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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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김시민(金時敏)

p05.png 3. 주요 자료 소개

 11) 촉석정 충단비(矗石旌忠壇碑)  소개 (2002. 5. 18. 정보미(문) 제공)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소 재 지 : 진주시 본성동 500-1

지정일자 : 1972년 2월 12일

규      모 : 비높이 143㎝, 폭92㎝,두께 21cm

시      대 : 조선 숙종 12년(1686)

 

이 비는 현재 촉석(矗石)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은 수성암(水成岩)을 사용하였으며 비문은 하단부가 마멸되었다. 귀부(龜趺)는 비신과 같은 수성암(水成岩)으로 높이 35cm이며 한 돌로 조각되어 있다. 이수(이首)는 쌍용(雙龍)을 조각하고 있는데 쌍용이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형태이며, 그 아래부분에는 화문(花紋)을 조각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다른 비석과 다르게 이수부분이 커서 윗부분이 넓고 하부가 좁은 사다리형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으며, 아랫쪽이 판독 되지 않을 뿐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비를 세운 동기는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金時敏)장군을 비롯한 진주성 싸움에서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위해서다.

 

즉 2만명의 왜군이 패배하였던 진주성의치욕을 씻고자 왜적은 다음 해 선조(宣祖) 26년(1593)에 제2차의 진주성 공략을 하게 된다. 왜군은 12만1천6백여명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세겹으로 에워싸며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6월29일 성이 무너졌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해주는 이 비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충절을 기린 비라고 하겠다. 비문은 정헌대부 이민서(正憲大夫 李敏徐)가 지었고 성균관사 신익상이 비문을 적었으며 홍문관제학 지연경사 김만중이 두전(頭篆)을 썼다.

 

비문에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에 대하여 기술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종후(高從厚 1554∼1593)는 임진왜란 당시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싸우다가 이곳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또한 비문은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등과 남강(南江)에 투신하게 되는 그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또 한명은 황진(黃進 ?∼1593)으로 황희(黃喜)의 5대손(代孫)이다. 이는 1591년 통신사와 함께 일본을 다녀와서 그들의 침입을 예언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때에는 용인(龍仁)에서 왜군과 교전하다 패전하자 진안(鎭安)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하는 전공을 올렸으며 진주성에서 마지막까지 성을 고수하다 전사한 인물이다. 이 외에도 장윤(張潤)등 진주성에서 순국한 인물을 비문에 기록하고 있어 임란의 전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촉석정충단비명>(矗石旌忠壇碑銘)

 

--(전략)

--처음 적이 대부대로 침구하여 조령을 넘어 이일(李鎰)을 패주시키고 신립(申立)을 꺾고 곧바로 서울을 함락하였다. 또 군사를 나누어 호남을 넘보았는데 한산도해전에서 패하게 되자 군사를 다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략하였다. 이 때 진주판관 김시민(金時敏)공은 적이 진주에 이르기 전에 미리 관내의 군사를 규합하여 사천과 고성의 적을 쳐서 쫓아버리고 진해와 금산을 점거한 적장을 격파하니 위명(威名)이 크게 떨치었다. 그리고 서둘러 회군하여 진주성 안으로 달려 들어와서 방어용 장비를 크게 수리하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진년(1592) 10월에 적이 과연 무더기로 몰려와 진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성안의 군사는 채 천명도 되지 않았다. 적장이 여러 진영의 군사 10여만명을 합하여 6일동안 포위하여 공격하엿다. 저들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형세가 마치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김공은 행동에 여유가 있어 때로 젓대도 불고 거문고도 타니 군중(軍中)이 믿고서 안정되었다. 여러 장수를 독려하니 의기가분발하고 군사들이 다 감격해 울었다. 기회를 타서 민첩하게 기묘한 계책을 내어 싸우니 적의 시체가 무더기로 쌓였다. 이에 적은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는 군사를 거두어 물러 갔다. 바로 이날 김공은 홀연히 유탄에 맞아 성위에서 전사하니 고을 백성과 장사(壯士)들이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

--(중략)

--그 뒤 역대 왕의 포증(褒贈)이 매우 구비하였다. 창렬사(彰烈祠)를 짓고 또 성 근처의 산기슭에 정충단(旌忠壇)을 모아 봄 가을로 제사하였다. 증 영의정 김시민공. 증좌찬성 황진공. 증좌찬성 김천일공. 증우참찬 최경회공의 위패는 북쪽에서 남향해 있고, . . . . . . .

--(후략)

- - - - - - - - - - - -숭정후 59년 병인 8월 일 입(立)

--정헌대부이조판서겸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경연성균관사 이민서찬(撰)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동지성균관사- - - - - - - - -신익상서(書)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홍문관제학지경연사 - - - - - - 김만중전(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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