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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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김시민(金時敏)

p05.png 3. 주요 자료 소개

7) 충민사 소개 (2002. 3. 31. 태서(익) 제공)

김시민장군 충민사(金時敏將軍 忠愍祠)

충청북도 기념물 제12호.   소재지 :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충민사 입구 충무교>

김시민 장군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사당이다. 김시민(1554-1592)의 자는 면오(勉吾), 본관은 안동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24년(1591)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사천, 고성, 진해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병마절도사(嶺南右道兵馬節度使)에 올랐다. 그후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제갑(1525-1592)의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본관은 안동으로 명종 8년(1553)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14년(1581)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임진왜란때 원주목사로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부인 이씨도 순절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시민은 진주 충렬사에 제향되었으나 고종 3년(1866) 훼철되어 김제갑의 사당(일명 충열사)에 합사하였는데, 1976년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충민사를 세웠다.

 

 * 괴산군지(괴산군지편찬위원회, 1990) 기록 내용

(2002. 5. 20. 윤만(문) 제공)

  (1) 忠烈祠(충렬사)   pp 915

--충렬사는 영조 13년(1737)에 槐山邑(괴산읍) 陵村里(능촌리)에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 순절한 文肅公(문숙공) 金悌甲(김제갑 1525∼1592)과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다 순절한 그의 조카인 忠武公(충무공) 金時敏(김시민 1554∼1592)을 合享(합향)한 사당인데 매년 3월 仲丁日(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사당에 있던 선조의 倫音(윤음)인 "一遇孤城(일우고성) 萬古三綱(만고삼강)"이란 편액은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 맛배지붕 목조 기와집이며 일주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2) 忠愍祠(충민사)   pp 917∼918.

--충민사는 1978년 정부에서 유적 정화사업의 하나로 괴산읍 능촌리에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다 순절하여 선조 37년(1604)에 宣武功臣(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뒤에 上洛府院君(상락부원군)에 추봉된 忠武公(충무공) 金時敏(김시민 1554∼1592)을 모신 사당으로 조성하였다. 김시민의 사당은 효종 3년(1652)에 진주에 세워졌으나 고종 3년(1866)에 훼철되자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원주목사로 임진왜란때 순절한 숙부인 文肅公(문숙공) 金悌甲(김제갑 1525∼1592)의 사당인 충렬사에 합사하였는데 1976년에 중원군 살미면 무능리에 있던 김시민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그 아래에 충민사를 세웠으며 매년 음력 9월 初丁日(초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에 "忠愍祠(충민사)"란 편액을 걸었으며 그 앞에 內三門(내삼문)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고주집인 宣武門(선무문)과 外三門(외삼문)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배지붕으로 된 效忠門(효충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그리고 바깥마당에 김시민 신도비와 月灘(월탄) 朴鍾和(박종화)가 짓고 李相馥(이상복)이 쓴 金時敏將軍遺蹟淨化紀念碑(김시민장군적정화기념비)를 세웠다.

--이 충민사는 1976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으며 충민사 관리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金時敏將軍遺蹟淨化紀念碑(김시민장군유적정화기념비)】

--우리 민족 억조창생은 남녀노소를 말할 것 없이 모두 다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신위를 모신 충민사 뜰 앞에 무릎끓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장군의 만고충절을 추모한다. 조선조 선조대왕 25년(서기 1592) 4월14일 왜관백 풍신수길은 대륙을 침공할 야욕으로 삼십만 대병을 바다에 띄워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7년 전쟁을 이르켜 조선팔도를 유린했을 때 이순신장군의 한산대첩과 권율장군의 행주대첩과김시민장군의 진주대첩과 명장 이여송의 평양탈환이 아니었던들 우리겨레는 모두 다 왜적의 칼아래 어육이 되고 삼천리 강토는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에서는 진주대첩의 큰 공훈을 찬양하여 이순신장군과 같은 충무공의 시호를 내리고 사우를 세워 신위를 봉안했던 것이다. 공은 명종 8년(1554) 갑인 8월 27일 목천 잣골 충남 천원군 병천면 가전리 본제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장성하여 25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에 취임했으나 병조판서가 국방정책을 듣지 아니하므로 결연히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 그 후 경인년에 진주판관으로부임했다.

