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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제주 유적 답사기 (2003. 3. 1. 항용(제) 제공)
--충렬공의 삼별초 토벌과 김치의 방선문 마애시 답사--
1. 일시 : 2003. 2. 25 2. 장소 : 제주도 일대 3. 답사자 : 김항용(제). 김익수(보명 태익. 제) 4. 답사과정 07:30-김포발 KAL기 이륙. 08:30-제주착. 익수씨 만남 09:30-방선문 착 12:30-방선문 남봉공 탁본 뜨기. 13:30-삼성혈 견학. 중식 14:00-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남봉공 목각판 유한라산기 감상) 14:30-함덕포(삼별초 토벌군 120척 1차 상륙지)--해안도로 경유 15:00-조천을 지나 삼사석에서 1차 전투지 답사 16:00-애월포(삼별초 수군 주둔지). 애월진(제일 큰 진). 2차 전투지(항파두리 공격, 破軍峰에서 최종 토벌) 답사. 16:30-명월포, 옹포(비양도에서 토벌군 2차 40척 상륙지) 17:00-항파두리 토성, 우물 답사 18:00-만호대 명월성
2월 25일 새벽 5시 40분, 잠을 설치고 일어나 준비하고 나온 우리 가족 4명은 어두운 길을 쏜살같이 달리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오늘부터 2박 3일간 제주도 여행을 간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올림픽 도로는 시원했다. 잠을 덜 잔 예진이 용진이는 연방 눈을 비벼댄다. 여행이 즐거워야지 시작부터 왜 이렇게 힘드냐고 잠 섞인 목소리로 투정이다. 서울의 거리가 이렇게 한산할 때도 있다. 불과 30분만에 공항에 도착했다. 너무 이르게 왔나 보다. 공항음식점에서 아침을 먹고 07:00시에 3층 관광사 직원 만남의 장소로 가서 비행기 항공권을 받아 비행기에 오른다. 07:30시에 이륙한 비행기는 안개와 구름이 낀 그 위 상공으로 날아오른다. 밖은 온통 구름뿐이다. 잠시 후 창밖을 보니 남해가 보이고 이내 제주공항 착륙 예고 방송이 나온다. 불과 50분만에 한반도의 끝자락에 왔다. 08:30분에 제주에 도착하자 출구에는 익수(보명-태익. 제학공파. <하담문집> 번역자. 제주도 문화재위원) 아저씨께서 벌써 마중 나와 계신다. 출발하기 며칠 전부터 우리의 출발과 만남에 대해 여러 번 전화 주시며 세밀하게 현지 준비를 하셨다. 참으로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예약된 렌트카(매그너스 승용차)를 인수받아 모두 차에 타고 첫 방문지인 방선문으로 향했다. 날씨는 바람도 없이 쾌청했다. 기막힌 날씨이다. 익수씨는 이런 날이 제주에 며칠 안 된다고 했다. 공항에서 신제주로 향하여 가다가 큰 로터리에서 좌회전 하여 구제주로 가다가 다시 제주 종합 운동장 방향으로 우회전 한다. 운동장을 지나 신호등 없는 작은 사거리를 조심하여 직진하면 오라동이 나온다. 교도소 정문을 지나 직진하여 골프장 가는 길을 향해 소로를 간다. 계속 길을 따라 차를 몰면 좌측에 최근에 세운 낮은 안내 표석 하나가 나온다. 제주 10경의 하나인 <瀛丘春花>(영구춘화)를 알린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써 있다. "영주 10경의 하나인 영구춘화로 알려진 들렁귀. 봄에 암벽사이로 철쭉이 필 때는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어 옛 부터 목사가 관기를 거느리고 나와 주연을 베풀기도 했으며 시인 묵객들이 모여 시화를 열기도 했다. 신선들이 드나들던 문이라는 전설이 얽힌 방선문(訪仙門)이 있고 홍중징(洪重徵) 등 많은 목사들과 최익현(崔益鉉) 등 유배인들의 제명을 볼 수 있다. 도내에서는 선인들의 마애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주: 들렁귀-들려 있는 바위 위에 있는 꽃(철쭉꽃)
