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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각종 역사 자료 종합
5) 문화유적총람 기록내용 (2002. 12. 18. 주회(안) 제공)
(1)【유적명칭】 ●김시민 장군 충민사(金時敏 將軍 忠愍祠) 관리번호】 367-800-271-009 【지정사항】 기념물 제12호 【유적종류】 사묘(사) 【유적위치】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유적 분포지도 참조 【소 재 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57 【시 대】 조선시대 【관 리 자】 기타(안동 김씨 종중) 【유적내용】 충민사(忠愍祠)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순절(殉節)한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의 사당으로 1978년에 중건되었다. 본래는 선조조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 순절한 숙부(叔父)인 충숙공 ★김제갑(忠肅公 金悌甲)과 동향(同享)되었으나 1978년 정화사업(淨化事業)으로 그의 묘소(墓所)를 충주시 살미면(乷味面) 무능리(武陵里)에서 이 곳으로 이장(移葬)하고, 그 아래 충민사를 신축하여 독향(獨享)하고 있다. 건물 구조는 본전(本殿)은 목조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집이며, 내삼문(內三門)인 선무문(宣武門)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고주집이고, 외삼문(外三門)인 효충문(效忠門)은 전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경내(境內)에는 신도비(神道碑) 2기와 김시민장군유적정화기념비(金時敏將軍遺蹟淨化記念碑)가 있다. 【참고문헌】 충청북도, 1982, <<문화재지>> 【비 고】 1976년 12월 21일 기념물 제12호 지정
(2)【유적명칭】 ●충렬사(忠烈祠) 【관리번호】 367-800-271-016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 사묘(사) 【유적위치】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유적 분포지도 참조 【소 재 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시 대】 조선시대 【관 리 자】 기타(안동 김씨 문중)
【유적내용】 충렬사는 영조 13년(1736)에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 순절한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 1525∼1592)과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다 순절한 그의 조카인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을 합향한 사당인데 매년 3월 중정일(仲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사당에 있던 선조의 윤음(倫音)인 ‘일우고성 만고삼강(一遇孤城 萬古三綱)’이란 편액은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일주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참고문헌】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괴산군 문화유적>>, 70. 【비 고】
(3)【유적명칭】●김시민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관리번호】660-160-213-005 【지정사항】유형문화재 제1호 【유적종류】기념비(전적비) 【소 재 지】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499-7번지 【시 대】조선시대(광해군 11년)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김시민(1554-1592) 장군의 전공을 기록한 이 석비는 일명 '진주전성각적비(晉州全城却敵碑)'라고도 불려진다. 이 석비는 현재 진주성 내의 충민사(忠愍寺) 경내에 팔작단층 맞배지붕의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 ★김시민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선조 11년(1578)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시기에 입시하였으며, 선조 24년(1591) 진주 판관(判官)이 되었다가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목사 ★이경(李璥)을 대신하여 목사직(牧使職)을 승계하였다. 먼저 공(公)은 성안의 백성들을 위무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였으며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그해 8월에는 정식으로 진주 목사에 취임하여 병기를 정비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구하였다. 또 9월에는 진해로 출정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는 등 전공을 세우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6일 진주성이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중요 요충이어서 경상우도의 주력이 이곳에 있음을 알고 적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자 성중의 부녀자와 노약자까지 총동원하여 적과 대치토록 하니 적군은 2만여 대군이었으나 아군 3,800여명에 불과하였다. 7일간의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적을 물리쳤으나 이 전투에서 공은 적탄에 맞아 점차 상처가 깊었지만 이를 비밀로 하여 최후까지 국사를 근심하는 등 충절을 다하다가 수일 후 진중에서 서거하였다. 그 후 선조 37년(1604)에는 선무이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추록(追錄)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석비의 형태는 조선시대 일반형 석비의 형태로 광해군 11년(1619)에 건립하였으며 총 높이 2.77m, 신(身)폭 0.99m이고 비문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그리고 충열사의 사액을 내리고 ★김시민을 주향(主享)으로 전몰제신을 모두 모시게 했다. 【참고문헌】경상남도, 1995, <<경남문화재대관>> 【비 고】1972. 2. 12. 지정
