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충렬공 묘소와 관련한 각종 자료 소개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에 있는 충렬공 김방경 할아버지의 묘소와 위의 광산김씨 묘와 관련한 이야기 (1)문화재관리국에서 CD로 제작한 문화유적총람 3편에 있는 기록. (2001. 6. 22. 주회(안) 제공) 【유적명칭】김방경 묘(金方慶墓) 【관리번호】760-920-310-499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묘(피장자가 알려진 묘) 【소 재 지】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335 【시 대】고려시대 【관 리 자】개인(김원재) 【유적내용】
김방경(金方慶)의 자는 본연(本然)으로 고려 명장이다. 16세때 산원이 되어 식목록사(式目錄事)를 겸하고 감찰어사(監찰御使)를 비롯한 여러 벼슬을 지냈다.
고려 원종(元宗) 11년(1270)에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진도를 함락시켰으며 삼별초가 다시 제주도에 들어가서 성곽을 쌓자 원나라 장군 홍도, 공다구와 함께 다시 이를 쳐서 완전히 평정하였다. 그 후 1278년과 1281년에 원나라가 일본을 칠 때 고려군 도원수로 종군하였다가 돌아와서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에 봉해졌다.
충직하고 근검했으나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 못한 것과 일본정벌 후의 불공평한 논공행상등으로 상, 하의 인심을 잃어 사후 예장을 치르지 못하고 안동에서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이 묘소는 실전되어 찾지 못하다가 안동 오천리 광산김씨의 시조 김효노(金孝盧)의 장례를 위해 죽송리 현지점을 파던 도중 '고려 충렬공 김방경지묘'란 지석이 출토되어 묘를 찾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곳에는 높이 2.1m, 둘레 32m의 호석이 있는 봉분과 1966년에 세운 묘비 및 신도비가 있는데 원래 묘비는 1602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묘 앞에는 좌우 6기의 망주석과 상석이 있다.
【참고문헌】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중, 184. ; 안동문화원, 1994, <안동의 분묘>, 66.
(2) 口傳談(전해오는 이야기 ) (2001.6. 22. 영환(문) 제공)
충렬공 할아버님 묘소에 대하여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 소개 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에 따라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같은 이야기입니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산소를 쓰고 제사를 지내는데 웬 난데없는 광풍이 몰아치면서 모든 제물이 날아가버렸답니다. 또 다시 지내려고 해도 또 날아가고 했더랍니다. 그래서 우선 우리 충렬공 할아버님 묘소에 먼저 제사를 지내고 나서 광산김씨 제사를 지내니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광산김씨 집안에서는 시제때마다 우리 할아버님께 먼저 제사 올리고 광산김씨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후 우리 집안과 광산김씨 집안은 현재까지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번 재사 신축시에도 많은 협조가 있었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서 광산김씨 문중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3)<경북마을지 하권>(경상북도 간) 기록 내용 (2001. 6. 23. 주회(안) 제공)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소개
대밭골 남쪽 마을에 고려말의 명신이며 여몽연합군의 총지휘관이었던 상락부원군 김방경 장군의 묘소가 있다고 능골이라 부른다. 영가지의 인물조에 실린 김방경 장군의 약전을 옮기면 효인의 아들이다. 처음 방경의 어머니는 서운을 머금는 태몽을 꾸었다. 어머님은 남에게 이르기를 "구름의 기운이 항시 내 입과 코에 있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의 세계에서 왔을 것이다" 하였다.
자라날 때에는 조금이라도 화가 나면 네거리에 드러누어 울어댔다. 소나 말까지도 이를 보고는 피해가니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다 하였다. 고종조에 비로소 벼슬하니 진도, 탐라, 일본정벌에 유공하였다. 벼슬이 첨의중찬에 이르렀다. 사람됨은 충직신후하였고,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말이 적었다. 기국이 홍대하고 관용이 있어 소절에 구애받지 않았다. 전고에 식견이 많아 일의 단안이 빨랐다. 몸을 가다듬는데는 근검하였다.
늙어서도 두발이 희지 않았고, 벼슬을 그만두고 간가할 때도 나라를 걱정함을 집일과 같이 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왕은 반드시 상의하였다. 나이가 88세에 홀연히 서거하니 시호는 충렬공이다.능리의 앞 들은 능들이라 한다.
충렬공 묘소의 바로 위에 광산김씨 안동 입향조의 묘소가 있는데 이 묘소에 제를 올릴 때는 반드시 먼저 상락군 묘소에 제사로 고한다. 이 행사는 광산김씨가 이곳에 묘를 처음 쓰니 회오리 바람이 불고 까막까치가 제물을 먹어 버려 제사를 지낼 수 없어, 그 아래의 이름없는 봉분이 있어 먼저 이 무덤에 제를 올리니 이 변이 없어졌다. 이 봉분이 상락군의 묘소였다. 이 일이 있고 안동 상락김씨는 실존한 상락군 묘소를 찾게 되었다 한다.
