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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요 자료 소개
12) 시장(金詩敏 諡狀) 소개 (2004. 8. 26. 항용(제) 출전 : 국역 국조인물고 제4집 233~239쪽 이유(李濡) 지음 공의 이름은 시민이고 자(字)는 면오(勉吾)이고 성은 김이며 고려 때의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12세손이다.
임진왜란 때에 공이 진주 판관(晉州判官)으로서 그 동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기용되어 일부의 군사를 이끌고 외로운 성을 지켜 큰 적을 물리쳐 경상우도(慶尙右道)를 보전하였으므로 그 공적이 참으로 특이하고 위대하여 매우 뛰어났거니와, 이제까지 1백 수십 년 동안에 어리석은 아녀자일지라도 다 임진년 진주의 승첩을 칭송하니, 그 군기(群機)를 규획(規畫)하고 사중(士衆)을 격려한 일에는 반드시 전할 만한 것이 많을 것인데, 공이 전진(戰陣)에서 작고하고 6년의 전쟁을 겪고 나서 이것을 기술(記述)한 사람이 없고 그곳이 또한 행조(行朝)에서 멀어서 그때 아뢰어서 드러내어 칭송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상세한 것은 옛일에 박식한 자일지라도 알아서 말할 수 없으니, 아까워 견딜 수 있겠는가?
다만 백사(白沙 이항복)ㆍ하담(荷潭 김시양) 등 명공(名公)들이 기술한 것과 진주 유민(遺民)이 지은 비문에 힘입어 그 공적 중에서 현저한 것은 오히려 알아서 밝힐 수 있다.
삼가 살피건대, 공이 진주 판관이 된 이듬해가 임진년이다. 이때 목사(牧使)가 마침 죽고 왜적의 소식이 갑자기 이르렀는데 인심이 크게 놀라서 도산(逃散)할 마음을 일으키므로, 공이 고을의 일을 대행하여 명령하기를, “감히 달아나는 자는 참(斬)하라.” 하고, 드디어 청야(淸野)하고 성 안에 들어가 기계를 보수하고 성지(城池)를 수선하여 사수(死守)할 계책을 세웠다.
이때 임금은 서방으로 피하고 적은 한성(漢城)과 개성(開城)을 잇달아 함락하여 팔도를 유린하는데 고을들이 풍문만 듣고 달아나 흩어지고 감히 그 예봉을 건드리는 자가 없었으나, 진주만이 요해를 끼고 우뚝히 전라도의 보장이 된 것을 조정에서 듣고 목사를 제수하였다.
공이 사졸(士卒)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고 생사를 같이할 것을 맹세하고 드디어 출병하여 사천(泗川)ㆍ고성(固城)의 적을 쳐서 이긴 바가 많았고, 또 진해(鎭海)에서 적진을 격파하여 그 장수 평소태(平小泰) 등을 잡아 행지(行在)에 헌부(獻俘)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초수(楚授)하였다. 공이 곧 군사를 일으켜 북으로 나가 금산(金山)에서 적을 격파하여 군세를 크게 떨치니, 개령(開寧)ㆍ금산(錦山)의 적이 풍문만 듣고 거두어 물러갔다.
이 해 겨울 공이 출전하여 돌아오기 전에 적의 대추(大酋)가 한산(韓山)으로부터 바닷가 고을들을 둘러 나와 여러 둔(屯)의 군사 10만여를 아울러서 장구(長驅)하여 곧바로 진주를 범한다는 말을 공이 듣고 길을 곱잡아 달려들어와 사민(士民)의 남녀를 모아 수첩(守堞)에 대오를 배치하여 부분이 겨우 정해졌는데, 적이 이미 모여 에워싸고 육박하여 왔다.
