 비샌 다음에 막는다. 심한 자는 기와 한 장도 바꾸지 않고, ‘나는 백성을 사랑한다.’ 하며 풀 한 포기 없애지 않고, ‘관정(官庭)에 송사하는 자 없다.’ 하니, 관사가 허물어 지는 것은 항상 이런 무리한데서 연유한다. 어찌 일에 용기를 내어 시작하기를 꽈하는 자 있으며, 또는 백성도 모르게 하면서 이렇게 성취한 자 있으리오. 내 일찍이 남쪽으로 가다가 선소(宣召)하심을 받고 용인읍을 지나는데, 박군이 나에게 붓을 주면서 기문을 청하였다. 내 졸문(拙文)임을 말하니, 군이 말하기를, ‘정자에 기문 받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정자 이름이 없으니, 어찌하랴.’ 하여, 내 말하기를 , ‘이름이 있는 것이 진실로 옳지마는, 이름이 없어도 또한 않될 것도 없다.용인읍에 군같은 원이 없었더라면 정자를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정자를 지을 수 없었은즉, 정자 이름이 어디에서 나오겠나. 이름이 없다는 것으로 이름삼아도 역시 이름으로서 좋은 것이다.’ 하니 군이 나에게 더욱 강청(强請)하였다. 그리하여 용인 백성이 우러러보고 새로 지은 것을 경축하던 뜻을 따서 이름 짓기를 ‘신정’이라 하였다. 전(傳)에, 신(新)이란 것은 고(故)가 있으므로서 이다.‘ 하지 않았느,s가. 처음부터 군자가 중하게 여기는 뜻이 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박군의 이름은 거명(居明)이고, 자는회문(晦文)이며, 밀산인(密山人)이다.” 하였다.

 

▣ 제3권 p57<전의현 제영(題詠)>

--현고징교목(縣古徵喬木)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고을이 오래 됨을 교목이 말해 주고, 연기 차가우니, 폐성임을 알겠도다.” 하였다.

 

▣ 제3권 p433<안동대도호부 본조>

--김수녕(金壽寧) : 익정(益精)의 손자이다. 나이가 18세 때에 계유년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렬하였으며,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고, 복창군(福昌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렸다.

 

▣ 제4권 p100<성주목 제영(題詠)>

--호산형승갑남주(湖山形勝甲南州)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호산의 좋은 경개가 남주에 으뜸인데, 백 가지 온갖 모양 봄빛이 아직 가을되지 않았구나.” 하였다.

 

▣ 제4권 p237<합천군 제영(題詠)>

--용문고처희초등(龍門高處喜初登)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오늘 강양(江陽)에서 한 번 취하니, 용문 높은 곳에 처음 올라 기쁘다.” 하였다.

 

▣ 제5권 p343<안악군 누정(樓亭)>

--이요루(二樂樓) : 객관 동쪽에 있는데, 연못이 있다.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홰나무는 천년이나 된 고을에 늙었고, 꽃은 백 척 누대에 둘렀네. 못이 열렸으니 대화지(大華池)에 연한 듯, 산이 가까우니 나부산(羅浮山)을 껴안은 듯. 이 세상에 선경(仙境)이야 있으랴. 하늘 서쪽에 좋은 고을이 있네. 공부(工部 두보)의 시흥 참을 수 없어, 때때로 낭만(浪漫)한 놀이 한다네.” 하였다.

 

▣ 제5권 p414<해주목 제영(題詠)>

--금도(金桃)는 붉은 것이 벌써 흐트러졌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금도는 붉은 것이 벌써 흐트러졌고, 은행은 푸른 잎 처음으로 그늘지네.” 하였다.

 

▣ 제5권 p528<삼척도호부 제영(題詠)>

--산에 의지한 촌집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엇 비슷한 고목을 앞 여울에 가로질러서, 자국마다 서늘한 마음 몇 번이나 놀랐던가. 평지에 이른 풍파 아무도 모르면서, 다리에 와서는 두렵게 보누나.” 하였다.

 

▣ 제6권 p56-57<평창군 제영(題詠)>

--바른 산 그늘의 넓고 먼 곳에 이르니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빨리 달리는 역마(役馬)를 타고 머무를 겨를이 없어, 바로 산 그늘의 넓고 먼 곳에 이르렀다. 사마천(司馬遷)같이 멀리 유람함은 아직 그치지 않았고, 진등(陳登)같은 호기(豪氣)는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노라. 시름을 씻는 데 병에 술이 없을 수 있으랴. 기이(奇異)한 것을 구하는데 도리어 상자에 글이 있구나. 이번 유람의 기절(奇絶)함이 평생에 으뜸되니, 좀 먹은 책속의 좀벌레 같은 생활이 우습기만 하여라.” 하였다.

 

☞ 진등(陳登) : 동한(東漢) 때의 사람이니 자는 원룡(元龍)이다. 허범(許氾)이라는 사람이 유비(劉備)에게 그의 인물평을 말하기를, “원룡은 호해(湖海)의 선비로서 호기(豪氣)가 일찍이 떨어진 일이 없다.”하였다.

 

▣ 제6권 p176-177<영흥대도호부 제영(題詠)>

--울총(鬱蔥)한 아름다운 기운이 신주(神州)를 싸고 있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하늘이 맑은 시냇물을 보내어 땅에서 솟아 오르니, 울총한 아름다운 기운이 신주를 싸고 있네. 순(舜) 임금의 옛날 밭갈고 고기잡던 그 자취는 모두 이 용흥강과 성역산(聖歷山) 머리에 있구나.” 하였다.

 

☞ 성역산(聖歷山) : 예전 순 임금이 역산(歷山)에서 밭을 갈다가 임금이 되었다 한다. 마침 영흥의 산 이름이 성역산이므로 이태조와 순 임금을 비유한 것이다.

 

▣ 제6권 p213<덕원도호부 제영(題詠)>

--이 덕원(德源)은 하늘이 만든 땅이로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반도(蟠桃)가 열매를 맺으려면 천 년이 걸리는데 선리(仙李)의 뿌리가 서리는데 8백년이 걸렸다네. 아름답다, 이 덕원은 하늘이 만드신 땅이로다. 면면(綿綿)하게 뻗은 오이덩굴 한 악장(樂章) 왕업(王業)의 아름다움을 찬송하였네.” 하였다.

☞ 선리(仙李) : 조선은 이씨가 왕이었으므로 이씨를 신선이씨라고 미화하여 말한 것이다.

☞ 악장(樂章) : 시전에 주나라 왕실을 예찬한 노래에 면면하게 뻗어나가는 오이덩굴이라는 말이 있다.

 

▣ 제6권 p217<문천군 누정(樓亭)>

--절문루(節文樓) : 객관 북쪽에 있다.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호기(豪氣)는 백 척(尺)의 다락이라고 들어 왔지만, 나르는 듯한 누각이 시원스런 이 바닷가에 있을 줄을 어찌 알았으리요. 십천두(十千斗)의 술을 가지고 진왕(陳王)의 즐거움을 하려하지 않으니, 한 번 웃는 월녀(越女)의 만류함에 관계없는 것일세. 대지는 찌는 듯 더운데 바람은 고요하고, 하늘은 감색으로 푸른데 불이 흘러 내리는 듯하네. 당시의 더위먹어 죽은 사람을 응당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인데, 이같이 시원하게 노는 것을 기뻐하노라.” 하였다.

 

☞ 진왕(陳王) : 이태백의 시에 진왕 옛날 양평락에 한 말 술 십천(十千) 주고 사서 마음대로 즐겁게 놀았다. 하였는데, 진왕은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 조식이 진사왕에 부하여서 진왕이라 한 것이다.

 

☞ 월녀(越女) : 한퇴지의 시에 월나라 서시가 한 번 웃으니 3년을 머물렀다.라는 시귀가 있다.

 

▣ 제6권 p231<단천군 산천(山川)>

--마운령(磨雲嶺) : 본군 남쪽 37리에 있다. 옛날에는 두을외대령(豆乙外大嶺)이라 일컬었다.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아늑한 마운령(磨雲嶺)의 최상단(最上端)을, 비틀거리며 가는 늙은 말 안장조차 못 이기네. 새만이 통행하는 길이 3천리나 된다고 전날에 들었더니, 이제 양의 창자같은 백 여덟 굽이를 오르네. 자는 안개 가벼운 산아지랭이에 옷은 반이나 젖었고, 매달린 언덕 위 절벽길은 두 눈이 차가웁네. 그대에게 말하노니 동쪽으로 가는 일을 이야기 하지 말라. 귀밑털이 서녘 바람에 또 얼룩지려 한다.” 하였다.

 

▣ 제6권 p331<경흥도호부 제영(題詠)>

--성 아래에 한 줄기의 강물이 길게 흐르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누른 구름은 국경에 가득하여 나그네의 근심을 자아 내는데, 성 아래 강물은 한 줄기가 길게 흐른다. 구슬픈 오랑캐의 피리소리 행여나 나그네의 긧전을 스치지 말아다오. 소리마다 국경의 여행을 괴롭혀 주느니.” 하였다.

 

▣ 제6권 p581<성천도호부 누정(樓亭)>

--강선루(降仙樓) : 객관 서쪽 모퉁이에 있다.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우연히 송양(松讓)을 지나다가 꽃다운 샘에 목욕하고, 머리 말리며 흘골산 앞으로 돌아오네. 한 물은 뜰을 따라 물결이 다시 고요한데, 두어 봉우리는 문을 헤치고 들어와 푸르게 잇닿았네 하여야. 안개가 개인 산시(山市)의 저물려는 햇빛에 안개가 맑고 비가 내릴려는 때에 바람은 강루(江樓)에 가득하네. 재주없어 황학루(黃鶴樓)의 글귀를 이루지 못하니. 다만 앵무주(鸚鵡洲)에 풀만 처량하네. 하였다.

 

☞ 황학루(黃鶴樓) : 황학루는 중국 호북성 무창에 있는 누각인데, 최호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옛 사람은 이미 흰 구름을 타고 사라지고, 여기에는 헛되이 황학루만 남아 있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1982>

 

 2) <연려실기술>내의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10. 윤만(문) 제공)

 가) ▣ 연려실기술 제6권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성종조의 명신 ▣

 

[김수녕(金壽寧)]

김수녕은 자는 이수(頤叟)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참판 익정(益精)의 손자이다. 단종 계유년에 문과에 올랐다. 이때 나이 18세였다. 좌리공신이 되고 복창군(福昌君)으로 책봉되었다.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어느날 저녁에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죽었다. 시호는 문도공(文悼公)이다.

 

○ 임금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으니 대사간으로 있던 공이 글을 올렸다. 그 글에 아뢰기를,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물 위에 떠있는 배와 같으니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로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지금 조강(朝講)ㆍ주강(晝講)에만 경연에 나오시고 석강(夕講)에는 나오지 않으시니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시려는 뜻이 아닌 듯 합니다. 바라옵건대, 경연관으로 하여금 번갈아 숙직하여 성상의 질문에 대비케 하소서.” 하였다. 임금은 기꺼이 받아드렸다. 《국조보감》ㆍ《대동운옥》

 

공은 문장이 뛰어나고 건실하며 더욱 소(疏)를 잘 하였다. 그 소에, “높은 지위에 계시면 겸손할 것을 생각하시고, 가득 차거든 덜 것을 생각하시며, 즐거운 일을 만나면 절제할 것을 생각하시고, 편안하실 때는 뒷날의 걱정을 생각하시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면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집을 새로 지으려 하면 분수에 맞게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시며,〈간사한 사람에게〉 총명이 가리워짐을 막으시려면 바른 말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시고, 참소와 간사를 미워하려면 자신부터 바르게 되기를 생각하시며, 작상(爵賞)을 시행할 때는 혹시 기쁜 나머지 지나치지 않는가를 생각하시고, 형벌을 시행할 때는 혹시 노한 김에 함부로 하는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열 가지 생각을 겸하여 꾸준히 행하시고, 믿음으로 지키신다면 민심이 기뻐하고 천도가 순응하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당장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해동잡록》

 

  나) ▣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3 등과 총목(登科摠目) ▣

 

단종 원년 계유 즉위 증광시에서 이숭원(李崇元) 등 40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유학 김상(金湘), 진사 유학 최한보(崔漢輔) 등을 뽑았다. 연령 제한 법을 폐지했다. 십운시(十韻詩)를 고시(古詩)로 개정했다. 가을 식년시에서 김수녕(金壽寧)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殿試)대책(對策) 시제 : 수성난(守成難)

 

☞ 수성난(守成難) : 당 나라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창업(剏業)과 수성(守成)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하고 묻자, 혹은 창업이 어렵다 하고 혹은 수성이 어렵다 하였는데, 창업이란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키는 개국(開國)을 말한 것이고, 수성이란 그것을 이어 받아서 지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문집(文集) ▣

 

강희맹이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하고, 김수녕(金壽寧)과 함께 점(點)을 치고 뭉개고 보태고 덜고 하여 남이 보기 좋게 하여, 선조의 시명(詩名)을 후세에 선양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도라고 하지만, 나는 불효라고 한다. 신영희(辛永禧)의 집에 그의 조부 문희공 석조(文禧公碩祖)의 시집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 집 문집은 간행할 만한가.” 하니, 영희가 말하기를,“나의 할아버지가 비록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은 있었으나, 《가집(家集)》에 기재된 것에는 하나도 전할 만한 것이 없네. 일찍이 한 문생(門生)에 대한 만시로서, 32세에 죽었구나 / 三十二而卒   불행히도 안회와 같구려 / 不幸同顔回  

 

라는 것이었는데, 이 시구 외에는 좋은 시가 없으니 어찌 간행하겠나.” 하였다고 한다. 남들은 이것을 불효라고 하나 나는 효도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조부의 문예에 대해 곧게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꾸민 말과 거짓을 꾸민 붓으로 선조를 높인들 선조의 마음이 저승에서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추강냉화》

 

  라) ▣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언해(諺解) ▣

보(補). 《태허정집(太虛亭集)》의 언해 발문을 보면 《시경》은 정인지(鄭麟趾), 《서경》은 정창손(鄭昌孫), 《예기》는 신숙주, 《논어》는 이석형(李石亨), 《맹자》는 성임(成任), 《중용》은 강희맹(姜希孟), 《대학》은 홍응(洪應)이 만들었고, 《소학》 구결은 세조 자신이 정하였는데, 구종직(丘從直)ㆍ김예의(金禮儀)ㆍ정자영(鄭自英)ㆍ이채근(李菜根)ㆍ박건(朴楗)ㆍ김수녕(金壽寧) 등과서로 의논하였다.

 

  마) ▣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문장(文章) ▣

우리 나라 문장이 최치원(崔致遠)에서 처음으로 발휘(發揮)되었다. 김부식(金富軾)은 풍부하면서도 화려하지는 못하였고, 정지상(鄭知常)은 화려하였으나 떨치지는 못하였으며, 이규보(李奎報)는 눌러 다졌으나 거두지는 못하였고, 이인로(李仁老)는 단련하였으나 펴지는 못하였으며, 임춘(林椿)은 면밀하였으나 윤택하지는 못하였고, 이곡(李穀)가정(稼亭) 은 적실하였으나 슬기롭지 못하였으며,이제현(李齊賢)익재(益齋)은 노련하고 기운찼으나 문채롭지는 못하였고, 이숭인(李崇仁)도은(陶隱) 은 온자(溫藉)하여 기운이 부족하였으며, 정몽주 포은(圃隱) 는 순수하였으나 요약(要約)하지는 못하였고, 정도전(鄭道傳)삼봉(三峯) 은 확대하였으나 검속하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일컫기를 이색(李穡)목은(牧隱) 은 시와 문이 구비되어 함께 우수하다 하나, 더럽고 엉성한 태도가 많이 있어서 원(元) 나라 사람의 시율(詩律)에 견주더라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당(唐)ㆍ송(宋)의 경지에야 비길 수 있으랴. 권근(權近)ㆍ변계량(卞季良)이 비록 문병(文柄)을 잡았으나, 이색에게도미치지 못하였고, 계량은 더욱 비천하고 연약하였다. 세종(世宗)이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맞이하였는데, 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이석형(李石亨)과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 같은 이는 모두 한때 이름을 날렸다. 삼문은 문장이 호방하나 시(詩)에는 모자랐으며, 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은 잘하여도 시를 몰랐다. 성원은 타고난 재주로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으나 견식이 넓지 못하였으며, 이개는 문장이 맑고 발월(發越)하였으며 시도 또한 정묘ㆍ기절하였으나,동료들은 모두 팽년을 집대성(集大成)하였다고 하니, 그의 경술과 문장ㆍ필법이 모두 훌륭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죽음을 당하여서 그들의 저술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최항(崔恒)은 사륙체의 변려문에 정묘하였고, 석형은 과거의 글에 능하였으며, 오직 숙주의 문장ㆍ도덕은 온 세상에서 모두 높이고 우러러 보았다. 그 뒤를 이을 자는 서거정(徐居正)ㆍ김수온(金守溫)ㆍ강희맹(姜希孟)ㆍ이승소(李承召)ㆍ김수녕(金壽寧) 및 성임(成任)뿐이었다.

