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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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한가락회>와 음수재

 

(2005. 8. 3. 발용(군) 제공)

지난 2004년 12월 5일(일). 한가락회(회장 斗皐 洪鳳性)는 우리의 중시조님이 모셔져 있는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의 충렬공 묘소 및 음수재를 참배하고 한시 및 시조 창작대회(제 177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 한가락회는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는 역사 유적지를 탐방하며 민족정신을 되새김과 동시에 탐방기 기술과 함께 현지에서 느낀 감회를 한시 또는 시조로 창작하여 기념물로 남기는 것을 취미로 삼는 모임이라고 한다. 참으로 놀랍고 존경해 마지않는 모임이었다.

 

 이때 참가하신 한가락회 23명 가운데에는 우리 문중 원로이신 전 문영공 종회장님이셨던 容大(익)님께서 함께하고 계셨다. 이날 현 대종회부회장님이신 명회부회장님께서 동행하셨는데 일행은 서울을 출발, 충렬공의 묘소를 참배하고 음수재에서 충렬공의 정신과 업적을 되새겨 본 후 현지에서 한시와 시조를 짓고 서울로 돌아 왔다고 한다, 이날의 탐방기와 창작시들이 한가락회에서 매년 발간하는 책자 <열다섯 번째 시조모음 한가락>(한가락 모임 엮음. 다운샘 출판. 2005. 4. 29) 속에 실려 있다.

 

     이상 한가락과 음수재(1) -- 작성자 :  김항용   

 

음수재(飮水齋)에서

 