(4)【유적명칭】●촉석정 충단비(矗石旌忠壇碑) 【관리번호】660-160-227-011 【지정사항】유형문화재 제2호 【유적종류】충효비(충의단비) 【소 재 지】경상남도 진주시 본선동 500-1번지 【시 대】조선시대(숙종 12년)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이 비는 현재 촉석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은 수성암(水成岩)을 사용하였으며 비문은 하단부가 마멸되었다. 귀부는 비석과 같은 수성암으로 높이 0.35m이며 한 돌로 조각되어 있다. 이수는 쌍룡을 조각하고 있는데 쌍룡이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나타낸 형태이며, 그 아래부분에서는 화문(花紋)을 조각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다른 비석과 다르게 귀부 부분이 커서 윗부분이 넓고 하복부가 좁은 사다리형으로 되어있다. 비신(碑身) 높이 1.43m, 폭 0.92m, 두께 0.21m, 이수 높이 0.925m, 귀부 높이 0.35m이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으며, 아래쪽이 판독되지 않을 뿐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비를 세운 동기는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진주성 싸움에서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서이다. 즉 2만명의 왜군이 패배하였던 진주성의 치욕을 씻고자 왜적은 다음해 선조 26년(1593년)에 제2차 진주성 공략을 하게 된다. 왜군은 20만명의 대군으로 7만명의 진주성의 아군을 세 겹으로 에워싸며 공격하자 중과부족으로 6월 29일 성이 함락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해주는 이 비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충절을 기리기 위한 비라고 할 수 있겠다. 비문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이민서(李敏徐)가 지었고 성균관사(成均館事) ★신익상(申翼相)이 비문을 썼으며 홍문관제학지경연사(弘文館題學知經筵事) ★김만중(金萬重)이 두전(頭篆)을 썼다. 비문에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에 대하여 기술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소위 삼장사(三壯士)이다. 즉 ★고정후(高征厚, 1554-1593)는 임진왜란 당시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싸우다가 이곳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또한 비문은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등과 남강에서 투신하게 되는 그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또 한명은 ★황진(黃塵, ?-1593)으로 황희(黃喜)의 5대손이다. 이는 선조 24년(1591)에 통신사와 함께 일본에 다녀와서 그들의 침입을 예언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용인에서 왜군과 교전하다 진안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하는 전공을 올렸으나 진주성에서 마지막까지 성을 고수하다 전사한 인물이다. 이 외에도 ★장윤(張潤) 등의 진주성에서 순국한 인물을 비문에 기록하고 있어 임란의 전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경상남도, 1995, <<경남문화재대관>> 【비 고】1972. 2. 12. 지정
(5)【유적명칭】●진주성(晋州城) 【관리번호】660-030-012-037 【지정사항】사적 제118호 【유적종류】성(읍성) 【소 재 지】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시 대】삼국시대(백제)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진주성은 원래 백제 때의 거열성지(居烈城址)였다고 전하며 고려 공민왕 때도 7차의 중수가 있었다. 일명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한다. 고려말 왜구방비의 기지였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김시민(金時民)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1592) 임란 3대첩의 승전을 이룬 곳이다. 1593년 6월 29일 왜군의 재침시에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 장렬한 최후을 마쳤으며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의하면 그가 총각시절에는 성벽은 무너져 그 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고려말에 왜구가 날로 심해지므로 우왕 3년(1377)에 비로소 옛 터에다 토성을 쌓았으나 곧 무너져 2년 뒤인 우왕 5년(1379)에 석축으로 개축하다가 중도에서 왜구에게 함락되었다. 이때의 성은 촉석성으로 지금의 내성에 해당되며 <<동국여지승람>> <진주목(晉州牧) 성곽조(城郭條)>에 따르면 "촉석성은 주(州)의 남쪽 1리에 있고 석성으로 둘레가 4,359척이며, 높이가 15척으로 성안의 우물과 샘이 각각 셋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하였다. 천연지세를 이용, 산성과 읍성을 절충한 성이며, 남강에 면한 절벽은 축성 당시의 면모를 보여준다. 기록으로 보면 선조 38년(1605)에 병사 ★이수일(李守一)이 진을 성내로 옮기고 동시에 성이 넓어 수비 곤란으로 내성을 수축하게 되어 성은 자연 촉석루를 중심한 현(現) 진주공원일대의 외성과 현재의 성내동 주변의 내성 둘로 나워진 셈이 되었고 동북에 1문과 2수문을 신축하게 되어 지금까지 동산성(東山城)같은 진주성이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읍성의 면목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그후 병사(兵使) ★김태허(金太虛)가 선조 40년(1607)에 포루 12개를 증축하였다. 【참고문헌】경상남도, 1995, <<경남문화재대관>> 【비 고】1963. 1. 21. 지정 ; 1972. 6. 3.-10. 19. 성곽보 촉석루복원 ; 1975. 11.22.-1976. 1. 23. 성곽보수 ; 1964. 12. 4.- 12. 31. 북장대 해체보수
(6)【유적명칭】●창렬사(彰烈祠) 【관리번호】660-030-271-039 【지정사항】문화재자료 제5호 【유적종류】사묘(사) 【소 재 지】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212-8번지 【시 대】조선시대(1595년) 【관 리 자】시유 【유적내용】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을 받아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김시민 장군(金時敏將軍)을 비롯한 39위(位)와 제장군졸(諸將軍卒)의 신위(神位)를 안치하여 1595년에 ★정사호(鄭賜湖)가 이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선조 40년(1607)에 국왕의 사액(賜額)을 받은 사당이다. 진주성내에 있는 창렬사는 6.25동란으로 불타고 그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목조 와가건물을 세웠으며 내외삼문 등 부속건물이 있다. 【참고문헌】경상남도, 1995, <<경남문화재대관>> 【비 고】1965. 10. 27.-12. 16. 창열사 공적비, 비각신축 ; 1967. 11. 2.- 12. 29. 외삼문신 축 및 원장공사 ; 1983. 8. 6. 지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