 

거정은 문장이 화려하고 시는 오로지 한유(韓愈)ㆍ육유(陸游)의 체를 공부하여 손을 대면문득 글이 만들어져서 화려하기 짝이 없었고,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다. 수온은 글을 읽으면 반드시 외웠으므로 문장이 체재를 얻었으며, 그 문장은 호방하고 웅건하여서 아무도 그와 더불어 기세를 다투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단속할 줄 모르므로 시의 운에 착오가 많고 격식에 맞지 않았다. 희맹은 시와 문이 전중 아담(典重雅淡)하고 타고난 재질이 제대로 무르익어서 여러 학자 중에 가장 뛰어났다. 승소는 시와 문이 함께 아름다워서 공교한 장인이 조각하여도 도끼로 찍은 흔적이 없는 것과 같았고, 수녕은 타고난 자질로 일찍 성취하였으며 반고(班固)를 본받아 문장이 노련하고 힘찼다.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수할 때에 사실을 서술한 것은 그의 솜씨에서 많이 나왔던 것이다. 성임의 시는 만당(晩唐 당의 후기)의 체재를 본받아서 구름가듯 물흐르듯 걸림이 없었다. 이 몇 사람이 모두 이름이 났으며 당대의 문학이 빛났다. 《용재총화》

 

  바) ▣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경연(經筵) ▣

성종이 어려서 왕위를 이었는데 대사간 김수녕(金壽寧)이 차자를 올리기를, “학문하는 방법은 배[舟]가 흐르는 물에 뜬 것 같아서 전진하지 아니하면 후퇴하는 것이니, 경연관에게 날마다 교대로 번을 들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성종기(成宗紀) 조에 상세하다.

 

 3) 김수녕 선조님이 쓰신 전의이씨 이함장(李 言咸 長) 묘갈명(墓碣銘)  (2003. 3. 7. 이왕섭(전의이씨) 제공)

   가. <이함장(李 言咸 長)의 계보>

이도(李棹:統合三韓開國翊贊 二等 功臣/三重大匡太師/전의이씨시조)▶ 이강(李康:精勇衛大將軍)▶ 이수영(李秀英:兵部尙書)▶ 이문경(李文景:千牛衛大將軍)▶ 이윤관(李允寬:刑部侍郞)▶ 이순(李順:保勝別將)▶ 이천(李仟/李阡:鷹揚軍大將軍)▶ 이자화(李子華:選部典書)▶ 이득영(李得榮:典法佐郎)▶ 이구직(李丘直:開國原從功臣/公州牧使)▶ 이정간(李貞幹:江原道道都觀察使/中樞院事/孝靖公)▶이사관(李士寬:江原道觀察使,京畿道觀察使,漢城府尹/全城府院君)▶ 이함장(李 言+咸 長:文科及第/佐翼原從功臣/江原道觀察使,慶尙道觀察使,禮曹參判)

 

▶ ●1남(男) 이수치(李壽稚).  ●2남(男) 이수남(李壽男: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좌리공신(佐理功臣) 전산군(全山君) 이다.)▶ 이한원(李翰元:통정대부 양주목사(通政大夫楊州牧使), 증 자헌대부 공조판서(贈 資憲大夫工曹判書) 정국공신(靖國功臣) 전성군(全城君) 이다.). ●3남(男) 이수아(李壽兒). ●4남(男) 이수해(李壽孩). ●5남(男) 이수영(李壽영)

 

   나. 김수녕은 아래 묘갈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承旨與壽寧善哭且言曰當銘曰 승지(이수남)가 (김)수녕과 가까이 지내는 터인데 찾아와서 곡하면서 지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기로 다음과 같이 명을 엮는다.

 

   다. 김수녕과 이수남은 평소에도 교분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67년(세조 13) 명나라 황제로부터 건주위(建州衛)의 정벌을 지원하라는 논지(論旨)가 있어 조정에서 예조참판(禮曹參判) 이함장[李 言咸 長:1410(태종 10) ∼ 1467(세조 12)]을 선위사(宣慰使)로 삼아 안주(安州)에 가서 명(明)나라 군대를 맞이하라고 하니, 병(病)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수행하다가 09월 20일(임오)에 58세(五十八歲)를 일기(一期)로 안주(安州)에서 졸하였다. 그해 12월 28일(경신) 부평(富平)의 동쪽 수탄리(水呑里)에 예장(禮葬)하였는데 이함장(李 言咸 長) 묘갈명(墓碣銘)은 가선대부 중추부첨지사 겸 춘추관동지사 김수녕(嘉善大夫 中樞府僉知事 兼 春秋館同知事 金壽寧)이 짓고(撰), 글씨는 그의 둘째아들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있던 이수남(李壽男)이 썼다(書).

 

  라. 이함장(李 言咸 長) 1410(태종 10) ∼ 1467(세조 12)

조선의 문신(文臣). 자(字)는 여신(如神). 본관은 전의(全義).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의 손자.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 사관(士寬)의 아들.

 

1435년(세종 17)에 성균시(成均試)에 1438년(세종 20) 29세에 문과(文科)에 각각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등용되었다. 그후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수(編修)에 참여하였고,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1450년(세종 32)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을 다녀온 후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며, 문종이 즉위하여 경기도사(京畿都事)로 나갔다가 1452년(문종 02)에 세종실록 편수 기주관(世宗實錄編修記注官)이 되고 1454년(단종 02)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문종실록(文宗實錄)의 찬수에 참여하였다. 1455년(단종 03)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고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57년(세조 0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으며 이어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지내고 1462년(세조 07)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듬해인 1463년(세조 08) 사은사(謝恩使)로 명에 다녀온 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465년(세조 10)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고, 1467년(세조 12) 선위사(宣慰使)로 명군을 맞아 안주(安州)에서 임무수행중 졸(卒)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마. 이수남(李壽男) 1439(세종 21) ∼ 1471(성종 0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인(子仁).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의 증손자,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 사관(士寬)의 손자, 예조참판 함장(言+咸 長)의 아들이다.

 

1455년(단종 03) 17세의 약관으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458년(세조 04) 20세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 2인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었으며 대교(待敎)를 거쳐 봉교(奉敎)로 전보되었다.

 

1460년(세조 06)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1462년(세조 08) 성균관 주부로 승진되었고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이조좌랑, 병조정랑,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거쳐, 1465년(세조 11) 문과중시(文科重試)와 발영시(拔英試)에 연이어 급제하고 1466년(세조 12) 세조의 명을 받아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우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를 역임하고 성종 즉위 후인 1469년에는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전산군(全山君)에 봉(封)하여졌다. 이해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으나 33세로 요절하였다.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이수남(李壽男)은 총민(聰敏)하고 경기(經記)하며, 또 사자(寫子)를 잘하여, 당시에 칭예(稱譽)가 있었다. 진취(進取)에 예민하여 비록 일찍 달관(達官:벼슬이 높은 관리)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만의(滿意)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바. 禮曹參判公 諱言咸長 墓碣銘(예조참판공 휘함장 묘갈명)

公諱⊙함長字如神姓李氏其先起全義麗祖之南征也有名棹者以禮迎⊙호王師最有勞策勳官至太師三重大匡自太師以來衣冠赫世蔚然相望入本朝曰丘直事 太祖有原從之功判公州牧使於公爲曾大父牧使生貞幹事母盡孝老而能慕 世宗嘉奬進資憲大夫爲中樞院使加賜⊙궤杖卒諡孝靖孝靖生士寬官漢城府尹用第三子平簡公勳贈純忠輔祚功臣議政府右議政全城府院君全城之子凡七科目賢者五公其一也⊙비韓氏西原府院君文簡公尙敬之女封上黨府夫人亦以五子故也 永樂庚寅十二月庚戌生公少而俊秀老益淳謹日事時書痛刮去豪習中乙卯成均試正統三年戊午射策選藝文檢閱庚申丁內艱預修治平要覽擬承政院注書再轉至忠淸都事時觀察使申近出且老不事事公洗心奉職興滯補蔽一道賴之入爲司憲府監察 世宗庚午以聖節使書狀官赴朝還拜吏曹佐郞公建言王子與公主親則一爾今有駙馬死則祿不及公主非厚意也請自今王女夫死者祿以終其身 文宗嘉納立定其法再轉爲京畿都事甲戌改成均直講兼職史官預撰 文宗實錄進拜司憲府掌令三遷又重爲本職世祖二年丁丑再試中第拜司憲府執義累遷出爲永興府大都護能廉平不苛惠政在民至今永人皆曰我有德繇僉知中樞出兼江原道觀察使癸未以謝恩使奉表如京旣還階嘉善觀察慶尙道 世祖十年乙酉拜禮曹參判丁亥秋 帝遣使諭助伐建州衛世祖命公爲宣慰使歸⊙아安州屬公疾聞 命因往九月壬午卒于安州客館享年五十八訃聞 上驚悼諭所過護喪 賜賻有加以其年十二月庚申禮葬于富平治之東水呑里原公天資⊙침毅莊重簡默修身治官周愼有槻法自公少時雖在倉卒無疾言遽色匡坐終日望之儼然遇子弟衣冠⊙내見至於輿臺待之至誠不敢加以⊙만語剛中小心不喜賓朋馳逐居家斥利不爲立産業基址其爲官事則小而不放大而不⊙파從容區處事己卽退憺然若無情者殆所謂君子人也 公嘗再佐史幕秉三憲綱爲大府爲觀察二道必務持正不少⊙굴法動遵大⊙체靜而無煩標望臨一時皆以坐鎭雅俗期之天之⊙구不大顯融惜也 娶蔚山郡事李伯臣女生五男一女男長壽稚戶曹正郞次壽男承政院左承旨三捷賢科有文名次壽兒典牲暑參奉次壽孩副司直次壽⊙영蔭授從仕郞女適務功郞朴仁烈正郞娶參判尹欽女生三男一女女適啓功郞申從沃餘幼承旨娶縣監朴秀林女生二男參奉娶直講金昇女生二男司直娶華山君權槃女生三男從仕郞娶佐郞李永弘女生一男務功郞生一女皆幼 承旨與壽寧善哭且言曰當銘曰

 

植桐千歲特不攀⊙예末之茂惟根深嗟李之門德業滋慶積之發桂五枝公於雁行秀白眉莊重寡言而有儀學之⊙제身行範俗⊙악立烏臺姦自伏彈琴單父春日長宣化至今民愛棠⊙민勉從事不自惜病惟奔命爲可戚志局於位施未豊惟有遺德垂無窮公胤旣多更有孫滿庭袞袞生蘭蓀譬如稼者種種⊙륙日至而熟皆可食我名不徵刻此石用告後人⊙욱無⊙역

 

嘉善大夫中樞府僉知事兼春秋館同知事金壽寧撰壽男謹書

 

<한자(漢字) 풀이>

⊙함-(言咸) 정성.  ⊙호-(食高) 호궤하다(餉軍, 勞之).  ⊙궤-안석.  ⊙비-죽은어미, 어미.  ⊙아-맞다.  ⊙침-가라앉다. 빠지다. 잠기다. ⊙내-이에. 곧. 이르다.  ⊙만-속이다. 헐뜯다. 게으름을 피우다.  ⊙파-두려워하다.  ⊙굴-굽히다. 복종하다.  ⊙체-(身豊) 체(體)의 속자(俗字)  ⊙구-기쁘다.  ⊙영-어린아이.  ⊙예-소리마주치다.  ⊙제-편안하다.  ⊙악-물수리, 징경이  ⊙민-힘쓰다. 맹꽁이.  ⊙륙-올벼  ⊙욱-힘쓰다. 勖의 와자.  ⊙역-싫어하다. [도]와 [두]로 발음하기도 한다.

 

 4) 밀산군 박종손 신도비 (2004. 4. 10. 윤만(문) 비문 제공. 친필 사진-발용(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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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有明朝鮮國 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崇祿大夫 密山君 諡恭孝 朴公 神道碑銘 幷序

 

유명조선국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숭록대부 밀산군 시공효 박공 신도비명 병서

밀산군(密山君) 박공(朴公) 중손(仲孫) 자(字) 경윤(慶胤)이 세상을 떠났다. 장사를 지내려 함에, 그 아들들이 상락(上洛) 김수녕(金壽寧)에게 신도비명을 지어달라 청하기를, “그대는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을 왕래하였으니 선군(先君)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네. 청컨대 선군의 높은 덕행과 큰 공로를 드러내어, 민멸되지 않고 영원히 전해질 수 있도록 해 주시게.” 하였다. 이때 수녕(壽寧)도 모친상을 치르는 중인지라 서로 붙잡고 통곡을 하였다. 그리고 신도비명 짓는 일을 사양하였는데, 들어주지 아니했다. 살피건대, 박씨(朴氏)는 신라(新羅)에서 시작되었다. 신인(神人)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라의 시조가 되었으니, 사씨(史氏)가 역사에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그 후손들이 삼한(三韓)에 퍼져 살며 대대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중에 밀양(密陽)에 사는 자들이 가장 드러나 망족(望族)이 되었다. 고려(高麗) 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 벼슬을 지낸 사경(思敬)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신데, 어질고 후덕한 군자였다. 판서(判書)께서 침(忱)을 낳았으니, 국조(國朝)에 들어와 우리 태조(太祖)를 섬겨 공로가 있었으므로 이름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에 실리고 벼슬은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다. 전서(典書)께서 강생(剛生)을 낳았다. 유아(儒雅)한 것으로 명망이 드러났고,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어 선정(善政)이 있었으며,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추증받았다. 찬성(贊成)께서 공(公)의 아버지인 절문(切問)이라는 분을 낳았으니, 행실이 돈독하며 성품이 문아(文雅)하였고, 세상을 떠날 때의 벼슬이 교서 정자(校書正字)였다. 공의 공로 덕분에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이라는 공신호를 하사받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처음에 공의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왕씨(王氏)가 임신하였을 때에 꿈에 집채만한 큰 소를 보고는, 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찬성공께 말하니, 찬성공이 말하기를, “집안이 창성(昌盛)하려면 징조가 반드시 먼저 보이는 것이니, 아마도 아이가 있게 되어 우리 집안을 중흥시킬 것 같습니다.” 하였다. 찬성공은 부인에게 아이를 잘 거두어 양육할 것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뒤 7개월 만에 공이 태어났다. 공은 준수하고 총명하였고 어릴 적에도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조금 자라서는 스스로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을 줄 알았다.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했다. 다시 어진 스승과 벗들을 따라 배우며 학문을 닦고 문장을 수련하여, 선덕(宣德) 을묘년(1435, 세종17)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집현박사(集賢博士)에 선보(選補)되었다가 승진하여 부수찬 지제교(副修撰知製敎)가 되었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전보되어 춘추관(春秋館)의 직임을 겸하게 되니,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그 즈음에 성관(星官)들이 학문이 부족하고 기술이 없으므로 세종(世宗)께서 근심하여 특별히 공의 벼슬을 굽혀서 서운판관(書雲判官)으로 삼았다. 공이 정미(精微)하고 오묘(奧妙)한 이치를 잘 궁구하여 조금도 차실(差失)이 없으니, 산술(算術)에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공을 앞서는 자가 없었다.