근처 길옆에 차를 주차하고 안내 표석 바로 옆으로 난 작은 산길로 걸어간다.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으려는 제주의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밝다. 산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맑다.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힘찬 물줄기로 만들어진 커다란 계곡을 따라 꼬불거리는 길을 걸어 조금 들어가니 계곡 좌측으로 웅장한 아치형의 방선문(訪仙門) 이 나온다. 옛날 이 곳은 소풍객과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는데 지금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한다. 산새 소리가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그 소리도 지금은 간간이 들리거나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모든 이들이 새롭고 흥미로운 것에만 관심을 갖고 엣냄새 나는 역사 유적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어 한다고 익수씨는 안타까워 하신다. 높이 약 20m, 좌우 길이 약 35m 정도 되는 바위가 좌측 산에 이어서 계곡으로 뻗어 나왔고 그 아래로 큰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비가 오면 계곡 물이 흘러간다고 한다. 물은 말라 있었다. 문의 입구 상단에는 <방선문>이라 새겨져 있었다. 익수씨는 먼저 남봉공의 마애시를 안내했다. 방선문 우측 벽 아래에 비스듬히 바닥으로 누워 있는 바위에 선조님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한 달 전(2월) 익수씨께서는 당신이 운영하시는 목요강좌(사설 한문 연구기관)의 여러분을 대동하고 이곳을 사전 답사했는데 처음에는 벽 쪽에 있다는 말만 듣고 벽에서 남봉공의 시를 한참 찾았으나 못찾다가 일행 한 분이 바위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밟고 있는 바위에 남봉공의 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님의 선험이 있었기에 우리는 편히 찾아 볼 수가 있었다. 감사하기만 하다.
이어서 익수씨는 가지고 온 여러 자료(<제주 마애명시>(목요강독회 자료) <제주 마애명전. 바위에 새겨진 한시>(2002. 5. 1. 한라산 관음사)를 펼쳐 보이면서 방선문 주변에 있는 10여 개의 마애시들을 설명하며 줄 줄 해석해 들려주신다. 님의 높은 한문 지식과 통달에 그저 감탄이 인다. 이들 마애시는 홍중징(洪重徵-방어사. 영조14년 10월에 제주에 도임. 이듬해 병으로 떠남). 이의겸(李義謙-판관. 순조27. 10. 제주 도임. 순조29 파면), 한정운(韓鼎運-방어사. 순조7. 3. 제주 도임. 순조9 이임), 한창유(韓昌裕), 한응상(梁應祥), 김락원(金樂圓) 등의 마애시이다. 이어서 남봉공의 마애시를 탁본해야 했다. 가져간 탁본 가방을 열고 도구들을 꺼냈다. 그리고 물을 떠서 먼저 바위를 닦았다. 근처 바위 위에 고여 있는 물이 아직은 겨울인지라 매우 찼다. 그 위에 제일 좋은 한지를 먼저 붙이고 나서 옷솔로 세밀하게 음각된 부분을 잘 두들겨 물 먹은 한지가 늘어나 음각된 홈 속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이 작업이 탁본 성패의 핵심이었다. 다음에는 준비해 간 탁본 방망이(좁쌀을 헝겊에 싸서 묶은 것)에 먹을 찍어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 작업도 한지의 습도에 따라 성패를 달리한다. 너무 물기가 많으면 먹물이 번져 홈으로 들어간 한지 부분까지 먹물이 번져 실패하고, 또 너무 마르면 홈에 들어간 부분이 일어나 먹물이 묻게 되어 역시 실패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1차본은 물기의 과다로 완전 실패다. 2차는 그리 좋지 않은 한지에 물기를 아주 적게 하여 작업했다. 그러나 이것도 물기의 과다로 일부 글자가 번져 50%만 성공이다. 3차본은 너무 습기가 적어 일부 글자가 일어나 먹이 묻거나 제대로 솔질이 안되어 글자가 선명하지 않아 80%의 성공작이 됐다. 4차는 이제서야 날씨와 습도에 숙달되어 완전한 성공작품을 만들었다.
작업하기가 퍽 곤란한 곳이었다. 비스듬한 바위이기에 작업을 하는 동안 여러 번 아래로 미끄러졌다. 익수씨도 마찬기지였다. 괜시리 나의 극성으로 고생하시는가 싶어 송구했다. 익수씨의 도움으로 그래도 쉬이 끝났다. 시계를 보니 12시 30분, 무려 3시간을 작업했다. 아이들은 기다리다 못해 차에 가서 기다린다. 볼이 많이 부어 있다. 이게 여행이냐고 푸념이 대단하다. 그러나 나는 큰 기쁨으로 도구를 챙겨 나왔다.