 

장군은 부임한 후에 군비를 충실히 하여 새로운 무기 天地玄黃銃筒(천지현황총통)이며 화약으로 飛擊震天雷(비격진천뢰)를 만들어 비치하니 장군은 벌써 다음해에 왜군이 침범할 것을 예측한 것이었다. 과연 이듬해 임진 사월에 왜적은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수사 원균이 패주하니 적병은 홍수같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로 향하기 시작했다. 장군은 군졸들을 호령하여 진주성을 사수할 것을 맹세한 후 갑주투구로 장창을 빗겨들고 진주의 인근읍 고성 거창 사천에 둔병한 적군을 습격하여 패주시키고 적장 평소태주 小太(소태)를 사로잡아의주 행궁으로 보내니 아군의 군세는 크게 떨쳤다. 국가에서는 장군의 큰 공을 아름답게 생각해서 진주목사로 승진시켰다.

 

쫓긴 왜적은 다시 대군 삼만여를 휘동하여 진주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 때 진주성 안에 있는 아군은 겨우 3천7백여명이었다. 장군은 친히 장병들을 격려하니 성중 백성들은 감읍하면서 여자들 까지 자원하여 낭자군이 되어 남복으로 갈아입고 군사들의 음식을 공궤하고 홰를 묶어 돌을 깨뜨려 임전태세를 취했다. 10월 초3일 적의 대군은 대사다리와 飛階(비계)를 매고 조총을 쏘면서 수천명이 성을 기어올랐다. 장군은 친히 활을 당겨 적병을 쏘아 부치고 장졸들은 기어오르는 적의 손과 팔을 찍어제치니 떨어져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낭자군들도 용감했다. 돌로 던져 성으로 기오른 적 머리통을 맞히고 끓는 물을 동이로 날라 적의 면상에 끼얹으니 적은 감히 기어 오르지 못하고 장군은 장졸들에게 영을 내려 급히 천지현황총통을 쏘아부치니 조총을 가진 적병은 감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진을 물려 퇴각했을 때 장군은 새로운 무기 비격진천뢰를 퇴각하는 적진을 향하여 터뜨렸다. 천지를 진동하는 큰 음향과 함께 화염은 충천하면서 적병은 수천명이 도륙되었다. 적의 시체는 산같이 쌓이고 이때 적의 죽은 자는 장군이 3백명이요 병졸이 3만에 가까우니 진주로 침범했던 왜적은 완전히 전멸상태였다.

 

적장 長谷川秀一(장곡천수일), 細川忠興(세천충흥), 加藤光泰(가등광태)는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패잔병 3백여명을 이끌고 부산으로 달아나다가 長谷秀一은 분통이 터져서 길에서 죽으니 이것이 김시민장군의 진주대첩이었다. 싸움이 끝난 후에 김시민장군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쟁터를 순찰할 때 만산평야한 시체 틈에 살아남은 왜적 한놈이 장군의 이마를 쏘았다. 슲프다. 장군은 말에서 떨어져 순절하니 임진 11월26일이요 나이는 겨우 39세였다.진주성민이 호곡하여 애통하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고 나라에서는 호국의 큰 별을 잃었던 것이다. 만약 장군이 좀더 계시었던들 이듬해 계사년 유월에 진주는 실함되지 아니 했을 것이다. 역사가 흘러갈수록 발을 굴러 통곡할 일이다. 정부에서는 만사람의 뜻을 모아 충민사를 복원 충창 경역을 정화하고 김시민장군의 유적정화기념비를 이곳에 세워 장군의 위업을 만세에 전한다.

 

一九七九년 월 일.  월탄 박종화 근찬.  우송 이상복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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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장군 유적 정화 기념비>                      <좌-충무공 신도비.  우-김제갑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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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宣武門>                                                <사당-충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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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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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지-영의정 추증>

 

1998년 4월, 역사적 고증과 영정부문 국내 제1인자이신 장우성화백께서 수개월의 각고 끝에 완성한 영정을 충민사 (충북 괴산)에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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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내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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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내 진주성 그림 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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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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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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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내의  구사당>

 

충민사 경내에 있으며 충무공과 문숙공(휘 제갑)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현 충민사 자리에 조선 선조때부터 있어온 사우(불천지위)로 충민사 중건(1978)으로 그 우측에 이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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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사당 내의 충무공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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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내의 구사당내 향사 장면(2003. 5. 8.)> (2004. 5. 9. 성수(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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