많고 적은 형세가 마치 산이 알을 누르는 것과 같았으나, 공은 다만 충의(忠義)로 격려하고 부인과 함께 친히 술과 음식을 가지고 성을 돌며 군사를 먹이니 사람들이 다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적이 운제(雲梯)ㆍ지도(地道) 등 온갖 계책을 써서 번갈아 공격하였으나, 공이 기회를 타서 계략을 쓰는 것이 민첩하고 신기하여 여러 번 와도 여러 번 물리치니, 적의 형세가 크게 꺾였다.
싸움이 한창인 때에 뭇 사람의 마음은 두렵고 장사(將士)는 생기(生氣)가 없었으나 공이 바야흐로 지휘하고 호령할 때에는 의기가 안정되고 때때로 거문고를 울리고 피리를 불어 마치 무사한 때와 같이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믿고 편안히 여겨 성가퀴에 올라 14일 동안 밤낮으로 싸워서 적의 주검이 들에 가득한데 갑자기 천둥치고 비가 내려 어두워지니, 적이 놀라 당황하다가 밤에 달아나서 성이 드디어 완전하였다.
적이 물러간 날에 공이 성을 순찰하는데 한 왜병이 쌓인 주검 안에 엎드려 있다가 총을 쏘아 공을 맞혔으므로 메어 관사로 돌아왔으나, 이 해 12월 26일에 상처를 앓다가 졸서(卒逝)하였는데 공은 이때 39세였다. 성 안에 사녀(士女)의 울음소리가 천둥 같았고 호남ㆍ영남의 인사가 다 서로 조상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는 어찌 하는가?” 하였다.
이듬해에 괴산에 있는 선대 묘역에 반장(返葬)하느라 호남 길로 나오는데 지나는 곳의 백성이 앞다투어 수레를 끌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 없었으면 우리가 죽은 지 오랠 것입니다.” 하였다.
진주가 두 번째 포위되었을 대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전라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璡)과 함께 군사 6만을 합하여 지키므로 성세(城勢)가 전보다 10배나 되니 사람들이 다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한 늙은 기녀가 홀로 근심하므로 김공이 불러서 그 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에는 군사가 적더라도 장졸(將卒)이 서로 사랑하고 호령이 한결같았으므로 이겼으나, 이제는 군에 통괄하는 바가 없어서 장수가 군병을 모르고 군병이 장수를 익히지 못하니, 첩이 이 때문에 근심합니다.” 하므로, 김공이 그 뭇 사람을 현혹하는 것을 미워하여 참하였는데 수일 뒤에 성이 함락되었다.
적이 드디어 성을 무너뜨리고 해자를 메우고 우물을 묻고 나무를 베고 소ㆍ말ㆍ닭ㆍ개 등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갔는데, 대개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전일의 패배에 분노하여 여러 적들을 시켜 힘을 합하여 반드시 도륙하여 없애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 강화할 때에 왜적이 말하기를, “진주성의 싸움에서 우리 장관(將官)이 죽은 것이 3백이고 군병이 죽은 것이 3만이니 반드시 상당한 것을 취하고서야 화해를 의논할 수 있다.” 하였는데, 대개 왜적이 입구(入寇)하고부터 실패 본 것으로는 진주성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그 분한이 특히 깊어서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이긴 것으로도 오히려 상당한 것을 얻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적병이 가득하여 살육한 것은 다 적을 수 없거니와 깊은 산이나 궁벽한 골짜기도 거의 조금도 멀쩡한 땅이 없었으나 진주만이 공이 굳게 지켜서 호남과 호서 내포(內浦)가 힘입어 완전하였으므로 국가의 군량ㆍ기계를 다 호남ㆍ호서에서 장만하였다.