                                  온 : 일흔일곱 번째 한가락 모임

                                  때 : 4337(2004)년 12월 5일, 일요일, 맑음

                                  곳 : 음수재(飮水齋) -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어제까지 추적거리고 내리던 비가 오늘은 개고 바람이 겨울 날씨 답지 않게 상쾌하게 불어온다. 이른 아침 6시에 집을 나서니 사방이 컴컴하다. 오늘은 한가락 역사탐방 제177회,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에 있는 여말(麗末) 충신 김방경 장군을 모시는 음수재(飮水齋)를 찾아가는 날이다. 김방경 장군은 동천서숙(東天書塾)에서 중관 선생님께 함께 한시를 수학하는 서원의 중시조 이기도 하다. 7시 15분 사당을 출발하니, 오늘 참석 인원은 선생님을 위시하여 안동김씨 대종회 부회장 김명회씨, 매현, 신갑주씨, 이한국씨, 갑고, 예주, 서봉, 세화, 손원장, 삼우당, 노산당, 서원, 임봉훈씨, 오외수씨, 석초, 이흥섭씨, 설전, 이한락씨, 고룡, 문화타임즈 강국장과 김현배씨, 필자 등 23명이다. 차안은 무두들 조용하다. 밖을 보니 해가 아직 뜨지 않아 부옇고,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조용히 겨울채비를 끝냈다. 차는 서울 나들목을 빠져나와 신갈 입체 교차로를 거쳐 용인 휴게소에 들렀다. 아침을 미처 들지 못하고 나온 회원들에게 간단히 아침 요기를 하게 하기위해서이다. 아침들을 해결하고 다시 용인을 출발하며 고룡 회장이 오늘 행사에 대한 안내와 이어서 문중의 인사 말씀이 있었다. 이어 고룡의 해설로 회동인물총기 중 신현 선생이 명에 들어가 명의 천자와 문답하는 내용의 강의가 있었다. 고룡 강의에 이어 노산당의 한시 감상시간, 기녀(妓女) 우돌(旴咄)의 한시(漢詩) 해설이 있었다. 한시 공부가 끝나고 밖을 내다보니 잎 떨어진 나무 앙상한 가지 위에 까치집이 오똑이 얹혀있고 한 해 동안 곡식을 길러낸 전답들이 가을걷이를 마치고 한가로이 누워있다. 이어 갑고님이 노산당이 해설한 우돌의 한시를 언제 들어도 청아한 소리로 창해 주셨다. 차는 영동 고속도로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특히 다리와 터널이 많은 중앙고속도로는 치악 터널을 지나자 상하행선이 서로 멀리 보면서 달리게 되는 구간에 들어서자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 보아도 좋은 경치가 펼쳐진다. 단양호수를 지나자 멀리서 중앙선 선로 위를 열차가 정겹게 지나간다. 영남의 관문 영주를 지나고 열시 조금 지나 서안동 나들목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가니 왼쪽으로 안동 과학대학이 보이고 장, 권, 김 삼태사 묘단소입구사거리를 지나 송현 오거리에 이르렀다. 오거리를 오른쪽으로 돌아 낙동강변 영호루를 건너다보면서 안동역 앞 삼거리에 이르르니 문중 김동수씨가 나와 맞아 준다. 문중 김동수씨 안내로 치암 고택을 지나고 구성 삼거리 상락군충열공신도비(上洛君忠烈公神道碑)라고 새겨진 비석(碑石)을 감싸 안치한 비각 앞에 섰다. 신도비(神道碑)를 돌아보고 마을 앞으로 난 작은 길을 거쳐 산속으로 난 길을 들어가다 보니 아스팔트 길이 나타나고 멀리 조선 기와집군이 보인다. 다가가 보니 오늘의 목적지 음수재(飮水齋)다. 재실 쳪으로 돌계단이 있는데 따라 올라 보니 돌 축대위에 고려식 방분(方墳)이 있는데 거북 대좌(臺座)위에 이수(螭首)를 얹은 비석에 ‘고려 추충 정란 정원 공신 벽상 삼한 삼중 대광 첨의 중찬 세자사 상락군 개국공 시 충열 김방경지묘(高麗推忠靖難定遠功臣壁上三韓三中大匡僉議中贊世子師上洛君開國公諡忠烈金方慶之墓)’라 새겨져 있다. 묘소앞 양편에 문인석이 있고 묘소는 실존하였다가 후에 광산김씨 묘소를 조성할 때 땅속에서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보전하였다고 한다. 우리 회원들은 공의 묘소 앞에 정열하여 참배를 하고 내려와 음수재뒤에 있는 사당에 들려 예를 올렸다. 사당 안에는 공의 영정(影禎)이 관복과 장군복의 모습으로 모셔져 있다. 우리는 이어 재실(齋室)로 돌아와 문중 분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문중 부회장 김명회씨로부터 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공은 여기에서 서쪽으로 100여리 떨어진 통사읍 회곡동에서 1212년에 출생하여  상낙대에서 무예(武藝) 공부를 하고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장군이 되었을 때 일본을 2번 정벌하러 갔었고, 사후에 묘소를 실전하였으나 200여년 후에 찾아서 지금과 같이 보전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선생님의 강의가 시작 되었다.

 