 

누차 전보되어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고 지제교는 그대로 맡았다. 첨지통례(僉知通禮)로 동첨사(同詹事)를 겸임하였다. 세종께서 말년에 병환으로 정사(政事)를 잘 돌볼 수 없게 되자, 군기(軍機) 이외의 일은 모두 세자(世子)에게 보고하여 결정하도록 하교하였다. 사무(事務)의 출납(出納)이 첨사(詹事)를 경유하였는데, 공이 그 직책을 잘 수행하니 세상의 여론이 더욱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 의정부에 들어가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지냈다. 재차 사헌부에 들어가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세 번째 들어가서는 집의(執義)가 되었다. 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오직 기풍을 지키고 격양시키는 일에 힘을 다하였으므로 조정의 기강이 엄숙해졌다. 낭관이나 사인(舍人)으로 있을 때에는 단정하고 고아하여, 임금을 보필할 대신의 풍도가 잠재되어 있었다. 재능있는 관원으로 추천되어 병조(兵曹)의 겸지사(兼知事)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발탁되어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누차 승진하여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년, 단종1년) 봄에 임금이 친히 과거를 보여 선비를 뽑았는데, 그때 공이 대독관(對讀官)을 하였다. 겨울에 금상(今上)께서 내란(內亂)을 평정할 때에 공이 요직에 있으면서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좌우에서 도왔다. 내란을 평정하는 일이 잘 마무리되었는데, 공의 공로가 매우 컸다. 드디어 병조참판(兵曹參判)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제수하였다. 시대의 어려운 일을 공의 도움으로 진정시켰기 때문이다. 공로를 기록하여,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이라는 공신호(功臣號)를 내리고 응천군(凝川君)을 봉하였으며, 그 얼굴을 그려서 맹부(盟府)에 보관하였다. 병조에서 옮겨져서 한성부 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에 들어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공조, 이조, 형조, 예조 등 4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전의 봉호를 고치어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가는 곳마다 큰 강령(綱領)을 잘 유지하고 까다롭고 자잘한 것에 힘쓰지 아니하였으며, 인재를 천거하거나 옥사(獄事)를 처리할 때에는 공평하게 하고 영합하지 아니하였으며, 국빈(國賓)을 접대하거나 나라의 제사를 담당했을 때에는 일을 잘 처리해서 찬란히 참으로 볼 만하였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하였다.

 

천순(天順) 병자년(1456년,세조2년) 봄에 과거(科擧)의 시관(試官)을 맡았다. 승진하여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얼마 안 되어 좌참찬(左參贊)에 승진하였다. 기묘년(1459년,세조5년) 봄에 또 과거의 시관이 되었다. 전후를 통하여 무릇 세 번 시관이 되어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공이 뽑은 선비 중에는 이름이 알려진 명사(名士)가 많았다. 가을(1459년 9월)에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상사를 당하였다. 큰 슬픔으로 초상을 치르느라 몸이 야위어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지고 품계가 올라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성화(成化) 2년(1466년, 세조12년) 여름 5월 병 신일(26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임금이 매우 상심하여, 정무(政務)를 정지하고, 관원에게 명하여 상가(喪家)에 가서 조문하게 하였으며, 부의(賻儀)를 갖추어 사제(賜祭)하였고, 공효(恭孝)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군(君)은 성실한 선인(善人)으로 온후하고 화락하였다. 매양 선군(先君)이 계실 때에 태어나지 못했음에 생각이 미치면, 그 슬픔으로,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닌 것같았다. 독실한 효성으로 모부인(母夫人)을 섬기면서도 오히려 그 뜻을 어기게 될까 염려하였으며, 형을 어버이 섬기듯이 섬겼다. 친인척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온 힘을 다하여 도와주었다. 산업(産業)은 그저 먹고살 만한 정도까지만 늘렸고, 별도로 넉넉히 여분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집안에 혼자 있을 때이거나 교유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이거나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을 지녀서, 몹시 좋아하며 구차하게 영합하지도 않았고 또한 남달리 특이하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정무(政務)에 능통하여 일을 대해서 여유가 있었으나, 일찍이 조금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공훈과 명성이 높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하게 낮추었다. 누차 권병(權柄)을 맡았으나 문에는 잡객(雜客)의 출입이 없었다. 일찍이 여묘살이를 할 때에 글을 지어 아들들을 훈계하였는데, 대략 그 내용은, 고금의 사치와 검소에 따른 득실의 자취를 논한 것이었다. 계주명(戒酒銘)을 지어 자리 옆에 걸어 놓아 자신을 경계하고, 인하여 아들들을 경계시켰는데, 그 말이 간략하면서도 뜻이 심원하여 또한 세상의 훈계가 될 만하다고 한다. 그해 7월 임진일에 교하현(交河縣)의 북쪽 탄포(炭浦) 오고미리(烏告美里)에 예장(禮葬)하였다. 부인 남평현 문씨(南平縣文氏)의 무덤과 같은 언덕인데 광혈(壙穴)은 다르다.

 

부인은 바로 공조정랑(工曹正郞) 문승조(文承祚)의 따님이니, 맑고 아름다우며 어진 행실이 있었다. 덕 높은 군자의 배필이 되어 어진 아들을 양육하며, 집안을 화목하게 하였는데,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맏이는 전(栴)이니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이며, 다음은 미(楣)이니 한성서윤(漢城庶尹)이며, 다음은 건(楗)이니 승정원 우승지이다. 둘째와 막내가 모두 문학(文學)의 재능이 있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선대의 사업을 잘 이어받았다. 막내는 바로 수녕(壽寧)과 같은 해에 급제한 자이다. 딸은, 맏이는 또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둘째는 전설사수(典設司守) 유오(柳塢)에게 시집갔다.부평도호부사는 첨지중추(僉知中樞) 윤삼산(尹三山)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름이 인열(仁烈)인데 음직(蔭職)으로 통사랑(通仕郞)에 제수되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서윤(庶尹)은 지돈녕(知敦寧) 강석덕(姜碩德)의 딸을 아내로 맞아 5남 1녀를 두었고 승지(承旨)는 서윤(庶尹) 최윤(崔昀)의 딸을 아내로 맞아 3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전설사수 유오(柳塢)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직(司直) 윤린(尹磷)에게 시집갔으니 또한 명문 집안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 박씨의 선조는 / 繄朴之先

처음에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 肇降自天

그 전승의 기원이 멀고 멀도다. / 有遠其傳

 

잇달아 훌륭한 인물 나와서 / 繩繩衣冠

삼한에 명문가를 이루었는데 / 望于三韓

그 중 밀양이 으뜸이었지. / 莫盛密山

 

판도공은 어질고 후덕하여 / 版圖仁厚

옛 사람의 짝이 될 만하였고 / 古人與偶

몸소 애쓴 보람으로 후손이 복을 받았네. / 劬躬燾後

 

찬성공에 이르러서는 / 爰曁贊成

베푼 일 많았으나 보응이 가볍더니 / 施重報輕

바로 공에게 이르러 형통하였네. / 政待公亨

 

공은 탄생이 기이하였네. / 公生也奇

소 꿈이 좋은 조짐이라고 / 夢牛維禨

찬성공이 점을 쳤었지. / 贊成占之

 

공이 집안을 이어받아 / 公世其家

덕과 문채를 떨치어 / 揭德振華

이름을 과방(科榜)에 드러냈네. / 名挂賢科

 

어버이 섬김에 효도하고 공손하며 / 事親孝恭

넓은 아량으로 사람들을 대하였고 / 待人則容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받들었네. / 奉上則忠

 

얼신이 지난번에 교만하여 / 孼臣昔驕

조정에서 소란 일으켜 어지럽히니 / 毒亂于朝

임금이 그 요망함을 제거하였지. / 王殄厥妖

 

난리를 평정하는 공적을 이루실 때에 / 丕顯神功

공이 곁에서 크게 도왔으므로 / 贊贊惟公

큰 종에다 공훈을 새기었다네. / 勒勛景鍾

 

공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으나 / 公名隆隆

공은 더 겸손히 몸을 낮추어 / 公愈匑匑

이룬 공로를 잘 보전하였네. / 以克保庸

 

마음은 사심없이 맑고 맑아서 / 游心冲泊

사치를 경계하고 검약 즐겼고 / 徵汰憙約

자손에게 약석 될 훈계 남겼네. / 遺誡藥石

 

선하다고 꼭 창성하는 건 아닌가 보다. / 善不必昌

중년의 나이로 세상 떴으니 / 中身云亡

아, 저 푸른 하늘만 바라보노라. / 粤瞻蒼蒼

 

훌륭한 자손들 많고 많아 / 靄靄蘭蓀

공의 가문에 가득하니 / 森立公門

공은 장생불사 하신 거라네. / 公乎長存

 

이에 돌에다 명을 새겨 / 爰刻銘章

삼가 아름다운 광채 드리우노니 / 式垂休光

나라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 與國無疆

 

[주석: 가나다순]

* 검상(檢詳) : 의정부의 정5품 벼슬.

* 경종(景鍾) : 진경공(晉景公)이 만든 종(鍾), 또는 큰 종. 경종에 공훈을 새겨넣은 옛 고사가 있으므로, 후세에는 공훈을 기록해 드러내는 일을 비유할 때에 이 낱말을 씀.

* 계주명(戒酒銘) : 글 제목이 ‘계주명‘이며, 술을 경계한다는 뜻임.

* 교서정자(校書正字):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교서관은 조선시대 경전(經傳)의 인쇄 출판 및 향축(香祝), 인전(印篆) 등을 맡았던 관청. 운각(芸閣)이라고도 함. 정자는 교서관의 정9품 벼슬.

* 국조(國朝) : 조선(朝鮮)을 말함.

* 금상(今上) : ‘지금의 임금‘이라는 뜻. 세조(世祖)를 가리킴.

* 난손(蘭蓀) : 난초와 창포. 둘다 향기로운 풀임. 훌륭한 후손들을 뜻하는 말로 쓰임.

* 녹권(錄券): 공신의 공훈(功勳)을 기록한 문서.

* 대과(大科):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를 아울러 일컫기도 하나 주로 문과 시험을 말함. 대개 간지에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들어 있는 해에 3년을 주기로 실시하였으므로 식년시(式年試)라고도 함.

* 대독관(對讀官) : 왕이 친림(親臨)하는 전시(殿試)에서 상석시관(上席試官)인 독권관(讀券官)이 수험생의 시권(試券)을 임금 앞에서 소리내어 읽는데, 이 때에 마주 서서 보좌하는 시관(試官)이 대독관임. 독권관은 2품 이상의 문관으로 임명하며, 대독관은 정3품 이하의 문관으로 임명함.

*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장관. 종2품.

* 도승지(都承旨) : 승정원의 6승지 중 수석 승지. 정3품 당상관 벼슬.

* 독란(毒亂) : 해독을 끼치며 난리를 일으킴.

* 동부승지(同副承旨) :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 벼슬.

* 망족(望族) : 명망이 높은 명문 집안.

* 맹부(盟府) : 충훈부(忠勳府)의 별칭.

* 병조참판(兵曹參判) : 병조의 종2품 벼슬.

* 보용(保庸) : 공훈이 있는 자를 포상하여 마음을 안착시킴을 뜻하는 말임. 즉, 나라에 공훈이 있어서 윗대 조상들까지 추증의 은혜를 입었음을 말함. 용(庸)은 사공(事功)임.

* 부수찬 지제교(副修撰知製敎): 여기서 부수찬은 집현전 종6품 벼슬임. 지제교는 임금이 반포하는 교서(敎書) 등의 글을 짓는 관원인데, 당시에 집현전 관원이 겸임하였음.

* 비현(丕顯) : 크게 나타냄. 크게 드러냄.

* 사씨(史氏) :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

* 사인(舍人) : 의정부의 정4품 벼슬.

*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 사헌부는 시정을 논의하고 백관을 규찰하며 기강을 정립하는 임무를 맡은 관청. 감찰은 정6품 벼슬.

* 산업(産業) : 농업, 어업, 공업 등 생산활동 및 재산증식과 관련되는 일들.

* 삼한(三韓) : 좁게는 한강 이남을, 넓게는 우리나라 강토 전체를 뜻하는 말로 씀.

* 서운판관(書雲判官) : 서운관(書雲觀) 판관. 서운관은 천문(天文), 재상(災祥), 역일(曆日) 등의 일을 담당하던 관청. 세종 때에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됨. 판관은 종5품 벼슬. 조선시대에는 이조(吏曹), 사헌부(司憲府) 등의 관직이 요직이며 관상감의 직책은 요직이 아니므로 본문에 ‘벼슬을 굽혀서‘라는 표현을 썼음.

* 성관(星官) : 천문을 관찰하는 관원. 관상감 관원을 말함.

* 성균시(成均試) : 성균관에서 주관하는 예비시험. 이 시험에 합격하면,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자격이 주어졌음.

* 세묘(世廟) : 세종(世宗) 임금.

* 승승(繩繩) :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는 모양.

* 신공(神功) : 신령스럽게 이룩한 공적. 임금의 공적을 비유함.

* 애애(靄靄) : 구름이 모인 모양. 눈이 많이 내리는 모양.

* 약석(藥石) : 약재(藥材)와 폄석(砭石). 옛날에는 침을 금속이 아닌 돌로 만들었음. 석(石)은 돌침. 약물 또는 경계가 되는 유익한 말을 비유함.

* 얼신(孼臣) : 임금의 측근에서 요망한 흉계를 부리는 신하.

* 음직(蔭職) : 정규 시험을 거치지 않고 부조(父祖)의 공덕 덕분으로 받은 관직.

* 이조 정랑(吏曹正郞) : 이조(吏曹)의 정5품 벼슬.

* 이조 좌랑(吏曹佐郞) : 이조(吏曹)의 정6품 벼슬.

* 장령(掌令) : 사헌부의 정4품 벼슬.

* 전설사수(典設司守) : 전설사는 의식(儀式)에 쓰이는 장막(帳幕)을 담당하던 관청. 정4품인 수(守)가 수장임.

* 지돈녕(知敦寧) : 돈녕부 지사(知事). 정2품.

* 집의(執義) : 사헌부의 종3품 벼슬.

* 집현박사(集賢博士) : 집현전 박사. 집현전은 조선초기에 궁중에 설치한 학문연구기관. 특히 세종 임금 때에는 집현전의 기능을 확대하고 훌륭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음. 박사는 집현전의 정7품 벼슬.

* 첨지중추(僉知中樞) : 중추부 첨지사(僉知事). 정3품 당상관.

* 첨지통례(僉知通禮) : 통례원 첨지사(僉知事). 통례원은 조선시대 국가의 의식(儀式)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첨지사는 정4품 벼슬.

* 춘추관(春秋館) : 시정(時政)의 기록을 담당하던 관청. 춘추관의 직임은 대개 다른 관청의 관원이 겸임하였는데, 공효공(恭孝公)이 당시 이조좌랑의 벼슬이었으니 겸임한 직책은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 7개월 만에 공이 태어났다 : 이 해가 1412년(태종 12년, 임진년)임.

* 통사랑(通仕郞) : 정8품 참하관(參下官).

* 판도판서(版圖判書) : 판도사(版圖司)의 판서(判書). 판도사는 고려 말의 관청으로서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糧), 식화(食貨), 전지(田地)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음. 나중에 호조(戶曹)로 개칭하였음.

* 판서(判書) : 6조(六曹)의 장관. 정2품.

* 한성부윤(漢城府尹) : 한성부의 최고 벼슬.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함.

* 한성서윤(漢城庶尹) : 한성부의 종4품 벼슬.

* 호조전서(戶曹典書) : 호조의 최고책임자. 조선 태조 때에는 정3품의 전서(典書) 2명을 두었다가 태종 때에 1명을 줄이고 이어 정2품으로 품계를 올려 판서(判書)로 개칭하였음.

 

 5) <박중순 신도비 탐방기> (2006. 5. 30. 발용(군) 제공)

  *탐방일시 : 2006. 5. 28   

  *탐방자 : 김발용, 김태영

 

박중손 [朴仲孫, 1412~146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밀양, 자 경윤(慶胤), 호 묵재(默齋), 시호 공효(恭孝)이다. 15세 때 성균관시(試)에 합격하고,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급제, 집현전 박사에 등용되었다. 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세종 말에 사인(舍人)·집의(執義)·병조지사(兵曹知事)·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병조참판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정난공신 2등에 책록,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대사헌, 공조·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올라 밀산군(密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1459년(세조 5) 춘시(春試)를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발굴하였다.

 

박중손 묘역은 자유로를 타고 문산방면으로 진행, 통일전망대를 지나 오금리 이정표를 보고 진입하여 오금2리 버스정류장에서 좌회전, 300미터 진행, 오금2리 방앗간을 끼고 돌면 신도비와 묘역이 나타난다.

 

신도비는 상락백(上洛伯) 김수녕(金壽寧) 찬(撰), 자헌대부중추부지사 성임(成任) 서(書), 가선대부형조참판 정난종(鋌蘭宗) 전(篆)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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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세운 신도비와 신도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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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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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락백(上洛伯) 김수녕(金壽寧) 찬. 성임 書. 정난종 篆.

 

공효공(恭孝公) 박중손(朴仲孫·1412~1466)은 세종~세조 년간의 문신으로 여러 요직을 지냈으며 특히 천문(天文)을 관찰함에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임. 박중손과 같은 언덕에 조성된 봉분은 공조정랑을 지낸 문승조(文承祚)의 딸인 정경부인(貞敬夫人)남평 문씨의 묘이다.

