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본문

p11.png 충렬공(忠烈公) 연보

 

1) 金泰瑞(익) 본 (2003. 1. 17.)

 서기(간지)

년령

사     적 

 1212(임신)

 1세

안동대도호부 회곡리에서 탄생

 1227(정해)

 16세

음보로 양은사동정에 선임. 이어서 대정, 태사부견룡과 산원겸식목록사, 별장과 랑장감찰어사 등을 역임.

 1247(정미)

 36세

몽고병이 침공함. 서북면 병마판관에 피명. 북계에 들어가서 위도에 축제하여 난민을 득식이활케 함.

 미상

 

견룡행수, 좌금중지론섭장군 겸급사중어사중승, 대장군, 지합문형부사, 지어사대사겸 선군별감 등을 역임하면서 강도에 거함.

 1265(을축)

 54세

1월에 광평공 순과 함께 진봉사로 원에 가서 5월에 돌아옴.

 1268(무진)

 57세

2월에 상장군 전분의 무고로 인해 남경수로 좌천, 3일만에 판례빈성사 서북면병마어사와 내각으로 형부상서 추밀원부사에 승진,북계로 감.

12월에 임행이 김준을 죽이고 정권을 잡음.

 1269(기사)

 58세

6월에 임면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신왕으로 세움.

9월에 원경까지 가서 토역군을 청함

10월에 최탄, 한신 등이 북계에서 반란

12월에 동지추밀원사어사대부를 배명함

 1270(경오)

 59세

1월 몽장 몽가독군과 같이 서경(평양)에 머물면서 몽고군의 대동강 도하를 저지시킴. 행궁에 가서 왕을 배알함.

5월 강도에서 개경으로 환도, 이 때 삼별초가 반란함.

9월 전하도 추토사를 피명하여 몽장아해와 더불어 진도의 삼별초를 침.

 1271(신미)

 60세

5월 혼도. 홍다구와 더불어 진도의 삼별초를 섬멸함. 김통정이 삼별초의 여중을 거느리고 제주에 들어감.

 1272(임신)

 61세

4월, 전라도 전함 16,000항으로 탐라(제주)의 삼별초를 완전히 섬멸하고 6월에 개환하다.

 1273(계유)

 62세

1월 문하시랑에 승하고 판추토사가 되다. 2월에 중군행영병마원수가 되어 제주의 삼별초를 섬멸하다.

7월 원제 세조의 소환으로 원나라에 가서 금안. 채복. 금 은 전을 상으로 받다. 문하시중에 배명되다.

세조로 부터 개부의 동삼사에 배명되다.

 1274(갑술)

 63세

1월 동남도 도독사로서 홍다구와 함께 일본 정벌에 필요한 전함축조를 감독하다.

6월 원종이 사하고 거가 충렬왕으로 립하다.

7월 정동선봉별초를 거느리고 신왕을 계행하다.

10월 중군을 거느리고 일본정벌의 장도에 오르다.

12월에 일본에서 환사, 포로 남여 200명을 헌상.

 1275(을해)

 64세

1월 원나라에 가다.

첨의 중찬이 되다.

7월 성절사로 다시 원나라에 가서 호두금패를 받음.

 1277(정축)

 66세

1월 세자사에 피명.

10월에 판전리사사, 상장군, 판감찰사사와 판전리사사가 됨.

11월 위득유 노진의 등으로부터 모반의 무고를 받음.

 1278(무인)

 67세

2월 대청도에 유배되고 2자 흔은 백령도에 유배됨.

4월 위득유 등 원고와 함께 원제의 명으로 입원, 원고가 도중에서 모두 급사하므로 무죄로 판명됨.

10월 첨의중찬 상장군 판사철사사가 되고 은 10근이 하사 됨.

 1279(기묘)

68세 

세자사가 됨.

제3자 순이 문과 급제함.

 1280(경진)

 69세

7월.10월.11월의 3차에 걸쳐 청노걸퇴를 하였으나 왕이 불허함.

박구.김주정과 함께 동정군사를 사열함.

 1281(신사)

 70세

3월 2차동정에 오름. 합포에 도착. 5월 합포출발, 6월 대마도, 일기도, 박다에서 크게 승리함. 8월, 태풍으로 인해 회군함.

 1282(임오)

 71세

1월 원제가 정동행중서성을 폐지함.

 1283(계미)

 72세

12월 퇴직을 청하자, 왕이 추충 정란정원공신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 사사 세자사로 치사함.

 1285(을유)

 73세

상락군 개국공을 수봉하고 식읍 1천호, 식실봉 300호를 받았다.

 1286(병술)

 74세

안동에 가서 선조의 묘에 성묘를 하다.

 1300(경자)

 89세

8월 16일 백목동 앵계리에서 별세,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묘 근처에 장사하다.

 1307(정미)

 

선충 협모 정란 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에 추증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다.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우다.

 

   2)金甫榮(도) 본(2005. 6. 24.)

      * 작성 참고 자료 : 충렬공 墓誌文(1300.9), 충렬공 行狀(1350)

年齡

西紀

干支

王朝

主要官職 및  動靜

1歲

1212

壬申

高麗22代
康宗 1年

 ⊙安東 檜谷里에서 誕生(諱 方慶)
   父:金孝印(兵部尙書, 증중서령)
   母:金海宋氏(元興鎭副使 郎將 宋耆의 女)

16歲

1227

丁亥

高宗14年

 ⊙良醞署 同正(散職) 選任(蔭補)
 ⊙隊正(武官/從9品), 太子府 牽龍
 ⊙散員(正8品), 式目錄事 兼職

17~35
歲於間 

1228
~
1246

 

 

 

 ⊙西北面兵馬錄事
 ⊙別將(正7品)
 ⊙郎將(正6品), 監察御史(從6品)
   *1231年 蒙古 1次 侵入(1259年까지 29年間 6차례 侵略, 全國土 유린과 掠奪로 결국 降伏)
   *1232年 江華 遷都

36歲
 (註1)

1247

丁未

高宗34年

 ⊙西北面兵馬判官(正5品)
   *內陸 住民들은 山城 또는 섬으로 疏散 待避  
   *公은 韋島(黃海定州郡) 堤防築造, 農地開墾, 貯水池 開發
 ⊙牽龍行首 代授
 ⊙攝將軍(正4品/註2)兼 給事中兼, 御史中丞(從4品)

47歲

1258

戊午

高宗45年

 ⊙大將軍(從3品)
   *崔氏 武人政權(60年) 崩壞

52歲

1263

癸亥

元宗 4年

 ⊙知閤門刑部事及 知御史臺事(從3品)
 ⊙選軍別監使 兼職

54歲

1265

乙丑

元宗 6年

 ⊙蒙古 進奉使

56歲

1267

丁卯

元宗 8年

 ⊙上將軍(正3品/重房首將)

57歲

1268

戊辰

元宗 9年

 ⊙南京(지금의 서울)留守로 左遷(3日만에 復職)
 ⊙判禮賓省事(從2品)
 ⊙西北面兵馬使
 ⊙刑部尙書, 樞密院副使(正3品)

58歲

1269

己巳

元宗10年

 ⊙同知樞密院事(從2品), 御史大夫

59歲

1270

庚午

元宗11年

 ⊙三別抄 鎭壓 追討使
 ⊙守司徒(註3) 參知政事 頒給 拜受  
  * 39年만에 開京 還都 (6月 5日)

60歲

1271

辛未

元宗12年

 ⊙珍島 三別抄 鎭壓
 ⊙守大府(註3) 中書侍郞平章事(正2品/入相)(註4)
  *蒙古, 國號를 元으로 改稱

61歲

1272

壬申

元宗13年

 ⊙行營中軍兵馬元帥로 濟州討伐

62歲

1273

癸酉

元宗14年

 ⊙三別抄亂 平定
 ⊙[守大師(註3) 門下侍中]
 ⊙元帝 [開府儀同三司] 加授

63歲

1274

甲戌

元宗15年

 ⊙中軍都督使로 1次 日本 征伐( 對馬島,一岐島,하카다 )
   *次子 大將軍 忻, 사위 將軍 趙忭 從軍
 ⊙上柱國(註3), 判御史臺事

64歲

1275

乙亥

忠烈王元年

 ⊙匡靖大夫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從1品)
   *元制度를 避하여 [侍中]의 名稱을 [僉議中贊]으로 改稱

65歲

1276

丙子

忠烈王2年

 ⊙元의 [虎頭金牌] 受賞

67歲

1278

戊寅

忠烈王4年

 ⊙大靑島 流配(次子忻, 白翎島 流配)
 ⊙2個月만에 誣告로 判明,
   [僉議中贊] 復職
 ⊙[世子師 重大匡](註3) 兼職

69歲

1280

庚辰

忠烈王6年

 ⊙元官職[中奉大夫管高麗軍 都元帥] 除授(日本征伐 受命)
 ⊙元 賀正使(12月)

70歲

1281

辛巳

忠烈王7年

 ⊙2次 日本 征伐(對馬島, 一岐島, 하카다)
   *颱風으로 回軍(8月)

72歲

1283

癸未

忠烈王9年

 ⊙[三韓壁上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 三重大匡(註3)判都僉議事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註5)로 隱退
    *[判都僉議事]는 [僉議中贊]의 또다른 稱號임

75歲

1286

丙戌

忠烈王12年

 ⊙省墓次 故鄕 安東 訪問

85歲

1296

丙申
(註6)

忠烈王22年

 ⊙[上洛郡開國公] 加封(食邑1千戶, 食實封 3百戶 下賜 )

89歲

1300

庚子

忠烈王26年

 ⊙8月16日 別世(開京 栢木洞 鸚溪里)
 ⊙9月3日 禮安縣에 安葬

死後
7年

1307

丁未

忠烈王33年

 ⊙[宣忠協謀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 三重大匡] (註7) 追贈
 ⊙諡號 [忠烈] 下賜
 ⊙神道碑 建立 下命

 

註)

1. 作家[閔 幾]가 쓴 [國難을 克復한 安社功臣 金方慶] 資料에는 忠烈公께서 蒙古侵攻 당시 스무살로 西北面 兵馬判官에 任命되어 35歲까지 韋島에 있었다는 記錄이 있음.

2. 行狀原文에 [指諭攝將軍]으로 되어있는 것을 [諭攝將軍]으로 誤譯하고 있음. 武臣 최충헌도 [攝將軍]을 거쳤으며 삼별초난을 일으킨 노영희는 夜別抄의 [指諭]로 있었다는 記錄이 있음.

3. 高麗朝에는 恭愍王때까지 王의 顧問兼 元老인 三師(大師,大府,大保)와 無任所大臣인 三公(大尉,司徒,司空) 및 勳位(上柱國,柱國)가 있었으며 모두 正1品임.(단 柱國은 從1品이고 大師,大府,大保,大尉를 太師,太傅,太保,太衛로  司空을 司公 으로 記錄한 資料도 있음) 以外에도 文散階로 1品 鄕職인 壁上三韓三重大匡, 三重大匡등이 있었음.

4. 墓誌文에는 辛未年(1271) 珍島 平定후 [金紫光祿大夫 守大尉 中書侍郞平章事 判吏部事 大子大保]로 拜命되고 얼마후 [門下侍郞平章事]를 拜命하였다고 記錄되어 있음.

5. 行狀에는 [推忠靖難定遠功臣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致仕 된 것으로 되어있음.

6. 行狀에는 乙未年 12月(1285)에 [上洛郡開國公]에 封한 것으로 飜譯 되어있으나 公이 隱退한 癸未年 以後의 乙未年은 1295年이므로 墓誌文의 記錄대로 丙申, 冬으로 해도 無妨할 것임.

 

 3)장동익본 (2006. 12)

  *출전 : <충렬공 김방경>(2006. 12. 안동대학교 편저. 안동시 간)에서 발췌

 

시 기

연령

행 적

1212년(강종 1)

1

* 본관은 安東, 曾祖는 司戶 義和․祖는 掌冶署丞兼直史館 敏誠․父는 兵部尙書翰林學士 孝仁․外祖는 元興鎭副使郎將 宋耆(金海府人).

1224년(고종 11)

13

* 5월경 父 將仕郞․大官署丞兼寶文閣校勘 金孝仁이 寶鏡寺圓眞國師의 碑文을 씀.

1227년(고종 14)

16

* 三韓功臣 日兢의 蔭敍로 良醞史同正에 임명되었다가 借隊正․太子府牽龍을 거쳐 散員兼式目都監錄事에 임명됨. 이때 門下侍中 崔宗峻이 그의 忠直함을 사랑하여 禮로서 대우하고 큰일을 모두 맡겼다고 함.

1231년(고종 18)

20

* 8월 29일(임오) 蒙古元帥 撒禮塔이 咸新鎭을 포위하고 鐵州를 공격하여 몽고군의 침입이 시작됨.

* 10월 1일(계축) 蒙古人 2인이 牒을 가지고 平州에 오자 殿中侍御史 金孝仁을 파견하여 事由를 묻게 함.

1232년(고종 19)

21

* 6월 16일 首都를 江華島로 옮기기로 결정함.

1237년(고종 24)

26

* 4월 伯父 金敞이 判大僕寺事로서 國子監試를 주관함.

1242년(고종 29)

31

* 4월 9일(신유) 伯父 金敞이 樞密院副使로서 知貢擧가 됨.

이 후

 

* 西北面兵馬錄事․別將․郎將을 역임함.

* 監察御史(종6품)에 임명되어 右倉을 감독하여 請託을 받아들이지 않음. 宰相 某가 權臣(집정자 崔瑀로 추측됨)에게 김방경을 헐뜯자, 權臣이 김방경을 질책하였으나 굽히지 않았음.

1247년(고종 34)

36

* 西北面兵馬判官에 임명됨.

1248년(고종 35)

37

* 3월 北界(西北面)兵馬使 盧演에 명하여 蒙古兵을 피하여 人民을 이끌고 海島에 入保하게 함. 김방경은 兵馬判官으로서 葦島에 入保하여 堤防을 쌓아 10여리의 평야를 개간하고, 빗물을 用水로 사용하게 하자 人民이 편히 여김.

이 후

 

* 牽龍行首에 임명되어 解弛해진 宿衛를 철저히 하려고 함.

* 左禁中指諭․攝將軍에 임명됨.

1250년(고종 37)

39

* 5월 8일(계유) 父 金孝仁이 尙書左丞으로 同知貢擧가 됨.

1253년(고종 40)

42

* 11월 15일(경인) 김방경의 父 兵部尙書․翰林學士 金孝仁이 別世함.

1256년(고종 43)

45

* 2월 4일(을축) 伯父인 守太師․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金敞이 죽으면서 조카 金方慶에게 國葬을 사양하게 함.

이 후

 

* 將軍에 임명되어 給事中을 겸임함.

* 御史中丞(종4품)에 임명되어 법을 엄격히 준수함.

1260년(원종 1)

49

* 3월 1일(무진) 太孫(충렬왕)이 開城으로 還都하기 위해 大將軍 김방경 등을 出排別監으로 삼음.

* 3월 3일(경오) 김방경을 知刑部事로 임명함.

이후

 

* 金吾衛大將軍으로 知閣門事를 겸임함.

1263년(원종 4)

52

* 이해에 御史中丞(종4품)으로서 銓選을 장악한 知御史臺事(종4품)․左丞宣 兪千遇와 班次[官品]을 다툼. 이로 인해 김방경의 姻戚들의 仕宦이 막힘.

* 12월 20일(병인) 知御史臺事兼選軍別監使에 임명됨.

1265년(원종 6)

54

* 1월 25일(을미) 廣平公 恂․大將軍 金方慶․中書舍人 張鎰 등을 蒙古에 보내어 方物을 바침.

* 5월 1일(기사) 廣平公 恂․大將軍 金方慶 등이 蒙古에서 돌아옴.

이 후

 

* 御史大夫를 겸임함.

이 후

 

* 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되어 惠政을 베품. 母喪을 당하여 사직하고 돌아옴.

이 후

 

* 上將軍(정3품)에 임명됨.

1268년(원종 9)

57

* 2월 이 시기 이전에 重房의 將校를 班主인 鷹揚軍上將軍 田份의 미움을 받음. 이때 權臣(집정자 金俊으로 추측됨)에 의해 南京副使[南京倅]로 좌천됨.

* 2월 25일(병오) 西北諸城의 요청에 의해 남경에 부임한지 3일 만에 判秘書省事․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됨.

이 후

 

* 서북면병마사에서 돌아와 刑部尙書․樞密院副使에 임명됨.

1269년(원종 10)

58

* 6월 18일(임진) 임연이 宰樞를 모아 元宗을 廢位하기를 의논하고, 21일(乙未) 安慶公 淐을 옹립하고 원종을 別宮으로 옮김.

* 9월 7일(경술) 집권자[敎定別監] 林衍이 樞密院副使 金方慶․大將軍 崔東秀를 몽고에 보내 元宗의 廢位事件을 변명하게 함.

* 이때 몽고에 있던 世子(忠烈王)가 世祖에게 請兵하여 蒙哥篤 휘하의 軍士가 출동하게 됨. 문하시중 李藏用이 이들을 안내하게 될 인물로서 김방경을 추천하여 세자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몽고군과 함께 東京에 주둔함.