 공의 휘(諱)는 방경 안동인(安東人)으로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9세손이며, 증조(曾祖)의 휘(諱)는 의화(義和) 사호(司戶)이며, 조(祖)의 휘(諱)는 민성(敏誠) 장야서승겸직사관(掌冶署丞兼直史館)이며,고(考)의 휘(諱)는 효인(孝印) 정의 대부(正議大夫)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충사관(充史館) 수찬관(修撰官) 지제고(知制誥)이며, 비(妣)는 흥진부사(興鎭副使) 낭장(郎將) 송기(宋耆)의 따님이며, 처음에 임신(姙娠) 하였을 때 자주 꿈에 구름과 안개를 마셔 일찍이 사람들에 일러 말하기를 “항상 운기(雲氣)가 내 구비(口鼻)에 있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神仙) 사운데서 올 것이다.” 하였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충근(忠勤) 공검(恭儉)하고 신후(信厚) 침엄(沈嚴) 하였으며, 장군(將軍)겸 급사중(給事中) 어사중승(御使中丞), 금오위대장군지합문사(金吾衛大將軍知閤門事),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어사대부(御使大夫)로 게으르지 않고 결단이 분명하고 늠름해서 바람이 이는 듯 하였으며, 다들 두려워 하며 엄숙하게 생각하였으며, 백성의 희망으로 서북을 진압하러 갔을때 은혜와 위엄을 엊바꿔 써서 지금도 그 풍속에서 노래하고 추모하고 있다고 한다. 나라가 강화도에서 송도(松都)로 나올때에 일부 군인이 명령을 어기고 남쪽으로 내려 갔었는데, 고은 추밀원사(樞密院事)로 추토사(追討使)가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진도를 포위하고, 다음해 5월 까지 무려 15번을 크게 싸워 진압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대위(守大尉)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판이부사(判夷部事) 대자대보(大子大保)가 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후에 남은 무리들이 제주에 들어가 점거함에 공(公)은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가 되어, 계유(癸酉) 4월 28일 배로 바다를 건너가 봉둔(蜂屯)을 진압했으며, 원나라 조정에서 불러 침전(寢殿)에 들어가 음악을 연주하여 들려주고 잔치를 배풀어 주며, 수대사 개부의 동삼사 문하시중 상주국 팡어사대사(守大師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上柱國判御史臺事)를 받았으며, 이때에 또 일본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받들어 갑술(甲戌)년에 일본을 들어가 쳐서, 잡아온 포로와 베어온 괵(馘)이 매우 많았다. 경진(庚辰)년 겨울에 제소(帝所)에 들어가니, 제(帝)가 중봉대부 관 고려국 도원수(中奉大夫管高麗國都元帥)를 주었다. 신사(辛巳)년 여름에 또 일본에 들어갔으나 남송(南宋)군이 오기로 하였는데, 기일(期日)을 삼개월이나 어기고 그간에 병질(病疾)이 일어나 부득이 돌아왔다. 계미(癸未)에 글을 올려 간절히 물러날 것을 고하니, 위에서 삼한벽상 추충정란 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韓壁上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重大匡判都僉議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를 더하여 주었으며, 이에 벼슬을 떠났는데 위에서는 이에도 부족하여 병 신(丙申)년 겨울에 상락공(上洛公)으로 식읍(食邑) 일천호, 식실(食實) 삼백호를 봉(封)해줬다. 그후 충열(忠烈)이라 시호(諡號)를 내려주고, 신도비(神道碑)도 명(命)하여 세우게 했다. 충열왕(忠烈王) 26년 경자(庚子)년 가을 8월 16일에 백목동(栢木洞) 앵계리(鸎溪里)에서 병(病)으로 돌아가니, 유언(遺言)에 따라 9월 초삼일 예안(瘞安) 서쪽산 기슳에 장시지냈다. 사람이 살면서 귀히 여기며 이루기 바라는 것이 세가지 있는데, 공(公)은 백성을 구제(救濟)하여 이룬 덕이 하나이며, 산날이 팔십구세니 수(壽)가 eh 하나이며, 도원수(都元帥)에 이르렀으니 관작(官爵)이 또 하나라. 이 셋을 다 얻은 분은 오직 공 한 분이시다. 배(配)는 기거랑 지제고 박익정의 따님으로 삼남 삼녀를 두었으며 계배 손씨는 일녀를 두었다. 공(公)의 기식(器識)은 넓고 크며 작은일에 구애 되지 않았으며, 일을 결단함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집안 내력(來歷)으로 글씨와 시(詩)에 능했으며, 기골(氣骨)이 보통 사람과 달랐으며, 추위와 더위에 잘 견디어 무병(無病)하였으며 옛 친구를 버리지 않았으며, 의식(衣食)은 검소(儉素)하게 하였으며, 평생 위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으며, 매년(每年) 세시(歲時)에는 공경(公卿) 장상(將相)들이 먼저 와서 절을 하여 만세(萬世)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끝으로 선생님은찬시(讚詩)에서

 

山水秀靈人傑豊       永嘉鄕貫金門瓏

羅時王裔中興祖       麗夫元勳上洛公

理亂重任誠盡力       征倭大事惜歸恫

至今世故如當日       尙敎一謀俟舊功

 