 

묘소의 전면은 3단으로 조성하고 각 단은 1단의 장대석을 쌓았는데 각 묘앞에는 상단의 장대석축에 걸쳐 장방형의 간단한 상석(床石)을 두었고 그 앞에 각각 장명등을 세웠다. 묘역 좌우에는 각각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으며 우측 무인석 아래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공효공 묘역의 장명등은 신도비 건립년대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기 장명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매의 부재 중 하부재는 대좌(臺座)와 화사(火舍)로 이루어져 있고 상부재는 옥개석으로 되어 있다. 등부(燈趺)인 대좌는 하대·중대·상대 등 세부분으로 구성되었고 그 위에 화사부분이 조식되었으며 옥개석은 옥개(屋蓋)와 연주대(蓮珠帶) 및 연봉형(蓮峯形)의 보주(寶珠)로 구성 되었다. 정경부인 묘 앞의 장명등은 공효공 보다 먼저 사망하였으므로 약간의 시기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노출되어 있는 두 장명등의 높이는 서로 비슷하나 공효공 묘 앞의 장명등이 둔중해 보이는데 비해 정경부인 묘 앞 장명등은 세장하며 화창은 서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2기의 장명등 모두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장명등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으며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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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 박중손. 우 정경부인 남평문씨 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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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화로 인하여 판독이 어려울 정도인 구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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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물 제1323호 장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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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물 제1323호 장명등. 전 후면은 방형(方形)으로 화창(火窓)을 내었으나, 동쪽에는 원형(圓形),

     서쪽에는 반월형(半月形)의 화창을 두어 일(日) 월(月)을 상징한 독특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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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 우  문 ㆍ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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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부인 남평문씨 묘 앞의 장명등.

 

또한 묘역내의 묘제 및 기타 석물들도 조선초기의 우수한 조성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공효공 앞의 장명등은 전·후면은 방형(方形)으로 화창(火窓)을 내었으나 동쪽은 원형(圓形), 서쪽은 반월형(半月形)의 화창을 두어 일(日)·월(月)을 상징한 독특한 형태이다.정경부인 묘 앞의 장명등은 세장(細長)하면서 화창은 모두 방형으로 만들어 서로 비교되고 있다.

 

이처럼 특수한 조성수법과 형태를 가진 장명등은 매우 희귀한 예로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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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손 묘역 전경.

 

7) 강희안 행장  (2004. 12. 5. 윤만(문) 제공)

    <출전 : 문화재청홈페이지/문화재찾기>

   <진산세고(晉山世稿)>

○ 보   물 : 제1290호

○ 명   칭 : 진산세고(晉山世稿)

○ 분   류 : 고문서류

○ 수   량 : 4권 1책

○ 지정일 : 1998.12.18.

○ 소재지 : 서울 강서구

○ 시   대 : 조선 성종

○ 소유자 : 박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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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단변(四周單邊), 반엽(半葉) 19.2×13.3cm, 유계(有界), 11행19자(11行19字),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 상하흑구(上下黑口), 판심제(版心題) 「세고(世稿)」. 본문은 완전하나 권두의 서(敍) 제1장이 떨어져 나가고 제2장 왼쪽 윗부분이 파손된 것을 동일 간본(刊本)의 해당 부분을 복사하여 보수하였으며, 표지도 후대의 것으로 개장(改裝)하였다.

 

○ 인(印) : 『야산초인장서(野山樵人藏書)』

○ 지기(識記) : 『주(主) 축산금(竺山金)』

○ 서(序) -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신숙주근서(申叔舟謹序) - 성화계사(成化癸巳)(성종 4년, 1473) 모춘하한(暮春下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최항서(崔恒敍) - 봉원(蓬原) 최항손서(崔恒孫序)

 

본문(本文) 통정선생도순문사강공(通亭先生都巡問使姜公)(회백(淮白))행상(行狀)……천순신묘(天順辛卯)(성종 2년, 1471) 동십월하한(冬十月下澣)손(孫)……숭정대부판돈녕부사겸지경연춘추관사진산군강희맹근장(崇政大夫判敦寧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晉山君姜希孟謹狀) - 진산세고권지일(晉山世稿卷之一)(20장(長)) 통정(通亭) 완역제선생재민강공(玩易齋先生載愍姜公)(석덕(碩德))행장(行狀)……세신묘(歲辛卯)(성종2년, 1471) 동십월하한(冬十月下澣)……숭정대부판돈전부사겸지경연춘추관사진산군강희맹근장(崇政大夫判敦寧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晉山君姜希孟謹狀) 완역재고(玩易齋稿) - 진산세고권지이(晉山世稿卷之二)(21장(長)) 완역재(玩易齋) 인재강공(仁齋姜公)(희안(希顔))행장(行狀)……세임진(歲壬辰)(성종 3년, 1472) 춘정월하한(春正月下澣)……가정대부(嘉靖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복창군김수녕근장(福昌君金壽寧謹狀) 인재시고(仁齋詩藁) - 진산세고권지삼(晉山世稿卷之三)(23장(長)) 인재(仁齋) 양화소록서(養花小錄敍)……용집갑오(龍集甲午)(성종5년, 1474) 맹춘상한사제진산강희맹경순서(孟春上澣舍弟晉山姜希孟景醇敍) - 진산세고권지사(晉山世稿卷之四)(31장(長)) 양화소록(養花小錄) 인재경우찬(仁齋景愚撰)

 

발(跋) - 진산세고이진목발(晉山世稿移晉牧跋)……창룡병 신(蒼龍丙申)(성종 7년, 1476) 중추상한(仲秋上澣) 진산후학(晉山後學) 강희맹경(姜希孟景) 순근발(醇謹跋) - 제인재시고후(題仁齋詩藁後)……성화기원지칠년(成化紀元之七年)(성종 2년, 1471) 칠월기망(七月旣望) 달성서거정강중(達成徐居正剛中) 서우정정정(書于亭亭亭) 성화칠년(成化七年)(성종 2년, 1471) 십월재생명(十月哉生明)(3일)호죽최호세원(弧竹崔灝勢遠)서우(書于) 허백당(虛白堂) - 시세계사(是歲癸巳)(성종 4년, 1473) 동십월(冬十月) 함양군수숭선김종직근식(咸陽郡守嵩善金宗直謹識) - 진산세고발(晉山世稿跋)……병 신(丙申)(성종 7년, 1476) 추칠월기망(秋七月旣望) 달성서거정강중발(達城徐居正剛中跋)

 

 이 책은 조선 초기의 문신인 사숙재 강희맹(私淑齋 姜希孟)(1424∼1483)이 할아버지 통정 강회백(通亭 姜淮伯)(1357∼1402), 아버지 완역재 강석덕(玩易齋 姜碩德)(1395∼1459), 형 인재 강희안(仁齋 姜希顔)(1417∼1464)의 행장(行狀)과 시문(詩文)을 각각 1권으로 하고, 형 강희안이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1권을 합하여 전 4권으로 엮은 강씨(姜氏) 삼세고(三世稿)이다. 권1은 강희맹이 쓴 강회백의 행장(行狀)과 그의 시 42수와 서발(序跋)등, 권2는 강희맹이 쓴 강석덕의 행장과 그의 시 42수, 권3은 김수녕(金壽寧)이 쓴 강희안의 행장과 그의 시 66수, 권4는 강희안의 『양화소록』과 강희맹이 쓴 서발(敍跋)이 있고, 서거정과 최호(崔灝)가 쓴 강희안의 시문집발(詩文集跋)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권수(卷首)에는 신숙주, 최항, 정창손의 서문이, 권말(卷末)에는 김종직, 서거정 등의 발(跋)이 있어 이 책의 편집과 발간의 경로를 알 수가 있다. 발문에 의하면 강희맹이 편집(1471∼1473)한 것을 함양군수(咸陽郡守) 김종직(金宗直)에게 부탁하여 함양에서 3개월에 걸쳐 개판(開版)(1473)한 후, 이듬해 강희맹의 「양화소록서」가 추가로 판각되고 성종 7년(1476) 책판을 진주로 옮기면서 강희맹의 「진산세고이진목발(晉山世稿移晉牧跋)」과 서거정의 「진산세고발(晉山世稿跋)」이 추가된 것으로 나타나므로, 이 책은 성종 7년(1476)에 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산세고』는 전본(傳本)이 더러 있긴 하나, 이 책은 원간본이며, 『진산세고』의 지금까지 알려진 여러 판 중 오래된 것이다. 다른 본에는 「진산세고이진목발(晉山世稿移晉牧跋)」과 「진산세고발(晉山世稿跋)」은 실려있지 않다. 따라서 『진산세고』는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시대의 세고(世稿)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의 것이라는 점과 화훼분야의 전문서적 중 가장 오래된 『양화소록』의 수록, 비록 시문집이기는 하나 조선 초기 당대 대가들의 서발(序跋)이 많을 뿐 아니라, 신숙주·최항·정창손의 서(序)가 있다는 점 등에서 역사적·학술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8)  대사간(大司諫) 김수녕(金壽寧.34세)의 상소문(上疏文) (2005. 7. 18. 태영(군) 제공)

《성종1. 1470年 4月14日(壬戌)》(김수녕 34세)

 “신 등이 모두 재목이 아닌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언책을 맡고 있으면서 항상 지혜를 다하고 충절을 다해 조금이라도 성명(聖明)을 돕기를 생각하나, 학술(學術)이 허소하고 견문(見聞)이 낮아서 한 가지 얻은 어리석음도 다하지 못하고 앉아서 파면되기만 기다린 것이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엎드려 성지(聖旨)를 읽건대, 성심(聖心)이 가뭄을 근심하시어 여섯 가지 일로 자책(自責)하시고, 또 신료(臣僚)로 하여금 실봉(實封)하여 아뢰게 하시었으니, 아! 언책(言責)이 있는 자는 명령을 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묵묵히 있을 수 없는데, 하물며 인도하여 말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신 등이 일찍이 들으니, 착하여 상서(祥瑞)가 있는 것은 순리(順理)이고 착하여도 혹 재앙이 있는 것은 변처(變處)입니다. 생각건대, 성상께서 즉위(卽位)하시던 처음에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시어 은택(恩澤)이 백성에게 미치고 화기(和氣)가 널리 흡족하였으니, 아름다운 상서가 마땅히 날로 이를 것입니다. 바야흐로 농사 때에 당하여 뜨거운 볕이 재앙이 되어 위로 전하의 생각을 번거롭게 하니, 이것은 다만 시운(時運)의 변한 것이지 어찌 부른 것이 있겠습니까? 옛적에 송(宋)나라 경공(景公)의 말 한 마디에 형혹성(熒惑星)이 30리를 물러갔고, 은(殷)나라 탕(湯)임금이 육사(六事)로 자책하여 단비가 문득 내렸으니, 천도(天道)의 감응(感應)의 빠른 것이 속일 수 없습니다. 전하의 한 말씀이 여기에 미치시어 천지 신명(天地神明)이 감림하여 위에 있으시니, 아침이나 저녁에 단비가 패연(沛然)히 내릴 것은 의심이 없습니다.

 

살펴보건대, 지금 버려야 할 폐단은 대강 모두 제거되었으며, 행하여야 할 일은 남김없이 닦아 거행하였으니, 귀중한 것은 오직 실효(實效)만 책하고 문구(文具)에 흐르지 않으며, 시초를 삼가고 마무리를 생각하여 한결같이 하여 잃어버리지 않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무릇 옛날 제왕(帝王)이 처음 정사에는 혁연(赫然)히 능력이 있지 않음이 없으며 보좌하는 신하도 모두 크게 건백(建白)하는 것이 있어 당우(唐虞)·삼대(三代)를 스스로 기약하였다가, 승평(昇平)에 습관이 되고 안일한 데에 빠지게 되면 비록 영걸한 임금이라도 조금 게을러짐이 없지 못하므로, 총애를 받고 간사하게 아첨하는 무리가 틈을 타서 일어나 임금의 욕망하는 것으로 뜻을 맞추니, 바르고 곧은 말이 날로 퇴각하고 군자(君子)가 날로 소원하여져서 국사(國事)가 날로 글러짐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여러 정사를 새로 도모하여 바야흐로 서광이 비치는 것 같으니, 근심하고 부지런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신다는 소문이 멀고 가까운 데에 전파되었습니다. 정히 두렵건대, 한 생각이라도 혹시 해이하여지고 하루라도 혹시 방사(放肆)하여져서 편안히 노는 것이 혹 근심하고 부지런한 것을 바꾸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가 혹 군자를 이간한다면, 이것은 신 등이 감히 먼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는 무일(無逸)을 바탕으로 하여 날로 하루라도 삼가서,

높고 위태한 데에 처하면 겸손하고 낮추는 것을 생각하고,

차고 가득한 데에 임하면 눌러서 겸손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편안하고 즐거운 것을 만나면 준절(콂節)할 것을 생각하고,

안일한 데에 있으면 후환(後患)을 생각하고,

욕심나는 것을 보면 만족할 줄 알 것을 생각하고,

장차 흥선(興繕)을 하려면 그칠 줄을 아는 것을 생각하고,

옹폐(壅蔽)하는 것을 막으면 맞아들이는 것을 생각하고,

참소하고 간사한 것을 미워하면 몸을 바르게 할 것을 생각하고,

작상(爵賞)을 행하면 기쁨으로 인하여 지나치는 것을 생각하고,

형벌(刑罰)을 베풀면 노여움으로 인하여 넘치는 것을 생각하고

하여, 이 열 가지 생각을 겸하여 오래도록 행하고 성(誠)과 신(信)으로써 지키면 백성의 마음이 기뻐하고 천도(天道)가 순하며, 오징(五徵)이 제때에 오고 백곡(百穀)이 이루어져서 요기(妖氣)가 변하여 화기(和氣)가 되고 재앙이 화하여 상서가 되어서 태평의 정치를 곧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에 응함에는 실지로 하고 문구(文具)로 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원컨대 예감(睿鑑)은 마음에 두소서. 가지고 있는 바의 편의(便宜)한 사건(事件)을 조목조목 뒤에 붙이고, 또 재택(財擇)하시기를 바랍니다.

 

 1. 무릇 직(職)을 받아서 만 60일이 되어도 고신(告身)을 준(准)하지 않는 자는 으레 계(階)를 빼앗고 녹(祿)을 징수하여 전후에 회수를 당한 자가 무려 백 수십인이나 됩니다. 대개 직을 받는 사람이 혹은 쌓인 공로로, 혹은 넓은 은전(恩典)으로 된 것이고, 모두 까닭없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제의 제수는 반드시 공로와 은전으로 인한 것이고, 오늘의 회수는 죄고(罪辜)에 관계된 것이 아니니, 두렵건대 선비를 예로 대접하는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질(秩)이 승진하는 것으로 영광을 삼는 것은 사람마다 모두 이 마음이 있으니, 어찌 질병과 사고가 없이 고의로 고신을 준하지 않겠습니까? 간혹 어리석어 법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나 그것은 진실로 논할 것도 없습니다. 먼 지방 동떨어진 지역의 수령(守令)·교수(敎授)들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계급이 승진된 월일도 알지 못하는데, 계급을 빼앗으라는 명령이 이미 내렸으니 어찌 결망(缺望)됨이 없겠습니까? 근자에 성은(聖恩)이 여러 번 자세히 묻기를 더하심을 입어서 도로 준 자도 진실로 많지마는, 회수된 자도 또한 적지 않습니다. 당초에 계급을 빼앗고 녹을 징수하는 뜻은 다만 잘못 주어진 자 때문에 베풀어진 것입니다. 지금 서경(署經)의 법이 이미 회복되었으니, 비록 일찍이 그릇 받은 자가 있더라도 저절로 빙험(憑驗)이 될 것입니다. 청컨대 모든 계급을 빼앗긴 자에게 모두 도로 주도록 명하여 은택을 넓히시면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군사 같은 것은 서경의 한계에 있지 않으므로 응당 고준(考准)을 하여야 하겠으니 계급을 빼앗는 법을 폐지하지 못할 것 같으나, 그러나 새로 고신을 줄 때를 당하여 전번에 고준한 것을 징험하여 고신에 서명한다면, 계급을 빼앗고 녹을 징수하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간사와 호위가 저절로 종식될 것입니다.