방선문에서 나와 차를 몰고 삼성혈로 갔다. 제주의 3성씨(고, 부, 양)가 처음 땅 속에서 나왔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상하게도 3개의 구멍이 있었다. 허기에 지친 아이들은 배고픔을 못 참았다. 익수씨는 우리를 근처의 제주 전통음식점으로 안내했다. 한치물회와 옥돔구이, 갈치구이를 시켰다. 시장하기도 했지만 생선 맛이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풍성한 음식에 또 놀랬다. 평소 생선은 별로 좋아하지 않던 아이들이 체면을 못 차리고 먹어댄다. 맛있는 식사 뒤에 음식값을 내려는 나의 행동을 막아서는 익수씨를 뿌리치려니 익수씨와 익히 잘 아는 사이인 음식점 주인은 은근한 눈빛으로 날보고 돈을 거두란다. 이어 인근에 있는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으로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익수씨는 한 안내원에게 연구원 한 분의 면회를 요청한다. 2개의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는 50대 초반의 한 분이 뛰다시피 나와 익수씨께 공손한 인사를 올린다. 목요강좌에서 공부하고 있단다. 입구에는 남봉공의 <유한라산기>를 명필가인 소암 현중화씨가 쓴 목각판이 무려 20m 길이의 웅장한 모습으로 걸려 있다. 옆에는 <사진촬영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으나 내게는 비디오든 사진이든 얼마든지 찍으란다. 익수씨 덕분에 귀빈 대접을 받았다.
<제주 민속 자연사 박물관에 있는 남봉공의 유한라산기 목각판>
다시 차를 몰아 동쪽 방향으로 20분 쯤 달려 함덕포에 이른다. 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제주의 해수욕장 중 대표적인 곳으로 이름난 이곳에 여름이면 발 디딜 틈이 없단다. 텅 빈 겨울바다는 다소 을씨년스러웠으나 눈앞의 정경은 푸른 바다와 원형의 해안, 파도를 잘 막아주도록 잘록하게 들어 온 포구, 곱게 깔린 모래톱으로 본래의 아름다움은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제주의 삼별초를 공격하기 위해 충렬공과 관군이 1차로 상륙한 곳이다. 1273년 4월 9일 여몽 연합군(고려군6천, 몽고군2천, 한군2천) 1만명이 추자도에 이르렀다가 4월 28일 충렬공은 30척으로 비양도 바로 앞의 명월포를 진격하는 척 하는 유인책을 쓰고 나머지 주력부대 120척을 이끌고 이곳으로 진격하여 상륙한 곳이라는 익수씨의 자세한 설명이 뒤따른다. <함덕포>
당시 삼별초 이시화(李時和)등이 끝까지 저항을 하였으나 연합군의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돌진하고 장군 나유(羅裕)가 선봉대를 거느리고 맹공격을 하니 삼별초의 함덕 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한다. 함덕 상륙에 성공한 충렬공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파군봉(破軍峰. 약1200고지)에서 삼별초의 전초를 격파하였고, 명월포 앞에 있던 선단(30척)도 귀일포로 상륙하여 충렬공군에 합세하였으며 여몽연합군은 화공으로 항파두리성을 공격하여 삼별초의 유성장 김원윤(金元允), 김윤서(金允敍)등의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을 함락시켰던 것이다. 이곳 함덕에서 부터는 해변가로 도로가 잘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해변가로 돌담이 연이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삼별초가 1270년 이곳에 와서 제주인들을 총동원하여 갖은 무력을 행하며 쌓은 환해장성이라 한다. 장관이었다. 이곳에서부터 항파두리 앞 옹포 넘어 까지 제주도 북단 해안 전체를 돌로 성을 쌓았던 것이다. 이때 수많은 제주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한다. 식량공급이 안되어 자신의 대변을 받아먹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간다. 불과 2년만에 이 많은 공사를 해 냈던 당시 삼별초의 무력과 제주민들의 고초를 생각해 보았다. 1시간 여를 달려 애월리의 애월포에 닿았다. 이곳이 삼별초의 수군 사령부가 있던 곳이란다. 뒤쪽에 자리잡은 주성인 항파두리를 방어하는 곳이다. 멀리로는 파군봉과 항파두리성이 보인다. 충렬공은 섬의 중서부에 있는 이곳을 피해 함덕으로 양동작전을 벌이며 상륙작전을 폈던 것이다. 역시 이곳의 포구 주변에도 옛 부터 있어온 환해 장성의 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애월포와 환해장성(포구의 안쪽에 있는 돌담이 환해장성)>
포구 안쪽으로 들어가니 규모가 엄청난 애월진이 나온다. 해변임에도 갑자기 위치가 높아져 멀리 바다를 경계하기에 좋았다. 그 자리는 성곽만 옛날 그대로 돌로 쌓여 있고 성 안은 애월초등학교로 변했다. 정문 입구에는 안내 표석이 서 있다. "1271년(원종 12)삼별초의 난 때 목성이 축조되었으며 1581년(선조 14) 김대정 목사때 포구로 옮겨 돌로 쌓았다. 둘레 549척, 높이 8척이었으며 남과 서에 성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애월진 표석>
<애월진 내부(현 초등학교)>
이곳을 지나 해안가로 달려 한림을 지나 명월포로 간다. 그런데 명월포는 새로운 간척공사로 많이 좁아졌다. 이곳으로 2차 상륙을 했다고도 하고 조금 더 서쪽으로 가서 있는 옹포에 상륙했다고도 한다. 명월포에는 배가 없었고 옹포는 지금도 포구로 쓰고 있었다.