* 10월 13일(을유) 西北面兵馬使營의 記官 崔坦․韓愼이 반란을 일으켜 각지의 守令을 죽였으나, 김방경의 妹婿인 博州守 姜份․延州守 權闡만은 方慶의 緣由로서 禮로써 대접함.

* 11월 23일(갑자) 元宗이 복위함.

* 12월 13일(신사) 김방경이 同知樞密院事․御史大夫에 임명됨.

1270년(원종 11)

59

* 1월 9일(기유) 몽고에 파견되었던 門下侍中 李藏用․同知樞密院事 김방경 등이 東京[遼陽]에서 돌아와 東京부근의 行宮에서 몽고에 행차하던 원종을 알현함.

* 이 시기 이후에 김방경이 몽고장군 蒙哥篤과 함께 西京에 머물면서 崔坦․韓愼 등이 蒙哥篤에게 권하여 開京을 함락시키려는 획책을 저지시킴.

* 2월 25일(을미) 임연이 病死하고, 아들 林惟茂가 교정별감에 임명됨.

* 5월 14일(계축) 집권자 임유무가 피살됨.

* 5월 29일(무진) 사신을 강화에 보내 三別抄를 罷하게 함.

* 6월 1일(기사) 삼별초의 반란이 일어남.

* 6월 13일(신사) 김방경을 逆賊[三別抄]追討使로 임명함.

* 8월 19일(병술) 삼별초가 珍島에 入居함.

* 9월 7일(갑진) 申思佺을 代身하여 全羅道追討使(혹은 討賊使)에 임명되어 蒙古元帥 阿海와 함께 진도를 토벌함. 김방경이 阿海와 함께 羅州 부근의 三堅院에 駐屯하면서 진도와 對峙하였는데, 이때 潘南人 洪贊․洪機 등이 김방경을 阿海에게 참소하여 삼별초와 密通하고 있다고 보고함. 이로 인해 達魯花赤 脫朶兒에 의해 김방경은 면직되고 체포되어 개경으로 압송되었으나, 兩側의 對辯에 의해 誣告임이 확인되어 석방됨. 元宗이 脫朶兒에게 청하여 김방경을 다시 기용하게 하고서 上將軍으로 임명하여 삼별초를 치게 함.

* 12월 22일(정사)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러 삼별초와 싸울 때 阿海의 畏縮으로 인해 포위되었으나, 將軍 楊東茂에 의해 구원됨.

* 12월 守司徒․參知政事에 임명됨.

1271년(원종 12)

60

* 1월 5일(기사) 將軍 印公秀를 몽고에 보내어 阿海의 畏縮을 보고하자 世祖가 阿海를 소환함.

* 3월 3일(병인) 몽고가 忻都․史樞를 보내와 阿海를 代身하여 삼별초를 토벌하게 함.

* 4월 14일(정미) 追討使 김방경이 忻都와 삼별초의 왕래를 보고함.

* 5월 1일(계해) 洪茶丘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도를 토벌함.

* 5월 15일(정축) 김방경․忻都․홍다구 등이 진도를 공격하여 격파하여 僞王인 承化侯 溫을 죽이니 金通精이 餘衆를 이끌고 耽羅로 달아남.

* 11월 26일(병술) 追討使 김방경이 凱旋하여 戰功으로 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判吏部事에 임명됨.

1273년(원종 14)

62

* 1월 6일(경신) 門下侍郞平章事 김방경을 判追討事로, 樞密副使 邊胤을 追討使로 임명함.

* 2월 20일(계묘) 行營中軍兵馬元帥 김방경이 精騎 800을 거느리고 忻都와 함께 삼별초를 치기위해 耽羅로 출발함.

* 4월 28일(경술) 원수 김방경이 흔도․홍다구와 함께 탐라에서 삼별초를 격파함.

* 6월 16일(정유) 원수 김방경이 개선함.

* 윤6월 13일(계해) 삼별초 토벌을 포상하여 中軍元帥 김방경을 守太師․門下侍中으로, 兵馬使 邊胤을 判樞密院事로 임명함.

* 7월 16일(을미) 시중 김방경이 元에 불려갔는데, 世祖가 廣寒殿에서 引見하여 丞相의 다음에 앉히고 金鞍․綵服․金銀을 하사함.

1274년(원종 15, 충렬왕 즉위년)

63

* 1월 2일(경진) 시중 김방경이 일본정벌을 위해 戰船 300艘를 建造하게 하라는 元 中書省의 牒을 가져옴. 이때 開府儀同三司에 책봉되고 東南道都督使로 임명됨. 이때 洪茶丘(察忽)가 감독관으로 파견되어 옴.

* 이후 김방경은 전라도에 파견되어 造船을 감독하다가 6월 18일(계해) 元宗이 崩御하자 洪茶丘와 함께 歸京함.

* 7월 12일(병술) 김방경이 征東先鋒別抄를 거느리고 合浦로 출발함.

* 10월 3일(을사) 都督使 김방경으로 하여금 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金侁을 左軍使, 金文庇를 右軍使로 삼아 三翼軍으로 편성하고 8,000명을 거느리고 몽고군 25,000명과 함께 일본을 정벌하게 함.

* 10월 6일 東征軍이 對馬島에 상륙함.

* 10월 14일(병진) 一岐島에 이르러 海岸에 陣을 친 倭兵을 공격하여 1,000여급을 擊殺함. 이어서 伊蠻島로 나아가 三郞浦(鹿原)에서 상륙하여 中軍(김방경)․右軍(金文庇)은 伊蠻島를 공격하고 左軍(金侁)은 博多(朴加多)를 공격하여 왜병과 싸우다가 철수하여 전함으로 돌아옴. 이날 밤 큰 風雨가 있어 戰艦이 巖崖에 부딪혀 많이 破損되고 左軍使 金侁이 溺死함.

* 11월 27일(기해) 동정군이 합포에 돌아왔는데, 귀환하지 못한 자가 13,500餘人임.

* 12월 28일(경오) 侍中 김방경이 開京으로 還軍함. 上柱國․判御史臺事의 官爵이 더해짐.

1275년(충렬왕 1)

64

* 1월 8일(경진) 門下侍中 김방경이 大將軍 印公秀와 함께 元에 파견되어 일본원정의 부담을 감소하여줄 것을 요청함.

* 3월 20일(신묘) 김방경이 원에서 돌아옴.

* 10월 25일(임술) 官制의 改革으로 首相인 匡靖大夫․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됨.

* 12월 24일(경신) 上柱國이 더해짐.

1276년(충렬왕 2)

65

* 7월 17일(계축) 中贊 김방경이 直史館 文璉과 함께 함께 원에 파견되어 聖節(世祖의 生日)을 하례함. 王이 김방경의 삼별초토벌 및 일본원정의 전공을 포상하여 虎頭金牌를 下賜하여 줄 것을 요청함

* 9월 世祖를 알현하고 虎頭金牌를 하사받음.

* 10월 7일(무진) 김방경이 원에서 호두금패를 받아 돌아옴.

* 12월 16일(병자) 匿名의 誣告書에 따라 達魯花赤 石抹天衢에 의해 齊安公 淑․金方慶 등 43人이 叛逆의 혐의로 체포됨. 17일(정축) 亞相인 僉議侍郞贊成事 柳璥의 努力에 의해 公主(忠烈王妃)가 석방함.

1277년(충렬왕 3)

66

* 1월 1일(신묘) 중찬 김방경이 妻母의 喪을 당하였으나, 軍國의 事務가 번다하여 후일에 服을 입게 함.

* 1월 4일(갑오) 김방경을 世子師로, 柳璥을 世子傅로 임명함.

* 12월 13일(정묘) 前大將軍 韋得儒․中郎將 盧進義․金福大 등이 김방경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忻都에게 무고하자 왕이 贊成事 柳璥․元傅 등으로 하여금 東征元帥 忻都․達魯花赤 石抹天衢 등과 함께 심문하게 하고 무고임을 알고서 석방함.

1278년(충렬왕 4)

67

* 1월 18일(임인) 왕이 봉은사에서 忻都․洪茶丘와 함께 김방경․忻의 父子를 심문함.

* 2월 3일(병진) 왕이 국청사에서 忻都․洪茶丘와 함께 김방경․忻의 父子를 심문함. 이때 홍다구가 혹독하게 심문하였으나 끝내 自服하지 아니하자 병기를 私事로이 保管한 죄로서 大靑島에 유배함.

* 2월 10일(계해) 장군 印候를 원에 보내어 김방경을 유배시킨 것을 보고함.

* 2월 14일(정묘) 柳璥을 判典理司事로 임명함. 이때 홍다구의 청에 의해 韋得儒을 上將軍으로, 盧進義를 將軍으로 임명함.

* 3월 15일(무술) 위득유․노진의가 고려의 談禪法會가 元을 저주하는 행사라고 홍다구에게 전하자 홍다구가 이를 中書省에 보고함

* 4월 15일(무진) 印候가 원에서 돌아와 世祖가 김방경의 부자와 위득유․노진의로 하여금 왕을 隨從入朝하여 對辯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고 전함. 위득유와 노진의는 원에 가다가 노진의는 中道에서, 위득유는 大都에서 죽음.

* 6월 26일(무인) 왕이 中書省에 上書하여 김방경의 일과 담선법회를 변명함.

* 7월 3일(갑신) 왕이 세조를 알현하고 김방경이 무고된 것을 해명함.

* 7월 22일(계묘) 세조가 김방경을 赦免하고 왕을 따라 還國하게 함.

* 10월 3일(계축) 김방경을 僉議中贊․上將軍․判監察司事로 삼고 銀 10斤을 하사함.

* 10월 10일(경신) 僉議贊成事․判典理司事 柳璥이 辭職을 청하자 致仕시키고, 김방경을 判典理司事로 임명함.

* 12월 某日 洪茶丘의 一黨을 숙청한 일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元의 使臣 速魯哥가 중찬 김방경․判密直司事 許珙을 데리고 원에 돌아감.

1279년(충렬왕 5)

68

* 2월 29일(병오) 김방경을 重大匡․世子傅로 임명함.

* 6월 11일(정해) 셋째아들 恂이 別將으로 禮部試에서 2等으로 급제함.

1280년(충렬왕 6)

69

* 7월 7일(병오) 첨의중찬 김방경이 글을 올려 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함.

* 10월 30일(무술) 중찬 김방경이 글을 올려 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함.

* 11월 11일(기유) 右承旨 趙仁規․大將軍 印候를 元에 보내어 일본원정과 관련한 여러 문제의 해결을 청하면서 김방경을 위시한 장군들에게 官職을 내려줄 것을 청함.

* 11월 17일(을묘) 김방경이 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음.

* 11월 22일(경신) 중찬 김방경․密直副使 朴球․金周鼎이 東征軍士를 사열함.

* 11월 28일(병인) 중찬 김방경․장군 鄭仁卿을 원에 보내어 賀正하게 함.

* 12월 23일(신묘) 조인규․인후가 원에서 돌아와 충렬왕을 위시한 일본원정에 참여한 고려의 장군들에게 관직을 하사한 것을 전함. 이때 김방경은 中奉大夫․管領高麗軍都元帥에 임명됨.

* 賀正使로 元에 파견됨.

1281년(충렬왕 7)

70

* 1월 某日 김방경이 大明殿에서 賀正하고 侍宴할 때 世祖가 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게 하고 弓矢․劒․白羽甲을 하사함.

* 2월 歸國함.

* 3월 17일(임자) 元帥 김방경․萬戶 박구․김주정이 군사를 거느리고 合浦로 출발함.

* 4월 15일(경진) 왕이 합포에 도착하여 18일(계미) 閱兵함.

* 5월 4일(무술) 忻都․홍다구․김방경․박구․김주정 등이 군사를 이끌고 일본원정에 출발함.

* 5월 27일(신유) 忻都․홍다구․김방경이 世界村 大明浦에 이르러 通事 金貯로 하여금 檄文을 가지고 가서 타이르게 함. 김주정이 먼저 교전하였고, 이어서 諸軍이 모두 상륙하여 전투를 함.

* 5월 29일(계해) 行省의 摠把가 원정군이 26일(경신)에 一岐島로 향했다고 보고해옴.

* 6월 8일(임신) 김방경 등이 日本軍과 싸워 300여급을 참하고, 9일(계유) 다시 싸웠으나 洪茶丘의 군대가 패배함. 군중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戰死者․病死者가 3,000여명에 달함.

* 6월 15일(기묘) 이날 이전에 東路軍과 江南軍이 一岐島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나, 강남군이 도착하지 않음. 諸將이 回軍을 의논하니 김방경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음.

* 6월 25일(기축) 경 諸將이 회군을 의논하자 김방경이 강남군의 도착을 기다려 다시 공격하자고 주장하여 諸將이 수긍함.

* 7월 21일(갑인) 원수 김방경이 중낭장 朴昷을 보내와 諸軍이 太宰府에서 여러 번 싸우다가 退軍하였으나 蠻船[江南軍] 50艘가 合勢하여 다시 太宰府로 향한다고 보고함.

* 8월 1일(갑자) 東路軍 및 江南軍의 東征軍의 艦隊가 鷹島의 海上에서 大風雨에 의해 거의 반이 顚覆되고, 士卒 6~7/10이 喪失되어 回軍함.

* 8월 4일(정묘) 왕과 공주가 慶尙道에 행차함.

* 8월 14일(정축) 왕과 공주가 安東府에 도착함.

* 8월 16일(기묘) 別將 金洪柱가 合浦로부터 안동부의 行宮에 도착하여 원정군이 패하여 元帥 등이 합포에 귀환하였다고 보고함.

* 윤8월 2일(갑오) 김방경 등이 행궁에서 왕을 알현함.

1282년(충렬왕 8)

71

* 2월 3일(계사) 忽赤이 竹坂宮에서 왕을 향연하였고, 저녁에 왕이 南門에 행차해 있었는데 중찬 김방경이 술에 취하여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趙仁規의 참소를 받아 일시 巡馬所에 갇히었다가 석방됨.

1283년(충렬왕 9)

72

* 1월 21일(병자) 왕이 김방경의 집에 행차함.

* 12월 22일(신축) 中贊 金方慶이 致仕를 청하자 허락하고 三韓壁上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重大匡․判都僉議事․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上洛公으로 봉함.

1286년(충렬왕 12)

 

* 이 해에 왕에게 先山에의 省墓를 청하자 아들 恂을 太白山祭告使로 임명하여 함께 파견함.

1288년(충렬왕 14)

77

* 11월 6일(정해) 貢女를 선발할 때 前樞密院副使 洪文系(洪奎)가 응하지 않다가 처벌을 받게 되자 中贊致仕 김방경이 그를 위해 病中에도 나와서 請疏함.

1292년(충렬왕 18)

81

* 11월 27일(갑신) 왕이 중찬 김방경의 집에 행차함.

1295년(충렬왕 21)

84

* 1월 9일(갑인) 致仕한 김방경에게 (僉議中贊보다 上位로 新設된) 僉議令의 관직을 더해줌.

* 8월 27일(기사) 김방경에게 上洛郡開國公의 官爵을 하사함.

* 11월 12일 江陵道安集使를 통해 李承休에게 書狀을 전함.

* 12월 3일(임인) 세자(충선왕)의 청에 의해 上洛公 김방경에게 食邑 1,000戶 食實封 300戶를 하사함.

1296년(충렬왕 22)

85

* 2월 旦暮賻를 지어 보낸 李承休에게 書狀을 보냄.

1297년(충렬왕 23)

86

* 5월 25일(병술) 왕이 김방경의 집에 행차함.

1298년(충렬왕 24년, 충선왕 즉위․퇴위년)

87

* 1월 19일(병오) 왕이 세자(충선왕)에게 傳位함.

* 5월에 忠宣王妃 寶塔實憐 공주가 趙仁規의 딸인 趙妃를 妬忌하여 元에 사신을 보내 보고하려하자 上洛伯 김방경을 위시한 모든 致仕宰相들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음.

* 8월 18일(임신) 元의 使臣이 충선왕으로부터 國王印을 취하여 충렬왕에게 전하였고, 19일(계유)에 충렬왕이 復位詔書를 받음.

1299년(충렬왕 25)

88

* 1월 16일(정유) 萬戶 印候․金忻․密直 元卿 등이 恣意로 軍士를 동원하여 萬戶 韓希愈․上將軍 李英柱를 잡아서 謀叛을 도모하였다고 무고함.

1300년(충렬왕 26)

89

* 8월 16일(무오) 上洛公 金方慶이 開城 栢木洞 鸎溪里에서 別世.

* 9월 3일(을사) 遺言에 의해 禮安 西山에 安葬함. 이때 左承旨․判秘書寺事․文翰學士 李瑱이 墓誌銘을 지음.

충선왕대(1308~1313)

 

* 三韓壁上三重大匡宣忠恊謀定難靖國功臣으로 追贈되고, 諡號가 忠烈로 내려졌고, 神道碑가 王命에 의해 건립됨.

가족 사항

 

* 母는 元興鎭副使․郎將 宋耆, 夫人은 中書舍人․知制誥 朴益旌의 딸로 陰平郡夫人에 책봉됨. 소생은 3남(副知密直司事 愃․贊成事 忻․判三司事 恂) 3녀(壻 知密直司事 趙忭․將軍 金元沖․通禮門使 權允明). 後妻는 孫氏로서 1녀(壻 蔡宜=贊成事 蔡洪哲).