공이 1천이 못 되는 군졸로 네 지경을 출입하여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적의 진영을 엄습하여 장수를 잡아서 드디어 위세가 미치는 곳에서는 싸우지 않고 물러가는 자가 있게 하였고, 마지막에는 외로운 성을 지키고 크게 날로 늘어가는 적을 물리쳐서 국가가 중흥할 근저를 만들엇으니, 중도에 일찍 죽어서 큰 뜻을 다하지 못하였더라도 그 성취한 것을 보면 그 정충(貞忠)하고 장렬(壯烈)한 것을 어찌 한 곳의 방어에서 공을 거두고 한 사지(死地)에서 자결한 자와 견주어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백사 이 정승이 말하기를, “성을 지킨 공은 세상에서 특히 연안(延安)의 이정암(李廷馣)을 일컬으나 진주의 김시민에 못 미치니, 이는 또한 거꾸로 놓인 것이다.
이정암의 공은 워낙 칭찬할 만하나, 김시민과 아울러 논한다면 또한 차등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대개 이정암이 대적한 자는 흑전장정(黑田長政)인데 군병이 1만이 못 되어 이정암이 거느린 것도 수천이 넘고 모여 온 의병장들도 많아서 맞설 만하였고 당시 그 도의 장수들은 다 공을 세우지 못하고 이정암만이 능히 이러하였으며 진중(陣中)에 또한 사자(士子)가 많아서 과장하기 쉽고 행재가 멀지 않아서 명성이 알려지기 쉬웠으므로 그 공이 크게 나타났으나, 김시민으로 말하면 본디 거느리던 것을 거느렸을 뿐이고 원병이 매우 적었고 각 성채의 적들이 온 진영을 다하여 합세하여 적병이 네 고을에 차서 천이나 만으로 셀 수 없어 마치 산을 쳤으므로 그 형세가 쉽지 않은 것이 이정암보다 훨씬 더하였으나 그때 그 도내 사람들이 흩어져서 보고 아는 사람이 없었고 행재가 아주 멀리 있어서 명성이 미치지 못하였으니, 연안의 일과 견두어 헤아린 것은 정론(定論)이 이니다.
하담 김 판서가 말하기를, “임진란 때에 우리 나라에 세 대첩(大捷)이 있었는데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노량(露梁)과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행주(幸州)와 절도사 김시민의 진주가 이것이다.” 하였다.
이 연안ㆍ노량ㆍ행주의 공은 워낙 다 사람의 이목에 빛나나 당시 제공(諸公)의 논평에서 대등하게 하기도 하고 더하게 여기기도 하였으니, 공의 큰 공을 대개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은 가정(嘉靖)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에 목천현(木川縣) 백전촌(栢田村)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도 아주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사는 마을에서 가까운 큰 냇물 가의 바위가 웅덩이를 만들고 큰 뱀이 그 가운데에 굴을 지어 살면서 백성의 가축이 물에 가까이 가면 으레 잡아먹혔는데, 공이 없애려고 뽕나무와 쑥대로 손수 활과 살을 만들어 가동(家僮)을 데리고 냇가에 가서 가동을 시켜 먼저 바위에 올라가 도발하게 하였으나 아이가 두려워서 감히 나아가지 못하므로 공이 활을 당겨 쏘려 하니 아이가 겁이 나서 달려 올라갔다.
이윽고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고 물결이 용솟음치며 과연 큰 뱀이 나와 바위를 둘러 턱을 딱 벌리고 사람을 향하는 형세가 매우 사나웠는데, 공이 문득 나아가 어지러이 쏘아서 당장에 죽였다.
이때 공의 나이가 8세이었으므로 장로(長老)들이 다 크게 놀라고 듣는 자는 모두 매우 씩씩하게 여겼는데, 지금까지도 주민들이 김공이 뱀을 쏜 곳이라고 가리켜 말한다 한다. 장성하여서는 몸이 건장하고 크며 도량이 비범하나 기력을 믿고 학문을 즐기지 않고 큰소리하기를 좋아하므로 남들이 웃고 허황하게 여겼다.
