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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각종 역사 자료 종합
6) 하담 김시양 문집 중 부계기문(부溪記聞)에서 (2002. 12. 11. 항용(제) 제공) 출전 : <괴산군 설화집> 괴산군문화원 간. 1999. <진주성에서 순절한 김시민> 상락군(上洛君) 김시민(金時敏)은 내종형이다. 젊었을 때 대범하여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키가 매우 크고 장대했으며 어림없는 말을 잘하여 한 집안 사람들도 그의 인물을 알아보지 못했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時)에 뽑혀 들어갔는데 이헌국(李憲國)이 제조(提調)로 있을 때 유독 김시민의 인물을 높이 평가하여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 번번이 조정에 있도록 힘을 써주었다. 신묘(辛卯)년(年)에 진주통판(晉州桶判)으로 나갔는데 진주(晉州)는 영남의 큰 고을로 본래 호족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이름이 났다. 김시민은 적절히 조절하여 덕망과 위엄을 갖추고 관원을 단속하니 백성들이 존경하고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넘쳐 흘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마침 목사(牧使)가 죽어 할 수 없이 목사의 일까지 맡아야 했다. 그리하여 무기를 손질하고 읍성을 고치며 굳게 방어할 준비를 하였다. 그 때 여러 고을이 맥없이 왜적에게 함락 당하니 임근은 서쪽으로 피난을 가고 왜적이 사방에서 날뛰어도 감히 그것에 항거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진주성만 우뚝하니 호남과 영남의 보루가 되었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듣고 김시민을 목사(牧使)로 승진시키니 김시민은 사졸과 동고동락하며 생사를 같이 하기를 맹세하였다. 그리고 금산(金山)에 있던 왜적을 격파하고 진해(鎭海)에 있던 적장 평소태(平小泰) 등을 생포하여 임금이 계신 곳으로 보냈다. 선조(宣祖)는 이를 가상히 여겨 김시민을 절도사(節度使)로 특진시켰다. 그 해 겨울에 왜적이 군대를 전부 동원하여 진주성을 포위하고 운제지도(雲梯地道) 등 구공지술(九攻之術)을 다 써가며 공격했지만 김시민은 귀신같이 이에 대흥하니 왜적은 곧 좌절하고 후퇴하였다. 성 안에는 정병(精兵)이 없고 밖에서 개미새끼 하나도 원병이 없었는데도 김시민은 오직 충의로 사병을 격려하여 죽음을 작정하고 진주성에 올라가 14일간 밤낮으로 적을 무수히 살상하니 왜적은 크게 패하여 도망을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김시민은 유탄에 맞아 부상하여 논공행상을 받기 전에 죽으니 성 안의 남녀들이 소같이 통곡하며 울었다. 호남과 영남의 인사들이 다 조문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이제 어쩔 것인가?" 하였다. 괴산(槐山) 선영으로 운구할 때 사민들은 다투어 상여를 끌고 울면서 "우리의 어른이시다. 우리의 어른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죽은지 오래이다." 라 하였다. 진주가 다시 포위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호남절도사(湖南節度使) 최경회(崔慶會), 호서절도사(湖西節度使) 황진(黃璡) 등이 6만의 군대를 가지고 수비했는데 그 병력이 전에 비하면 십 배나 더 많아 사람들은 모두 진주성을 충분히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늙은 기생 하나만은 그렇게 믿지를 않고 걱정을 하여 김천일을 불러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전에는 비록 병력은 적었으나 장병이 서로 사랑하고 호령이 한 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군대는 많아도 규율이 없고 자수는 사병을 모르고 사병은 장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걱정하는 것입니다." 라 대답하였다. 김천일은 '요사한 말'이라 하여 그 늙은 기생을 처형시켰는데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진주성은 함락되고 왜적은 지난번 패전의 분풀이로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가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