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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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김시민(金時敏)

p05.png 5. 각종 역사 자료 종합

9) 충청리뷰에 실린 김시민장군 내용 소개 (2003. 5. 30. 주회(안) 제공)

<충청리뷰>에 김시민 장군의 충민사

충북 청주지방의 주간지인 <충청리뷰> 2003년 5월 31일자에 김시민 장군의 충민사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청주역사문화학교 김혜경 교사의 탐방기입니다.

인터넷에는 <오마이 뉴스> 홈페이지(http://www.ohmycb.com)에도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내용 중에 특이한 기록은

--요즘은 주차장과 사당사이에 ‘충무교’라는 큰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지만 예전에는 조그만 나룻배를 타야만 사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시민 장군을 높이 추앙하는 뜻에서 그렇게 큰 다리가 세워졌다는데, 사당 주변 산세와는 어울리지 않게 덩치만 큰 다리가 그야말로 ‘70년대식’ 다리다.

--대승을 거둔 이 전투는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남쪽에 있던 수군이 후에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큰 승리라면 상대적으로 일본에게는 큰 패배였으니, 일본의 역사책에는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만 대패했다’라고 단 한 줄로만 기록되어 있다.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라는 얘기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이 무심결에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 3대첩의 주인공은 이순신, 권율, 김시민 이렇게 셋이다. 그런데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이 좌의정, 권율이 우의정인 것에 비해 김시민 장군은 영의정에 봉해졌을 정도니 과연 누가 더 비중이 높은 인물일까.” 등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 <오마이 뉴스> 홈페이지(http://www.ohmycb.com)

편집 : 5/30(금) 09:21

김시민 장군의 위패 모신 그 곳

▲ 충민사 전경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나들이 장소로 동물원이나 놀이시설을 찾는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유적을 찾아갈 필요성을 많이 느낀다. 그런데 역사기행을 하다보면 곳곳에서 사당을 만나게 된다. 사당이란 역사상으로 대접받는 이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충북에도 곳곳에 많다.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장군의 사당 길상사(진천), 가사문학의 대가인 정철의 정송강사(진천), 귀주대첩을 이룬 강감찬장군의 충현사(청원군),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의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괴산) 등 각 지역에 하나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사당을 갔을 때, 아이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기란 참 어렵다. 어딜 가도 비슷한 건물에 밋밋하고 단편적인 내용의 표지판만이 찾는 이들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당의 인물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건들을 알아가다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또한 거기에 담겨있다.

 

오늘은 초등학교 5학년 사회 교과서 ‘민주시민의 길’ 이란 단원에 나오는 김시민 장군을 모신 괴산의 충민사를 찾아가 보자. 청주에서 괴산 읍내를 지나서 충주 연풍 쪽으로 가다보면 괴강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충주로 가는 길로 접어들어 차로 2~3분 달리면 왼편으로 충민사가 보인다. 충민사는 대개 산 중턱에 높이 올라앉아 있는 여느 사당과 달리, 바로 앞으로 강줄기가 흐르는 천변(川邊) 사당(祠堂)이다.

 

요즘은 주차장과 사당사이에 ‘충무교’라는 큰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지만 예전에는 조그만 나룻배를 타야만 사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시민 장군을 높이 추앙하는 뜻에서 그렇게 큰 다리가 세워졌다는데, 사당 주변 산세와는 어울리지 않게 덩치만 큰 다리가 그야말로 ‘70년대식’ 다리다. 지금도 다리 아랫쪽 강기슭에 매어놓은 작은배 한 척이 있는데, 강물의 흐름대로 흔들리는 그 모습이 충무교보다 외려 더 강물을 마당으로 두고 있는 사당으로서의 운치를 더해준다.

 

떳떳한 기상 가진 김시민 장군

김시민 장군은 충남 병천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고향인 괴산읍 능촌리 방아재에서 무예를 닦으며 자랐다. 그래서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가는 길목마다 장군의 흔적을 애써 새겨놓은 것들이 꽤 많기도 하다. 김시민 장군은 어려서부터 대담하고 의협심이 강했다고 한다. 대록지의 기록을 보면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어린 김시민이 8세 때 이웃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천안군수의 행차가 진 앞을 지나려하였다. 이를 본 소년대장 김시민은 큰소리로 군수행차를 못 건너게 하였다. 이에 군수가 말에서 내려 시민의 손을 잡고 감탄해 하며 뉘집 자손이냐 물은즉, 곁에 서 있던 아이가 김지평의 아들이라고 말하니 군수가 지평에게 가서 치하를 했다한다.