선조 무인년(戊寅年 1578년 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하고 일찍이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게 일을 의논하였으나 판서가 그 말을 채택하지 않으므로 공이 항론(抗論)하여 마지않으니 병조 판서가 견디다 못하여 목소리를 돋우었는데, 공이 곧 일어서서 모자를 벗어 땅에 던지고 발로 밟아 부수며 말하기를, “장부가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남에게 모욕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곧 달려나가 벼슬을 떠났다.
이 때문에 더욱 영락(零落)하고 불우해지니, 당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래 뒤에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이 되었는데 정승 이헌국(李憲國)이 제조(提調)로서 특별히 기량이 뛰어남을 알아주고 여러 번 외직(外職)에 보임되었을 때에 으레 청하여 유임시켰으며, 중봉[重峰 조헌(趙憲)] 조 선생이 일찍이 상소하여 재능이 장수가 될 만하고 왜적을 막을 수 있는 자 몇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공이 실로 거기에 끼었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진주 판관이 되었는데 처음에 공의 숙부인 관찰사 김제갑(金悌甲)이 일찍이 진주를 맡아 뛰어나게 잘 다스렸으므로 이때에 진주 사람들이 기뻐서 말하기를, “이는 김 사군(金使君)의 조카이다.” 하고 온 경내가 모두 기뻐하였으며, 공이 다스리는 것도 능히 그 뒤를 이어 이장(弛張)이 적당하여 덕이 베풀어지고 위엄이 행해져서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따랐으므로 임진왜란 때에 백성이 마치 자제처럼 명령을 따랐다.
바야흐로 성이 포위되었을 때에 관찰공(觀察公)이 원주 목사(原州牧使)로서 영원산성(領原山城)에서 순절하여 부고가 왔으므로 공이 거애(擧哀)하였는데 온 성안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들 친척을 슬퍼하듯이 통곡하였는데 왜적이 염탐하여 말하기를, “주장(主將)이 인심을 이처럼 얻었으니 성을 칠 수 없다.” 하였다.
뒤에 공의 조카 김유(金維)가 진주를 지나다가 초가에 묵었는데 연로한 주인이 물어서 공의 조카임을 알고는 놀라 일어나 손을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소를 잡고 머무르게 하고 말하기를, “김 사또(金使道)의 덕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스스로 지인(知印)으로서 일찍이 공을 가까이 모셨다고 말하며, 이어서 그때의 일을 대강 전하였는데, 공은 활을 잘 쏘아서 싸움에 임하면 지인이 양 옆에 서서 화살을 공급하게 하여도 오히려 부족하였고 오래 쏘아 무지(拇指)의 힘이 떨어지면 식지(食指)ㆍ장지(長指)를 써서 쏘아도 오히려 쏘면 반드시 거듭 맞히며 세 손가락이 다 병나면 쏘지 못하였다 하였다.
조정에서 공의 공훈을 추영(追榮)하여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호(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號)를 내리고 2등 제2에 두고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 상락군(上洛君)을 추증(追贈)하였고, 뒤에 또 영의정(領議政)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을 추증하고 진주성 안에 단(壇)을 설치하여 정충(旌忠)이라 이름하였고, 뒤에 또 따라서 사단(詞壇)을 세워 임금이 충렬(忠烈)이라 사액(賜額)하고 창의사(倡義使) 이하 전사한 제공(諸公)을 아울러 제사하되 공을 주향(主享)하였으며, 28년 뒤 기미년(己未年 1619년 광해군 11년)에 남이흥(南以興) 공이 목사일 때에 제단에 비석을 세워 제(題)하여 전성각적비(全城卻敵碑)라 하고 그 고을 사람인 진사(進士) 성여신(成汝信)을 시켜 글을 지어 기록하였고, 금상(今上) 병인년(丙寅年 1686년 숙종 12년)에 정승 서문중(徐文重)이 경상도 관찰사이었을 때에 남방의 장사(將士)에게 물어서 풍비(豐碑)를 세우고 판서 이민서(李敏敍)가 글을 지어 전후 제공을 아울러 기록하였으며, 공의 조카 김소(金素)가 일찍이 진주 목사이었을 때에 정충단에 친히 제사하였는데 강신하고 나서 축문을 읽으니 백홍(白虹)이 사중(祠中)에서 갑자기 일어 종일 있다가 없어졌다.