(4)<충렬공 예장문제에 관한 내용> (2001. 6. 26. 주회(안) 제공)
⊙ 충렬공 김방경 할아버지의 예장문제와 관련된 기록중에 (고려사 등)
"충직하고 근검했으나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 못한 것과 일본정벌 후의 불공평한 논공행상등으로 상, 하의 인심을 잃어 사후 예장 (禮葬 : 종친·공신·종1품 이상의 문·무신이 죽으면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준 일, 종1품 이상의 관원은 禮葬 贈諡한다) 을 치르지 못하고 안동에서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와는 다르게 분석한 석사학위 논문이 있어 그 내용을 정리함.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유선영, 1993, 전남대학교 대학원) 에
1283년(충렬왕9) 72세의 나이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왕이 김방경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또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고, 또 1295년(충렬왕21) 그가 첨의령,상락군 개국공으로 봉해지고 세자(충선왕)의 청으로 식읍 3천호, 식실봉 3백호가 하사되었다. 1299년 조비무고사건 때는 궁궐에 나아가 조비를 옹호하는 등 개입을 했고, 퇴임 후에도 항상 나라 일을 걱정했다" 고 한 것처럼 그는 치사한 후에도 일정하게 정사에 간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충렬왕과 충선왕의 왕위분쟁으로 조정이 충렬왕파와 충선왕파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던 때였다. 이때 그는 조비를 변호하는 등 충렬왕에 대립하여 충선왕의 편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 1300년(충렬왕26) 89세로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가 예장으로 치러지지 못했던 것은 그나 그의 아들 흔이 충선왕에 협조하므로써 충렬왕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 상기 두 자료의 종합 정리.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개혁정치를 펴다가 원의 간섭 및 충렬왕파에 의하여 8개월만에 밀려나 원으로 가고 출렬왕이 복위하는등 왕위분쟁 과정에서 충렬왕(재위 1274-1308)과 충선왕(재위 1298, 1308-1313)의 사이에서 김방경과 그의 둘째아들 김흔이 충선왕의 편에 섬으로써 1300년(충렬왕26, 89세) 출렬공이 돌아가시자 당시 권세를 잡고있던 충렬왕과 그의 측근들의 반대에 의해서 예장을 치르지 못한 것이다.
충렬공 사후 7년이 지나서 충렬왕이 이 일을 후회하고 1307년(충렬왕33)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고,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충렬왕이 죽기 한 해 전인 1307년에는 충렬왕이 사냥에만 몰두하는 등 정사를 방치하고, 충선왕의 절친한 벗이자 후원자인 원의 무종이 즉위하자 이미 모든 권한이 충선왕에게 돌아간 상태이므로 실제로는 충선왕에 의해서 이루어진 듯하다)
(5)<충렬공 묘소와 관련한 내용 소개>(2001. 6. 27. 주회(안) 제공)
충렬공(김방경) 묘소와 관련된 족보 내용 발췌.
⊙ 충렬공 묘지문 (1300, 이진 찬)
1300년(대덕4년 경자) 8월 16일에 병환으로 인하여 백목동 영계리에서 돌아가시니 9월 3일에 예안현 서쪽 산록에 유고에 따라 안장하였다.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89세에 병환으로 본댁에서 돌아가시니 임종시까지 아픔이 없이 쓸쓸하게 앉아서 돌아가셨고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부산소 (족보에 조부 김민성 묘는 안동부서 一息 화림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근처에 장사하게 되었다. 영구가 떠날 때는 삼관녹사 80여명이 모두 소복으로써 제사를 드리고 울음으로써 보내는데 그때 공을 미워하는 간신들 무리의 모사로 예장을 치르지 못하여 왕이 이를 후회하고 1307년 (충렬왕33) 6월 14일 왕이 영지를 내려 이르되 "고 상락공 김방경은 공이 많은지라 대려와 같이 (오래도록) 잊어버리기 어렵다" 하고 그의 벼슬을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여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 충렬공 신도비문 (1971, 학술원장 이병도 근찬, 후세손 사달 근서)
공은 치사한 뒤에도 우국여가 대사가 있을 때는 반드시 왕의 자문을 받더니 1300년 (충렬왕26) 8월 16일에 향년 89세로 졸하여 조야가 모두 통찬하니라.
1307년(충선왕 즉위초)에 왕지를 내려 "고 상락공은 사직에 유공함이 대려와 같다" 하여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고 명하여 신도비를 세우게 하다
(주) 그 당시의 신도비는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 침략군에 의해 파괴되어 없어지고 그후 379년동안 재건치 못하고 내려오다가 서기 1971년 11월 26일에 안동군 녹전면 구송동 산117-3에 여러 특지종인들의 성력에 의하여 재건하였다.
⊙ 대종회의 활동
1990년 7月23日 忠烈公 묘소가 四百餘年間 光山金氏 종산에 모셔져 있어 泰亨 會長께서 崙會氏와 같이 安東에 내려가 都評議公派 冕鎬씨를 만나 光山金氏 종회장을 尋訪하여 祿田面 九松洞 산19番地 忠烈公 墓域 二百九十九坪을 讓渡키로 합의하여 우리 산으로 확보하였다. 또한 우리는 光山金氏 문중에 고맙다는 뜻으로 金一千萬원을 희사하였다.
7月 23日 묘역 확장 축대 및 계단 축조 공사를 二千七百五十萬원을 들여 동시에 착공하여 단기간내 훌륭히 완공하니 數 百餘年의 통한을 풀게 되었다. 이에 泰亨會長의 공로가 지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