 

4)<김항용본>. (2009. 1. 7. 항용(제) 제공)

 *본 충렬공 연보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묘지명(족보본, 복제본), 행장, 묘비문, 김태영본(안동김씨 홈페이지, 역사적 인물 김방경란), 장동익본(<충렬공 김방경>. 2006. 12. 안동대학교 편저. 안동시 간) 등을 상호 비교하여 정리하였으며 서로 상이한 것은 별도의 주를 달았음. 특이한 관직명은 <高麗時代 官階 官職 硏究>(고려대출판부. 박용운저. 1997. 6), 국사대사전(새국사사전. 교학사. 1996) 등을 참고하여 주를 덧붙였음.

 

1. 1212년(강종 1). 1세

이름은 김방경(金方慶)이요 자(字)는 본연(本然)으로 경북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에서 3남 2녀 중 장자(長子)로 출생하였다. 신라 56대 왕인 경순왕 후손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증조(曾祖)는 예부시랑(禮部侍郞) 김의화(金義和), 조(祖)는 장치서승 겸 직사관(掌冶署丞兼直史館) 김민성(金敏成), 부(父)는 병부상서 한림학사(兵部尙書翰林學士) 김효인(金孝印), 모(母)는 원흥진부사낭장(元興鎭副使郎將) 송기(宋耆, 金寧人)의 따님인 금관국대부인(金官國大夫人)이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 했을 때 가끔 안개와 구름 속에 싸이는 꿈을 꾸어 사람들에게 “운기(雲氣)가 항상 코와 입에 닿으니, 아들이 반드시 신선 가운데에서 점지해 나오려는 듯하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랄 때는 할아버지 김민성(金敏成)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혹 자기 의사를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으면 으레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도리어 무서워하며 김방경을 피해 지나갔다 한다.

 

2. 1213년(강종 2). 2세

*8월 : 고려 고종이 즉위 하였다. 대륙에서는 몽고가 새로 일어나 거란과 대치하였다. 거란은 그동안 고려를 무수히 짓밟아왔던 숙적이었다. 따라서 고려는 몽고와 거란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었다.

 

3. 1219년(고종 6). 8세

*1월 : 몽고군이 거란의 모든 성을 처부수고 마지막으로 강동성(江東城)을 칠 때 고려의 서북면 원수 조충(趙沖)이 몽고의 요구에 의하여 몽고군과 합세하여 강동성을 함락하였다.

 

4. 1224년(고종 11). 13세

*5월, 부(父) 장사랑 대관서승 겸 보문각 교감(將仕郞․大官署丞兼寶文閣校勘) 김효인(金孝印)이 보경사 원진국사(寶鏡寺圓眞國師)의 비문(碑文)을 썼다.

 *조(祖-金敏成)로부터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에서 학문을 배웠고 낙동강 상류의 상락대(上洛臺) 등에서 심신(心身)을 연마하였다.

 

5. 1227년(고종 14). 16세

*5대조인 삼한공신(三韓功臣) 김일긍(金日兢)의 음서(蔭敍)로 양온서동정(良醞署同正)(주1)에 임명되었다가 차대정(借隊正.종9품)(주2) ․ 태자부견룡(太子府牽龍)을 거쳐 산원(散員.정8품) 겸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정9품)에 임명되었다. 이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忠直)함을 사랑하여 예(禮)로써 대우하고 큰일을 많이 맡겼다.

#주1. *양온서(良醞署) : 궁중에서 술을 바치는 일은 담당하던 곳. 문종때는 양온서(良醞署), 뒤에 장례서(掌醴署)로 고치고 신종때 양온서로 복귀했다가 충렬왕때 사온감(司醞監)으로 개칭했다.(새국사사전.교학사.1996. 이하 ‘국사대사전’이라 함),

*양온사(良醞史) : 행장, 장동익본

*동정(同正) : 일정한 직책이 아직 부여되지 않은 허직(<高麗時代 官階 官職 硏究>. 고려대출판부. 박용운저. 1997. 6. 참고.-이하 ‘고관연’이라 표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묘지명, 묘비문 : 기록 없음

 

#주2. *대정(隊正) : 행장,

*차대정(借隊正) : 장동익본

*고려사, 고려사절요, 묘지명, 묘비문 : 기록 없음

*차(借) : 일시 빌려서 하는 임시 직위(고관연)

*국사대사전 : 고려 무관직의 최 하위직

 

6. 1231년(고종 18). 20세

*8월 29일, 몽고 원수(蒙古元帥) 살리타이(撒禮塔)가 함신진(咸新鎭)을 포위하고 철주(鐵州)를 공격하는 등 몽고군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10월 1일, 몽고인(蒙古人) 2인이 첩(牒)을 가지고 평주(平州)에 오자 김방경의 부(父) 전중시어사 김효인(殿中侍御史 金孝印)을 파견하여 사유를 묻게 하였다.

 

7. 1232년(고종 19). 21세

*6월 16일,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약 10만에 이르는 개경의 민호(民戶)는 강제로 강화도로 옮기고, 강화도 천도가 적의(敵意)의 표시가 되어 이 해 가을 몽고의 살리타이는 대군을 이끌고 제2차 고려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때에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타버렸다. 그러나 수전(水戰)에 미숙한 몽고군은 천의 요새지인 강도를 쳐들어가지 못하고, 내륙지방을 짓밟아 엄청난 참상을 당하였다. 살리타이는 처인성(處仁城)에서 사살되었다.

 

8. 1237년(고종 24). 26세

*4월, 백부(伯父) 김창(金敞)이 판대복시사(判大僕寺事)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였다.

 

9. 1242년(고종 29). 31세

*4월 9일, 백부(伯父) 김창(金敞)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10. 이 후

*서북면병마록사(西北面兵馬錄事.정9품)․별장(別將.종7품)․낭장(郎將.정6품)을 역임하였다.

 *감찰어사(監察御史.종6품)에 임명되어 우창(右倉)을 감독하게 됨에 청탁(請託)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상(宰相) 모(某)가 권신(權臣. 집정자 崔瑀로 추정)에게 김방경을 헐뜯자, 이에 권신(權臣)이 김방경을 질책하였으나 굽히지 않았다.

 

11. 1247년(고종 34). 36세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정5품)(주3)에 임명되었다.

#주3

*김태영본 : 1231년(고종 18년. 20세)에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임명 되었다.

 

12. 1248년(고종 35). 37세

*3월, 왕이 북계(北界-西北面) 병마사(兵馬使) 노연(盧演)에게 명하여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북계의 여러 성(城)에 있는 백성들을 이끌고 해도(海島)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때 김방경은 병마판관(兵馬判官.정5품)으로서 위도(葦島-지금의 평안도 정주)에 들어갔다. 안북부(安北府)에 위도(葦島)라는 곳은 10여 리(里)나 되는 평탄하고 넓은 곳이 있었지만, 바다의 조수(潮水)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는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제방을 쌓고 개간(開墾)하여 종자를 뿌리게 하니, 백성들이 처음에는 괴로워하였으나, 가을이 되자 크게 풍년이 들었으므로 백성들이 그 힘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또한 섬에는 우물이 없어 물을 길러 간 자가 때때로 몽고병에 사로잡혀 가므로 김방경이 둑을 쌓아 빗물을 저장하여 못을 만들어 여름에는 끌어 물을 긷고, 겨울에는 얼음을 뜨게 하니 그 걱정이 드디어 사라지게 되어, 사람들이 그의 지혜에 탄복하였다.

 

13. 이 후

*견룡행수(牽龍行首)(주4)에 임명되어 해이해진 숙위(宿衛)를 철저히 하였다.

#주4. 견룡행수 : 고려시대에 국왕의 숙위 및 의식을 담당한 숙위군의 대장. 대전·동궁·제비주부의 숙위를 담당하고 태묘의식 등 각종 의식에 거의 참가하였으며, 의장에도 시종하였다. 말단의 무관직이나 국왕을 가까이 하며 총애를 받아, 권문세가 자제들의 관심 직책이었다.

 *좌금중지유 섭장군(左禁中指諭 攝將軍(정4품)(주5)에 임명되었다.

 

#주5 *攝將軍 : 장동익본, 행장

*고려사, 고려사절요, 묘지명, 묘비문 : 기록없음

*‘攝’은 실직이 아닌 임시 직위라는 의미.(고관연)

 

14. 1250년(고종 37). 39세  

*5월 8일, 부 김효인(金孝印)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주6)가 되었다.

#주6. *동지공거(同知貢擧) : 지공거(과거 시험관)의 바로 아래 직위

 

15. 1253년(고종 40). 42세

*11월 15일, 김방경의 부(父) 병부상서 한림학사(兵部尙書․翰林學士) 김효인(金孝印)이 별세하였다.

 

16. 1256년(고종 43). 45세

*2월 4일, 백부(伯父)인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 김창(守太師 門下侍郞平章事 判吏部事 金敞)이 죽으면서 김방경에게 국장(國葬)을 사양하게 하였다.

 

17. 이 후

*장군(將軍.정4품)에 임명되어 급사중(給事中.종4품)을 겸임함.

 *어사중승(御史中丞.종4품)에 임명되어 법을 엄격히 준수함.

 *1258년(고종45). 최씨무인정권 붕괴되었다.

 

18. 1260년(원종 1). 49세

*3월 1일, 태손(太孫-충렬왕)이 옛 서울 개경으로 환도(還都)하고자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다. 대장군 김방경(金方慶)과 장군 김승준(金承俊) 등을 출배별감(出排別監)으로 삼아, 창고의 쌀 6천 4백 20휘(角斗)를 꺼내어, 제왕(諸王)과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고, 서울에 집을 짓는 비용에 보태게 하였다.

 *3월 3일, 지형부사(知刑部事.종3품)에 임명되었다.

 

19. 이후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종3품)으로 지합문사(知閤門事.종3품)(주7)를 겸임하였다.

#주7. *지합문사(知閤門事) : 행장, 묘지명, 고관연, 국사대사전

*지각문사(知閣門事) : 장동익본.

*고려사, 고려사절요, 묘비문 : 기록 내용 없음

 

20. 1263년(원종 4). 52세

*어사중승(御史中丞.종4품)으로서 전선(銓選)을 장악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종4품) 좌승선(左丞宣) 유천우(兪千遇)와 반차(班次-官品)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이로 인해 김방경 인척들의 사환(仕宦) 길이 막히었다.

 

 *12월 20일, 김방경(金方慶)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종4품) 겸 선군별감(兼 選軍別監使. 종3품)에 임명되었다. 김방경은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고 풍절(風節)이 늠름하였다(<麗史制綱>). 방경은 안동인(安東人)인데, 성품이 엄격하고 굳세어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감찰어사(感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감독하였는데 청탁이 행하여지지 않았다. 재상(宰相)이 권신(權臣)에게 참소하기를, "지금 어사는 전의 어사가 봉공(奉公)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때마침 방경이 이르자 권신이 힐책하니, 대답하기를, "전의 어사와 같도록 하려면 나도 또한 그렇게 할 수는 있다. 나는 나라의 창고를 쌓는 것이 요긴하지 여러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는 없다." 하니, 참소한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을 때 금위군(禁衛軍)이 권문(權門)에 다투어 아부하느라고 숙위(宿衛)가 몹시 게을러지니, 방경이 이에 분노하여 비록 병이 있었으나 휴가를 청하지 아니하였다. 어사대에 들어와서는 법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서 풍채와 절개가 늠름하였다(<東史綱目>)

 

21. 1265년(원종 6). 54세

*1월 25일, 광평공 순(廣平公 恂)․대장군 김방경(大將軍 金方慶)․중서사인장일(中書舍人 張鎰) 등을 몽고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5월 1일, 광평공 순(廣平公 恂)․대장군 김방경(大將軍 金方慶) 등이 몽고에서 돌아왔다.

 

22. 이 후

*어사대부(御史大夫.정3품)를 겸임하였다.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되어 혜정(惠政)을 베풂. 모상(母喪)을 당하여 사직하고 돌아왔다.

 *상장군(上將軍.정3품)에 임명되었다.

 

23. 1268년(원종 9). 57세.

 *2월, 중방(重房) 장교(將校)들의 반주(班主)인 응양군상장군 전빈(鷹揚軍上將軍 田份)의 미움을 받았다. 이때 권신(權臣.집정자 金俊으로 추측됨)에 의해 남경부사(南京副使)로 좌천되었다.

*2월 25일, 남경에 부임한 지 3일만에 북계(北界) 40여 성(城)에서 글을 올려서 김방경(金方慶)이 이 지역에 다시 와서 진무(鎭撫)하기를 청하니, 왕이 김방경을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정3품)(주8) 西北面兵馬使(주9)로 삼았다. 방경이 앞서 북계를 진수(鎭守)하면서 백성에게 유애(遺愛)가 있었기 때문이다(<麗史提綱>).

#주8.  *判禮賓省事 : 고려사. 고려사절요, 행장, 김태영본, 국사대사전

*判秘書省事 : 장동익본

#주9. *西北面兵馬使 : 장동익본, 김태영본

*北界兵馬使 : 고려사절요

 

24. 이 후

*서북면병마사에서 돌아와 형부상서(刑部尙書.정3품)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정3품)(주10)에 임명되었다.

#주10.

 *김태영본 : 1265년(원종 6). 김방경(金方慶)을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삼았다.

 

25. 1269년(원종 10). 58세.

 *6월 18일, 임연이 재추(宰樞)를 모아 원종(元宗)을 폐위(廢位)하기로 의논한 뒤, 21일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옹립하고 원종을 별궁으로 옮김.

*9월 7일, 집권자 교정별감 임연(敎定別監 林衍)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김방경(金方慶), 대장군(大將軍) 최동수(崔東秀)를 몽고에 보내 원종(元宗)의 폐위사건(廢位事件)을 변명하게 하였다.

배신(陪臣)이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전왕(前王)이 질병에 걸려 크게 위독하므로, 장차 분수를 지켜 목숨을 연장하려고 하여, 간절히 영화를 사양하고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또한 형이 왕위를 사양할 때에는 그 아우에게 전하라는 것은 선왕(先君)의 유언이 있었고, 또 이 번국(藩國)의 왕위를 하루라도 비워 두기가 어렵습니다. 국왕은 진실로 부왕(父王)의 명령을 거스르거나 신자(臣子)의 상도(常道)에 어긋날까 두려워하여, 이에 어쩔 수 없이 임시로 국사를 맡아보고, 문득 그 사유를 자세히 써서 서둘러서 아뢰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때 몽고에 있던 세자(世子-忠烈王)가 원나라 세조(世祖)에게 병사를 내어 줄 것을 요청하여 몽가독(蒙哥篤) 휘하의 군사를 출동하게 하였다. 문하시중 이장용(李藏用)이 이들을 안내하게 될 인물로서 김방경을 추천하였다. 이것이 세자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김방경은 몽고군과 함께 동경(東京)에 주둔하였다.

 *9월, 유천우(兪千遇)를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김방경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종2품) 어사대부(御史大夫.정3품)(주11)로 삼았다.

 

처음에, 천우가 좌승선(左承宣)이 되어 오래 정병(政柄: 관리임명권)을 잡았으므로 사대부(士大夫)가 다 따라붙었다. 방경이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있을 적에 길에서 그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揖)하였다. 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명을 받드는 몸이라, 3품 이하는 다 은피(隱避)하는데, 그대는 어찌 그러하오?" 하니, 방경이 말하기를, "그대와 나는 다 3품이나 그대가 조삼(早衫) 차림으로명을 받든 몸이니, 내가 예를 행하고자 할 따름이오." 하여 오래도록 서로 따지다가 방경이, "해가 저물었소." 하고 먼저 갔는데, 천우가 이 때문에 유감을 품었다. 그래서 방경의 친족으로 벼슬을 구하는 자는 다 억제 하였으나 방경은 개의하지 않았다. 뒤에 진도(珍島)를 공격할 때에 천우의 전장(田庄)이 장사(長沙)에 있었으나 방경은 요란 피우지 말라고 경계하였다(<東史綱目>)

 

#주11. *고려사 : 9월, 김방경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종2품) 어사대부(御使大夫-정3품)에 임명되었다.

*장동익본, 김태영본 : 12월 13일,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종2품) 어사대부(御史大夫.정3품)에 임명되었다.

*행장 : 12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종2품) 어사대부(御史大夫.정3품)에 임명되었다.

*고려사절요, 묘지명, 묘비명 : 기록 없음

*10월 13일,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 최탄․한신(崔坦․韓愼)이 반란을 일으켜 각지의 수령을 죽였으나, 김방경의 매서(妹婿)인 박주수 강빈(博州守 姜份) ․ 연주수 권천(延州守 權闡)만은 방경(方慶)의 선정(善政) 연유(緣由)로 인해 해를 입히지 않고 예로써 대접하였다.

 *11월 23일, 원종(元宗)이 복위하였다.

 

26. 1270년(원종 11). 59세

*1월 9일, 몽고에 파견되었던 문하시중 이장용(門下侍中 李藏用)․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종2품) 김방경 등이 동경(東京-遼陽) 부근의 행궁에서 몽고로 행차하던 원종을 알현하였다.