공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혈통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에게서 나왔다. 고조 김수형(金壽亨)은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지내고 좌통례(左通禮)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증조 김언묵(金彦黙)은 종사랑(從士郞)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으며, 할아버지 김석(金錫)은 진사이고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여 드디어 은둔하여 벼슬하지 않았으며, 아버지 김충갑(金忠甲)은 지평(持平)으로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당하여 20년 동안 귀양 살고 벼슬하였으나 현달(顯達)하지 못하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창평 이씨(昌平李氏)이다.
공이 부여 서씨(扶餘徐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그 아버지는 서팽수(徐彭壽)이고, 아들이 없으므로 형 전한(典翰) 김시회(金時晦)의 아들 김치(金緻)를 아들로 삼았는데 김치는 문과에 급제하고 관찰사를 지냈다.
관찰사가 참판 목첨(睦詹)의 딸을 아내로 맞아 한 아들 김득신(金得臣)을 두었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승습(承襲)하여 안풍군(安豐君)에 봉해졌다.
공은 처음에 괴산에 묻혔다가 뒤에 충주(忠州) 신당리(新塘里) 건지산(乾支山) 축좌(丑坐)인 언덕에 이장되었으며, 부인은 공보다 23년 뒤에 작고하여 합부(合祔)되었다.
공의 집은 대대로 다 문학으로 아름다움을 성취하였으나 공만이 궁마(弓馬)로 출세하였고 또한 기개가 오만하여 남을 따라 부앙(俯仰)하지 못하므로 오래 하류에 침체하여 있다가 판탕(板蕩)한 때를 만나 그 포부를 분발하였다.
하늘이 순탄하게 도와서 공의 포부를 다하게 하였다면 중흥의 큰 공적이 더불어 백중할 자가 없었을 것인데, 나라의 중진(重鎭)인 사람이 갑자기 졸서하여 장지(壯志)가 문득 무너졌다. 아아, 통탄하다. 시운인가? 천명인가? 공은 이미 훈부(勳府)에 책명(策命)되고 상공(上公)에 증작(贈爵)되었으니 법으로는 시호(諡號)를 받아야 할 것인데, 이제까지 고요하니 실로 소대(昭代)의 흠전이다. 삼가 공사(公私)의 전하는 기록을 모아 아주 적은 것을 얻어서 봉상시(奉常寺)에서 사실을 상고하는 자료에 갖춘다.