 

 1. 사장(沙場)에 수(戍)자리하는 군사는 갑옷을 입고 노숙(露宿)하여 바람과 추위를 견디니, 예전부터 간고(艱苦)하다고 칭합니다. 우리 나라 세 변방으로 말하면 양계(兩界)와 북도(北道)가 더욱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그 수령들이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는 자는 으레 경창(京倉)에서 월지미(月支米)를 주어 그 집을 넉넉하게 하나, 홀로 만호(萬戶)만은 녹(祿)이 처자에게 미치지 못합니다.대개 무릇 구자(口子)라는 것은 모두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에 해당하므로, 군사는 고단하고 힘이 약하여 고생하는 것이 갑절이나 되는데 은례(恩例)는 감함이 있으니, 두렵건대, 녹을 중히 하고 선비를 권하는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 지금 양계 구자의 평탄하고 험하고 한가하고 바쁜 것은 하나둘로 말할 수 없으나, 회령(會寧)의 고령(高嶺)과 강계(江界)의 만포(滿浦) 같은 곳은 저쪽과 경계를 접하여 조석(朝夕)으로 적을 대하는 땅이니 괴로움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헤아린다면 길성(吉城) 이북, 희천(熙川) 이서의 만호(萬戶)는 몸을 편안히 하고 처자를 양육하는 신하에 비교하면 수고롭고 편안한 것이 서로가 동떨어집니다. 청컨대 양계·북계의 만호의 집에 월지미(月支米)를 주어 수자리하는 군사를 권하면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또 교수(敎授)는 외방에서 가르침을 나누어 풍화(風化)를 맡았으니, 비록 그 사람이 모두 어질지는 못하지만 그 책임은 또한 적게 여길 수 없습니다. 세상에 패관(稗官) 소리(小吏)가 질(秩)이 차면 응보(應報)를 기다려 문득 영전이 되는데, 교수가 된 자는 과목 출신(科目出身)으로서 읍상(邑庠)에 국한되어 8, 9년이 되어도 조용(調用)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또한 드나들게 하여 수고를 균일하게 하는 뜻이 아닙니다. 청컨대 교수 중에 맡길 만한 사람은 예(例)에 따라 진용(進用)하고, 교수·훈도(訓導) 중에 어로 불변(魚魯不辨)하여 스승이 될 수 없는 자는 모두 다 파하여 보내게 하소서. 또 이제부터 과목 출신이 아닌 자는 교수를 제수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양계를 제외하고는 모름지기 생원(生員)·진사(進士)를 써서 훈도를 제수하는 것을 허락하여 상서(庠序)의 가르침을 삼가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세록(世祿)의 집에서 사치하고 화려한 것으로 교화(敎化)를 망치는 것은 옛부터 탄식하는 것인데, 높은 상투가 한 자나 되고 넓은 소매가 한 필의 비단이 되는 것은 대개 그 숭상하는 것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풍속에 혼인하는 집이 다투어 재물로 서로 높이어서 사치한 것이 절도가 없어, 부유하고 넉넉한 자는 오히려 저 사람이 나보다 나을까 두려워하여 가산을 기울여 스스로진력하고, 가난한 자는 내가 감히 아무개의 가문을 당하지 못한다 하여 오직 가난한 것만 부끄럽게 여기고 딸의 장성하는 것은 근심하지 않아서 이따금 혼인의 시기를 놓치는 탄식이 있으니, 대개 사치의 풍속이 이미 맑은 교화를 더럽히고 혼인의 시기를 놓치는 것이 족히 화기(和氣)를 상합니다. 혼인하는 집에 복식(服飾)·기용(器用)이 제도를 넘는 것을 금하는 것과 횃불의 수효까지 이미 나타낸 법령이 있으니, 청컨대 유사(攸司)에 신칙(申飭)하여 엄하게 금단(禁斷)을 가하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또 《주례(周禮)》의 황정(荒政)을 상고하면 생례(챞禮)이니 다혼(多昏)이니 하는 말이 있는데, 주(註)에 이르기를, ‘생례(챞禮)라는 것은 길례(吉禮)를 감쇄(減殺)한다는 뜻이요, 다혼(多昏)이라는 것은 예를 갖추지 않고 혼취(昏娶)하는 자가 많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한재와 흉년이 너무 심하니, 청컨대 처자(處子)가 나이 장성하여도 빈궁하여 성례를 하지 못하는 자는 예전 법에 준하여 관가에서 장구(粧具)를 주어서 은택을 넓히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무릇 그만둘 수 있는 역사(役事)와 급하지 않은 일은 평상시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정지하여 파하여야 하는데, 때가 다하고 일이 거창한 것을 옛사람은 더욱 삼가하였습니다. 지금 간경 도감(刊經都監)은 본래 임시로 설치한 아문(衙門)이어서 일이 끝나면 곧 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일이 이미 완성되면 뒷일이 이어 시작되어 날마다 다시 하루, 해마다 다시 한해 하여 파할 때가없으니, 소비하는 돈과 양식이 무릇 얼마이겠으며, 역사하는 인부와 장인(匠人)이 무릇 얼마이겠습니까? 비용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고 역사는 반드시 사람이 하여야 하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말하지 못하는 까닭은 불자(佛者)의 무리가 하나는 선왕(先王)을 위하여 명복을 빈다 하고 하나는 현재를 위하여 복을 빈다 하여, 심지어는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고 때가 화평하고 해가 풍년 드는 것이 이것으로 인하지 않음이 없다 하니, 그러므로 비록 그 탄망(誕妄)함을 아는 자도 감히 탄망하다 말하지 못하고 그 폐해를 아는 자도 감히 그 폐해를 말하지 못합니다. 요는 성상께서 통찰(洞察)하시고 강단(剛斷)하시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신 등이 전 상소에 불씨(佛氏)가 무익(無益)하다는 말을 대략 진달하였으니, 청컨대 도감(都監)을 파하소서. 다시 청컨대 오늘날의 일로 밝히겠습니다.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어 능히 세상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복되게 한다면, 이번 가뭄에 성심(聖心)이 노심 초사(勞心焦思)하시고 신민(臣民)이 부르짖기를, ‘비, 비’ 하여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 부처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의 일이 이와 같으니, 어찌 미래의 복의 응보를 알겠습니까? 부처의 탄망(誕妄)한 것이 드러나서 심히 명백하니, 청컨대 급히 간경(刊經)의 역사를 파하여 국가의 용도를 펴게 하소서. 또 무릇 사사(寺社)를 새로 경영하는 것은 일체 금단하여 민간으로 하여금 낭비를 하지 말게 하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1. 환과고독(鰥寡孤獨) 네 가지는 왕정(王政)에서 마땅히 먼저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기산(岐山)을 다스릴 때에 소민(小民)은 품에서 보호하고 환과(鰥寡)는 혜선(惠鮮)하였습니다. 혜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환과의 사람이 머리를 떨구고 기운을 잃었으니, 반드시 주휼(켵恤)해 주어서 살 뜻이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말이 있기를,‘부 한 사람은 괜찮지마는 이 경독(?獨)한 사람이 불쌍하다.’ 하였습니다. 경독한 사람은 공가(公家)에서 주급(켵給)하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데, 만일 진휼(賑恤)하여 대여하지 않으면 돌아갈 곳이 없으니, 어찌 더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조정의 진제장(賑濟場)의 법이 곧 예전 혜선(惠鮮)의 남은 뜻인데 지난날에 폐지하고 베풀지 않았으니, 어찌 사람마다 진휼하자면 다 진휼할 수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봄·여름 사이에 묵은 곡식이 이미 다하고 모맥(牟麥)이 익지 않으면 중인(中人)의 집에서도 또한 주림을 괴롭게 여기니, 경독(?獨)한 무리는 더 심함이 있습니다. 지극히 곤란하여도 고할 데가 없어 부엌은 냉하고 창자는 타서 날마다 관가의 진휼을 바라는 자가 얼마인데, 의창(義倉)에서 진대(賑貸)하는 것도 또한 정한 수량이 있기 때문에 수령(守令)이 창고를 발(發)하지 못하고 굶주려 죽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혹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말하기를, ‘병으로 죽은 것이고 주린 것이 아니다.’ 하니, 이것은 작은 사고가 아닙니다. 지금 봄 가뭄이 더욱 심하여 모맥이 잘되지 못하였으니, 가을 곡식이 비록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여름 동안에 백성이 반드시 식량이 곤란할 것인데, 하물며 전년에 실농(失農)한 고을은 백성이 현재 양식이 없는데 지금 다시 가뭄에 상하니, 비록 모맥이 조금 성숙한다 하더라도 종전에 이삭을 주워서 생활하던 무리가 유리(流離)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당요씨(唐堯氏)가 한 백성이 주린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주리게 만든 것이다.’ 하였고, 후주(後周) 세종(世宗)이 회남(淮南)의 흉년을 만나 쌀을 꾸어 주라고 명하였는데 혹자는 백성이 가난하여 갚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백성은 내 자식이다. 어찌 백성이 거꾸로 매달렸는데, 아비가 풀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반드시 갚기를 택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청컨대 미리 구황(救荒)의 정책을 강구하여 여러 도 여러 고을에 나가서 가장 실농하여 가뭄에 상한 자를 택하여 빈핍(貧乏)한 것을 구제하여 주고 반드시 갚는 것을 요구하지 말아서 어진 정사를 넓히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9) 추회 사수 증 김문학수녕 구정(秋懷 四首 贈 金文學 壽寧 求正)  (2005. 7. 19. 태영(군) 제공)

이승소(李承召)

바람 따라 오동잎 한 조각이 나르매 / 桐葉隨風一片飛

늙은이 새벽에 일어나 흩옷을 걱정한다 / 老夫晨起㤼單衣

일천 집에 밤이 고요하매 다듬이 소리 급하고 / 千門夜靜砧聲急

만리에 구름 깊으매 기러기 그림자 희미하다. / 萬里雲深雁影微

뜬세상의 헛된 이름 말할 것 있나 / 浮世虛名何足道

잠간 동안 놀며 즐기기를 어기지 말라 / 暫時行樂莫相違

국화는 이미 제철[重陽節]에 가까웠나니 / 黃花已近重陽節

남 따라 높은 산에 올라 잔뜩 취해 돌아오리 / 準擬登高爛醉歸

 

黃鷄와 白日은 세월을 재촉하는데 / 黃雞白日歲崢嶸

서당문 닫고 혼자 앉아 있으면 만고의 情일세 / 獨掩書堂萬古情

처마 끝의 달빛은 한없이 좋고 / 簷外月華無限好

풀 속의 벌레 소리는 원망[不平]스레 들려온다 / 草根虫響不平鳴

흥을 보내려 오동잎에 시를 쓰고 / 詩因遣興題桐葉

시름을 씻으려고 쇠뿔잔에 술을 딴다. / 酒爲澆愁酌兕觥

자색 게는 한참 살찌고 누른 벼는 익었으리 / 紫蟹正肥黃稻熟

고향을 돌아가는 꿈이 몇 번이나 놀랐는가 / 故山歸夢幾番驚

 

靑燈은 어둑하고 비소리는 쓸쓸한데 / 靑燈黯黯雨蕭蕭

사방 벽에 쌓인 책은 적막과 짝하였다. / 四壁圖書伴寂寥

누수[漏] 북은 둥둥둥 別院에 전하는데 / 漏鼓鼕鼕傳別院

거센 바람은 딸각딸각 차가운 가지를 흔든다 / 商飆浙浙撼寒條

진실로 마구간에 엎드려 천리를 생각하는 말이 되었고 / 眞成伏櫪思千里

감히 바람을 치고 구소(九霄)에 오르는 붕새[鵬]를 흉내내리 / 敢擬摶風上九霄

무룹을 안고 길게 노래하매 노래가 격렬한 것은 / 抱膝長歌歌激烈

일생의 호걸스런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음이라 / 一生豪氣未全消

 

흥진에 발 빠진 것 스무해가 되었으니 / 矢脚紅塵二十霜

고향 소나무 밑 오솔길이 이끼로 거치리라 / 故園松徑想苔荒

공명은 수가 있는 것 힘으로는 어렵고 / 功名有數難容力

근심과 걱정은 번갈아 드는 것 늘 고통만이 있는 것 아니다 / 憂樂相尋苦不常

허리 아래 황금은 季子에게*  많은 것이 / 腰下黃金饒季子

머리 아래 힌 털 풍당(馮唐*)이 느껴워라 / 頭邊白髮感馮唐

임금 은혜 못갚고 몸먼저 늙었으니 / 主恩未報身先老

어느 때나 색동옷 입고 北堂에 모셔볼까 / 綵服何時上北堂

 

* 백거이(白居易)의 詩에 “황계는 새벽을 재촉하고 백일은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재촉한다” 하였다.

* 좋은 말은 하루 천리를 달린다고 하는데 이미 늙어서 마굿간에 엎드려 있어도 마음만은 천리가는 데에 있다고 전한다.

* 옛날 전국시대의 소진(蘇秦)이란 사람인데 그는 한때에 여섯나라 정승이 되어서 여섯 나라에서 봉급을 받아  황금이 많았다고 하는데 당시 모두 아첨꾼이 많이  몰려 門前成市 했다 한다.

* 한나라 문제 때 사람으로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下級官吏로 늙었는데 급기야 문제에게 발견되었을 이미 늙어서 소용없어졌다 한다

 

-삼탄- 이승소

삼탄 이승소 선생(1422~1484)은 조선초기 관인문학을 주도한 학자로 서거정, 강희맹, 김수온 등과 함께 조선초기 4대문장가로 꼽힌다. 집현전 출신으로 벼슬은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 예조판사 등을 거쳐 숭정대부(종1품)의정부 좌참찬에 오르고  지중추부사이던 성종14년 62세로 별세했다. 저서로는 국조의례의, 명황계감 번역 등이 있고 여주 영릉의 "세종장헌대왕천릉지석문"을 썼으며 유고집인 삼탄집(유형문화재137호)에는 무려 500여편의 한시와 문장이 실려있다.    출전: 삼탄집

 

10) 유명조선국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숭록대부밀산군시공효 박공신도비명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崇祿大夫密山君諡恭孝朴公神道碑銘) 병서

 

김수녕(金壽寧)  撰

밀산군(密山君) 박공(朴公) 중손(仲孫) 자(字) 경윤(慶胤)이 세상을 떠났다. 장사를 지내려 함에, 그 아들들이 상락(上洛) 김수녕(金壽寧)에게 신도비명을 지어달라 청하기를, “그대는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을 왕래하였으니 선군(先君)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네. 청컨대 선군의 높은 덕행과 큰 공로를 드러내어, 민멸되지 않고 영원히 전해질 수 있도록 해 주시게.” 하였다. 이때 수녕(壽寧)도 모친상을 치르는 중인지라 서로 붙잡고 통곡을 하였다. 그리고 신도비명 짓는 일을 사양하였는데, 들어주지 아니했다. 살피건대, 박씨(朴氏)는 신라(新羅)에서 시작되었다. 신인(神人)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라의 시조가 되었으니, 사씨(史氏)가 역사에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그 후손들이 삼한(三韓)에 퍼져 살며 대대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중에 밀양(密陽)에 사는 자들이 가장 드러나 망족(望族)이 되었다. 고려(高麗) 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 벼슬을 지낸 사경(思敬)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신데, 어질고 후덕한 군자였다. 판서(判書)께서 침(忱)을 낳았으니, 국조(國朝)에 들어와 우리 태조(太祖)를 섬겨 공로가 있었으므로 이름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에 실리고 벼슬은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다. 전서(典書)께서 강생(剛生)을 낳았다. 유아(儒雅)한 것으로 명망이 드러났고,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어 선정(善政)이 있었으며,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추증받았다. 찬성(贊成)께서 공(公)의 아버지인 절문(切問)이라는 분을 낳았으니, 행실이 돈독하며 성품이 문아(文雅)하였고, 세상을 떠날 때의 벼슬이 교서 정자(校書正字)였다. 공의 공로 덕분에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이라는 공신호를 하사받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처음에 공의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왕씨(王氏)가 임신하였을 때에 꿈에 집채만한 큰 소를 보고는, 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찬성공께 말하니, 찬성공이 말하기를, “집안이 창성(昌盛)하려면 징조가 반드시 먼저 보이는 것이니, 아마도 아이가 있게 되어 우리 집안을 중흥시킬 것 같습니다.” 하였다. 찬성공은 부인에게 아이를 잘 거두어 양육할 것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뒤 7개월 만에 공이 태어났다. 공은 준수하고 총명하였고 어릴 적에도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조금 자라서는 스스로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을 줄 알았다.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했다. 다시 어진 스승과 벗들을 따라 배우며 학문을 닦고 문장을 수련하여, 선덕(宣德) 을묘년(1435, 세종17)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집현박사(集賢博士)에 선보(選補)되었다가 승진하여 부수찬 지제교(副修撰知製敎)가 되었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전보되어 춘추관(春秋館)의 직임을 겸하게 되니,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그 즈음에 성관(星官)들이 학문이 부족하고 기술이 없으므로 세종(世宗)께서 근심하여 특별히 공의 벼슬을 굽혀서 서운판관(書雲判官)으로 삼았다. 공이 정미(精微)하고 오묘(奧妙)한 이치를 잘 궁구하여 조금도 차실(差失)이 없으니, 산술(算術)에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공을 앞서는 자가 없었다.  