몽고에서 몽가독(蒙哥篤)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경(西京)에 주둔하게 하였다. 처음에 세자(世子)가 임연(林衍)의 변란소식을 듣고 몽고에서 군사를 내어 줄 것을 청하니, 몽고는 바로 몽가독을 파견하였고, 몽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떠나려고 하는데,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몽가독이 만약 오랫동안 서경에 머물고 있으면, 임연이 이미 황제의 명령을 배반 하였으니, 반드시 군량미를 공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히 임연과 내통하지 않을 사람을 뽑아서 함께 가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세자가 그 인선(人選)을 어렵게 여기니, 시중 이장용(李藏用) 등이 말하기를, "김방경(金方慶)이 두 번 북계(北界)의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백성들에게 남긴 은혜가 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불가 합니다." 하였다. 이에 김방경에게 몽가독을 동반하여 가게 하였다.

 

김방경이 계책을 말하기를, "몽고 관군(官軍)이 서경에 이르러 만약 대동강(大同江)을 건너면, 왕경(王京)이 저절로 혼란하여져 장차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우니, 황제의 분부를 받아서 대동강을 건너지 말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므로, 마침내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이것을 윤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에 이르니, 부로(父老)들이 울면서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공이 만약 여기 있었다면 어찌 최탄(崔坦)과 한신(韓愼)의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고, 다투어 와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이때에 최탄 등은 몽고 군사에게 의지하여 속으로 고려가 허약한 틈을 타서 나라를 방탄할 뜻이 있어서, 몽가독을 후하게 대접하고 날마다 간사한 계략으로 꾀었으나, 김방경이 언제나 계책을 내어 이를 저지 시켰다.

 

임연은 왕이 몽고 군사를 청하여 옛 서울 개경을 회복하려는 것이 염려되어, 황제의 명령을 거역 하고자 지유(指諭) 지보대(智甫大)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황주(黃州)에 주둔하게 하였고, 또 신의군(神義軍:三別抄의 하나)으로 하여금 초도(椒島)에 주둔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최탄과 한신 등이 그 음모를 알고 비밀히 배(舟楫)와 복병(伏兵)을 갖추고, 남몰래 몽가독에게 이르기를, "임연 등이 장차 몽고 관군을 죽이고 제주도(濟州島)에 들어가려고 하니, 청컨대, 관인(官人)께서 나가서 사냥한다고 말을 퍼뜨리고서 고려 경군(京軍)의 왕래하는 상황을 살펴서 서로 보고하게 하면 우리들은 수군(舟師)으로 보음도(甫音島), 말도(末島)에 진군하고 관인께서는 군사를 거느리고 착량(窄梁)에 나가면 저들이 능히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 정상을 알아낸 다음에 황제에게 자세히 아뢴다면, 왕경(王京)을 빼앗을 수 있으며, 고려의 자녀(子女)와 옥백(玉帛)을 다른 놈들이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몽가독이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오득공(吳得公)이란 자가 최탄의 내상(內廂)으로 있었는데, 그것을 알고 비밀히 김방경에게 고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하니 오득공이 말하기를, "만약 믿지 못하시겠거든, 남몰래 정찰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김방경이 몽가독의 관문(館門)에 나아가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모이고 최탄 등이 기뻐하는 빛이 있는 것 같았다. 몽가독이 김방경에게 이르기를, "객지에 오래 있어서 무료하므로, 사냥이나 즐기겠는데, 공은 나를 따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였다. 김방경이, "어느 곳에서 사냥할 겁니까?" 하니 몽가독이, "대동강을 건너서 황주(黃州), 봉주(鳳州)에 이르러 초도(椒島)까지 들어가겠습니다."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관인(官人)께서 황제의 분부를 들었을 터인데, 어찌 강을 건너려 하십니까?" 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몽고사람이 활쏘고 사냥하는 것을 일삼는 것은 황제께서도 또한 알고 계신데, 그대가 어찌 이를 막는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내가 사냥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동강을 건너가는 것을 금지할 뿐입니다. 만약 관인께서 사냥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어찌 반드시 강을 건너 저쪽으로 간 다음이라야 즐겁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몽가독이 말하기를, "만약 대동강을 건넜다고 죄를 받는다면 내가 혼자 당할 터인데, 그대에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있는데, 관인께서 어떻게 강을 건너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 건너고 싶거든, 반드시 황제의 명령을 품신(稟申)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김방경이 비밀히 지보대등을 타일러서 군사를 후퇴 시키도록 하였다.

 

몽가독은 김방경의 충성과 정직이 천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고 크게 그를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서, 사실대로 고하기를, "고려 왕경(王京)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최탄의 무리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였다.

 

 *2월 25일, 임연이 병사하고,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교정별감에 임명되었다.

 *5월 14일, 집권자 임유무가 피살되었다.

 *5월 29일, 사신을 강화에 보내 삼별초(三別抄)를 파(罷)하게 하였다.

 *6월 1일, 삼별초의 반란이 일어났다.

 *6월 13일, 김방경을 역적(逆賊-三別抄) 추토사(追討使)로 임명하였다. 김방경은 군사 6천여명을 거느리고 몽고의 송만호(宋萬戶) 군사 1천여 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였다.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적선이 영흥도(靈興島: 지금의 南陽)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김방경이 이를 공격하려고 하니, 송만호가 두려워하여 이를 만류 하였는데, 적은 이에 도망 하였다.

 

적중(賊中)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온 자가 남녀노소 모두 1천여 인이나 되었는데, 송만호가 ‘적의 도당’이라 하여 모두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다. 방경이 돌려보내 주기를 행성(行省)에 청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은 자가 많았다.(<東史綱目>)

 

 *8월 19일, 삼별초가 진도(珍島)에 입거(入居)하였다.

 *9월 7일, 신사전(申思佺)을 대신하여 전라도 추토사(追討使, 혹은 討賊使)에 임명되어 몽고 원수(蒙古元帥) 아해(阿海)와 함께 진도 토벌에 나섰다. 김방경이 아해(阿海)와 함께 나주(羅州) 부근의 삼견원(三堅院)에 주둔(駐屯)하면서 진도와 대치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몽고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군사 1천 명을 이끌고 진도(珍島)를 토벌 하였는데, 이때에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하여 여러 주, 군(州郡)이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맞이하여 항복하였다.

적이 장차 나주에 이르려고 하자, 부사(副使) 박부(朴浮)등이 망설이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나주 향리(鄕吏) 정지려(鄭之呂)가 분개하여 말하기를, "만약 성에 올라가서 굳게 지키지 못한다면, 차라리 산골짜기로 군사를 피할 것이지 무슨 면목으로 고을의 수리(首吏)가 되어서 나라를 배반하고 적을 따르겠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사록(司錄) 김응덕(金應德)은 성품이 본래 용감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분연히 성을 지키기로 뜻을 결정하고 금성산(錦城山)에 들어가서 지키면서, 가시나무를 꽂아 목책(木柵)을 만들고 군졸을 거느리고 독려하였다. 적이 포위하고 공격하자, 상처를 싸매고 결사적으로 지키니, 적이 무릇 이레 동안 밤낮으로 성을 쳤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을 사람 김서(金敍), 정원기(鄭元器), 정윤(鄭允) 등이 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니, 왕이 가상하게 여겨서 김응덕에게 7품 벼슬을, 김서 등에게 섭오위(攝伍尉) 벼슬을 내려 주었고, 또 미곡을 내려 주었다. 처음에 적들이 나주를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를 치니,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항복할 것을 논의 하였으나, 전주 사람들이 또한 망설였는데, 김방경(金方慶)이 도중에서 이 말을 듣고 군사를 버리고 갈 길을 재촉하여 남쪽으로 가서 먼저 전주에 통첩하기를, "아무 날에 마땅히 1만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고을에 들어갈 것이니, 곧 군량미를 준비하고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주에서 그 통첩을 나주에 보이니 적이 이 소문을 듣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가버렸다. 이 뒤로부터 적은 다시 여러 고을을 함부로 노략질 하지 못하였다.

 

김방경이 탄핵하여 아뢰기를, "토적사(討賊使) 상장군 변윤(邊胤), 장군 조자일(曹子一), 공유(孔愉)는 적이 금성(錦城)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구원하지 않았으니, 섬에 유배시키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왕이 용서하고 삭직(削職)에만 그쳤다. 공유는 환관과 서로 결탁한 때문에 죄를 면할 수 있었다.

 

 *11월, 김방경(金方慶)이 아해(阿海)와 함께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여, 진도(珍島)를 마주보고 진을 쳤다. 적들이 약탈한 배에 모두 괴수(怪獸)를 그렸는데, 강을 가리우고 물에 비치어 배가 움직이면서 굴러가는 것이 마치 날아가는 듯하여, 능히 감당할 수가 없는 형세였다. 매번 싸울 적마다 적군(賊軍)들이 먼저 북을 둥둥 울리고 돌진하여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여러 날 동안 서로 버티었다. 마침 반남(潘南) 사람 홍찬(洪贊) 홍기(洪機)등이 적중(賊中)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와서 아해(阿海)에게 말하기를, "김방경. 공유(孔愉) 등이 남몰래 적과 내통 합니다." 하니, 아해(阿海)가 그 말을 믿고 다루가치(達魯花赤)에게 보고 하였으므로, 다루가치가 김방경을 소환하여 홍찬과 대질하게 하고, 참지정사 채정(蔡禎)에게 대신 하게 하였다. 아해가 김방경을 오라로 묶어서 왕경(王京)으로 보내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홍찬과 대질시키니, 홍찬이 무고(誣告)한 것을 자백 하였으므로, 이에 김방경을 석방하였다.

 

원종(元宗)이 탈타아(脫朶兒)에게 청하여 김방경을 다시 기용하게 하고 상장군(上將軍.정3품)으로 임명하여 삼별초를 공격하게 하였다.

 

 *12월 22일,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러 삼별초와 싸울 때 아해(阿海)의 외축(畏縮)으로 인해 포위되었으나, 장군 양동무(楊東茂)에 의해 구원되었다.

 *12월, 수사도 참지정사(守司徒 參知政事.종2품)에 임명되었다.

 *윤월, 왕이 다루가치(達魯花赤)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진도(珍島)에 이르니, 적이 모두 배를 타고 기치(旗幟)를 벌여 세우고 징과 북소리를 울리며 바다를 크게 들끓게 하였다. 또 성(城) 위에서도 북을 치고 크게 소리를 질러서 기세를 돋우니, 아해(阿海)가 싸우기를 겁내어 배에서 내려 천막을 쳤다가, 또 물러가서 나주(羅州)에 주둔 하도록 명령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수가 만약 물러간다면 이것은 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오. 적이 승승장구(勝勝長驅)한다면, 누가 감히 그 예봉(銳鋒)을 감당할 수가 있겠소? 황제께서 만약 문책 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 하겠소?" 하니, 아해가 감히 물러가지 못하였다. 김방경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공격하자, 적이 전함(戰艦)을 가지고 이를 역습하자 관군이 모두 달아났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결승(決勝)은 오늘에 달려있다." 하고, 적진 가운데로 돌진하니, 적이 배로 포위하여 몰고 갔다. 김방경의 배에는 화살과 돌이 모두 다 떨어지고, 군사들은 모두 화살에 맞아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미 진도(珍島)에 가까워지니, 언덕에 적의 군사가 있다가 칼날을 번득이면서 배 가운데로 뛰어들자 김천록(金天祿)이 짧은 창으로써 그들을 거꾸로 찔렀다. 김방경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차라리 고기의 뱃속에 장사지내는 신세가 될지언정, 어찌 적의 손에 죽을 수 있겠는가?" 하고, 바다 가운데로 몸을 던지려고 하니, 위사(衛士) 허송연(許松延). 허만지(許萬之) 등이 이를 만류하고 사람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웠다. 김방경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큰 배를 가지고 공격하여 구원하자 비로소 적이 흩어지므로 포위를 뚫고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김방경이 장군 안세정(安世貞), 공유(孔愉) 등이 달려와서 구원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죄를 따지고 목을 베려 하자 아해가 만류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27. 1271년(원종 12). 60세

*1월 5일, 장군 인공수(印公秀)를 몽고에 보내 삼별초와의 전투시 아해(阿海)의 외축(畏縮)을 보고하자 세조(世祖)는 아해(阿海)를 소환하였다.

 *3월 3일, 몽고에서 흔도(忻都)․사추(史樞)가 와서 아해(阿海)를 대신(代身)하여 삼별초 토벌에 참여하였다.

 *4월 14일, 추토사(追討使) 김방경이 흔도(忻都)와 삼별초의 내통을 보고하였다.

 *5월 15일, 김방경(金方慶), 흔도(炘都) 등이 진도(珍島)를 토벌하여 적을 크게 격파하고 위왕(僞王)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목 베니, 적의 도당 김통정(金通精)이 나머지 무리들을 거느리고 탐라도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몽고 관군이 자주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자, 적이 업신여겨 방비를 마련하지 않았는데, 김방경(金方慶)이 홍다구(洪茶丘)등과 함께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분발하여 적을 치니, 적이 놀라서 흩어져 모두 처자를 버리고 도망갔다.

김방경이 적을 추격하여, 남녀 1만여 명과 전함(戰艦) 수십 척을 사로잡았다. 적에게 포로가 되어 갔던 강화도의 사대부집 여자와 진귀한 보화 및 진도(珍島)의 주민들이 모두 몽고 군사에게 사로 잡혔다. 준 승화후 왕온은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동모형(同母兄)이다. 왕준이 아들 왕희옹(王熙雍)에게 부탁하기를, "만약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마땅히 형의 죽음을 구원해야 한다." 하였는데, 홍다구가 먼저 들어가서 왕온과 그 아들 왕환(王桓)을 죽여 버렸다.

 

처음에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 안방열(安邦悅)이 옛 서울 개성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태조의 어진(御眞)에다 점을 쳤는데, 반은살아남고 반은 죽는다는 점괘를 얻고, 죽는 것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요, 살아남는 것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적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도에 들어가 웅거하면서 적을 달래기를, "용손(龍孫)은 12대에 끝났지만, 남쪽으로 가면 제경(帝京)을 이룩한다.[龍孫十二盡 向南作帝京]’는 참위설(讖緯說)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다." 고 하면서, 드디어 적의 주모자가 되었다.

적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몸을 뽑아내어 김방경을 만나 보려고 하였으나, 군사들이 그를 쳐서 죽였다. 이 때에 적장(賊將) 유존혁(劉存奕)이 남해현(南海縣)을 점거하고 연해지방을 쳐서 노략질 하다가, 적이 탐라도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그도 또한 배 80여 척으로 따라갔다.

 

 *11월 26일, 추토사(追討使) 김방경이 개선(凱旋)하여 전공으로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守太尉 中書侍郞平章事(정2품) 判吏部事(종1품))(주12)에 임명됨.

#주12. *守大尉 中書侍郞平章事 判吏部事 : 고려사

*守太尉 中書侍郞平章事 判吏部事 : 장동익본

*守大夫 中書侍郞平章事 : 행장

*中書侍郞平章事 : 고려사절요

*金紫光綠大夫 判吏部事 守大尉 中書侍郞平章事 大子大保 : 묘지명

*묘비문 : 기록 없음

*12월, 흔도(炘都)가 봉주(鳳州)에서 와서 왕에게 따지기를, "군마(軍馬)가 많이 굶어 죽는데도 양식과 말먹이를 계속하여 보내지 않은 것은 무엇때문 입니까?" 하였다. 흔도가 이것을 구실로 삼았으나, 사실은 참소하는 말을 듣고서 우리나라 안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이리 하여 유사(有司)에서 독려하여 군량미를 수송하였는데, 길이 험하고 멀어서 사람들이 모두 괴로워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군사를 염주(鹽州). 배주(白州)로 옮겨 주둔하도록 청하니, 흔도가 그대로 따랐다.

 

28. 1273년(원종 14). 62세

*1월 6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 김방경을 판추토사(判追討事)로, 추밀부사 변윤(樞密副使 邊胤)을 추토사(追討使)로 임명하였다.

 *2월 20일, 중군 행영 병마 원수(中軍行營兵馬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정예(精銳)한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흔도(炘都)와 함께 삼별초(三別抄)를 탐라도에서 토벌하니, 왕이 부월(斧鉞)을 주어서 보냈다.

 *4월 28일,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아뢰기를, "흔도(炘都) 등이 군량미를 매우 급하게 요구하니, 마땅히 전라도의 공납미(貢納米)를 가지고 이를 보충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재추(宰樞)들에게 그 계책을 물었다. 재추들이 모두 말하기를, "근래에 창고가 텅텅 비어서 경략사(經略使)와 제반 물선(物膳) 공급에도 감당할 수 없으니, 청컨대, 경상도의 조세(租稅)를 수송하여 군량미에 보충하게 하고, 전라도의 공납미는 모두 경창(京倉)으로 운반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김방경(金方慶)이 흔도(炘都) 등과 함께 탐라도(耽羅島)의 적을 토벌하였다. 이보다 앞서 흔도, 홍다구(洪茶丘)등이 반남현(潘南縣)에 주둔 하였다가 장차 출발하려고 하는데, 여러 도의 전함(戰艦)들이 모두 표류하거나 침몰 하였다.