 

또한 25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판관이 된 그는 군사행정이 해이한 것을 보고 시무대책 (時務對策)을 병조 판서에게 올렸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장군은 군모를 땅에 벗어버리고 발로 밟으며 과감하게 관직을 벗어버렸다. 자기 뜻이 옳다고 생각하면 결코 굽히지 않는 떳떳한 기상과 정신을 가졌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바른 소리를 하다가 벼슬길을 버렸다가 다시 관직으로 나간 김시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년 진주 판관으로 부임한다. 임진왜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 전투는 김시민 장군이 진주목사로 있던 1592년 10월에 일어났다. 3천 2백 군사로 왜적 3만8천명을 맞아 14주 동안 민.관.군이 힘을 합해 거둔 승리였다. 대승을 거둔 것을 확인한 장군은 성안을 순시하던 중 죽은 사람 속에 숨어있던 왜적에 의해 이마에 총을 맞고 두 달 후에 세상을 떴다. 이때 장군의 나이 39세였다.

 

대승을 거둔 이 전투는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남쪽에 있던 수군이 후에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큰 승리라면 상대적으로 일본에게는 큰 패배였으니, 일본의 역사책에는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만 대패했다’라고 단 한 줄로만 기록되어 있다.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라는 얘기다.

 

임진왜란 3대첩의 인물

 

원래 김시민 장군의 묘소는 중원군 살미면 구릉리에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장례를 치르느라 남아있는 유물도 많지 않다. 그러나 역사란 당시보다 오히려 후에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이 끝날 당시의 김시민 장군은 선무공신2등에 정해졌다가 숙종 때에 와서 진주대첩의 공이 밝혀지면서 영의정에 봉해졌다. 그 후 충주댐 수몰관계로 1979년 지금의 능촌 방아재로 옮겨졌다. 원래 이곳은 충렬사로 그의 작은아버지 김제갑의 사당이었는데 김시민 장군의 묘가 옮겨지며 ‘충민사’라 이름도 바뀌고 규모도 커졌다.

 

효충문과 선무문을 지나면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이 있다. 사당 뒤쪽으로 장군의 묘가 있고, 묘 앞에는 2개의 문신(文臣)석에 희끗희끗한 ‘지을류’가 자라고 있다. ‘지을류’는 오래된 돌에만 생기는 이끼의 한 종류로 장군이 돌아가신 후의 사 백 년 세월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다. 그 이끼낀 문신석을 뒤로 하며 함께 간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이 무심결에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 3대첩의 주인공은 이순신, 권율, 김시민 이렇게 셋이다. 그런데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이 좌의정, 권율이 우의정인 것에 비해 김시민 장군은 영의정에 봉해졌을 정도니 과연 누가 더 비중이 높은 인물일까.” 또한 으리으리한 이순신 장군의 사당 현충사와, 이 곳 충민사의 규모는 어떻게 다른가. 또한 ‘충무공’이란 시호는 이순신 장군에게만 붙여진 고유명사가 아니라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다른 사람도 받았다. 그렇다면 ‘충무공 탄신 4백주년’은 분명 틀리는 것이고, ‘이순신 장군 탄신4백주년’이 맞다”라고.

 

아무튼 우리 고장의 충민사를 시작으로 역사 속 임진왜란 3대첩의 인물을 찾아가는 현장학습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임진왜란 3대첩

시민의 진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행주대첩- 1592년 2월 12일에 평양, 함흥에 있던 왜군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 의해 서울까지 퇴각했으나, 전라도 순찰사였던 권율이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치고 후방에서 위협하며 행주산성으로 옮겨 요새화하고 왜군을 맞아 인해전술로 격전을 벌이며 승리로 이끌었다.

 

한산도 대첩-1592년 7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통영 앞바다에 있던 왜군을 맞이하여 학익진법과 거북선으로 대승을 이끈 전투였다.

 

진주성 대첩-1592년 10월 조선을 침략해서 6개월이 다되도록 진주성을 점령하지 못하자 조바심이 난 풍신수길이 경상도에 주둔한 4만여 병력을 동원해서 공격했으나, 진주성을 지키던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심리 교란작전을 펴 대승을 이끈 전투이다.

 

-김혜경 청주역사문화학교 교사

 

충청리뷰 2003-05-28

ccreview@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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