<명월포>
<옹포>
바로 눈 앞에 비양도가 있었다. 서녘 노을에 눈부신 저 섬, 당시 충렬공은 비양도를 은폐 엄폐물로 삼아 양동작전으로 삼별초군을 유인했고, 제주도를 관찰했으며 관군을 잠시 쉬게도 하며 전초기지로 사용했던 섬이다. 당시 긴요하게 섬을 활용했던 충렬공의 눈빛과 작전을 생각해 본다. 김통정이 이 유인책에 속아 함덕에서 온 충렬공 주력부대가 뒤에 있는 항파두리 성을 칠 때까지 바보처럼 비양도만을 바라보며 지키고 있던 포구다. 다시 차를 몰아 내륙으로 들어간다. 이제 항파두리로 간다. 마치 충렬공께서 공격해 가던 모습으로 말이다. ---계속---- <옹포앞 비양도>
다시 애월읍으로 되돌아갔다가 우회전하여 항파두리로 올라가는 길은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파군봉은 그 너머에 우뚝 서 있었다. 애월읍 古城里의 항파두리(缸坡頭里)란 지명에 대해 궁금했다. 우선 일반적인 다른 지명과 비교해 볼 때 어감상 특별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익수씨께서 우리 홈에 기고해 주신 적도 있지만(2002. 7. 14. <김방경과 제주>) 이 지명은 제주에서도 많은 이론이 있어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익수씨께서는 일찍이 깊이 연구하신 바 있었다. 1992년 11월 26일자 제민일보에 소개된 내용 일부를 잠시 정리해 본다.
"---항파두리의 어원을 살펴보면 항파와 두리의 합성어임을 알 수 있다. 항파(缸坡)는 고려때에는 缸破로 표기되었던 것이 조선조에 와서 缸波, 缸坡로 쓰이게 된 것으로 본다. 고성리가 해변이 아니므로 波에서 坡로고쳐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缸破>가 제일 먼저 나온 출전은 <高麗史>의 열전 중 裵仲孫條와 <高麗史 節要>의 元宗順孝大王庚午十一年條이다.
즉 고려사의 배중손조 중에 「강화에서 지키던 군사가 많이 도망하여 육지로 나가니, 적이 능히 지키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이에 함선을 모아 公私의 재화와 자녀를 모두 싣고 남으로 내려가니 仇浦에서 缸破江까지 배들의 꼬리와 머리가 서로 닿아 무려 천여 척이나 되었다…」고 했고 <고려사 절요>의 元宗 庚午 十一年條에도 똑같은 문장이 실려 있다. (중략) 仇浦란 지금의 강화도의 서쪽 內加面 外浦里의 外浦港을 일컫는다. 缸破江은 龍津鎭, 廣城堡, 德津鎭, 草芝鎭에 이르는 江華島 東岸의 남쪽 狹水路를 말함이다. 특히 좁은 곳은 急水門 또는 孫乭목이라고 부른다.