 

누차 전보되어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고 지제교는 그대로 맡았다. 첨지통례(僉知通禮)로 동첨사(同詹事)를 겸임하였다. 세종께서 말년에 병환으로 정사(政事)를 잘 돌볼 수 없게 되자, 군기(軍機) 이외의 일은 모두 세자(世子)에게 보고하여 결정하도록 하교하였다. 사무(事務)의 출납(出納)이 첨사(詹事)를 경유하였는데, 공이 그 직책을 잘 수행하니 세상의 여론이 더욱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 의정부에 들어가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지냈다. 재차 사헌부에 들어가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세 번째 들어가서는 집의(執義)가 되었다. 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오직 기풍을 지키고 격양시키는 일에 힘을 다하였으므로 조정의 기강이 엄숙해졌다. 낭관이나 사인(舍人)으로 있을 때에는 단정하고 고아하여, 임금을 보필할 대신의 풍도가 잠재되어 있었다. 재능있는 관원으로 추천되어 병조(兵曹)의 겸지사(兼知事)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발탁되어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누차 승진하여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년, 단종1년) 봄에 임금이 친히 과거를 보여 선비를 뽑았는데, 그때 공이 대독관(對讀官)을 하였다. 겨울에 금상(今上)께서 내란(內亂)을 평정할 때에 공이 요직에 있으면서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좌우에서 도왔다. 내란을 평정하는 일이 잘 마무리되었는데, 공의 공로가 매우 컸다. 드디어 병조참판(兵曹參判)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제수하였다. 시대의 어려운 일을 공의 도움으로 진정시켰기 때문이다. 공로를 기록하여,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이라는 공신호(功臣號)를 내리고 응천군(凝川君)을 봉하였으며, 그 얼굴을 그려서 맹부(盟府)에 보관하였다. 병조에서 옮겨져서 한성부 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에 들어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공조, 이조, 형조, 예조 등 4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전의 봉호를 고치어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가는 곳마다 큰 강령(綱領)을 잘 유지하고 까다롭고 자잘한 것에 힘쓰지 아니하였으며, 인재를 천거하거나 옥사(獄事)를 처리할 때에는 공평하게 하고 영합하지 아니하였으며, 국빈(國賓)을 접대하거나 나라의 제사를 담당했을 때에는 일을 잘 처리해서 찬란히 참으로 볼 만하였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하였다.

 

천순(天順) 병자년(1456년,세조2년) 봄에 과거(科擧)의 시관(試官)을 맡았다. 승진하여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얼마 안 되어 좌참찬(左參贊)에 승진하였다. 기묘년(1459년,세조5년) 봄에 또 과거의 시관이 되었다. 전후를 통하여 무릇 세 번 시관이 되어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공이 뽑은 선비 중에는 이름이 알려진 명사(名士)가 많았다. 가을(1459년 9월)에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상사를 당하였다. 큰 슬픔으로 초상을 치르느라 몸이 야위어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지고 품계가 올라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성화(成化) 2년(1466년, 세조12년) 여름 5월 병 신일(26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임금이 매우 상심하여, 정무(政務)를 정지하고, 관원에게 명하여 상가(喪家)에 가서 조문하게 하였으며, 부의(賻儀)를 갖추어 사제(賜祭)하였고, 공효(恭孝)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군(君)은 성실한 선인(善人)으로 온후하고 화락하였다. 매양 선군(先君)이 계실 때에 태어나지 못했음에 생각이 미치면, 그 슬픔으로,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닌 것같았다. 독실한 효성으로 모부인(母夫人)을 섬기면서도 오히려 그 뜻을 어기게 될까 염려하였으며, 형을 어버이 섬기듯이 섬겼다. 친인척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온 힘을 다하여 도와주었다. 산업(産業)은 그저 먹고살 만한 정도까지만 늘렸고, 별도로 넉넉히 여분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집안에 혼자 있을 때이거나 교유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이거나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을 지녀서, 몹시 좋아하며 구차하게 영합하지도 않았고 또한 남달리 특이하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정무(政務)에 능통하여 일을 대해서 여유가 있었으나, 일찍이 조금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공훈과 명성이 높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하게 낮추었다. 누차 권병(權柄)을 맡았으나 문에는 잡객(雜客)의 출입이 없었다. 일찍이 여묘살이를 할 때에 글을 지어 아들들을 훈계하였는데, 대략 그 내용은, 고금의 사치와 검소에 따른 득실의 자취를 논한 것이었다. 계주명(戒酒銘)을 지어 자리 옆에 걸어 놓아 자신을 경계하고, 인하여 아들들을 경계시켰는데, 그 말이 간략하면서도 뜻이 심원하여 또한 세상의 훈계가 될 만하다고 한다. 그해 7월 임진일에 교하현(交河縣)의 북쪽 탄포(炭浦) 오고미리(烏告美里)에 예장(禮葬)하였다. 부인 남평현 문씨(南平縣文氏)의 무덤과 같은 언덕인데 광혈(壙穴)은 다르다.

 

부인은 바로 공조정랑(工曹正郞) 문승조(文承祚)의 따님이니, 맑고 아름다우며 어진 행실이 있었다. 덕 높은 군자의 배필이 되어 어진 아들을 양육하며, 집안을 화목하게 하였는데,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맏이는 전(栴)이니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이며, 다음은 미(楣)이니 한성서윤(漢城庶尹)이며, 다음은 건(楗)이니 승정원 우승지이다. 둘째와 막내가 모두 문학(文學)의 재능이 있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선대의 사업을 잘 이어받았다. 막내는 바로 수녕(壽寧)과 같은 해에 급제한 자이다. 딸은, 맏이는 또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둘째는 전설사수(典設司守) 유오(柳塢)에게 시집갔다. 부평도호부사는 첨지중추(僉知中樞) 윤삼산(尹三山)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름이 인열(仁烈)인데 음직(蔭職)으로 통사랑(通仕郞)에 제수되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서윤(庶尹)은 지돈녕(知敦寧) 강석덕(姜碩德)의 딸을 아내로 맞아 5남 1녀를 두었고 승지(承旨)는 서윤(庶尹) 최윤(崔昀)의 딸을 아내로 맞아 3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전설사수 유오(柳塢)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직(司直) 윤린(尹磷)에게 시집갔으니 또한 명문 집안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 박씨의 선조는 / 繄朴之先

처음에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 肇降自天

그 전승의 기원이 멀고 멀도다. / 有遠其傳

잇달아 훌륭한 인물 나와서 / 繩繩衣冠

삼한에 명문가를 이루었는데 / 望于三韓

그 중 밀양이 으뜸이었지. / 莫盛密山

판도공은 어질고 후덕하여 / 版圖仁厚

옛 사람의 짝이 될 만하였고 / 古人與偶

몸소 애쓴 보람으로 후손이 복을 받았네. / 劬躬燾後

찬성공에 이르러서는 / 爰曁贊成

베푼 일 많았으나 보응이 가볍더니 / 施重報輕

바로 공에게 이르러 형통하였네. / 政待公亨

공은 탄생이 기이하였네. / 公生也奇

소 꿈이 좋은 조짐이라고 / 夢牛維禨

찬성공이 점을 쳤었지. / 贊成占之

공이 집안을 이어받아 / 公世其家

덕과 문채를 떨치어 / 揭德振華

이름을 과방(科榜)에 드러냈네. / 名挂賢科

어버이 섬김에 효도하고 공손하며 / 事親孝恭

넓은 아량으로 사람들을 대하였고 / 待人則容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받들었네. / 奉上則忠

얼신이 지난번에 교만하여 / 孼臣昔驕

조정에서 소란 일으켜 어지럽히니 / 毒亂于朝

임금이 그 요망함을 제거하였지. / 王殄厥妖

난리를 평정하는 공적을 이루실 때에 / 丕顯神功

공이 곁에서 크게 도왔으므로 / 贊贊惟公

큰 종에다 공훈을 새기었다네. / 勒勛景鍾

공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으나 / 公名隆隆

공은 더 겸손히 몸을 낮추어 / 公愈匑匑

이룬 공로를 잘 보전하였네. / 以克保庸

마음은 사심없이 맑고 맑아서 / 游心冲泊

사치를 경계하고 검약 즐겼고 / 徵汰憙約

자손에게 약석 될 훈계 남겼네. / 遺誡藥石

선하다고 꼭 창성하는 건 아닌가 보다. / 善不必昌

중년의 나이로 세상 떴으니 / 中身云亡

아, 저 푸른 하늘만 바라보노라. / 粤瞻蒼蒼

훌륭한 자손들 많고 많아 / 靄靄蘭蓀

공의 가문에 가득하니 / 森立公門

공은 장생불사 하신 거라네. / 公乎長存

이에 돌에다 명을 새겨 / 爰刻銘章

삼가 아름다운 광채 드리우노니 / 式垂休光

나라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 與國無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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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효공 박중손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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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지정번호 : 보물 제1323호

소 재 지 : 파주시 탄현면 오금리 산19

소 유 자 : 밀양박씨 규정공파 대종회

제작년대 : 조선 전기

재 료 : 화강암

 

공효공(恭孝公) 박중손(朴仲孫·1412~1466)은 세종~세조 년간의 문신으로 여러 요직을 지냈으며 특히 천문(天文)을 관찰함에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임. 박중손과 같은 언덕에 조성된 봉분은 공조정랑을 지낸 문승조(文承祚)의 딸인 정경부인(貞인敬夫人)남평 문씨의 묘이다.

 

묘소의 전면은 3단으로 조성하고 각 단은 1단의 장대석을 쌓았는데 각 묘앞에는 상단의 장대석축에 걸쳐 장방형의 간단한 상석(床石)을 두었고 그 앞에 각각 장명등을 세웠다. 묘역 좌우에는 각각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으며 우측 무인석 아래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공효공 묘역의 장명등은 신도비 건립년대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기 장명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매의 부재 중 하부재는 대좌(臺座)와 화사(火舍)로 이루어져 있고 상부재는 옥개석으로 되어 있다. 등부(燈趺)인 대좌는 하대·중대·상대 등 세부분으로 구성되었고 그 위에 화사부분이 조식되었으며 옥개석은 옥개(屋蓋)와 연주대(蓮珠帶) 및 연봉형(蓮峯形)의 보주(寶珠)로 구성 되었다. 정경부인 묘 앞의 장명등은 공효공 보다 먼저 사망하였으므로 약간의 시기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노출되어 있는 두 장명등의 높이는 서로 비슷하나 공효공 묘 앞의 장명등이 둔중해 보이는데 비해 정경부인 묘 앞 장명등은 세장하며 화창은 서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2기의 장명등 모두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장명등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으며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 되고 있다. 또한 묘역내의 묘제 및 기타 석물들도 조선 초기의 우수한 조성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공효공 앞의 장명등은전·후면은 형방(方形)으로 화창(火窓)을 내었으나 동쪽은 원형(圓形), 서쪽은 반월형(半月形)의 화창을 두어 일(日을)·월(月하)을 상징한 독특한 형태이다.정경부인 묘 앞의 장명등은 세장(細長)하면서 화창은 모두 방형으로 만들어 서로 비교되고 있다.

이처럼 특수한 조성수법과 형태를 가진 장명등은 매우 희귀한 예로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11) 김이수(金壽寧의 字)가 내가 과장한다고 꾸짖기에 수미음(首尾吟)을 지어 보내서 한번 웃기를 바람.

 (205. 8. 1. 태영(군) 제공)

출전 :  사숙재집 (강희맹의 문집)

私淑齋集卷之二

七言律詩

金頤叟誚余誇張。作首尾吟奉呈希哂。 四首

김이수(金壽寧의 字)가 내가 과장한다고 꾸짖기에 수미음(首尾吟)을 지어 보내서 한번 웃기를 바람.

 

君無嗤我太誇張。兒到如余亦是良。獻策早膺金榜首。

承恩每侍玉階傍。功名熱處還藏鍔。詩酒濃時欲擅場。

四十五年無事客。君無嗤我太誇張。

그대는 내가 너무 과장한다고 비웃지 말게나

어린애가 나만큼 되기도 역시 대견한 일이지

헌책(獻策)할때 일찍이 금방(金榜)의 으뜸에 뽑혔고

은혜를 입음에는 매양 옥계(玉階)의 곁에서 모셨지

공명(功名)이 높은 곳에선 되려 칼날을 감추었고

시주(詩酒) 무르녹을 때에는 독판을 치려 하였지

마흔 다섯 해를 아무 탈없이 지내온 사람이니

그대는 나를 너무 과장한다고 비웃지 말게나.

 

君無嗤我太誇張。少不尖新老不僵。附勢掃門無帚柄。

與時干祿有錐囊。人言癡癖兼儒拙。物論詩魔帶酒狂。

免使毀譽輪至此。君無嗤我太誇張。

그대는 내가 너무 과장한다고 비웃지 말게나

젊어서 모나지 않았기에 늙어서도 보전한다네

권세에 아부하여 문 앞을 쓸려도 비가 없고

시태(時態)에 따라 벼슬하려고 해도 주머니 속 송곳 같다네

남들은 어리석은데다 유약하다 하고

여론은 시마(詩魔)에 주광(酒狂)겸했다 하네.

훼예(毁譽)가 여기에 이르지 못하도록 할망정

그대는 나를 너무 과장한다고 비웃지 말게나.

 

君無嗤我太誇張。好箇菁川一老姜。慣踏名途迷偪側。

飽諳世味昧炎涼。軒裳簪笏從朝着。芋栗田園望故鄕。

仕便列卿休便隱。君無嗤我太誇張。

그대는 나를 너무 과장한다고 비웃지 말게나.

사람 좋은 청천(菁川)의 늙은 강가(姜哥)라오

명도(名途) 밟고는 있으나 사람 사귐엔 익숙치 못하고

세상맛 익히 맛보았으나 염량(炎涼)의 세태엔 어둡다네

헌상(軒裳) 잠홀(簪笏)로 조정 반열을 따르나

우율(芋栗) 전원(田園)에 고향을 생각하지

벼슬하면 열경(列卿)이요 그만두면 은사이니

그대는 나를 너무 과장한다고 비웃지 말게나

 

君無嗤我太誇張。不是閒閑豈是忙。細挹詩書迎稚子。

謹將經術謁明王。陶泓暫試玄霜笏。金鴨輕燒小篆香。

寫罷黃庭無箇事。君無嗤我太誇張。

그대는 나를 너무 과장한다고 비웃지 말게나

한가한것도 아니지만 바쁠 것 무엇 있겠나

시서(詩書) 손에 쥔 채 어린 자식들 맞이하고

삼가 경술(經術)로 현명한 임금을 섬긴다네

도홍(陶泓)은 잠시 현상(玄霜)의 홀(笏) 시험했고

금압(金鴨)에는 가벼이 소전(小篆)의 향기 피어오르지

황정경(黃庭經) 다 베끼고 나면 일도 없으니

그대는 나를 너무 자랑한다고 비웃지 말게나.

 

금방(金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건 방(榜)

금압(金鴨): 쇠붙이를 가지고 오리 모양으로 만든 향로(香爐). 향불 연기는 꼬불꼬불하여 마치 전자(篆字)와 같아 전연(篆煙)이라 함.

황정경(黃庭經): 황제(黃帝)가 지었다는 의서(醫書)의 이름.

 

 12) 김이수(金壽寧의 字)에 대한 悼詩 -점필재집

(2005. 8. 2. 태영(군) 제공)

남원군이 옥당 수사록을 보내주었는데 이 천한 사람의 성명도 실려 있었다. 또 그 서문은 바로 이수가 지은 것인데 이수는 이미 별세하였는지라, 기쁜 나머지 도리어 슬픈 생각이 들어 절구 두 수를 읊어서 기록하여 국화 및 언승에게 보이다[南原君送與玉堂修史錄賤姓名亦載焉又其序 乃頤叟所作頤叟已矣欣悚之餘翻成悲惋吟得二絶錄似國華及彦升]

 

선조의 보전이 완성됐다는 말만 들었더니 / 只說先朝寶典成

어찌 선록에 내 이름이 들었을 줄 알았으랴 / 豈知仙籙忝吾名

수북이 쌓인 부서를 때때로 열람하노니 / 簿書叢裏時時閱

남들이 대모당 주이라고 조롱하거나 말거나 / 遮莫人譏著帽餳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로 명성이 자자하여 / 妙齡藉藉桂林魁

동국 사람들이 팔두재주로 추앙을 했는데 / 鰈海人推八斗才

천상의 백옥루기 주를 응당 끝냈으리니 / 天上玉樓應記罷

바람 수레 타고서 어찌 세간으로 안 돌아오려나 / 飇輪寧爲世間回

 

[주1]대모당 : 모자를 쓴 엿이란 뜻으로, 즉 의관(衣冠)을 갖춘 사람의 형상이기는 하나, 엿처럼 유연하여 매사에 무능함을 비유한 말이다.