 

김방경이 흔도 등과 함께 군사 1만 명과 전함 1백 6십 척을 이끌고 추자도(楸子島)에 머물렀다가 바람을 기다려 탐라도로 들어갔다. 중군(中軍)이 함덕포(咸德浦)에서부터 들어가니, 적이 바윗돌 사이에 복병 하였다가 갑자기 뛰쳐나와 크게 소리치면서 항거하였다. 김방경이 성난 소리로 크게 꾸짖고,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뛰쳐나가 적의 가운데로 돌입(突入)하니, 사졸들이 이 기세를 틈타서 다투어 진격하였고, 장군 나유(羅裕)가 선봉을 거느리고 뒤따라 이르러 적을 죽이거나 생포한 것이 매우 많았다.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楊島)로부터 바로 적의 진지를 들이치니, 적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달아나서 내성(內城)으로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外城)을 넘어 들어가면서 불붙인 화살을 사방으로 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고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김통정(金通精)은 그 도당 70여 인을 거느리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들어갔고, 적장(賊將) 이순공(李順恭), 조시적(曹時適) 등은 웃옷을 벗어 몸을 들어내고 항복하였다. 김방경이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내성으로 들어가니 부녀자들이 목을 놓아 울었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적의 괴수를 섬멸할 것이지만, 협박 받아 따른 사람들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다만 김원윤(金元允) 등 6인의 목을 베고, 항복한 자 1천3백여 인을 여러 배에 나누어 싣게 하며, 탐라도에 원래 살던 사람들은 전과 같이 편안히 자리 잡고 살게 하였다.

 

탐라도가 마침내 평정되었다. 이리하여 흔도가 몽고군 5백 명을 주둔시키고 김방경도 또한 장군 송보연(宋甫演) 등으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주둔하게 하고 돌아왔다. 나주에 이르러 적당(賊黨) 35인을 목 베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이며, 크게 잔치하여 군사들을 먹이고 여러 주(州)의 군사들을 해산하였다. 김방경이 김수(金綬)와 지후(祗候) 김감(金減)과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어 승첩(勝捷)을 고하니, 왕이 김수(金綬)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삼고, 유보를 중랑장으로 삼고, 대정 고세화가 먼저 성을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시켰다고 하여 그를 낭장에 임명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으로 적을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6월 16일, 원수 김방경이 개선하였다.

 *윤6월 13일, 대장군 김수(金綬)를 보내어 원나라에 가서 탐라도(耽羅島)의 적을 평정한 것을 고하였다. 삼별초 토벌을 포상하여 왕은 중군원수(中軍元帥) 김방경에게 붉은 가죽띠 1벌을 하사하고 크게 잔치하였으며, 김방경을 수태사 문하시중(守太師 門下侍中.종1품)(주13)으로, 병마사 변윤(兵馬使 邊胤)을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로, 김석(金錫)을 상장군(上將軍)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삼고, 나유(羅裕). 송보연(宋甫演)을 모두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주13. *守大師 : 행장

*守大師 開府儀 同三司門下侍中 上鑄國 判御使臺事 : 묘지명족보본

*授大師 開府儀 同三司門下侍中 上柱國 判御使臺事 : 묘지명복제본

*守太師 : 장동익본

*김방경을 侍中으로 삼음 : 고려사

*7월 16일, 시중 김방경이 원에 불려갔는데, 세조(世祖)가 광한전(廣寒殿)에서 인견(引見)하여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금안(金鞍) ․ 채복(綵服) ․ 금은(金銀)을 하사하였다.

 

29. 1274년(원종 15, 충렬왕 즉위년). 63세

*1월 2일, 시중 김방경이 일본정벌을 위해 전선(戰船) 300척을 건조(建造)하라는 원(元)나라 중서성(中書省)의 첩(牒)을 가져왔다. 원나라에서 총관(摠管) 찰홀(察忽)을 보내어 전함(戰艦) 3백 척을 감독하여 만들게 하였다. 또 홍다구(洪茶丘)로 하여금 감독하여 정월 15일부터 역사를 시작하기로 약속하니, 왕이 이에 시중 김방경(金方慶)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종1품),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삼고, 추밀원부사 허공(許珙)을 전주도 도지휘사(全州道都指揮使)로 삼고, 우복야 홍록주(洪祿週)를 나주도 지휘사(羅州道指揮使)로 삼고, 또 대장군 나유(羅裕)등을 보내어 여러 도의 부부사(部夫使)로 삼아 공장(工匠)과 인부(役徒) 3만 5백여 인을 징집(徵集)하게 하였다. 이때에 역마(驛馬)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여러가지 사무가 번잡한데다가 기한이 급박하여 몰아치기를 바람과 번개같이 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배 만들 재목을 변산(邊山: 지금의 부안(扶安))과 천관산(天冠山:지금의 장흥(長興))에서 취했는데, 일을 이달 16일에 시작하여 5월 그믐에 끝내어 크고 작은배 9백척을 금주(金州)에 돌려대니, 사신을 보내어 원에 고함.(<東史綱目>)

 

 *2월, 별장 이인(李仁)을 보내어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기를, "소방(小邦)에서 중서성의 지시를 받으니, ‘전함(戰艦) 3백 척을 만드는데, 거기에 필요한 공장(工匠). 인부와 재목(材木)등을 배신(陪臣) 김방경(金方慶)등에게 나누어 맡겨서 마련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공사가 크고 국력이 미약하여 잘 마련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또 가만히 생각하건대, 정월 15일부터 역사를 시작할 때에, 거기에 종사하는 공장. 인부 3만 5백명의 하루 세끼 양식을 계산한다면 3개월간에 모두 3만4천3백12석5두를 지출하여야 합니다. 또 흔도(炘都)의 군사 4천5백인이 금주(金州)에 도착하였는데, 가지고 갈 양식 1천5백70석과 홍다구(洪茶丘)의 군사 5백인이 가지고 갈 양식 85석과 제주도에 머물면서 지키는 몽고 관군(官軍)과 소방(小邦)의 군시를 합하여 1천4백인의 7개월간 양식 2천9백4석과 나주(羅州)에 낙후(落後)하여 있는 오로활단치(奧魯闊端赤)의 군량미 8천석과 말먹이(馬料) 1천3백25석을 모두 소방(小邦)으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였습니다. 또 중서성 지시를 받으니, ‘봉주(鳳州)의 둔전군(屯田軍)의 매달 부족되는 양곡 2천47석과 소먹이(牛糧) 1천1석7두를 공급하도록 하라’고 하였으나, 이들 종전군(種田軍)에게 그 농우(農牛), 농기(農器), 종자(種子)와 도착한 첫해 가을까지의 양곡을 이미 넉넉히 지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간사한 사람들이 망령되게 일컫기를, ‘둔전(屯田)이 충재(蟲災), 수재(水災)의 손해를 입었다’고 하면서 함부로 중서성의 지시를 받아 가지고 소방으로 하여금 또 공급하도록 하는데, 이것은 감히 지시를 어기려고 이렇게 말을 꾸며서 신달(申達)하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소방으로 하여금 공급하게만 하고 기한이 없으니 실로 민망할 뿐입니다. 모두 면제시켜서 먼 곳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4월, 간의대부 곽여필(郭汝弼)을 보내어 원나라에 가서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전번에 홍다구(洪茶丘)가 김방경(金方慶)에게 글을 보내기를, ‘배 3백 척과 뱃사공[梢工]. 수부[水手] 1만5천인을 마땅히 먼저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소방(小邦)은 땅이 좁고 인구가 적은데다가 전란까지 겹쳤습니다. 지난번 탐라도(耽羅島)를 정벌할 때의 병졸과 사공들이 모두 배 만드는 역사에 나갔으니, 지금 일본을 정벌하는 군사를 장차 어디에서 차출 하겠습니까? 소방(小邦)의 북계(北界) 여러 성과 서해도(西海道)에서 조세를 포탈한 백성들 가운데 동녕부(東寧府)로 가서 투항한 자들은 모두 배 젓기에 익숙한 자들이니 청컨대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군사 정원[軍額]에 충당하도록 하여 주소서. 또 경오년(庚午年1270년, 원종11년)으로부터 지금까지 5년 동안 군량미를 공급하는 데에도 이미 부족하였는데, 지금 이러한 조선(造船)과 둔전(屯田) 및 홍총관(洪摠管)의 군사와 제주도 주둔군[留守軍]의 군량미를 모두 배신(陪臣)과 백성들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능히 계속할 수 없자, 특별히 황제의 인자하심에 힘입어 쌀2만 석을 운반하여 군량미를 보충하였으며, 또 양곡 값으로서 비단을 하사하시니, 무엇으로 보답하고 사례하여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공사(公私) 재물이 이미 고갈되었으며 또 배를 만드는 일로 인하여 농사지을 때를 잃게 되었으니, 비단을 주고 양곡을 사는 일도 여의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후 김방경은 전라도에 파견되어 조선(造船)을 감독하다가 6월 18일, 원종(元宗)이 붕어(崩御)하자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귀경(歸京)하였다.

 *7월 12일, 김방경이 정동선봉별초(征東先鋒別抄)를 거느리고 합포(合浦)로 출발하였다.

 *10월 3일, 도독사(都督使) 김방경으로 하여금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김선(金侁)을 좌군사(左軍使),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右軍使)로 삼아 삼익군(三翼軍)으로 편성한 8천명을 거느리고 몽고군 2만5천명과 함께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

원나라 도원수 홀돈(忽敦), 우부원수 홍다구(洪茶丘), 좌부원수 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몽고군사. 중국군사[漢軍] 2만5천명과, 우리나라 군사 8천명 및 사공[梢工]. 수부[水手] 6천7백명과 전함(戰艦) 9백여 척이 합포(合浦)를 출발하였다.

 *10월 6일, 동정군(東征軍)이 대마도(對馬島)에 상륙하였다.

 *10월 14일,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왜병이 해안 위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박지량. 조변(趙卞)이 뒤쫓으니, 왜인들이 항복하기를 청하다가 다시 싸웠는데, 홍다구가 박지량. 조변과 더불어 공격하여 왜인 1천여 명을 죽였다. 이어서 이만도(伊蠻島)로 나아가 삼랑포(三郞浦-鹿原)에 상륙하여 중군(中軍-金方慶) ․ 우군(右軍-金文庇)은 이만도(伊蠻島)를 공격하고 좌군(左軍-金侁)은 박다(博多-朴加多)를 공격하여 왜병과 싸우고 철수하여 전함으로 돌아왔는데 적병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왜병이 공격해 와서 중군과 충돌하므로 김방경이 큰 화살 한 개를 빼어서 쏘면서 성난 소리로 크게 호통을 치니, 왜인들이 겁에 질려 달아났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申奕) 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니 왜병이 크게 패하여 시체들이 삼단 깔리듯이 엎어져 있었다. 홀돈이 말하기를, "비록 몽고인들이 잘 싸운다고 하지만, 어찌 이보다 더 싸울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종일토록 싸우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풀었다. 김방경이 홀돈, 홍다구에게 이르기를, "우리 군사가 비록 수효는 적지만, 이미 적의 땅에 들어 왔으니 누구나 스스로 힘을 다하여 싸우게 됩니다. 이것은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背水陣)을 친 격(주14)입니다." 하면서, 다시 결전하기를 청하였으나,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에 ‘작은 적이 견고하더라도 큰 적에게 사로 잡힌다."고 하였는데, 피로한 군사들을 내몰아 큰 적과 싸우게 하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회군(回軍)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유복형이 날으는 화살에 맞아 먼저 배로 올라갔기 때문에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날 밤 큰 풍우가 있어 전함이 암안(巖崖)에 부딪쳐 많이 파손되고 좌군사(左軍使) 김선(金侁)이 익사하였다.

#주14.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背水陣)을 친 격: 진(秦)나라때 사람 맹명(孟明: 百里奚의 아들)이 진(晉)을 정벌하여 크게 패하였으나, 목공(穆公)의 재등용으로 드디어 황하(黃河)를 건너서 타고간 배를 불태우고 결사(決死)의 각오로 싸워 결국 진(晉)을 이기고 서융(西戎)의 패국(覇國)을 이루었다는 고사(古事)와 한(漢)나라 장군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조(趙)나라와 싸울때에 강(江)을 등지고 진(陣)을 친 뒤에 조(趙)나라 군사와 싸워 이겼다는 고사.]

 *11월 27일, 동정군이 합포로 돌아왔는데, 귀환하지 못한 자가 1만3천5백여 명이었다. 홀돈(忽敦)이 사로잡은 동남(童男). 동녀(童女) 2백인을 왕(王)과 공주(公主)에게 바쳤다.

 *12월 28일, 시중(侍中) 김방경이 개경(開京)으로 환군(還軍)하였다. 상주국 판어사대사(上柱國 判御史臺事)의 관작이 더해짐.

 

30. 1275년(충렬왕 1). 64세

*1월 8일, 문하시중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인공수(印公秀)를 원나라에 보내어 표문(表文)으로써 아뢰기를, "소방(小邦)이 근래 역적들을 소탕하는 일로 인하여 몽고 대군의 군량미를 해마다 백성들에게서 거두어 들였으며, 게다가 왜국[倭邦]을 정토(征討)하려고 전함(戰艦)을 수리 건조하는 일 때문에 장정(壯丁)들은 모조리 공사 부역에 나가고 노약자들만이 겨우 밭을 갈고 씨를 뿌렸는데, 시절이 처음에는 가물었고 늦게는 큰물이 져서 곡식을 제대로 거두지 못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비용마저 피폐한데, 더구나 싸움에 다치고 물에 빠져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으니 비록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세월에 소생(蘇生)될는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다시 일본을 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에 필요한 전함과 군량미를 실로 소방에서 능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삼가 간절한 정성을 굽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2월, 문하시중 김방경이 원에서 돌아왔다.

 *10월 25일, 관제(官制)의 개혁(改革)으로 수상(首相)인 광정대부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 감찰사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 監察司事(종1품)(주15)에 임명됨.

 #주15. *監察事事 : 행장

 

*監察司事 : 장동익본, 국사대사전

*고려사, 묘지명, 묘비문 : 기록 없음

*첨의중찬(僉議中贊) : 고려시대 도첨의부에 속한 종1품 벼슬. 충렬왕 1년(1275)에 문하시중을 고친 것.

 *12월 24일, 上柱國이 더해졌다.

 

31. 1276년(충렬왕 2). 65세

*3월, 선지(宣旨)를 ‘왕지(王旨)’라고, 짐(朕)을 ‘고(孤)’, 사(赦)를 ‘유(宥)’, 주(奏)를 ‘정(呈)’이라고 고쳤다. 이보다 앞서 다루가치(達魯花赤)가 힐문하기를, "선지(宣旨)라고 일컫고, 짐(朕), 사(赦)라고 일컫는 것이 어찌 참람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왕이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과 좌승선 박항(朴恒)으로 하여금 이를 해명하게 하기를, "감히 참람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께서 서로 전하여 오던 옛날 법을 따른 것 뿐입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호칭을 고쳤다.

 

 *7월 17일, 중찬 김방경(金方慶)과 직사관(直史館) 문연(文璉)을 원나라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는데, 왕이 원나라 중서성에 상서(上書)하기를, "다루가치 경력(經歷) 장국강(張國綱)은 밝고 민첩하며 청렴하고 공평하여 백성들이 그 덕을 입었으니, 그 임기가 이미 찼으나 유임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배신(陪臣) 김방경은 몽고 관군(官軍)과 함께 진도(珍島), 탐라도(耽羅島)의 적을 격파 하였으며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전함(戰艦)을 수리 건조하였으며, 병력을 해상으로 상륙시키는 데에 실로 큰 힘이 되었으니, 호두금패(虎頭金牌)를 하사하여 뒷사람들을 권장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 8월, 명주(溟州)의 아전 김천(金遷)이 요양(遼陽)에서 어미를 찾아 본국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고종 말년에 몽고 군사가 침략하여 왔을 때에, 김천의 어미는 막내아들 김덕린(金德麟)과 함께 사로 잡혔었다. 이때 김천의 나이가 15세였는데 밤낮으로 어미를 부르면서 울었다. 사로잡힌 자들이 많이 길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상복을 입고 복제(服制)를 마쳤다.