<시장 원문 소개> (2005. 3. 2 영환(문) 소개) 출전 : 한국학중앙연구원>도서 > 형태별 > 史部 > 傳記 > 太常諡狀錄n1-44책 > 太常諡狀錄v7 > 贈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上洛府院君行嘉善大夫慶尙右道兵馬節度使兼晉州牧使金公諡狀
贈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上洛府院君行嘉善大夫慶尙右道兵馬節度使兼晉州牧使金公諡狀
公諱時敏字勉吾姓金氏麗朝忠烈公方慶之十二世孫也在壬辰島夷之難公以 晉州判官起爲本道兵使提偏師守孤城却大敵全嶺右其功固奇偉卓絶矣至今百數十年雖婦孺之愚皆誦壬辰 晉州之捷則其規?軍機激勵士衆必多有可傳者而公歿於陣上涉六年幹戈無人爲之紀述地又遠行朝不時聞而暴揚以故其詳則雖博識古事者亦無得而稱焉可勝惜哉獨賴有白沙荷潭諸名公所記述及 晉州遺民所撰碑文其功績之表著者猶可得以徵焉謹按公通判 晉州之翌年爲壬辰時牧使適死而倭聲猝至人心大駭擧懷逃散公攝州事令曰敢走者斬遂淸野入城修器械繕城池爲死守計時大駕西狩賊連陷二京蹂躪八路所在列郡望風奔潰無敢?其鋒者獨晉控扼要害屹爲湖嶺保障朝廷聞之就拜爲牧使公與士卒同甘苦誓死生遂出兵擊泗川固城之賊多所克捷又破賊陣于鎭海擒其將平小泰等獻? 行在 上嘉之超授嘉善大夫 嶺南右道兵馬節度使公乃揚兵北出破賊于金山軍聲大振開寧 錦山之賊聞風捲退是冬公出戰未還而賊大酋自閑山繞出海縣幷諸屯兵十餘萬長驅直犯本州公聞之倍道馳入合士民男女排伍守堞部分甫定而賊已合圍肉薄而進衆?之勢如山壓卵而公只以忠義激勵與夫人親持酒食巡城餉士人皆感泣殊死戰賊雲梯地道百計交攻公乘機投?捷出神奇屢進而屢却之賊勢大挫方戰之?也群心業業將士無人色公方指揮號令意氣安閑有時鳴琴吹笛若無事時城中恃而爲安登?十四晝夜賊屍遍野忽大雷雨晦冥賊驚惑乘夜退遁城遂以完賊退之日公巡城有一倭伏積屍中放丸中公輿還府第以是年十二月二十六日病創而卒公時年三十九城中士女哭聲如雷湖嶺人士皆相弔出涕曰吾其如何翌年返葬槐山先塋路出湖南所過民爭輓車以泣我公乎我公乎無我公我死久矣及晉之再被圍也倡義使 金千鎰與湖南節度使 崔慶會湖西節度使黃璡合兵六萬守之聲勢比前十倍人皆以爲可守有老妓獨憂之金公招問其說對曰前者兵雖少將卒相愛號令齊一故勝今軍無所統將不知兵兵不習將妾是以憂之金公惡其惑衆斬之數日而城陷賊遂夷城塡塹?井刊木牛馬鷄犬不遺一物而去蓋 秀吉憤前日之敗令諸賊竝力必欲屠滅故也其後甲午講和時倭言晉城之役吾將官死者三百軍兵死者三萬必取當然後和可議也蓋自倭入寇其見?敗未有若晉城者故其忿?獨深以癸巳之捷猶爲不足得當也當時賊兵充斥殺戮不可紀極深山窮谷殆無一片乾淨地而獨晉州得公固守湖南及湖西內浦賴以完國家兵糧器械皆取辦于兩湖焉公以不能滿千之卒出入四境戰必克捷斫營擒將遂使威聲所及有不戰而退者末乃獨守孤城却千萬日滋之賊以爲國家中興之根?雖中途夭枉未究大志而就其所成就而觀之其貞忠壯烈豈可與收功於一障自決於一死者比而論之也故白沙 李相國曰守城之功世獨稱延安 李廷?而不及晉州金時敏此亦倒置廷?之功固可嘉奬至與 時敏竝論則亦不無差等蓋廷?之所敵者長政而兵不滿萬 廷?所領又過數千義兵諸將來會者亦多可與?頑當時本道諸將皆不能立功唯 廷?能如此陣中且多士子易以鋪張行在不遠聲問易達故其功大著至於時敏只率所領而援兵甚少各寨諸賊擧陣合勢賊兵彌漫於四郡不可以十數萬計比如擧山壓卵而時敏卒能固守而却之其勢之難易遠過 廷?