江華島와 金浦반도와의 사이 수로를 고려시대에는 江이라고 불렀다. <新東國與地勝覽>에 江華府의 궁궐조의 <公衙>중 鄭以吾의 記文에 「…이로써 바닷길이 오래도록 맑으며 전에 떠난 백성이 강을 건너 돌아와 그들의 밭을 갈고 집을 지어 삶을 편안히 하며 업을 번성히 했다…」고 하여 海路를 江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고려사 배중손조에도 「…국인(國人)이 많이 모였는데, 혹은 달아나 사방으로 흩어져서 배를 다투어 강을 건너기도 하고, 혹은 물 속에 침몰되기도 하였다. 삼별초가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고 강을 돌아다니며 크게 외치기를, …」라고 하여 강화도와 육지 사이를 江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강으로 보았던 것이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화부의 진들 중에 草芝鎭 옆에 舟工頭浦鎭이 있다고 했으며 강화지도에도 工舟頭鎭이 동남쪽에 나와 있다. (중략)
다음에 <두리>는 무엇인가? 頭里란 바로 <두레>의 한문표기인 것이다. 이병도 박사는 (중략) 두레는 삼남지방에 아직도 남아 있는 말로서 협동체, 공동체의 호칭으로 군사단체, 근로단체, 유희단체, 신앙단체, 공제단체, 경기단체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레는 徒의 뜻인 <들>(무리)이 그 어원이란 지적이다. (중략)
그러므로 <항파두리>를 풀이하면 缸破江을 떠나온 항몽집단체 내지 군사단체란 해석이 된다. (중략) 보다 정확한 기록에 근거한다면 위에 논증한 바와 같이 <缸破두레城>으로 불러야 될 것으로 본다."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익수씨의 해박하신 어원 분석에 감탄과 아울러 이를 정리해 두고 싶어 옮겨 적어 본 것이다. 익수씨는 아직도 지역 주민들은 그저 아무 어원 근거도 없이 그렇게 불러 왔다고 만 말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토로하신다.
城 가까이 가니 약간 우뚝 솟은 터에 토성이 길게 연하여 쌓여 있다. 동편 문으로 들어 가니 넓은 터가 나온다. 입구에서부터 웅장하다. 당시의 규모를 알만 하다. 불과 2년만에 이곳에 들어온 삼별초가 환해장성을 쌓고 또 이 토성을 인력으로 만들었으니 당시의 土役工事에 시달린 제주민들의 고역을 상상만 해도 아찔하였다.
<항파두리 토성> <입구의 안내도>(성곽 전체를 표시함)
성의 중앙으로 가니 담을 두르고 건물을 세운 항몽 유적 전적지가 있었다. 문 입구의 안내판에는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사적 제 396호)>라고 적고 삼별초군의 항몽사적과 정신을 찬양하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항파두리 안내판>
입구의 문에는 <순의문>이라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삼별초의 지휘부 건물이 있던 곳이란다. 커다란 돌에 새겨진 비석이 있다. 전면에는 <抗蒙殉義碑>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삼별초의 항몽정신을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역시 무인시대였던 1977년 박정희 정권 때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분향로도 있었다.
<입구의 안내판과 대문>
<항몽 순의비 비석>
한 역사를 어느 정치가의 세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마치 정설인 양 호도하고 어떤 건축물을 세운다 해도 결국은 사필귀정이라. 이 건물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입구의 좌측에 있는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니 당시에 사용하던 각종의 유물과 삼별초의 사건을 7폭으로 그린 그림들이 대형으로 걸려있다. 더러는 미화도 시키고 왜곡도 되어 있다고 보였다.
<삼별초의 항파두리 전쟁 장면> <기념관 내 유물들>
<기념관 앞의 항파두리 성내의 삼별초 건물 돌쩌귀 유물들>
이어 옆에 있는 관리실 안으로 들어가 삼별초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책 하나를 얻어 나왔다. 그리고 서쪽으로 나왔다. 이곳 토성 앞은 낭떠러지의 계곡이 천연 해자(垓字)로 잘 갖춰져 있었다. 토성 옆으로 난 북쪽 길을 따라 차로 돌았다. 토성의 위와 아래에서 싸우던 당시의 전투 장면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다시 동편 입구 가까이로 오니 <구시물>이란 곳이 나왔다. <구시>란 나무나 돌로 수로를 파서 만든 것이란 뜻인데 물이 귀한 제주에서 삼별초가 식수로 쓰던 우물이다. 잘 만들어져 있다. 토성 밖인 이곳에 또 작은 성을 쌓아 보호했다고 한다.