 

14년이 지난 뒤에 백호(百戶) 습성(習成)이란 자가 원나라에서 와서 저자에서 사흘 동안 명주사람을 소리 질러 찾았는데, 마침 김천의 친구 정선(旌善)사람 김순(金純)이 이에 응답하니, 김천의 어미가 붙인 편지를 주었다. 편지에 이르기를, "나는 살아서 아무 주(州) 아무 집에 이르러 계집종이 되어 있다."고 하였다. 김천이 그 편지를 보고 통곡하고, 가서 어미를 속환(贖還) 시키고자 하여, 백금(白金)을 싸가지고 본국 통역관 공명(孔明)과 함께 북주(北州)에 사는 천로(天老)의 산채(山寨)로 돌아가다가, 군졸 요좌(要左)의 집을 찾아 갔다. 할미 한사람이 있는데, 헤어진 옷을 입고 머리털이 쑥대처럼 헝클어지고 얼굴에 때가 묻어 김천이 이를 보고 그가 자기 어미 인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 할미가 관향(貫鄕)과 속적(屬籍)을 자세히 말하고서 이르기를, "덕린이 나를 따라서 이곳에 와서 이미 나이가 열아홉 살이 되었다. 지금 서쪽 이웃에 있는 천로의 집종이 되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김천이 이 말을 듣고 엎드려 절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미가 김천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네가 정말 내 아들이냐? 나는 네가 죽었다고 여겼었다."고 하였다. 요좌가 마침 거기에 있지 아니하여, 김천이 어미를 속환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동경(東京:요양)으로 돌아와서 별장(別將) 수룡(守龍)의 집에 의거하여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수룡과 더불어 요좌의 집에 왕복하며 속환하기를 청하였으나, 요좌가 들어주지 않았다. 김천이 애걸하면서 백금 55냥으로써 속환하여 김덕린에게 보냈다가, 동경으로 보내오게 하였다. 울면서 말하기를, "지금 비록 서로 따라갈 수가 없지만, 하늘의 복이 있다면 반드시 서로 만날 기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모자가 서로 얼싸안고 울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마침 중찬 김방경(金方慶)이 원나라에서 돌아오다가 동경에 이르러 김천 모자를 불러서 보고 칭찬하고 탄식하기를 그치지 아니 하였다. 김방경이 총관부(摠管府)에 말하여 노인(路引)을 지급하게 하고 음식과 거마(車馬)를 주어 명주에 이르렀다. 그 지아비 김종연(金宗衍)도 또한 별탈이 없었으므로 서로 만나서 기뻐하면서 마침내 부부로서 처음과 같이 되었다. 그녀의 아비 자릉(子陵)이 나이 79세였는데, 딸을 보자 기뻐하며 갑자기 땅에 졸도하였다. 6년이 지난 뒤에 천로의 아들이 김덕린을 데리고 본국으로 왔으므로 백금 86냥으로써 그를 속환 시켰다. 몇 년이 아니 되어 그가 전후하여 빌린 백금을 모두 갚았으며, 김덕린과 함께 효도를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10월 7일, 김방경이 원에서 호두금패(虎頭金牌)를 받고 돌아왔다. 김방경이 원나라에 이르러 폐백(幣帛)을 받드는 예를 끝마치고 전(殿)에 올랐는데, 멸망한 송(宋)나라의 유주(幼主)가 뒤에 이르렀다. 두 사람이 유주의 소매를 잡고 앞에서 인도 하였는데, 황제가 유주에게 명하여 황태자의 자리 아래에 앉게 하였다. 유사(有司)에서 김방경에게 청하여 송나라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앉기를 청하였는데,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는 의리를 흠모하여 스스로 귀부하여 왔으나, 송나라는 힘이 다하여 이에 항복하였으니,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송나라 복왕(福王)은 유주에게 대부(大父)이고 나이도 또 많으니, 자리를 김재상(金宰相)의 위에다 마련해주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김재상의 자리 아래에 앉히도록 하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김재상은 군공(軍功)이 있으니, 호두패(虎頭牌)를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우리나라 사람[東人]들이 금부(金符)를 띠게 된 것은 김방경으로 부터 시작 되었다. 김방경이 이때에 이르러 원나라에서 돌아오니, 왕이 도성에 나와서 마중 하였다.

 

 *12월 16일, 공주가 정화궁주(貞和宮主), 제안공(齊安公) 숙(淑),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 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바로 석방하였다. 병자일 밤에 어떤 사람이 다루가치(주16) 석말천구(石抹天衢)의 관사에 익명서(匿名書)를 던지고, 또 길에서 외치기를, "옷이 있으면 입고, 밥이 있으면 먹어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지 말게 하라[有衣則衣 有食則食 勿爲他人所得]." 하였다.

 

이튿날 다루가치가 왕과 몽고 공주에게 고했는데, 그 익명서에서 무고하기를,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왕의 총애를 잃자, 여자 무당으로 하여금 몽고 공주를 저주(詛呪)하게 합니다. 또 제안공(齊安公) 왕숙(王淑)과 김방경(金方慶), 이창경(李昌慶), 이분희(李汾禧), 박항(朴恒), 이분성(李汾成) 등 43인이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여 다시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하였다. 몽고 공주가 홀라대(忽剌臺), 삼가(三哥), 차고대(車古臺) 등을 보내어 정화궁주를 가두고 부고(府庫)를 봉하였고, 석말천구도 또한 왕숙과 김방경등 43인을 가두고 재상을 불러서 서로 뒤섞어 여러 가지를 힐문한 다음에, 또 몽고 공주에게 여러 죄수들을 친히 심문하도록 권하니 몽고 공주가 장차 그 말에 따르려고 하였다.

 

이튿날 아상(亞相)인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유경(柳璥)이 여러 재상과 함께 몽고 공주를 알현하기를 청하고 말하기를, "근래에 권신이 국정을 잡고, 죄로써 남을 고하는 자가 있으면, 사건의 허실(虛實)과 죄의 경중(輕重)을 묻지 않고 곧 마치 풀을 베듯이 사람들을 베어 죽이니, 나라 사람들이 무서운 마음에 아침저녁을 믿지 못합니다. 황천(皇天)이 돌보시어 이러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공주로 하여금 동방에 와서 계시게 하시니, 이제 무고(無辜)하게 화를 당하는 일이 일어날 수 없을 것 이라고 신 등은 생각하였습니다. 이번에 다루가치가 받은 익명서에 대해서는 신이 변명하기를 청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인물이 쇠모(衰耗)한데 몽고 관군이 사방에 주둔하고 있으니 누가 감히 도망해 숨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름도 없는 글을 어찌 족히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정화궁주가 저주(詛呪)하였다는 사건도 또한 분별하기 쉬운 일입니다. 공주께서 하가(下嫁)하여 오신 뒤에 나라 사람들이 안도(安堵)하고 모두 황제의 은덕을 감사하는데, 그가 만일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주를 저주했다면 귀신도 영험이 있으니 은덕을 배반한 화가 반드시 되돌아갈 것입니다." 하였다.

 

유경의 눈물이 마구 떨어지고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니, 좌우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몽고공주[忠烈王妃]도 감동하고 깨달아 모두 석방시켜 주었다.

 

#주16. 다루가치[達魯花赤(달로화적)] : 고려 후기에 원나라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설치한 민정(民政) 담당자. 원래 원나라는 중앙의 하급 관부와 지방의 노(路) ·부(府) ·주(州) ·현(縣) 및 복속 국가에 대한 통치방식으로 다루가치를 설치함. 고려에서는 1231년-1278년 사이 존속함.

 

32. 1277년(충렬왕 3). 66세

*1월 1일, 중찬 김방경이 처모의 상을 당하였으나, 군국(軍國)의 사무가 번다하여 후일 복(服)을 입게 하였다. 재상(宰相)으로서 복(服)을 제(除)하는 예(例)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었으나 이때에 군국(軍國)의 사무가 번잡하였으므로 처음으로 이러한 명령을 내렸다. [사신(史臣)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3년의 상(喪)과 오복(五服)의 제도는 선왕(先王)이 끝없이 애통한 마음을 절제하여 어진 자로 하여금 감히 상복을 입는 기한을 넘기지 못하도록 하고, 불초(不肖)한 자로 하여금 그 기한을 정한대로 따르도록 한 것이다. 국가에서 기일을 정하여 말미를 주는 것도 옛법에 어긋남이 이미 심한데, 더구나 권도(權道)로 편의하게 길복(吉服)을 입다가 뒤에 그 복제(服制)를 행하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1월 4일, 김방경(金方慶)을 세자사(世子師)로 삼고, 유경(柳璥)을 세자 부(世子傳)로 삼고, 원부(元傳)를 세자보(世子保)로 삼고, 김구(金坵)를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삼고, 허공(許珙), 홍녹주(洪祿주), 이분희(李汾禧), 한강(韓康)을 세자조호(世子調護)로 삼았다.

 

 *7월, 왕이 병으로 김방경의 집에 피접(避接)을 왔다.

 *12월 13일, 전 대장군 위득유(韋得儒)와 중랑장 노진의(盧進義) 등이 김방경(金方慶)이 모반(謨反)한다고 무고(誣告) 하였다. 이때에 김방경은 중찬(中贊)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 일을 맡아 보았고, 또 호두금부(虎頭金符)를 받고 도원수(都元帥)가 되니, 권세가 온 나라를 좌우하고 그의 전지와 장원(莊園)이 주, 군(州郡)에 없는 데가 없었으며, 그 휘하 장사들이 날마다 그 문을 지켰는데, 그 세력에 붙고 그 위엄을 핑계 대는 자들이 중앙과 지방에 횡행하였으나 이를 금지하지 아니하였다.

 

또 왜국(倭國)을 정벌한 군공(軍功)을 정하는데 벼슬과 포상이 매우 공평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많이 실망하였다. 위득유는 일찍이 동정 좌군사(東征左軍使) 김선(金侁)의 부대에 종군하여 지병마사(知兵馬事)가 되었는데, 김선이 물에 빠져 죽자 주장(主將)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여 김방경이 그 관직을 파면시켰고, 노진의는 진도(珍島)를 공격할 때에 종군하여 힘써 싸우지는 않고 남의 재산만 빼앗아 가지니 김방경이 그 재물을 몰수하여 관에 들여 놓았다. 이로 말미암아 두 사람이 김방경을 원망하여 모함하게 된 것이다. 이에 흔도(炘都)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이 그 아들 김흔(金忻), 사위 조변(趙卞)과 공유(孔愉), 나유(羅裕), 한희유(韓希愈), 안사정(安社貞) 등 4백여 인과 함께 왕, 공주,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제거한 다음에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서 웅거하여 모반하려고 합니다." 하면서, 여러 가지로 말을 꾸며서 참소하였다. 흔도가 석말천구(石抹天衢)와 함께 왕에게 고하니, 왕이 찬성사 유경(柳璥), 원부(元傳) 등에게 명령하여 흔도, 석천말구와 함께 여러 가지로 심문하게 하였으나 곧 그것이 무고인 줄을 알고 다만 한희유등 12인이 갑옷을 감추어 둔 죄만을 논하여 곤장을 때리고 석방시켰다.

 

33. 1278년(충렬왕 4). 67세

*1월 18일, 왕이 봉은사에서 흔도(忻都) ․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김방경․김흔(金忻) 부자(父子)를 심문하였다.

 *2월 3일, 왕이 국청사에서 흔도(忻都) ․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김방경․김흔 부자를 심문하였다. 이때 홍다구가 혹독하게 심문하였으나 끝내 자복(自服)하지 아니하자 병기(兵器)를 사사(私事)로이 보관(保管)한 죄로 김방경은 대청도(大靑島)로, 김흔은 백령도로 유배 보냈다.

이보다 앞서 홍다구(洪茶丘)가 본국과 묵은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틈을 엿보아 화를 나라에 미치게 하려고 하였는데, 김방경의 사건을 듣고서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서 자청하여 본국으로 와서 국문하게 되었다. 흔도(炘都)도 또한 일찍이 자기 아들 길대를 몽고에 보내어 위득유(韋得儒)의 말을 황제에게 아뢰었기 때문에 황제가 그에게 명령하여 왕과 몽고공주와 함께 심문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왕이 흔도. 홍다구와 함께 다시 김방경과 그 아들 김흔(金忻)을 국문하였다. 홍다구가 쇠사슬을 그 머리에 감고 마치 장차 못질을 하려는 듯이 하였고, 또 곤장을 치는 사람을 호령하여 그 머리를 곤장으로 때리도록 하고 발가벗겨 하루종일 세워두니, 추운날씨에 살과 피부가 얼어서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왕이 홍다구에게 이르기를, " 지난번에 흔도와 함께 이미 국문하기를 끝마쳤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다시 심문해야 하는가?" 하였으나, 홍다구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 낭가대(郎哥대)가 전라도에서 돌아 왔는데, 홍다구 등이 김방경 부자를 다시 심문하니 왕이 낭가대를 불러서 심문에 동참하게 하였다. 낭가대가 말하기를, " 내가 장차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려는데 황제께서 만약 동쪽 지방의 일을 물으신다면 마땅히 내가 듣고 본 대로 대답할 것이다." 하니, 홍다구가 자못 수그러졌다.

 

이때에 이르러 또 국문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소국(小國)이 하늘같이 원나라를 받들고 황제를 어버이 같이 사랑하는데 어찌 하늘을 배반하고 어버이를 거역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 하겠는가? 내가 차라리 억울하게 죽을지언정 거짓으로 자복할 수는 없다." 하였다. 홍다구가 기어이 자복시키려고 하여 참혹하고 혹독한 형벌을 더하니, 온몸이 온전한 곳이 없었으며,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깨어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홍다구가 비밀히 왕의 좌우들을 달래기를, "날씨가 매우 차고 비와 눈이 그치지 않으니 왕도 또한 문초하기에 지쳤다. 만약 김방경으로 하여금 자복하게 한다면 무고한 죄는 다만 한 사람으로 그치고 말 것이며 법에 따라 마땅히 유배(流配) 가는 것뿐인데 나라에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니, 왕이 그 말을 믿고, 또 차마 그 광경을 볼 수가 없어서 그에게 이르기를, "경이 비록 자복하더라도 천자께서 어질고 훌륭하시니 장차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밝힐 것이며 사형에 처하지는 않을 것인데 어찌하여 스스로 이렇게까지 고통을 당하는가?"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주상께서 이러실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군인 출신으로 직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니, 몸이 죽어 없어질지라도 나라에 족히 보답할 수 없는데 어찌 한 몸을 아끼어 없는 죄를 자복해서 사직(社稷)을 저버리겠습니까?" 하고, 홍다구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나를 죽이려거든 빨리 죽여라. 내가 불의에 굴복 하지는 않겠다." 하였다. 이리하여 갑옷을 감춘 것을 죄로 삼아 김방경을 대청도(大靑島)에, 김흔을 백령도(白翎島)에 유배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석방시켰다. 김방경이 귀양갈 적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길을 막고 울면서 그를 보냈다.

 

 *2월 10일, 장군 인후(印候)를 원에 보내어 김방경을 유배시킨 것을 보고하였다.

 *2월 14일, 유경(柳璥)을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임명하였다. 이때 홍다구의 청에 의해 위득유(韋得儒)를 상장군(上將軍)으로, 노진의(盧進義)를 장군(將軍)으로 임명하였다.

 *3월 15일, 위득유 ․ 노진의가 고려의 담선법회(談禪法會)가 원을 저주하는 행사라고 홍다구에게 전하자 홍다구가 이를 중서성(中書省)에 보고하였다.

 *4월 15일, 원나라에서 김방경을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왕과 몽고공주, 세자가 원나라로 가니 흔도(炘島)와 홍다구(洪茶丘)가 각각 말을 왕에게 선물하고 또 전송연[祖宴]을 베풀었는데 그들이 왕에게 사뢰기를, "황제가 김시중(金侍中)의 사건을 물을 때 왕께서 아뢰는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장순룡(張舜龍). 백거(白据)가 원나라에서 돌아오다가, 길에서 왕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황제께서 칙명하여 김방경, 위득유 등이 입조하여 대질 변명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따라가던 신하들에게 의논하였는데 이분희(李汾禧), 이습(李褶)이 말하기를, "흔도(炘都), 홍다구(洪茶丘)가 원래 이 일의 시비를 가리고자 하지 아니 하였으니, 지금 비록 황제의 분부에 의거하더라도 그가 반드시 칙명의 문서가 없다고 하면서 듣지 않을 것이니 원나라에 입조하여 다시 청한 뒤에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나 모두들 말하기를, "원수부(元帥府)에서 듣지 않는다면 어찌 황제의 분부를 어기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죄가 더욱 무거워질 것이니 우리로서는 할 말이 있게 되는 것 입니다." 하였으므로 이에 장순룡을 보내어 김방경 등을 불렀다. 나라 사람들이 본래 이분희 형제가 홍다구에게 붙은 줄로 의심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더욱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 장순룡이 김방경 부자와 위득유(韋得儒), 노진의(盧進義)를 데리고 원나라로 가는데 요가채(姚家寨)에 이르러 노진의는 혀가 문드러져서 죽었다. 그가 죽을 때에 임하여 말하기를, "내가 위득유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 하니, 위득유가 이 말을 듣고서 마침내 침식을 잊고 항상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크게 한숨만 쉴 뿐이었다.

 

이보다 앞서 홍다구가 사람을 보내어 황제에게 무함하여 아뢰기를, "김방경(金方慶)이 곡식을 저축하고 배를 만들며, 무기와 갑옷을 많이 저장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고 하니 청컨대, 왕경(王京개성)이 남의 요해지에다 군사를 두어 방수(防戍)하게 하고, 또한 주.군(州郡)에도 모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며, 김방경과 그 아들, 사위의 가족을 모두 경사(京師)로 보내어 노비[臧獲]에 충당하게 하고, 그 전지의 조세를 거두어 군량미에 충당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인후가 원나라에 이르자, 황제가 묻기를, "김방경이 갑옷을 얼마나 간직 하였는가?" 하니, 인후가 대답하기를, "46벌 뿐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김방경이 이것을 믿고 반역을 도모하였겠는가? 고려에서 주.현(州縣)의 조세를 모두 왕경(王京)에 조운(漕運)으로 수송하기 위하여 배를 만들고 곡식을 저축하는 것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또 김방경이 집을 왕경에다 지었는데 만약 그가 반역을 도모하려고 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반드시 집을 지었겠는가? 홍다구를 빨리 돌아오도록 하고, 국왕도 또한 와서 조회하여 자신이 스스로 아뢰도록 하여라." 하였다.