[주2]팔두재 : 시문(詩文)의 재주가 대단히 풍부함을 이름. 사령운(謝靈運)이 말하기를 “천하 사람의 재주가 모두 일석(一石)인데, 조식(曹植)이 혼자 팔두를 얻었고, 내가 일두(一斗)를 얻었으며,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다른 사람들이 일두의 재주를 함께 나누어 썼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3]백옥루기 : 당(唐) 나라 때의 시인 이하(李賀)가 죽을 적에 천사(天使)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천제(天帝)께서 백옥루를 지어놓고 그대를 불러다가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고 한 데서 온 말로, 문인(文人)의 죽음을 뜻한다.

 

                                                           출전: 점필재집(김종직의 문집)

 

 13) 보한재전집에 실린 <김수녕> 기록 내용 (2005. 8. 20. 윤만(문) 제공)

 1) 김 응교(應敎) 수녕(壽寧)과 이 판관(判官) 극균(克均)이 자준(子濬)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길도(咸吉道)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

-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 -

 

兩君文武擅才華(양군문무천재화) 두 사람 뛰어난 문재와 무예로

入幕籌邊世所多(입막주변세소다) 막부에 들어가 계책세우니 칭송이 자자

一取功名猶拾芥(일취공명유십개) 공명 세우기 티 검불 줍듯 할 것이라.

毛錐大劍定如何(모추대검정여하) 붓대와 큰 칼 어느 것으로 정하겠소

《출전 : 보한재전서 상 pp237-238/1984》

☞ 자준 :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字(자).

 

 14) 합천 동헌에 있는 서 참판 거정과 김 승지 수녕의 운을 차하다   (2005. 8. 22. 태영(군) 제공)

[次陜川東軒 徐參判居正 金承旨壽寧 韻] 2수

 

지루한 세월을 말 위에서 보내노라니 / 荏苒光陰馬上消

장안에 머리 돌리매 더욱 멀기만 해라 / 長安回首轉遙遙

눈에 가득한 봄바람은 이별을 슬프게 하고 / 春風滿眼堪傷別

창중에 뻗친 살기는 문득 높아짐을 알겠네 / 劍氣橫空陡覺高

이 문지르는 청담주D-001은 달뜬 밤이 좋겠거니와 / 捫蝨淸談宜月夕

게 다리 쥔 미친 흥주D-002은 꽃핀 아침을 저버렸네 / 持螯狂興負花朝

징심루 아래 흐르는 한계의 물에 / 澄心樓下寒溪水

술취해 난간 치니 귀밑머리 비치는구려 / 醉拍欄干燭鬢毛

 

남쪽에 온 정황은 몹시도 느슨하여라 / 南來情況苦騰騰

풍광을 관령하는 것도 잠시 뿐이로세 / 管領風光且暫能

한가한 놀이를 위해 항상 신에 밀을 바르고주D-003/ 秪爲優游常蠟屐

말라빠진 환상 혐의해 문득 중을 멀리하네 / 還嫌枯幻便疎僧

취중의 별천지는 반드시 끝까지 찾는데 / 醉鄕日月須窮討

속세의 공명은 매양 만나기 어려워라 / 塵世功名每錯譍

쓸모없는 이 사람을 그 누가 채용해주랴 / 跌宕散人誰省錄

등한히 동으로 갔다 다시 서로 오르네 / 等閑東度復宬

 

[주D-001]이 문지르는 청담 : 진(晉) 나라 때 청담으로 이름이 높던 왕맹(王猛)이 환온(桓溫)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방약무인한 태도로 옷속의 이를 문지르면서 당세(當世)의 일을 담론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게 다리 쥔 미친 흥 : 진(晉) 나라 때 필탁(畢卓)이 일찍이 말하기를 “술 수백 섬을 배에 가득 싣고 사시(四時)의 감미(甘味)를 비치하고서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 왼손에는 게의 앞다리를 쥐고 주선(酒船) 안에 떠서 노닌다면 일생을 마치기에 만족하겠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한가한 놀이를……밀을 바르고 : 진(晉) 나라 때 완부(阮孚)가 나막신을 좋아하여 항상 신에다 밀을 발라 광택(光澤)을 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四十九》

출전: 점필재집(김종직의 문집)

 

 15) 인재 강공 행장(仁齋姜公行狀) 소개 (2005. 8. 24. 태영(군) 제공)

공은 휘가 희안(希顔)이고 자는 경우(景愚)이며 호는 인재(仁齋)이니 대민공(戴愍公)의 큰 아들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부터 지식이 뛰어나  나이 겨우 두 서너 살에 담장 벽에 손을 휘둘러 물을 뿌리면 글씨가 되고 그림이 되는데 모두 법도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장하자 스승을 따라 학문하여 문장으로 이름이 크게 떨쳤다. 무오년(세종 20, 1438) 공의 나이 21세때 새로 설립한 ‘시부진사시(詩賦進士試)에 단번에 급제하고 신유년(세종23, 1441) 공의 나이 24세때 이석형(李石亨) 방의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에 보직 되었다. 임기가 다 되자 사섬시 주부(司贍侍注簿)를 제수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르렀다. 이때 세종대왕이 보옥을 얻어 국새(國璽)를 만들고자 ‘체천목민 영창후사(體天牧民 永昌後嗣)’의 여덟 자를 새기려고 하였으나 ‘전자체(篆字體)’로 쓸 사람을 얻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논의하여 공을 천거하니 공은 예조정랑으로 바쁜 직무이기 때문에 한직인 돈영주부(敦寧主簿)가 되었고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승진 하였으며 임기가 다하자 부지돈영부사(副知敦寧府事)를 배수했다. 때 마침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자리가 결원이 되어 정부에서 공을 첫 번째로 천거하여 발령하려 하니 공은 영화로운 자리에 진급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굳이 사양하였다. 여러 제상들이 괴이하게 여겼으나 공의 성실한 뜻을 알고 곧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지병조사(知兵曹事)를 두루 역임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參議) 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어머니 병환으로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를 배수했다가 바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여 행상호군(行上護軍)이 되어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 중국의 선비들이 공의 풍채와 태도를 보고 비상한 사람임을 알았으며 그 글씨와 그림을 보게 되자 크게 칭찬하며 얻으려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공은 겸손하며 모두 물리쳤다. 조정에 돌아와 인수부윤(仁壽府尹)을 배수하였고 을유년(세조11 1465) 겨울에 등창으로 졸하니 향년 48세이다.

공은 천성이 침정아담(沈正雅淡)하고 관평낙이(寬平樂易)하였으며 일을 당하면 감히 남보다 먼저 하지 않았으며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계략을 도모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공은 말하기를 “궁달(窮達)은 모두 분수에 있는 것이지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사양 한다고 피할 수도 없다. 혹 분수에 지나치면 재난이 따르니 어찌 고생스럽게 경영하여 분수 아닌 일을 필요로 하겠는가” 하였고 간혹 어떤사람이 나약한 것처럼 기만하더라도 공은 오히려 태연하게 대처하였다.

공은 문장과 시를 짓는 재능이 정수를 얻었고 전서 예서 해서 초서와 회화의 묘에 이르기까지 당세에 독보를 이루었으나 공은 모두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자제가 글씨나 그림을 구하면 공은 이르기를 “글씨나 그림은 천한 기술이니 후세에 전하게 되면 도리어 이름만 욕 될뿐이다.”하여 그의 작품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공은 사물의 이치가 정밀하거나 거친 것 이라 할지라도 한번 보면 스스로 해득하였으나 오직 음률은 알지 못하였다. 한번은 악공이 비파를 타는 소리를 듣고서 이르기를 “네가 비파를 가능한 한 천천히 타 보라” 하고 자세히 듣고 나서 한 동안 있다가 이르기를 비록 소리는 이룰수 없으나 대강은 할수 있다.” 하고 손으로 한번 한번 타는데 그 곡조가 틀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민첩함에 탄복하였다.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지었는데 화초를 심고 기르는 법을 곡진히 하여 사물의 조화하는 뜻을 붙였다. 하루는 아우인 나(경순)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하므로 내가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내가 꿈에 어느 관청에 들어가니 여러 관원이 늘어 앉았는데 그 사이에 빈 자리가 하나 있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대답하여 이르기를 “여기에 앉을 사람이 잠시 다른 곳에 나갔는데 금년에 돌아올것이다.” 하였다. 그 자리의 이름표를 보니 즉 나의 성명이었다. 이것이 어찌 오래 살 징조이겠느냐” 하더니 그 해에 과연 졸 하였다.

공의 전취는 지통예문사(知通禮門事) 이곡(李谷)의 딸인데 자녀가 없고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후취는 전 주부(前主簿) 김중행(金仲行)의 딸이니 4녀를 낳았다. 장녀는 참봉 조중휘(趙仲輝)에게 출가하고 그 다음은 생원 송윤종(宋胤宗)에게 출가 하였으며 그 다음은 유학 어맹렴(魚孟濂)에게 출가 하였는데 모두 이름 높은 집안의 자제로 학문과 행의가 있는 사람들이다.

임진년(성종3, 1472)정월 하순

순성좌리공신 가정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복창군 김수녕 삼가 짓다.

출전:국역진산세고

 

<원문>  仁齋姜公行狀

公諱希顔 字景愚 號仁齋 戴愍公之長子也 公生而智識過人 年甫數歲 或於墻壁間 隨手揮洒 或書或畵 無不中法 及長從師問學 文名大振 歲戊午 新說詩賦進士試 公一擧輒中 辛酉李石亨榜登第 補翰林 秩滿授司贍注簿 累遷至禮曹正郞 世宗得寶玉 欲用欽賜 體天牧民永昌後嗣 八字爲寶 難其書篆者 廷議薦公 以禮官務劇 遷公爲敦寧注簿 陞授吏曹正郞 秩滿拜副知敦寧府事 時議政府檢詳缺員 政府擬公爲薦首 公不喜榮進固辭 諸相怪之 知其誠乃己 累歷司憲掌令 知司諫院事 集賢殿直提學 知兵曹事 歷吏戶禮三曹參議 出爲黃海道觀察使以母病召還 復拜戶曹參議 俄陞嘉善行上護軍 朝燕京華士觀公風度 知其爲非常人 及見所作書畵 大加稱賞 求者坌集 公皆謙卻 還朝拜仁壽府尹 乙酉冬 公發背而卒 享年四十八 公天性 沈正雅淡 寬平樂易 遇事不敢以能先人 不慕紛華 禍敗隨之 何苦經營 以要非分 或欺其懶 公處之怡然 文章詞藻 得其精粹 篆隸眞草 至於繪畵之妙 獨步一世 公皆秘而不宣 子弟有求書畵者 公曰書畵賤妓 流傳後世 祗以辱名耳 手蹟世罕傳焉 凡物理精粗 一見自解 獨不知音律 見伶人彈琵琶者 曰汝可徐徐下指 熟視良久 曰雖不成聲 且得梗槩矣 手彈一腔不失條貫 人服其敏 著養花小錄 曲盡蒔養之法 以寓經綸造化之意 一日語弟景醇曰 吾不久於世 景醇請其故 曰吾夢入官府 群公列座 間有虛席 問諸下者 答云坐此者 適他所 今歲當還 視其標題 則吾姓名也 此豈久徵歟 是歲果卒 公先娶知通禮門事 李谷之女 無子先公亡 後娶前注簿 金仲行之女 生四女 長適參奉趙仲輝 次適生員宋胤宗 次適幼學金孟鋼 次適幼學魚孟濂 皆世族子弟之有學行者也

歲壬辰春正月下澣 純誠佐理功臣 嘉靖大夫戶曹參判兼 同知春秋館事 福昌君 金壽寧 謹狀

 

 16) 집현 김이수(수녕)의 시에 화운하다(和金集賢 頤叟韻)

 

조회 파하니 일어나 대성원으로 돌아와 / 朝罷抽臺省院回

매양 일 대할 때 마다 재주 없음이 부끄럽네 / 每將對事愧無才

개을러 벼슬버리고 집으로 돌아 갔으니 / 疎慵己卜投簪去

임금님의 두터운 총애 언제나 내게 올까 / 寵渥何期及我來

 

무슨 요행으로 임금의 행차 다시 뵙게 되리 / 何幸金鑾得再回

모시고 지내는 사람 모두가 적선재 들이네 / 陪遊多是謫仙才

아침마다 강이 파하면 궁궐을 떠나는데 / 朝朝講罷歸靑銷

함께 은혜와 영광 입고 느린 걸음으로 나오네 / 共被恩榮綏步來

 

한가한 틈에 말 타고 나오니 잠자리 비어있고 / 乘閑騎出獨空牀

시가 큰 길 위의 진흙 물이 나의 바지 적시네 / 陌上靑泥沾我裳

날마다 봄바람 불어 향기로운 풀 자라고 / 日日東風芳草綠

임금님 그리워도 뵐수없어 크게 마음 상하네 / 思君不見太心傷

 

듣자하니 그대가 병들어 동상에 누었다니 / 聞君嬰疾臥東牀

깜짝 놀라 저고리와 바지를 바꾸어 입었네 / 驚駭顚衣又倒裳

약을 안 쓰고 자연히 나으면 도리어 기쁘니 / 勿藥自然還有喜

전부터 알았지 조금 앓음은 상하지 않음을 / 故知微恙是無傷

 출전:강희맹의 진산세고

 

 17) 강의맹 문집(晉山世稿)에 있는 김수녕 선조관련 시 (2005. 9. 5. 태영(군) 제공)

  이수에게 부치다.(寄頤叟) 이수:김수녕의 자

 

초가을(初秋)

향 피우고 고전을 쓰니 한 자루 붓 남았고 / 古篆香燒一穗殘

건을 쓰고 하루 종일 청산을 마주하네 / 岸巾終日對靑山

푸른 산은 그늘져 경치 저물려 하는데 / 靑山翳翳景將暮

상쾌한 기운이 물과 돌 사이에 일어나네 / 爽氣生從水石間

 

전원을 그리워 하다.(憶田園)

늙은 몸이 십년을 벼슬살이에 매었다가 / 十載龍鍾繁官遊

꿈속에서 고향의 동산에 길게 누었었네 / 夢中長臥故園秋

지금까지 하던일 나는 모두 마치니 / 柢今事業吾休矣

돌아가서 시나 짓고 근심을 참으리라 / 欲賦歸歟不耐愁

 

강동에 놀다(遊江東)

강가에 내리는 비 많았다 적었다 하는데 / 白雨江濱密復疎

대나무 숲 깊은 곳에 수레를 멈추었네 / 竹林深處且停車

어옹이 손님을 좋아하여 술을 사왔고 / 漁翁愛客仍酤酒

작은배 다시 흔들며 고기잡이 나가네 / 更掉扁舟爲打魚

 

한가한 가운데 달을 보다(閑中見月)

뜬구름 몇 조각 푸른 하늘 맑게 나르고 / 數片浮雲捲大淸

달빛은 산 빛과 서로 고음을 다투고 있네 / 月光山色共崢嶸

항아가 사람의 깊은 뜻을 아는 것 같아 / 姮娥似識幽人意

작년이나 올해나 한 모양으로 밝았네 / 去歲今年一樣明

 

취중에 노래를 듣다(醉中聞歌)

한 곡조 맑은 노래 멀리서 들려오는데 / 一曲淸歌遠莫親

소리소리 높이 떨쳐 대들보를 울리네 / 聲聲高拂屋梁塵

취중에도 이 곡이 영롱한 노래인 듯 하니 / 醉中疑是玲瓏唱

한 낮의 닭 우는 소리 사람의 근심 없애네 / 白日黃雞愁殺人

 

가을의 흥취(秋興)

하얀 이슬이 하늘을 씻으니 은하수가 밝고 / 白露洗空河漢明

청여장 집고 달 밝은 뜰 가운데서 서 있네 / 扶藜步月立中庭

벽 위로 서늘한 기운 들어오니 뀌뚜라미 울고 / 凉侵壁上蛩吟急

삽상한 소나무 사이에 학이 꿈꾸러 깃들었네 / 爽溢松間鶴夢淸

 

제비는 둥지를 떠나 물차고 날아가고 / 玄鳥辭巢掠水去

누런 닭 기장 쪼다가 울타리 가에서 조네 / 黃雞啄黍傍籬眠

높은 재실 홀로 조용히 앉아 말이 없는데 / 高齋獨坐靜無語

해 저무니 뿔피리 소리 먼 하늘에 구슬프네 / 日暮角聲悲遠天

               출전: 晉山世稿(강희맹)

 

 18) <海東雜錄>(權鼈저)  속에 들어 있는 김수녕 선조님 기록 내용 (2005. 6. 14)

    가)  本朝[二] 기록 내용

   <원문>

    金壽寧

 

安東人。字頤叟。參判益精之孫。魯山癸酉年十八。擢壯元參佐理功。官至吏曹參判。封福昌君。文章俊發老健。尤工於章疏。一夕劇飮而卒。謚文悼。○我成廟以幼冲嗣位。大諫金壽寧上箚曰。爲學之道。如舟泛流。不日進則日退。今經筵只御朝晝。不御夕講。恐非磋磨及時之意。乞令經筵官。更日直宿。以備顧問。上嘉納之。 寶鑑 處高危則思謙降。臨滿盈則思挹損。遇逸樂則思撙節。在宴安則思後患。見可欲則思知足。將興繕則思知止。防壅蔽則思迎納。疾讒邪則思正己。行爵賞則思因喜而僭。施刑罰則思因怒而濫。兼是十思。而行之以悠久。守之以誠信。則民心悅而天道順。太平之治。可以立效。 金壽寧疏 金頤叟語徐剛仲曰。高麗詩文詞麗氣富。而體格生疎。近代著述。辭纖氣弱。而義理精到。孰優孰劣。剛仲曰。豪將悍卒。抽戈擁盾談說仁義。腐儒俗士。冠冕從容禮法。先生何取。頤叟大笑。 詩話

 

 *해동잡록 : 1670년 간.