산과 물 이 빼어나게 신령 스러우면 인걸이 많이 나는데

안동에 관향을 둔 문중에는 김문이 빛나는 구나

신라 왕족의 후예로 문중을 중흥시킨 할아버지요

고려 말의 큰 공을 세운 상락공이로다

난리를 다스리고 무거운 책임으로 정성껏 힘을 다하였고

왜를 정벌한 큰일은 아깝게도 슬픔으로 돌아 왔구나

지금 세상 연고가 그 당시와 비슷하니

부디 한꾀를 가르쳐 주어 옛 공과 같게하소서

 

라 하시고 강의는 끝났고, 시조와 한시를 목청껏 갑고님의 선창으로 불렀다. 이어 음수재 재실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안동 시내로 옮겨 이 고장에서 소문난 음식점 ‘옥동 칼국수’ 집으로 안내받아, 문중에서 정성으로 준비한 손칼국수와 동동주를 곁들인 점심을 푸짐하게 대접받고 문중 인사들과 작별하고 서울로 출발했다. 차가 고속도로 진입로로 들어와 내성천교를 지나자,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오외수씨가 하모니카를 들고 나와 한가락 탐방 중에는 처음으로 ‘비목’과 ‘그 집 앞’이란 노래를 정감 있게 불러주었다. 이어서 갑고님의 창으로 ‘도봉관풍’이란 한시창과 ‘바람’이 라는 시조가 이어졌다. 지는해가 서산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며 지난 한해를 돌아본다, EH 한해가 저물고 있다. 이렇게 이렇게…… 차는 병목지점을 피해 제천을 통해 박달재 터널을 지나고 감곡 나들목을 거쳐 다시 영동고속도로로 들어섰으나 지체가 심하다. 고속도로 나들목을 수차례 드나들며 서둘러서 올라오니 6시가 조금지나 궁내동 나들목을 지날 수 있었다. 나들목을 지나고 문중 김명회 부회장님의 작별인사와 고령 회장의 다음 행사를 안내하고 잠시후 사당에 이르러 오늘의 일정을 마쳤다.

 

다음은 선생님의 찬시(讚詩)에 운(韻)을 따서 지은 한가락 회원중 동천칠호(東天七豪)들의 율시(律詩)다.

 

                                                 西原 金容大

 

古邑永嘉遺蹟豊       綠田山麓高齋瓏

征倭大事都元師       救國靖難忠烈公

再拜焚香追慕敬       三杯獻酌淚心恫

宦途盡力吾門祖       靑史無雙萬世功

 

옛 고을 영가 땅엔 유적들이 많은데

녹전면 산기슭에는 높은 재실이 아름답구나.

왜를 정복하는 큰일을 하신 도원수요

나라를 구원하고 어려움을 안정시킨 충렬공이로다

지배하고 분향하며 추모하는 공경이요

삼배하고 술을 올리니 눈물 흐르는 마음 아프구나.

벼슬길에 힘을 다한 우리 문중 할아버지

청사에 둘도 없는 만대의 공이로다

 

                                                  濊州 金榮基

 

當到永嘉古跡豊       將軍神道元勳瓏

簪纓顯貴名門祖       危命授身忠烈公

蔭德繁孫猶讓逸       爲先微力恒呑恫

接賓厚禮期餘慶       代代兼成文武功

 

안동을 당도하니 고적이 많은데

장군의 신도비는 큰공이 빛나는 구나

벼슬높고 지위높은 명문의 할아버지요

나라가 위태하면 몸바친 충영공이로다

음덕으로 번성한 자손 오히려 편함을 사양했고

선조를 위하는 미력한마음 항상 아픔을 삼켰구나

손님을 후한예로 접대하니 남은경사를 기약하여

대대로 문무의 공을 겸해 이루리라

 

                                                  雪荃 任準新

 

夢裏祥雲生子豊       呱呱聲大金門瓏

羅時上係王孫閥       麗代華官宰相公

危亂重任常凱樂       征倭高責歸慷恫

昆仍誠懇崇齋室       今日京儒讚特攻

 