而當是之時本道渙散無人見知 行在絶遠聲聞未及至與 延安之事比而等之非定論也荷潭 金尙書之言曰壬辰之難我國有三大捷李統制之露梁權 元帥之幸洲金節度之 晉州是也惟此延安露梁幸洲之功固皆?赫人耳目而當時諸公之論或以匹之或以爲過之則公之偉烈蓋可見也公以嘉靖甲寅生于木川縣柏田村幼而有絶異之資所居村近大川水際巖爲淵大蛇窟其中民畜近水者輒遭呑?公欲去之以桑蓬手 弓矢挾焉率家?進至川邊使家?先行登巖以挑之兒懼不敢前公彎弓欲射之兒惶怯走上俄而飄風忽起水波蕩?果大蛇出繞巖??向人勢甚獰公便前亂射立?之時公年八歲長老皆大
驚聞者莫不壯異之至今居民指謂金公射蛇處云及長魁梧壯偉志度不凡顧負氣不肯學喜爲大言人皆笑以爲?誕登 宣祖戊寅武科嘗以訓鍊判
官議事于兵曹判書判書不用其言公抗論不已兵判不能堪加以聲氣公卽起立脫帽投地以足踏碎之曰丈夫非此則安能受侮於人卽趨出去官坐是
益落拓不偶時人莫之奇也久之爲軍器寺判官李相國憲國爲提調獨加器異屢補外輒請留重峯趙先生嘗疏薦才堪爲將可以禦倭者數人公實與焉
辛卯爲 晉州判官始公叔父觀察使悌甲曾任晉州有異政及是 晉人喜曰是金使君之侄也一境翕然而公之爲治克繩其武弛張得宜德施而威行吏畏
而民懷及乎變亂民之從令如子弟焉方圍城也觀 察公以原州牧使殉節於?原山城赴[주]訃至公擧哀滿城一時皆哭如悲親戚賊諜知曰彼主將得人心如此城不可攻後公從子維過 晉州宿村舍主人年老問知爲公侄也驚起握手汪然出涕殺牛留之曰金使道之德何可忘耶自言以知印曾侍公左右因粗傳其時事公善射臨戰使知印挾立供矢猶不給久而拇指墮用食長兩指而射猶發必疊雙及三指皆病則不能射也云 朝廷追榮公勳 賜效忠仗義
協力宣武功臣號置二等第二 贈 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上洛君後又 贈領議政上洛府院君設壇于 晉州城中名曰旌忠後又因建祠壇上 賜額 忠烈竝祠彰義使以下戰亡諸公而以公主享焉後 二十八年己未南公以興爲牧使立石于壇題曰全 城却敵碑命州人進士成汝信文以紀之今 上丙 寅徐相國文重觀察□(使) 嶺南詢于南中將士更?? 碑李尙書敏敍爲文竝記前後諸公公從侄素嘗爲 晉州牧使親祭於旌忠壇旣灌而祝白虹?起於祠 中竟日乃滅云公望 安東系出新羅敬順王高祖諱壽亨掌隸院司議 贈左通禮 曾祖諱彦默從仕郞 贈吏曹參判 祖諱錫進士 贈領議政?己卯士禍遂隱不仕 考諱忠甲以持平値乙巳之禍竄謫二十年仕以不達 贈左贊成 ? 贈貞敬夫人昌平李氏公娶扶餘徐氏 考曰彭壽無子取兄典翰時晦子緻爲子文科觀察使娶參判睦詹女有一子曰得臣文科襲封安?君公初葬槐山後移葬 忠州新塘里乾支山丑坐之原夫人後公二十三年而沒合?焉公家世皆以文學濟美公獨以弓馬發跡顧其氣槪傲岸不能隨人俯仰久沈下流遭時板蕩奮發其抱負天若助順畢公所?則中興偉績無與伯仲而長城忽頹壯志遽隕嗚呼痛哉時耶命耶公旣策名勳府 贈爵上公則法當易名而至今寥寥實爲昭代之欠典謹搜括公私傳乘得其萬一以備太常
考實之資云爾
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李濡謹狀庚寅十二月日照訖付奉常寺
[주]落點忠武[주]危身奉上曰忠折衝禦侮曰武 忠壯[주]忠上同勝敵克亂曰壯 壯武[주]壯上同武上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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