 

<역문>

  김수녕(金壽寧)

○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자는 이수(頤叟)인데 참판익정(益精)의 손자다. 단종[魯山] 계유년에 18세로 장원에 뽑히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였고,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며, 복창군(福昌君)으로 책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노련 건실하며 더욱이 소(疏)를 잘 지었는데, 어느날 저녁에 술을 심히 마시고 죽었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성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으니, 대사간김수녕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학문을 하는 길은 배가 물에 뜬 것과 같사오니 날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로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조강(朝講)과 주강(晝講)에만 경연(經筵)에 나오시고 석강(夕講)에는 나오지 않으시니,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시려는 뜻이 아닐 듯 합니다. 바라옵건대, 경연관으로 하여금 번갈아 숙직하게하여 고문에 대비하도록하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국조보감》

 

높은 자리에 계시면 겸손할 것을 생각하시고, 가득 찼을 때에는 줄어들 것을 생각하시며, 즐거운 일을 만나면 씀씀이를 절약할 것을 생각하시고, 편안할 때에는 뒷날의 걱정을 생각하시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면 만족할 줄을 아시고, 장차 영선(營繕)하고 싶으면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시며, 간신에게 총명이 가리워짐을 막으려면 바른 말을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시고, 참소와 간사함을미워하려면 몸소 바르게 되기를 생각하시며, 벼슬을 상 주려 할 때에는 혹시 기쁜 나머지 지나치지 않는가를 생각하시고, 형벌을 줄 때에는 혹시 노한 김에 함부로 하지 않는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10가지 생각을 겸하여 행하기를 꾸준히 하시고, 지키기를 성신(誠信)으로써 하신다면 민심이 기뻐하고 천도(天道)가 순하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당장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김수녕의 소(疏)

 

김이수(金頤叟)가 서강중(徐剛仲)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시문(詩文)은 그 말이 유려(流麗)하고 기운이 풍부하나 체(體)가 서투르며, 요즈음의 저술은 말이 섬세하고 기운이 약하나 내용이 지극히 정밀하여 그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하니, 강중이 말하기를, “호탕한 장수와 용감한 사졸이 창을 빼어들고 방패를 끌어안고 인의(仁義)를 담론하는 것과 썩은 유생이나 속된 선비가 관면(冠冕)을쓰고 예법이나 조용히 지키는 것 중에 선생은 어느 것을 취하겠습니까?” 하니, 이수가 크게 웃었다. 《동인시화》

 

  나) 해동잡록  <본조> (本朝)   기록 내용

 

조혜(趙惠)는 자호(自號)를 시재(詩齋)라 하고 즐겨 시를 지었으나 잘하지 못하였다.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에게 주는 시에 이르기를,

 

노루는 도망쳐서 산 밖으로 가고 /  獐逃山外去

고기는 물속에서 깊이 잠겼구나  / 魚在水中沈

 

하였는데, 김금헌(金琴軒 이름 유(紐))이 참판(參判)김수녕(金壽寧)에게, “이 시 어떻소.” 하고 물었다. 때마침 가뭄이 들어 있었다. 김이, “《시재집(詩齋集)》을 불태워 버리면 비가 올 것이다.” 하였다.

 

 <저자 소개>

 권별(權鼈)  

본관(本貫)-예천(禮泉), 시대(時代)-(1589-1671), 자(字)- 수보(壽甫),  호(號)- 죽소(竹所)

 

사간(司諫) 문해(文海)의 아들.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기자조선(箕子朝鮮) 이래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의 왕실의 사적(事蹟)과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의 인물 열전(列傳)을 집대성하여 「해동잡록(海東雜錄)」을 편술했다.

 

海東雜錄(奎 5663), 權鼈(), 연대미상, 14권 7책, 필사본, 20.  6×33 cm.

 

 내용은 각 왕조별로 인물사전식으로 편찬되어 있다. 제1권에서  제3권까지는  단군에서 고려 공양왕까지의 역대 왕들, 궁예견훤말갈거란몽고, 왜 등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다. 제4권에서 14권까지는 신라인 62명, 고구려인 23명, 백제인  8명,  고려인  526명, 조선전기인 455명 등 총 1, 074명의 인물의 열전이 수록되어 있다. 각  인물들을  왕조별, 성씨별로 분류하여 오늘날의 인명사전과 같은 편찬체제를 갖주어 각  인물에  대하여 그 내용을 찾아보기 쉽게 하였다. 이 책은 그의 선인인 權汶海의  {大東韻府群玉}을 중심으로 편차의 인물조 가운데 한 사람만 선별하여 수록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일화들을 중심으로 보완, 정리한 일종의 인물사적인 문헌설화집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大東韻府群玉}과는 상호연결되는 자매편이 되는 셈이며  최초의  인물사전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게다가 저자기 이 책을 편찬하면서 인용한 서목을 보면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 책들이 대부분이어서 우리의 고대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역대 인물들에 대한 기록도 수록 대상이 대부분  상고에서  조선전기에  걸치는 인물들이어서 이 방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9)남효온의 <추강냉화> 속의 김수녕 선조님 (2005. 6. 14. 항용(제) 제공)

 

추강냉화(秋江冷話) 초입(抄入)

 국오(菊塢 강희맹〈姜希孟〉의 호) 강경순(姜景醇 강희맹의 자)이 엮은 《진산세고(晉山世稿)》는 참판 김수녕(金壽寧)이 고치고 다듬은 것인데,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여 부조의 시명(詩名)을 후세에 선양(宣揚)했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으로써 효도를 하였다고 하나 나는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사(上舍)신영희(辛永禧)의 집안에 조부 문희공(文禧公)의 시집이 있었으나, 친구들이묻기를, “자네 집안의 문집이 간행할 만한가.” 하니 신영희는, “조부께서 비록 문명(文名)이 세상에 으뜸가기는 했으나, 집안 문집에 실은 것으로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소. 전일 한 문하생의 만시(挽詩)에,

 

서른 둘에 세상을 떠나니 /  三十二而卒

불행함이 안회와 같도다  / 不幸同顔回

 

한 것이 있는데 이 시 이외에 시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어찌 간행할 수 있겠소.” 하여, 남들은 그것이 불효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효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부가 행한 일을 그대로 말하였으니, 그것이 곧 효도이다. 설사 말을 꾸며 부조(父祖)를 기린들 부조의 넋이 어찌  저승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

 

*출전 : 추강냉화

 

조선 전기의 문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수필집.

필사본. 1책. 규장각도서. 한문으로 쓴 시화(詩話)와 일사(逸事) 등을 모아 엮은 책으로, 그의 시문집인 《추강집(秋江集)》의 부록으로도 수록되었고, 《대동야승(大東野乘)》에도 실려 전한다.

 

*저자 : 남효온(南孝溫)

1454(단종 2)∼1492(성종 23). 조선 단종 때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 5대손이고, 생원 전(恮)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했다.

 

 20) 동방급제 (2005. 11. 17. 항용(제)

김수녕, 김 한(金 漢) (전서공파)

1453년(단종 1) 승의랑(承議郞)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 직강 (直講)을 지냈다.

단종1년 증광시때는 73명의 합격자를 냈다.  

 

이름 생년 자 호 본관 합격등급

강기수(姜耆壽)    진주(晉州) 丁科5

구치강(丘致岡)    평해(平海) 丁科22

권이경(權以經)    안동(安東) 丙科6

김겸광(金謙光) 1419 기해 휘경(撝卿)  광주(光州) 丁科3

김구영(金九英)    김해(金海) 丁科2

김기(金祇)    예안(禮安) 丁科4

김리용(金利用)    상주(尙州) 丁科12

김병문(金炳文)    미상(未詳) 丁科8

김보륜(金輔輪)    상주(尙州) 丙科2

김부필(金富弼)    선산(善山) 丁科7

김석통(金石通)    미상(未詳) 丁科18

김성원(金性源)    광주(光州) 丙科7

김수녕(金壽寧) 1436 병진   안동(安東) 乙科1

김승벽(金承璧)    순천(順天) 丁科25

김양중(金養中)  홍후(洪厚)  의성(義城) 丁科21

김영벽(金暎璧)    미상(未詳) 丁科18

김자정(金自貞)    김해(金海) 丁科15

김한(金漢)    안동(安東) 丁科14

김효신(金孝新)    미상(未詳) 丁科23

남승보(南勝寶)    고성(固城) 丙科5

노사신(盧思愼) 1427 정미 자반(子胖) 보진(葆眞) 교하(交河) 丙科1

민우증(閔友曾)    여흥(驪興) 丁科9

박건(朴楗) 1434 갑인 자계(子啓)  밀양(密陽) 乙科3

박계성(朴繼性)    미상(未詳) 丙科2

박근(朴瑾)    의흥(義興) 乙科2

박숙진(朴叔蓁)    음성(陰城) 丙科4

박증(朴增)    죽산(竹山) 丁科17

박치명(朴致明)    미상(未詳) 丁科6

성간(成侃) 1427 정미 화중(和仲) 직일(直逸) 창녕(昌寧) 乙科3

손순효(孫舜孝) 1427 정미 경보(敬甫) 물재(勿齋) 평해(平海) 乙科2

손욱(孫旭)    경주(慶州) 丁科15

송극창(宋克昌) 1431 신해 파로(坡老)  여산(礪山) 丁科13

송흥문(宋興門)    미상(未詳) 丁科24

심산보(沈山甫)    삼척(三陟) 丁科9

안신손(安信孫)    죽산(竹山) 丁科11

양순석(梁順石)  윤보(潤甫)  남원(南原) 丁科1

양정명(梁井明)    제주(濟州) 丁科10

옥려(玉礪)    반성(班城) 丁科30

유계분(柳桂芬) 1397 정축 자형(自馨) 연균(緣筠) 문화(文化) 丙科3

유지(柳輊)    문화(文化) 丁科6

윤기번(尹起磻)    해평(海平) 丁科19

윤민(尹慜)  시봉(時逢)  파평(坡平) 丁科16

윤효손(尹孝孫) 1431 신해 유경(有慶) 추계(楸溪) 남원(南原) 丙科3

이간(李幹)    신평(新平) 丁科28

이극기(李克基)  자안(子安)  광주(廣州) 丙科6

이문환(李文煥)  요장(堯章)  경주(慶州) 丁科1

이미(李美)    함안(咸安) 丁科2

이숭원(李崇元) 1428 무신 중인(仲仁)  연안(延安) 乙科1

이승윤(李承胤)  장지(長之)  전주(全州) 丁科29

이우(李堣) 1432 임자 명중(明仲)  한산(韓山) 丁科27

이운봉(李芸奉)    흥양(興陽) 丁科8

이인견(李仁堅)    한산(韓山) 丁科14

이종산(李鍾山)    미상(未詳) 丁科7

이질(李垤)    우봉(牛峯) 丁科5

이희철(李希哲)  수헌(遂軒)  연안(延安) 丙科7

임택(任擇)    장흥(長興) 丁科4

정극인(丁克仁)  가택(可宅) 불우(不憂) 영광(靈光) 丁科13

정예손(丁禮孫)    영광(靈光) 丙科1

정옥경(鄭沃卿)  몽필(夢弼)  청주(淸州) 丁科3

정윤화(鄭允和)    연일(延日) 丁科11

정은(鄭垠)    진주(晉州) 丙科4

정이아(鄭以雅)    초계(草溪) 丁科17

정자명(鄭自明)    연일(延日) 丁科23

정침(鄭忱) 1424 갑진 불기(不欺)  해주(海州) 丁科22

조번(趙璠)    평양(平壤) 丁科20

조서정(趙瑞廷) 1423 계묘 자부(子符)  풍양(豊壤) 丁科12

조욱(趙昱)  자명(子明)  함안(咸安) 丙科5

조원지(趙元祉)    배천(白川) 丁科10

조찬(趙瓚)    임천(林川) 丁科19

최수지(崔水智)    전주(全州) 丁科21

최한보(崔漢補)    화순(和順) 丁科16

최호원(崔灝元)  혼연(渾肰)  미상(未詳) 丁科26

하한근(河漢近)    진주(晉州) 丁科20

 

 21) 사가집 자료

(2006. 9. 13. 태영(군) 제공)

   국역 사가집 2권

  * 자반(子胖)과 함께 술자리를 벌여놓고 이수(頤叟)를 기다리면서 인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서 그를 희롱하다.

 * 김이수(金頤叟)가 북경(北京)에 가서 서적을 많이 사 왔으므로, 시(詩)로써 서적을 빌려 달라 하면서 겸하여 희롱하는 뜻을 서술하다 (4수)

 * 김이수(金頤叟)의 시운에 차하다.

 * 능하역(凌河驛)에서 또 김문량(金文良), 임자심(任子深), 노자반(盧子胖), 김이수(金頤叟)의 시운에 차하다.

 

    국역 사가집 3권

 * 김이수(金頤叟)가 북정일과(北征日課)를 빌려가서 오래도록 돌려주지 않고 또 내게 왕림하기로 기약을 해 놓고 오지 않으므로 나의 심정을 서술하여 네 수의 시로 기록하다.

 

   국역 사가집 4권

 * 임자심(任子深), 김이수(金頤叟) 두 예부(禮部)가 내방(來訪)하여 나와 바둑을 두려 했었는데 마침 내가 침구(針灸) 치료 받는 때를 당하여 즐겁게 놀지 못했으므로 그 명일에 장난삼아 바치다.

 * 이수(頤叟)에게 부쳐 오가피(五加皮)를 요구하다.

 * 이수(頤叟)에게 부쳐 대금음자(對金飮子)를 요구하다. 대금음자(對金飮子)는 한약(漢藥)의 화제(和劑) 이름이다.

 * 앞의 운을 재차 사용하여 이수(頤叟)에게 부치다.

 * 이수(頤叟)가 오가피를 보내준데 대하여 사례하면서 앞의 운을 사용하다.

 * 이수(頤叟)가 대금음자(對金飮子)를 보내준데 대하여 사례하면서 앞의 운을 사용하다.

 * 자심(子深), 이수(頤叟)가 거듭 들르기로 약속해놓고 오지 않으므로 부쳐 올리다.

 * 김이수(金頤叟)가 좌승지(左承旨)에서 첨추(僉樞)로 좌천(左遷) 되었는데 병 때문에 위문하지 못한 지 여러 날 만에 이제야 졸시(拙詩)를 부쳐서 우선 높은 분을 초청하고 겸하여 희롱하는 뜻을 기술하다.

 * 회포를 써서 이수(頤叟)에게 부치다.

 

 22)《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2006. 11. 1. 태영(군) 제공)

[寧] 편안하다. 차리리.

[김수녕(金壽寧)]: 자는 이수, 본관은 안동, 참판(參判) 김익정(金益精)의 손자이다. 계유년(癸酉年1453)에 18세의 나이로 장원급제 하였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 하였다. 벼슬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문장이 빼어나고 노건(老健)했는데 상소문(上疏文)을 더욱 잘 지었다. 어느날 저녁 술을 많이 마시고 죽었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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