꿈속에 상소로운 구름은 큰아들을 낳으니

우렁찬 울음소리 김문이 환하구나

신라때 윗분들은 왕손의 집안이었고

고려때 빛나는 벼슬 재상이었구나

위난때 중한 책임 항상 개선해 즐거웠고

왜를 정벌할 높은 책임 마음 아프게 돌아왔구나

후손들은 정성 다해 지실 높혔고

오늘 서울 선비는 그 공을 특별히 찬양하도다

 

                                                  又仁 慶佑秀

 

我大震方名姓豊       三韓甲族金門瓏

福州陽地將軍廟       麗代忠臣高爵公

內治有勳人德果       外征無實天時恫

達尊三得眞稀事       仍夢旣成賢母功

 

우리 큰 진방에는 이름난 성씨가 많은데

삼한의 갑족으로 김문이 빛나는 구나

복주의 양지 바른곳 장군의 사당이요

여대의 충신이요 벼슬 높은 공 이로구나

내치의 공훈은 인덕의 결과요

왜국 정벌의 무실은 천시의 아픔이로다

달존 삼득은 참으로 얻기 힘든 일이나

잉몽시 이미 이룬 현모의 공이로다

 

                                            安一堂 李元熙

 

鯷域江山名所豊 福州祿轉齋宮瓏

羅王後裔金門長 麗代忠臣元帥公

渡海征倭猶有快 由風歸路何無恫

雲仍今日歡迎裏 一坐京儒讚大功

 

우리 강산에는 명소가 많은데

안동 녹전에 재실이 아름답구나

신라왕 후예 김문의 어른이요

고려 때 충신 원수공  이로다

바다건너 왜 정복은 오히려 통쾌함이 있었고

바람 때문에 돌아오는 길 어찌 아픔이 없었겠오

후손들이 오늘 환영 해주는 속에

한 자리에 앉은 서울 선비들 큰공을 기리는구나

 

                                                三友堂 張善淑

 

古色永嘉傳說豊 綠田幽谷金門瓏

羅時眞骨王城礎 麗代將軍忠烈公

雲霧夢中誠母訓 遠高陳上還元恫

再行東伐雖無實 惟一嗚呼痛快功

 

옛고을 영주에는 전설이 많은데

녹전 그윽한 골짝에 김문이 빛나는구나

신라때 진골로 왕성의 초석이요

고려때 장군인 충렬공이로다

구름안개 꿈속은 정성스러운 어머님 가르침이요

멀고 높은 싸움터에서 돌아온 큰 아픔이로다

두 번이나 동쪽을 침에 비록 실상은 없었으나

오직 한번 아…통쾌한 공이로다

 

마시는 맑은물에  힘 다시 솟아나고

이끄는 힘이 달라 눞자리 네모 반듯

기리는 높은 노래는  이어이어 뉘뉘로

           노산당 전향아

 

솔대의 마음이라 언제나 푸르르며

목말라 애타는데 물주는 집이로다

마침내 버릇 없을땐  거친 맛 좀 보이리

                      갑고 홍영표

 

안과 밖 다스리고 스스로 오래 살아

벼슬이 높았으니 세 가지 큰 것이라

딸 셋에 아들 셋까지 꿈속 놀이 점친 일

                     서봉 조철식

 

꿈으로 보여 알린 남다른 슬기론 이

나라의 어려움을 앞장서 치러내며

못다한 답답한 일은 물을 마셔 풀으리

                      설전 임준신

 

꿈속에 구름 안개 올 때에 남다르고

골고루 힘을 길러 세 덕을 이루었네

물 건너 겁줘 혼낸 일 떨친 이름 빚난다

                      우인 경우수

 

왜나라 치러 갔다 이루진 못했지만

이 나라 지난 자취 이런 분 있었던가

거기다 맑은 얼 윗물 내렸으니 말이오

                      석초 홍오선

 

떠오른 뭉개구름 온누리 포근히도

밝은빛 겨누어서 큰바람 휘어몰아

먼바다 언덕고을에 내깃발을 꽂고져

                      매현 김낙원

 

크나큰 몸가짐은 어긋남 하나 없고

바다 밖 다스리니 사람들이 노래했네

오늘날 나라사랑은 본떠가자 저 뜻을

                      예주 김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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