<삼별초의 식수터-구시물>
당시의 고려 관군과 삼별초의 전투를 잠시 생각해 본다. 어제까지 한 군 부대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전우들이 갑자기 적이 되어 눈을 부릅뜨고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죽이고 죽어야 하는 비극이 이곳에 있었다. 지정학적인 비극의 한반도 역사가 여기에 또 있어야 했다. 그 한 가운데에 우리 충렬공할아버지의 고뇌와 슬픔, 실행하고 싶지 않은 전쟁과 살육의 비극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죽은 이들은 누구며 그때 죽인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오늘의 우리는 또 어떤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가! 민족의 숙제인 이 한반도 관문국가의 괴로운 국제간 문제가 언제야 풀어 지려는가--- 가까운 저쪽의 파군봉(破軍峰)을 본다.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곳, 김통정과 부인 이화선이 함께 자진하였던 곳이다.
이제 날이 시나브로 어두워진다. 차의 라이트를 켰다. 급히 차를 몰아 가까이 있는 만호대를 찾았고 이어 옆에 있는 명월성지를 보았다. 더 이상 보고 싶어도 완전한 어둠으로 이젠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이내 차를 몰아 제주시로 들어갔다. 익수씨는 미리 예약해 두신 고급 일식집으로 우리를 데려 가신다. 처음 보는 산해진미의 음식이 연달아 나온다. 나도 아이들도 눈이 커지고 신기한 듯 이 음식 저 음식을 살핀다. 허기진 배, 지친 다리, 강행군으로 다닌 답사에 신기한 맛은 입을 놀라게 한다. 여기서도 익수씨의 해박하고 논리적이며 구수한 설명은 계속된다. 가끔 가다가 섞는 제주도 사투리에 향토색이 달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를 염려하여 알아듣기 쉬운 방언만 골라 하시는 것 같다.
저녁 9시 30분, 그래도 한 곳의 답사가 남았다고 하며 우리를 제주목사가 있던 관아로 안내한다. 서치 라이트 조명을 받아 밤이지만 전체를 잘 관람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복원된 목사의 관아라 한다. 밤 10가 넘었다. 작별하고 호텔로 들어가는 우리에게 갑자기 집 가까이 차를 정차시키더니 특별히 준비해 둔 밀감 한 박스를 주신다. 우리는 감사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 고마움을 어찌 다 갚을 수가 있을까? 제주에서의 밤은 아무래도 낯설다. 몇 잔의 술로 객수를 달래고 잠을 청한다. 내일은 7시에 일어나야 한다.
26일부터 이틀간 관광 버스를 타고 우리 가족은 일반 여행을 했다. 그 때도 틈틈이 익수씨는 우리를 챙기신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리가 탔던 <하나로 관광> 여성 가이드(김명희. 40대 초반. 제주 태생. 20년 가이드 경험)의 각 여행지 해설이 노련하기에 옆으로 슬그머니 찾아가 질문을 했다. 항파두리의 항몽 유적지에 대한 여행사 가이드의 설명내용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가이드는 항파두리는 일반 관광팀 코스에는 없고 대체로 중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단과 대학생들의 여행 코스에 넣는다고 한다. 그리고 예상대로 삼별초의 항몽정신과 민족, 自主 국방정신, 殉義정신을 강조한다고 한다. 그렇게만 설명하고 만다면 가이드의 해설 내용에 구체적인 거명은 없었지만 상대편 관군의 수장이었던 우리 충렬공 할아버지는 당연히 반민족주의자요 외세 의존주의자요 사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는가! 이것도 우리가 제주의 관광협회에 충분한 역사적 해설문을 보내어 바른 역사관에 의한 설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일이 앞으로의 남은 과제라고 생각했다.
여행 마지막 날, 익수씨는 비행장으로 전송을 나오셨다. 한 박스의 맛있는 밀감과 함께 몇 개의 답사 관련 자료를 급히 만들어 오셨다. 보잘 것 없는 나에 대한 님의 따뜻한 보살핌과 애정에 고개가 숙여진다. 너무도 감사하다. 아이들이 감사하여 더 어쩔 줄 몰라한다. 혈육의 정과 깊은 인간적 애정을 가슴속에 꼭꼭 담아 주신다. 비행기 탑승을 위해 출구로 들어가는 우리들의 마지막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님은 우리에게 손 흔들어 아쉬움을 보내신다. ---
8시 50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한 시간 여를 날아 김포에 도착했다. 11시가 넘자 서울 우리집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 왔다. 피곤했다. 그러나 보람과 기쁨이 가득한 여행이었기에 이렇게 가슴 뿌듯할 수가 없다. 컴퓨터가 보인다. <안동김씨 홈페이지>가 궁금하다. 전원을 키는 내 등 뒤에서 우리 홈을 더 걱정하는 우리집 아이들이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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