 

 *6월, 위득유(韋得儒)가 원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죽었다. 왕이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여 위득유, 노진의(盧進義)가 무고한 사실을 변명 하였는데, 마침 위득유도 또한 병들어 죽으니 사람들이 그가 천벌을 받았다고 하였다.

 *6월 26일, 왕이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여 김방경의 일과 담선법회를 변명하였다.

 *7월 3일, 왕이 황제를 알현하고 아뢰기를, "지난번에 황제[車駕]께서 북방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표문을 올려 소방(小邦)의 세폐(歲幣)와 공부(貢賦)를 모두 거두어 정벌을 돕겠다고 청하였는데 폐하께서 지방이 멀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지금 입조(入朝)하였으니, 몸소 군사를 준비하여 성덕(聖德)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하니, 황제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북방인(北方人)들이 잘못 생각하여 변방을 소란 시켰으나 지금은 이미 흩어져서 달아났다." 하였다. 왕이 또 아뢰기를, "일본(日本)은 하나의 섬 오랑캐일 뿐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황제께 조회하지 않고 감히 황제의 군사에 항거하니 신은 다시 배를 만들고 곡식을 저축하여 그 죄를 들어내어 토벌 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왕은 귀국해서 재상들과 잘 의논한 다음에 사람을 보내어 와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왕이 또 아뢰기를, "폐하께서 공주를 신에게 주시고 성은(聖恩)으로 돌보아 주시니 소방(小邦)의 백성들이 이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홍다구(洪茶丘)같은 자가 있다면 신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또한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홍다구 같은 자는 다만 군무(軍務)만을 관리해야 할 것인데 심지어 국가 정사까지 모두 마음대로 결단하려고 합니다. 그 다루가치를 남방(南方)에다 설치한 사실은 또한 신이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원나라에서 반드시 소방에다 군대를 두고자 한다면 차라리 달단(獺袒)과 한인[漢兒]의 군대를 보내고 홍다구는 소환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건 쉬운 일이다. 간혹 말하기를, ‘오직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왕(禹王). 탕왕(湯王)만이 제왕(帝王)의 도리를 능히 행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에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하여 임금의 의식(衣食)을 모두 신하에게 간청하게 되었다. 옛날에 한 임금이 양고기를 좋아 하였는데, 그 신하가 이를 주면 얻어먹고 주지 않으면 먹지 못하였다. 송(宋)나라 도종(度宗)때에 가사도(賈似道)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는데 도종으로 하여금 그 애첩(愛妾)을 내보내게 하니, 도종이 어쩔수 없이 그대로 따랐었다. 어찌 임금이 신하를 무서워하여 자기의 사랑하는 첩을 내보낼 수가 있겠는가? 왕의 부왕(父王)도 어찌 임연(林衍)이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왕으로 세우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짐이 듣건대 왕도 또한 재상들의 꼬이는 말을 믿는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하는데도 나라를 잘 다스린다면 진실로 좋겠지만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홍다구의 망령된 말입니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오직 홍다구의 말만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재상들과 더불어 나라를 잘 지킬 수 있는 방안들을 골라서 깊이 생각해서 시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왕이 아뢰기를, "이제 간사한 사람들이 김방경(金方慶)이 모반(謀叛)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감정을 품은 자들이 참소하는 말입니다. 뒤에 만일 이와 같이 불법한 자가 있으면 신이 그에게 죄를 주도록 청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대가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하고, 좌우들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빨리 홍다구를 소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왕이 황제에게 헌수(獻壽)하였다. 황제가 추밀부사(樞密副使) 발라(勃喇)를 시켜 고려에 있는 원나라 관군들이 백성들을 소요(騷擾)시킨 상황을 왕에게 물었는데 흔도(炘都)가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우리 군사들이 백성들을 소요시킨 일을 왕이 알고 계신다면 지금 말하시지요."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부하가 김방경(金方慶)의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 아이의 집을 침범 하였소. 우리 아이의 집도 침해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백성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소? 그대들이 나더러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하지 못한다고 호소 하지만, 그대들의 소요가 이와 같았으니 어떻게 편안하게 살게 할 수 있겠소?" 하고, 발라에게 이르기를, "나는 차마 이들과 함께 같이 살 수가 없으니 황제께서 신에게 땅 한 구역을 주신다면 신이 우리 백성들을 거느리고 와서 황제께 힘을 다할 것이요. 이것이 신의 소원이요." 하니, 발라가 말하기를, "황제는 다만 원나라 관군들이 백성들을 소요시킨 사실을 물은 것뿐인데 왕이 어찌 이와 같이 황제에게 아뢰려고 합니까?" 하였다.

 

황제가 또 합백(哈伯)과 발라(勃喇)를 시켜 왕에게 타이르기를, "김방경을 고한 자 2인이 모두 죽어서 대질할 수가 없게 되었고 짐이 이미 김방경의 원통한 것을 알았으니 그를 용서 하겠다." 하고, 또 명령하여 흔도, 홍다구의 군사와 종전군(種田軍)과 합포(合浦) 진수군(鎭戍軍)을 혁파하여 모두 돌아오게 하였다. 황제가 왕에게 해동청(海東靑-송골매) 1련(連)과 부마(駙馬)의 금인(金印)과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고 황후는 공주에게 채단(綵段) 1수레를 하사하며 겁설(怯薛) 단안독구(旦安禿丘)로 하여금 호송 하게 하였다.

 

 *7월 22일, 일행이 북경(北京)에 이르자 김방경(金方慶)에게 명령하여 왕을 따라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황태자도 또한 사람을 보내어 일행을 전별(餞別)하였다.

 

 *10월 3일, 김방경(金方慶)을 첨의중찬(僉議中贊) 상장군(上將軍)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로 삼고, 은 10근을 하사하였다. 이분희(李汾禧)를 백령도(白翎島)에, 이습(李褶)을 조홀도(祖忽島)에 유배시켰다가 곧 그들을 죽여 버렸다. 이습은 왕의 총애를 믿고 나라의 정령(政令)을 맡아볼 적에 백성들에게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이를 간쟁(諫爭)하여서 나라에 보탠 바가 많았으며 내료(內僚)들의 청탁을 일체 모두 거절하여 그 무리들이 항상 이를 갈았는데 마침 위득유(韋得儒)의 사건이 일어나서 온 나라가 흉흉하게 되자 이분희가 밤에 남몰래 홍다구에게 가서 일을 모의 하였고 이습도 또한 왕에게 권유하기를, "이것은 김방경에게서 비롯된 일이니 왕은 의당 미리 아는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니. 나라 사람들은 이분희 형제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수군거렸다.

 

왕이 원나라에 입조(入朝)할 때에 김주정(金周鼎), 박구(朴球), 염승익(廉承益)이 여러 번 그들의 단점을 말하였고 중랑장 최심(崔深)이 이를 증언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김주정 등이 내료들의 말을 듣고 왕을 부추기니 왕이 김방경을 불러 비밀히 의논하고 난 다음에 마침내 두 사람을 유배 시켰다. 혹자가 말하기를, "홍다구가 이것을 들으면 반드시 도당(都堂)에 고하고 그 사건을 조사하여 밝힐 것이니 그들을 죽이는 것이 낫다." 하였으므로, 마침내 모두 그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한 다음에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이습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내가 형 때문에 죽는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아깝게 여겼다.

 

 *10월 10일, 첨의찬성사 판전리사사((僉議贊成事 判典理司事) 유경(柳璥)이 사직을 청하자 치사(致仕)시키고, 중찬 김방경(金方慶)을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종1품)로, 박항(朴恒)을 참문학사로, 설공검(薛公儉)을 밀직부사로 삼았다. 중찬 김방경(金方慶)이 왕에게 잔치를 올렸다.

 *12월 모일, 원나라에서 단사관(斷事官) 속로가(速魯哥)를 보내어 와서 이분희 형제를 죽이고 지득룡(池得龍) 등을 유배시킨 사건과 종전군(種田軍). 진수군(鎭戍軍)의 아내를 조사하여 빼앗은 일을 따져 물었는데 대개 홍다구가 하소연했기 때문이다.

홍다구(洪茶丘) 일당(一黨)을 숙청한 일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원의 사신(使臣) 속로가(速魯哥)가 중찬 김방경 ․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허공(許珙)을 데리고 원으로 갔다.

 

몽고 공주가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왕이 이미 입조(入朝)하여 국가가 텅 비었으니 김방경과 허공은 황제의 명령이 있다면 함께 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데려갈 수 없다." 하니, 속로가가 그들을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김보성(金甫成)이 이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김보성은 원래 북계(北界) 사람인데 그의 아버지가 본국을 배반하고 요양(遼陽)으로 들어가서 홍다구의 심복이 되면서부터 이분희, 이습과 함께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속로가를 따라 왔는데 그동안 우리에게 따져 묻게 한 것은 모두 그의 음모였다.

 

34. 1279년(충렬왕 5). 68세

 정월, 왕이 원나라 황제를 알현하니, 황제가 어사대부 월렬륜(月烈倫), 추밀 발라(勃喇), 필도치(必도赤) 홀독가(忽禿哥), 아도올(兒도兀) 등을 시켜 왕에게 효유하기를, "흔도, 홍다구가 아뢰기를, ‘진변군(鎭邊軍), 종전군(種田軍)이 돌아올 때에 그 처자들이 모두 고려 관리들에게 억류되어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으며, 또 김방경(金方慶)은 벼슬이 높고 권세가 커서 불법한 짓을 많이 행하므로 이분희 형제가 언제나 그를 저지하려 하였기 때문에 김방경이 왕을 부추겨서 그들을 죽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인가? 하므로 왕이 대답하기를, "지난 여름에 황제의 분부를 받들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서 파견한 관원이 원수부(元帥府)와 함께 원나라 관군(官軍)의 처첩들의 결혼증서가 있고 없는지를 조사하여 규례에 따라서 점검하여 추쇄(推刷)한 것이고 감히 마음대로 억류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분희 형제의 사건은 강화도(江華島)에 있을 때에 이분희 아비가 권신(權臣) 김인준(金仁俊)을 섬기다가 뒤에 임연(林衍)과 더불어 공모하여 김인준을 죽였으며 임연이 왕을 폐립(廢立)하는 짓을 마음대로 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이분희의 음모 때문입니다. 신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자 이분희 형제가 매사(每事)에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죄를 징계하여 뒷사람들을 경계하려고 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2월 29일, 김방경을 세자부(世子傅.종1품)에 임명하였다.

 *6월 11일, 셋째아들 순(恂)이 별장(別將)으로 예부시(禮部試)에서 2등으로 과거 급제하였다.

 

35. 1280년(충렬왕 6). 69세

*7월 7일, 첨의중찬 김방경이 글을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함.

 *10월 30일, 야속달(也速達)이 경상도에서 돌아와 재추(宰樞)들에게 말하기를, "남쪽지방의 백성들이 환자곡[還穀]이 귀하여 모두 얼굴이 누렇게 뜬 색깔인데 귀국에서는 별감(別監)을 많이 보내어 오로지 가혹하고 난폭한 짓만을 일삼으며 형벌을 잘못 시행하여 속전(贖錢)을 무겁게 받아서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가 많으니 이 백성들도 곧 천자의 백성들인데 어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중찬 김방경(金方慶)이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말하기를, "정역 별감(程驛別監) 이영주(李英柱)가 항상 말하기를, ‘조정에서 백성들을 고문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의논하고 또 속전[贖銅]을 금지 한다면 누가 명령을 잘 따르겠습니까?’ 라고 하였는데, 야속달의 이러한 말은 아마 이런 무리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안렴사 권의(權宜)가 함부로 거두어 들이고 가혹하게 형벌을 행하였으니 청컨대, 그 죄를 바로 다스려서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니. 첨의부에서 그를 탄핵하여 유배시켰다.

 

김방경(金方慶)이 늙었다고 다시 사직을 간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천자가 동정(東征)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마땅히 원수(元帥)를 두도록 주청(奏請)해야 하겠다. 만약 공로가 없는 자를 청한다면 황제가 어떻게 생각 하겠는가?" 하며, 드디어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1일, 왕이 우승지 조인규(趙仁規)와 대장군 인후(印侯)를 보내어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상서(上書)하기를, "소국(小國)에서 이미 병선 9백척과 군사 1만명, 사공[梢工]과 수부[水手] 1만5천명을 준비 하였으며 군량미는 중국 석수(碩數)로써 계산하여 11만 석(碩)이고 기계(器械)까지도 모두 준비 하였는데 이로써 거의 힘을 다하여 황제의 은덕에 보답할까 합니다. 또 가만히 생각하건대 제후(諸侯)로서 중국의 재상이 되는 것은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며 요(遼)나라와 금(金)나라에서도 우리 조상들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삼았던 것입니다. 나도 또한 외람되게 황제의 은덕을 입어 일찍이 특진 상주국(特進上柱國)에 임명되었는데 제후로서 상국(上國)의 재보(宰輔)의 관직을 가졌던 것도 고금에 있었던 일이니, 잘 아뢰어 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행성(行省)의 군사나 국정에 관한 일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서로 상의 확정하여 시행할 것이며 심지어 사신을 보내어 원나라 조정(朝廷)에 가는 것 까지도 반드시 우리나라 사신과 함께 가게 할 것이며 소국(小國)이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식량이 모자라고 현재의 군량미 7만7백27석을 제외하면 공사간에 식량이 모두 고갈되어 있지만 그런데도 중앙과 지방에서 거두어 들여 대략 4만석을 준비하였으니 이 이상은 제공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만히 계산하니 1만 명 군사의 한달 치 식량이 대개 3천석이고 만약 군사가 3,4만 명에 이른다면 거기에 따르는 활단치(闊端赤)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며 사공과 수부도 또한 1만5천명 이상이 될 것입니다.

 

요즈음 행성(行省)의 첩문(諜文)을 얻어서 보니 명년5,6월에 배를 출발시키려고 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5,6월이 되면 장마비가 그치지 않고 내리고 조금이라도 서풍이 분다면 바닷길에 안개가 짙을 터이니 만일 혹시라도 시일을 지체하여 곧 배를 띄우지 못한다면 군사와 백성들이 한꺼번에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 됩니다. 만약 미리 다시 보고 드리지 아니하여 뒤에 일이 잘못 된다면 그 이해관계가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소방은 땅이 좁고 인구가 희소하여 군사와 백성들의 구별이 없는데 지금 다시 4천7백명을 더 뽑는다면 장차 그 인원을 충당하기가 어려울까 염려되니 탐라도(耽羅島)의 진수군(鎭戍軍) 1천명을 가지고 이를 보충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궁전(弓箭)과 갑주(甲胄)가 부족하니 갑옷 5천벌, 활5천개, 활시위 1만개를 보내어 주기를 바랍니다. 또 병선 9백척에 필요한 사공과 수부가 1만8천명인데 심지어 농민까지 징발하여 겨우 1만5천명을 얻었으니 그 부족한 3천명을 어디에서 징발 하겠습니까? 동녕부(東寧府)에서 관할하는 여러 성(城)이나 동경로(東京路)의 연해지방에 있는 주, 현(州縣)에서도 사공과 수부가 많으니, 3천명을 징발해 보내도록 해서 이를 보충하기를 바랍니다.

 

소방의 군관(軍官)들은 일찍이 진도(珍島), 탐라도, 일본을 치는 싸움에서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아직도 원나라의 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전번의 전공을 추가로 기록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김방경(金方慶)을 원수부(元帥府)의 구당(句當)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이며, 박지량(朴之亮) 등 10인을 총관(摠管)으로 삼고, 조변(趙卞) 등 10인을 천호(千戶)로 삼고, 김천록(金天祿) 등 20인을 총파(摠把)로 삼으며, 또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에게는 호두패(虎頭牌)를 하사하여 뒷사람들의 충성을 권장하도록 할 것입니다." 하였다. 원나라에서 장헌(張獻)을 보내어 비단 2만 필을 가지고 와서 쌀을 사서 군량미에 충당하게 하였다.

 

 *11월 17일, 김방경이 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22일, 중찬 김방경 ․ 밀직부사 박구(密直副使 朴球) ․ 김주정(金周鼎)이 동정군사(東征軍士)를 사열하였다.

 *11월 28일, 중찬 김방경 ․ 장군 정인경(鄭仁卿)을 원에 보내 하정(賀正)하게 하였다.

 *12월 23일, 조인규 ․ 인후가 원에서 돌아와 충렬왕을 위시한 일본원정에 참여한 고려의 장군들에게 관직을 하사한 것을 전함. 이때 김방경은 원으로부터 중봉대부 관령고려군 도원수(中奉大夫 管領高麗軍都元帥)에 임명되었다.

 

황제가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중서 좌승상(中書 左丞相) 행중서성사(行中書省事)로 삼고 인신(印信)을 하사하였다. 또 김방경(金方慶)을 관령 고려군 도원수(管領高麗軍都元帥)로 삼고,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을 소용 대장군(昭勇大將軍) 좌우 부도통(左右副都統)으로 삼아 모두 호두금패인(虎頭金牌印)을 하사하였고, 조인규(趙仁規)를 선무장군(宣武將軍) 왕경 단사관(王京斷事官) 겸 탈탈화손(脫脫禾孫)으로 삼아 금패인(今牌印)을 하사 하였고, 박지량(朴之亮)등 10인을 무덕장군(武德將軍) 관군 천호(管軍千戶)로 삼아 금패인을 하사하였고, 조변(趙卞) 등 10인을 소신교위(昭信校尉), 관군총파(管軍摠把)로 삼아 은패인(銀牌印)을 하사하였고, 김중성(金仲成) 등 20인을 충현교위(忠顯校尉) 관군총파(管軍摠把)로 삼았다.

 

이때 일본을 정벌하는 전함(戰艦), 군량미, 기계와 의장 등을 본국으로 하여금 일체 마련하도록 하고, 원수 흔도(炘都)와 우승상 홍다구(洪茶丘)를 보내어 감독 시켰는데 고려의 군신(君臣)들은 팔짱을 끼고서 멍청히 명령을 들었으나 도저히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이리하여 박항(朴恒)이 왕에게 말씀을 드린 다음에 글을 자세히 써서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이에 황제가 이러한 명령을 내린것이다. 만호. 천호. 백호는 모두 황제의 선명(宣命)과 부신(符信)을 함께 받았기 때문에 흔도 등으로 하여금 자기들 마음대로 전횡할 수가 없게 하였다. 그 동정(東征)하는 군사들을 접대하는 방책과 군사와 기계를 마련하는 방도는 모두 박항에게서 나온 것이다.

 

 *김방경이 하정사(賀正使)로 원에 파견되었다.

 

36. 1281년(충렬왕 7). 70세

*1월 모일, 김방경이 대명전(大明殿)에서 하정(賀正)하고 시연(侍宴)할 때 세조(世祖)가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게 하고 궁시(弓矢) ․ 검(劒) ․ 백우갑(白羽甲)을 하사하였다. 또 활 1천개, 갑주(甲胄) 1백벌, 반오(絆오) 2백 벌을 하사하여 동정(東征)하는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3월 17일, 원수(元帥) 김방경 ․ 만호(萬戶) 박구 ․ 김주정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合浦)로 떠났다.

 *4월 15일, 왕이 합포에 도착하여 18일 열병(閱兵)하였다.

 *5월 4일, 원수 김방경(元帥 金方慶)및 원나라의 흔도(炘都), 홍다구(洪茶丘)와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이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일본 정벌을 출발하였다.

 

 *5월 27일, 깁방경과 흔도(忻都)․홍다구가 세계촌(世界村) 대명포(大明浦)에 이르러 통사 김저(通事 金貯)로 하여금 격문(檄文)을 가지고 가서 일본군을 타이르게 하였다. 김주정이 먼저 왜인의 선봉과 교전하게 되어 여러 군대가 모두 배에서 내려서 그들과 더불어 싸웠는데 낭장 강언(康彦), 강사자(康師子) 등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여러 군대가 일기도(一岐島)로 향하였는데 선군(船軍) 1백 13인과 사공 36인이 풍랑을 만나서 그들의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낭장 유비(柳庇)를 원나라에 보내어 이를 보고 하였다.

 

 *5월 29일, 행성(行省)의 총파(摠把)가 원정군이 26일에 일기도(一岐島)로 향했다고 보고해 왔다.

 *6월 8일, 김방경(金方慶), 김주정(金周鼎), 박구(朴球), 박지량(朴之亮), 형만호(荊萬戶) 등이 일본 군사들과 힘써 싸워서 3백여 급(級)을 목 베었다.

 *6월 9일, 일본 군사들이 돌진하여 오니 원나라 관군들이 무너지고 홍다구는 말을 타고 달아났는데, 왕만호(王萬戶)가 다시 가로질러서 이들을 공격하여 50여 급을 목베니, 일본 군사들이 그제서야 물러갔기 때문에 홍다구는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6월 10일, 다시 싸우다가 패전 하였으며, 군중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전쟁과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모두 3천여 인이나 되었다.

 *6월 15일, 흔도, 홍다구등이 여러 번 싸웠으나 불리하였고, 또 범문호(范文虎)도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으니 회군(回軍)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는데, 말하기를 "황제의 분부에서는 강남군(江南軍)과 동로군(東路軍)으로 하여금 6월 보름 전에 반드시 일기도에 같이 모이게 하였는데, 지금 강남군은 제때에 오지 않고, 우리 군사가 먼저 와서 여러 번 큰 전투를 치렀다. 배는 상하고 양식은 다 되었으니, 장차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하니, 김방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6월 25일, 제장(諸將)이 또 처음과 같은 의논을 하니 김방경이 말하기를, "황제의 분부를 받들어 3개월 치 식량을 가지고 왔는데, 지금 한달치 식량이 아직 있으니 강남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힘을 합쳐서 공격 한다면 반드시 섬오랑캐를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하니, 여러 장수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범문호가 전함 3천 5백 척과 만군(蠻軍) 10여만을 거느리고 이르렀는데 마침 큰 풍랑을 만나서 만군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으니 시체들이 밀물과 썰물을 따라 포구로 밀려오니 이 때문에 포구가 막히어서 시체들을 밟고 다니게 되었다.

김방경(金方慶)이 중랑장 박온(朴溫)을 시켜서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군사들이 태재부(太宰府)에 이르러 여러 번 싸우다가 서로 물러나서 퇴각하였는데 만선(蠻船) 50척이 뒤따라 도착하였으므로 다시 전진하여 싸우고 있습니다."하고, 인하여 노획한 갑주(甲胄), 궁시(弓矢), 안마(鞍馬) 등의 물품을 바쳤으므로 왕이 박온을 섭장군(攝將軍)에 임명하였다.

 

 *7월 21일, 원수 김방경이 중낭장 박온(朴昷)을 보내어 제군(諸軍)이 태재부(太宰府)에서 여러 번 싸우다가 퇴군(退軍)하였으나 만선(蠻船-江南軍) 50척과 합세하여 다시 태재부(太宰府)로 향한다고 보고하였다.

 *8월 1일, 동로군(東路軍) 및 강남군(江南軍)의 동정군(東征軍) 함대가 응도(鷹島)의 해상에서 대풍우에 의해 거의 반이 전복(顚覆)되고, 사졸(士卒) 6-7할이 상실되어 회군하였다.

 *8월 4일, 왕과 공주가 경상도에 행차하였다.

 *8월 14일, 왕과 공주가 안동부(安東府)에 도착하였다.

 *8월 16일, 별장(別將) 김홍주(金洪柱)가 합포(合浦)로부터 안동부의 행궁(行宮)에 도착하여 원정군이 패하여 원수(元帥) 김방경 등이 합포에 귀환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윤8월 2일, 김방경 등이 안동 행궁에서 왕을 알현하였다.

 

37. 1282년(충렬왕 8). 71세

*2월 3일, 홀치(忽赤)가 죽판궁(竹坂宮)에서 왕에게 잔치를 올렸다. 저녁에 왕이 남문(南門)에 나와 앉았는데 중찬 김방경이 술에 취하여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가자 조인규(趙仁規)의 참소(讒訴)로 일시 순마소(巡馬所)에 갇히었다가 석방되었다.

 

38. 1283년(충렬왕 9). 72세

*1월 21일, 왕이 김방경의 집에 행차하였다.

 *12월 22일,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치사(致仕)를 청하자 허락하고 삼한벽상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 상락공(三韓壁上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司事 世子師 上洛公)(주17)에 봉하였다. 김방경은 이때 70세가 넘었는데도 머리털이 희어지지 않았으며,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어 병이 없었다. 나라에서 큰 의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자문하였다.

 #주17

*행장 : 僉議中贊

*장동익본 : 判都僉議事(‘첨의중찬의 또 다른 칭호’라고 해설)

*김태영본 : 1283년 12월, 推忠靖難定遠功臣 上洛公의 작호를 더하여 致仕하게 함(<東國通鑑>), 첨의령(僉議令)을 더 내려주고 상락군 개국백(上洛郡開國伯)을 봉하고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를 줌(<東史綱目>)

*고려사 : 上洛公으로 치사

*고려사절요 : 推忠靖難定遠功臣 上洛公

*묘지명 : ‘上洛公’만 기록.

*三重大匡 : 1308년(충렬왕 34) 삼중대광을 정1품의 품계명으로 제정하였고, 뒤에 벽상삼한을 덧붙였다가 다시 1310년(충선왕 2) 삼중대광이라 하였으며, 1362년(공민왕 11) 다시 벽상삼한을 덧붙였다. 1060년(문종 14) 문산계(文散階)를 처음 제정할 종1품(從一品)을 최고 품계로 하였다가, 1308년(충렬왕 34) 문관만 정1품을 두었으나 정1품을 위한 관직은 따로 두지 않았고, 그 명호(名號) 등의 제도는 변개가 많았다.

 

39. 1286년(충렬왕 12). 75세

*이 해에 김방경이 왕에게 선산(先山)의 성묘(省墓)를 청하자 아들 순(恂)을 태백산 제고사(太白山 祭告使)로 임명하여 함께 고향에 가게 했는데, 친구들과 수일을 머물고 나서, "농촌에 가을일이 한창이어서 백성들이 잠시라도 틈을 낼 수 없는 시기인데 오래 머물면서 그들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고 바로 돌아왔다.

 

40. 1288년(충렬왕 14). 77세

*11월 6일, 공녀(貢女)를 선발할 때 전추밀원부사(前樞密院副使) 홍문계( 洪文系-洪奎)가 응하지 않다가 처벌을 받게 되자 중찬 치사(中贊 致仕) 김방경이 그를 위해 병중(病中)에도 나와서 청소(請疏)하였다.

 

41. 1292년(충렬왕 18). 81세

*11월 27일, 왕이 중찬 김방경의 집에 행차하였다.

 

42. 1295년(충렬왕 21). 84세

*1월 9일, 치사(致仕)한 김방경에게 (僉議中贊보다 上位로 新設된) 첨의령(僉議令-최고직)의 관직을 더해 주었다.

*8월 27일, 김방경에게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의 관작(官爵)을 하사하였다.(주18)

#주18. 上洛郡開國公

1)고려사, 장동익본, 김태영본 : 1295년.

2)행장 : 1285년(충렬11). 76세.

3)묘지명 : 1296년에 ‘상락공으로 가봉’ 기록

 

*11월 12일, 강릉도안집사(江陵道安集使)를 통해 이승휴(李承休)에게 서장(書狀)을 전하였다.

 *12월 3일, 세자(충선왕)의 청에 의해 상락공(上洛公) 김방경에게 식읍(食邑) 1,000호 식실봉(食實封) 300호(주19)를 하사하였다.

 

 #주19.

1)고려사 : 1295년. 食邑 3000戶 食實封 300戶

2)장동익본 : 1295년. 食邑 1,000戶 食實封 300戶

3)묘지명 : 1296년. 食邑 1,000戶 食實封 300戶

4)행장 : 1285년. 食邑 1,000戶 食實封 300戶

 

43. 1296년(충렬왕 22). 85세

*2월 단모부(旦暮賦)를 지어 보낸 이승휴(李承休)에게 서장(書狀)을 보냈다.

 

44. 1297년(충렬왕 23). 86세

*5월 25일, 왕이 김방경(金方慶)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였는데, 이로부터 옮겨 거둥한 곳이 한군데가 아니었다.

 

45.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 즉위, 퇴위년). 87세

*1월 19일, 왕이 세자(충선왕)에게 전위(傳位)하였다.

 *5월, 익명서(匿名書)를 궁문(宮門)에 붙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조인규(趙仁規)의 처(妻)는 귀신과 무당을 섬겨 저주하여 왕으로 하여금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그 딸<조비(趙妃)>에게만 사랑을 쏟게 하였다." 하였다. 공주가 조인규와 그 처를 하옥(下獄)시키고, 방(榜)을 붙인 자를 찾아내게 하였는데 바로 사재주부(司宰主簿) 윤언주(尹彦周)가 한 짓이었다. 또 조인규의 아들 조서(趙瑞). 조연(趙璉). 조후(趙珝). 사위 박의(朴義). 노영수(盧潁秀)등과 그들의 처를 가두고, 철리(徹里)를 보내어 원나라에 가서 이를 아뢰게 하였다. 이에 상락백(上洛伯) 김방경을 위시한 모든 치사 재상(致仕 宰相)들이 공주에게 철리를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으며, 왕이 사람을 시켜 또 요청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8월 18일, 원의 사신이 충선왕으로부터 국왕인(國王印)을 취하여 충렬왕에게 전하였고, 19일에 충렬왕이 복위 조서(復位 詔書)를 받았다.

 

46. 1299년(충렬왕 25). 88세

*1월 16일, 만호 인후(萬戶 印候)․김흔(金忻)․밀직 원경(密直 元卿) 등이 자의(恣意)로 군사(軍士)를 동원하여 만호 한희유(萬戶 韓希愈)․상장군 이영주(上將軍 李英柱)를 잡아서 모반(謀叛)을 도모하였다고 무고하였다.

 

47. 1300년(충렬왕 26). 89세

*8월 16일, 상락공 김방경(上洛公 金方慶)이 개성 백목동 앵계리(開城 栢木洞 鸎溪里)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김방경은 안동인(安東人)으로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원손(遠孫)이며, 성품이 충직(忠直)하고 신의(信義)가 있고 너그러우며 엄숙하고 굳세며 말이 적었다. 타고난 기품(氣品)이 너그러워 소절(小節)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전고(典故)에 대한 식견이 많아 일을 결단하는데 능하였다. 자신을 검속하여 항상 부지런하고 검소하였으며, 옛친구를 버리지 않았다. 비록 치사(致仕)하여 한가하게 살면서도 나라를 근심함이 집안을 돌보듯이 하였으며 나라에서 큰 의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諮問)하였다. 나이 89세가 되었으나 머리털이 희어지지 않았으며 기골(氣骨)이 보통 사람과 달라 추위와 더위에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매, 이때 권력을 가진 자가 김방경을 미워하여 마침내 예장(禮葬)을 저지하였다. 후에 시호(諡號)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다.

 *9월 3일, 유언(遺言)에 의해 예안 서산(禮安 西山-현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산19-1번지)에 안장(安葬)하였다. 이때 좌승지 판비서시사 문한학사 이진(左承旨 判秘書寺事 文翰學士 李瑱)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48. 1307년(충렬33). 로 7년 후

*6월 14일, 삼한벽상 삼중대광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三韓壁上 三重大匡 宣忠恊謀 定難靖國功臣)으로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 충렬(忠烈)이 내려졌으며, 신도비(神道碑)가 왕명에 의해 건립되었다.(주20)

#주20.

*행장 : 1307년(충렬33). 6월 14일. 三韓壁上 三重大匡 宣忠恊謀 定難靖國功臣으로 追贈, 諡號가 忠烈, 神道碑가 건립됨.

*장동익본 : 충선왕대(1308-1313)에 추증.

*묘지명, 고려사, 고려사절요 : 추증 기록 및 신도비 기록 내용 없음.

<가족 사항>

모(母)는 원흥진부사 낭장(元興鎭副使 郎將) 송기(宋耆)의 따님, 부인(夫人)은 중서사인 지제고(中書舍人 知制誥 朴益旌)의 따님으로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주21)에 책봉되었다. 소생은 3남(副知密直司事 愃․贊成事 忻․判三司事 恂) 3녀(壻 知密直司事 趙忭․將軍 金元沖․通禮門使 權允明). 후처(後妻)는 손씨(孫氏)로서 1녀(壻 蔡宜=贊成事 蔡洪哲)가 있다.

 

*주21.

*족보(경진보(1580년 간), 기미보(1979년간) 기타 모두) : 냉평국대부인 죽주박씨

*장동익본 : 음평군부인

*묘지명 : 부인 책봉명 기록 없음(박익정의 따님--)

*묘비문, 행장 : 기록 없음

 

1)충렬공의 배위 죽주박씨에 대한 호칭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의 ‘음평(陰平)’은 현 경기도 죽산을 말함.

*음평(陰平) : 죽산(竹山)은 경기도(京畿道) 용인군(龍仁郡)과 안성군(安城郡) 일부에 속해있던 옛 지명으로 --(중략)--고려(高麗) 초에 죽주(竹州)로 고치고,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음평(陰平) 또는 연창(延昌)이라 하였으며 --(중략)--1413년(조선 태종13)에 죽산(竹山)으로 개칭하여 감무(監務)를 두었고,--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 1971. 민족문화추진회간. 126p, 133p)

2)냉평국대부인(冷平國大夫人)’의 ‘冷平’이란, <한국지명총람>(경상북도 편)에 ‘경북 안동지방에 있는 지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원로종친[김재철님]의 제보를 받고 2008년 12월, 필자 김항용은 국립 중앙 도서관에서 해당 도서를 조사하였으나 찾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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